홍하사의 분대장시절 3편을 시작하기에 앞서 며칠전 "동아방송"의 박종길전우님께서 궁금해 하시는 초대회장이셨던
신춘섭(의정부 거주)님의 2002년 10월 15일 육군회관에서 찍은 사진을 올린다. 두미국전우(물론 베트남참전)가운데
신회장이시며 우측이 이현태(월남전 최초로 훈장받으신)님이시고 옆이 안타깝게 작년 천국가신 사모님이며~
좌 붉은치마(오동희전우사모님) 그리고 맨위 우측이 홍하사의 울淑(최집사)이며~ 벌써 21년이 되었네요.
귀국직전('71/1/18일) 찍은 우리 3분대원들의 호작업중 찍은 사진이다.(좌측부터)분대장 하사 홍진흠, 6번소총수 박덕순병장,
8번 소총수 박봉만병장, 7번 소총수 김화웅병장, 2번 저격수 정교진 병장, (아래 좌부터) 4번 유탄사수 임정오병장,5번 소총수
정건일 병장,9번 부분대장 강용희 병장, 1번 척후병 정금태 병장이며 병장이 많은 이유는 재빨리 진급시켜 $를 조금이라도 더~
다시 "꽁가이 이야기" (www.vietvet.co.kr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간추려 옴.
그분은 어느날 내게 팬티하날 선물했는데
자신이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옷이라고 하며
혹시 치수가 맞는지 입어보라한다.
월남여자들이 흔히 입는 통바지(검은 아오자이용 빤질빤질한)옷감으로 하나 서비스했다.
그러자 우리분대원들 모두 너, 나 할것없이
하나씩 유행처럼 그집에서 다 맞춰 입었다.
양장점이랄까? 양복점이랄까? 나중에 이분들이 결국엔 홍하사의 양부모가 되셨다.
그곳 사람답지않게 딱 남매만 두었는데 솔직히 난 그분의 그게 맘에 들었다.
왜냐하면 주렁주렁 연연생으로 낳은 다른집관 달리 상당한 인텔리란 느낌을 받었기에 말이다.
덕분에 자동으로 나에겐 "봄"(길게 발음)과 "새우" 라는 내동생들도 생겼다.
특히 "봄" 은 가끔 학교가 파하고 아이들과 집으로가다 내가 서고 있는 앞을 지나는데
"엠"
하고 부르면 수줍은듯 볼이 발그레 지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아마도 국민학교 졸업반 쯤이될까한 사춘기의 소녀였다.
Johnny Dorelli/L'immensita(눈물속에 피는꽃)
나는 믿어요 지금 흘러내리는 눈물 눈물마다 새로운 꽃이 피어날 것을...
그리고 그 꽃잎 위에 나비가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요..
영원속에서 나를 생각해주고 나를 잊지 않을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그래요 언젠가 나는 찾을거예요. 내 일생동안 혼자는 아닐거예요
나는 알아요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해 영원속에 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래요 내 일생동안 혼자는 아닐거예요
나는 알아요 이 하늘보다 더 높고 넓은 영원속에 작은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을...
1소대는 "소대장조" 와 "선임하사조" 가 있고 '이돌태병장'무전병(대구 출신, 홍하사와 현재 소식왕래중),홍하사, '김용종중사' 님.
꽁가이 이야기(3)---홍 진흠 소총 중대의 생활은 개미 체바뀌 돌듯 늘 거의 변동이 없었다. 한번 작전나가면 보름이나 이십여일, 좀 더 길면 한달가량을 산에서만 살아야한다. 월남에 함께 주둔한 연합군과 합동으로 하는 작전과 주월사 작전이 1년에 한두번, 맹호 사단작전이 두어번 그 틈틈이 연대작전이나 이 따금 대대작전, 중대 자체내에서 하는 작전이 수시로--- 그 외의 일과시간은 중대장의 재량에 따라서 변동될수 있었다. 작전나가는 기간외엔 언제나 똑 같은 반복의 생활이었다. 근교의 월남민가 주위와 들과 야산의 수색정찰, 밤이면 매복근무, 또한 도로경계나 중대 자체경계를 1,2,3 그리고 화기소대가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면서 임무교대함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일주일을 매복 섰다면 이번 일주일은 도로경계, 순서대로 다음주는 수색정찰 또 그 다음주는 베이스 자체경계이지만 우리 1소대는 특히 도로경계를 잘한다는 평을 중대장으로 부터 하사(?)받아 홍하사의 말년엔 우리소대가 거의 맡아놓다시피했다. 타 소대에서 도로경계를 서면 꼭 사고가 나거나 월남주민들과 마찰이 생겨 불평과 원성이 상급부대로 들어가 대민지원 작전에 차질이 생기곤 했다. 주민들과 트러불이라야 별게 있겠는가? 길거리 흔한 가게에서 시원한 맥주 한두캔 사먹고 돈 계산(우린 딸라로 주고 그들은 피아스타(동)로 계산하니) 때문에 가끔은 시비가 생기기도하고 (말단 소총중대엔 불쌍하게도 시원한 맥주한캔 맘대로 사먹을수 없었으니 기껏해야 중대장실에 조그만 냉장고가 하나있기에 부관정도까지만 겨우 먹을정도였다.) 수상한 사람들이 지나가면 싣고가는 화물과 차량검사를 핑계로 개인소지품 점검하고 신체검사도 가끔은 할때가 있었는데 간혹 짖궂은 병사들이 노출심한 젊은 여성들에게 찝적거린다거나 진한 농담(?)으로 희롱성의 표현으로 잘못 전달되기도 했고 때론 수상한 행동을 하는 넘들이 (실제론 적일것임) 아녀자들을 앞세워 위기를 모면하려는데 그 과정에서 커무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뤄지질않아 우리병사들은 첩자라고 우길테고 그들은 선량한 양민이라고 잡아뗄것이다. 암튼 그 지역은 우리 주둔지인만큼 우리 2중대장이 지역사령관과도 같았으며 때문에 우리 1소대가 계속 도로경계만을 쓰는데 여태까진 별 탈없이 임무수행에 차질이 없었다. 남북으로 뻗은 1번도로에서 약간 벗어난 퀴논시에 맹호 사단사령부가 있고 다시 1번도로를 조금 달리면 기갑연대로 가는 왼쪽길이 나온다. 26연대는 반대 방향인 남으로 향하고(백마부대 인접)계속 북으로 직진하면 1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푸캇비행장이 있는 빈딩성의 깟탕면 (1대대가 위치한)으로 502번 도로에 중간쯤에 위치한 2중대가 내가 13개월 있은 내고향과도 같은 추억이 서린곳이다. 대대본부에서 2중대까지는 대대에 배속돼 함께있는 1중대에서 우리중대 베이스까지 도로정찰및 경계를 맡았고 우린 중대 맞은편에 위치한 대대 급수장(16번사진)에서부터 아스팔트 도로가 있는 푸캇입구까지만 도로경계를 맡으면된다. 내가 그동안에 있은 가장 큰 사건이라면 주월사 군예대에서 위문공연 왔을시에 가수 박 재란과 악수를 했다는 점이다. 당시 박재란과 악수한번 한다는건 오늘날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악수하는것 이상으로 대단한 사건이다. 말단 소총소대에서 도로 경계를 서다보면 혹 우리기술자들이(주로 한진회사)거의 60마일 이상의 속력으로 차량을 달린다. 행여나 저격당할까봐 빨리 지나가지만 우린 시골길이기에 그나마 우리쪽으론 거의 오지않는다. 어쩌다 푸캇근처(우리의 임무는 푸캇입구에서 되돌아옴이 임무였지만 가끔 1번도로가 궁금해서 잠깐씩 본적이 있다)에서 민간인 기술자들만 봐도 눈물이 피잉 돌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수 없는터에 하물며 고국의 일류 유명가수가(더우기 박재란은 미모로도 한 몫 하지않은가?) 그 많은 대대병력중에 하필이면 가운데 통로쪽에 있는 내게와서 맨먼저 악수를 청하니 이런 횡재가 어디있었겠는가? 난 며칠을 손을 씻지않을 정도였고 주위의 병사들도 간접으로 그녀의 체취을 맡으려 내게 악수를 청할정도였다. 그런 영광이 또 어디 있겠는가? 뒤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테지만 가수 박재란과 악수한번하고 기분파인 홍하산 $300:00 불을 썼다. 유감스럽게 우리 소총중대엔 사진사도 없었고 사진찍기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리유(張柳)씨 가족과 인연을 맺은건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월남생활도 그럭저럭 3/4을 거의 넘기고 이젠 고참측에 끼이게된 '70년 11월경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맹호 5차년도 30제대였으니 '69년 12월에 배를 탔음) 그날도 도로정찰을(21번 사진) 끝내고 도로경계로 임무가 바뀌게 되는 아침 거의 8~ 9시경이 된다. 이때부터 민간차량을 비롯해서 모든 차량이 합법적으로 그 길을 다닐수 있게된다. 1분대서 부터 푸캇 거의 다달은 지역서부터 훑어 내려오면서 배치되고 순서대로 띄엄띄엄 두사람씩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근무하게되었다. 우리 3분대는 내가 분대원들에게 각자 위치를 정해주고 나와 유탄사수 임정오 병장과 어느 야자수가 가까이 있는 "푸자" 마을 길가 가장자리에 하루 근무처로 자릴 정했다. 배치되는 자리가 허허벌판일때도 있고 다리위가 될때도 있고, 쟝글이 우거진 숲일 수 도, 시장터가 될수도 있고, 공동묘지에 설 수 도 있고 총탄을 잔뜩맞은 빈 절터일수도 있었다. 좌우간 적들이 우리에게(미군이나 주월연합군, 월남 정규군,민간인을 포함한 모든 아군) 피해를 주지못하도록 우리가 하루종일 그 일대를 철통경계로 무사히 지나도록 방어하면 우리임무는 끝인것이다. 그날은 띄엄뜨엄 있는 동내 집들중간에 자릴잡았다. 거의매일 대하는 주민들이기에 이젠 어느정도 안면도 있게되고 지니가는 그들과 인사도 나눌정도이다. 어느동네 누군 학교 선생이고 누군 직장이 푸캇으로 매일 몇시쯤 나다니고, 파란 대문집은 월남군 장교집이며 어느집엔 항상 향냄세가 나고 어느 코너를 돌면 바로 대나무숲이고 어디엔 꼭 한번씩 수상한 지역으로 위협사격으로 탄창 한개를 다 갈겨대는곳도 있었다. 시골길에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살지않은 동네이므로 우린 훤하다. 어디엔 시장이 항상서고 있고, 콜라가 먹고싶으면 어느 가게에 가면 싸게 잘해주고 한국말 잘하는 아가씨가 있는 가게는 무슨 마을 뉘네집이다. 중대에서 푸캇입구까지는 거의 4~5K 가 되니 우리분대의 할당구역은 약 1K 내외이다. 어떤지역은 가까이에 어떤지역은 상당히 먼 거리에 우리들이 배치된바 서로들 오가며 연락도 취하며 해 떨어지기 전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우린 지나가는 차량을 얻어타며 서로의 구역을 순찰도 하며 정보도 교환하기도 하며 가끔 높은 분들이 지나간다는 무전이 오면 더욱 경계 잘하라고 독려하기도 한다. 주위에 열 두어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 넘이 자전거를 탄체 내 주위를 자꾸 맴돌며 가질않고 있었다. 내 명찰을 보며 "헝~헝"(Hong) 하면서 아는체를 한다. 어제 근무한 Mong Troi Cau(우린 "무지개 다리" 라고한다)에서 나를 봤고 "중세이 니엿 헝"(홍 하사)이라고 했다. 오늘 또 자기집 근처에서 만나서 반갑다고 악수를 청한다. 내 이름을 그들식으로 발음하여 "헝" 하며 읽고있었다. 임병장이 씨 레이션을 하나꺼내 꼬마에게 건넸다. 그리고 리리(저리가) 하면서 손짓을 했지만 가질않고 버틴다. 가끔 우리주위를 돌며 깡통을 달라며 조르는 월남꼬마들이 있기에 귀찮아서 하나주며 보내려고 했지만 받질않고 연신 "헝" 한다. 이번엔 담배를 줘본다. 그래도 싫다는 표정이다. 월남은 조그만 아이들도 담배를 빠꼼빠꼼 곧잘 피우고 총소리에 놀라지도 않고 발바로 앞까지 총을쏴도 눈하나 깜짝이지 않음은 오랜 전쟁속에서 만성이 된 탓일게다. 내가 "콩 파이. 턴 또이라 홍"(아냐 내 이름은 홍이야)이라고 했더니 "비역"(알았어요)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바오 뉘우 뚜이"(너 몇살이냐?) "뭐이 하이"(열 두살)이란다. "어 라우"(집은 어디니?) 조기야(저기요) 손으로 다음집을 가르킨다. 불과 십여메타 떨어진 길가 다음집이다. 우린 심심하던차에 말동무가 되어갔다. "왓스 유어 네임?" "마이 내임 이즈 '옹'" (아쭈 이놈봐라!) 우린 급속히 친해졌다. 한참을 지나니 "옹아으~"(옹아!) 하고 집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는 다시 올테니 얘기하자면서 인사를 하고 떠났다. (오늘 또 하나 배웠다. 이름뒤에 아으~를 붙이는구나.) 그는 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따이한" 중에서도 그렇게 적의(?)를 품지않고 친절하고 인간적으로 대해 주는사람을 별로 못봤기 때문일게다. 내가 그들에게 순해보였던지 지나가는 아줌마들이 가끔 손가락으로 놀려대기도 했는데 다른말은 못알아듣겠으나 "뎁꽈" 하는말은 알아들었으니 "귀엽다" 로 해석하면 될듯하다. 사실 난 어릴때부터 거지가 얻으러 오드라도 웃으며 돌려보내는(뭐라도 쥐어주며) 습관이 베어있었고 영영 헤어질 사람이라도 뒷모습을 아름답게 하자는 모토로 평생 실천하기로 맘 먹었기에 가끔은 이용당하여 불이익를 당할때도 많았지만 여태 뉘못지않게 친절본위로 살아왔다. 또한 당시엔 월남말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아무나 잡고 말을 배움에 익숙해 있었다. 간혹 월교대(월남어 교육대) 나온 전우가 지나가다 그들과 대화하는걸 들으면 나보다도 덜 알아듣는것 같았다. 글짜를 쓰던가, 읽던가 말도 표준어를 쓸땐 나보다 낫겠지만 실제로 그지역 사투리로 말할땐 나보다 별로 나은게 없어보이는듯 했다. 왜냐하면 내가 더 현실적인 적응훈련을 하기에 그런것 같았다. 게다가 난 틈만나면 그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고 "슝앙" 마을엔 벌써 양부모까지(12번 사진) 맺어놓을 정도로 그들말에 익숙해 있었다.잠시후에 다시 나와 그와 난 친구가 되어갔다. "옹" 이 저희집을 가잔다. 난 망설였다. 그러나 눈칠 챘는지 임병장은 "분대장님! 염려말고 다녀 오셔요." 임병장은 우리분대원 8명중 나를 가장 잘 따라주며 자청해서 당번병 노릇을 해주는 유일한 유탄사수 (4번째 소총수라고 할수있으며 통상 분대장뒤에 위치하며 수류탄을 멀리 가게하는 총-M79유탄발사기)이다. 잘 근무하라 당부하면서 만약 여차하면 저차하라고 했다. 총소리가 나면 사실그대로 보고하라고 하면서 "ON"("옹"-길게 발음) 을 뒤따라갔다. 곧장 부엌으로 날 데려간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으며 통과하여 뒷뜰의 야자수밭을 겸한 밭쪽으로도 가봤다. M16 소총의 안전장치도 풀고 하시라도 발사준비할 태세에 임하면서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면서 말이다. 탐색을 겸한 주위경계 이기도했다. 언제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르겠기에 미리 사전답사를 해둬야하기에 말이다. 이넘이 적인지? 아군인지? 또한 VC앞잡이인지 어떻게 믿을수있는가? 잠깐 훑어보고 다시 부엌으로 되돌아 왔는데 등뒤에서 "어서 오십시오." 라는게 아닌가? 돌아보니 환한 웃음으로 반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순간 난 망치로 얻어맞은듯 까무라치고 말았다. 아릿따운 아가씨가 날 보고 웃고있었다. 너무나 놀라 당황하였는데 뒤이어 정확한 우리말로 "이리 앉으십시요" 라고 재차 또렷한 한국말로 하는게 아닌가? 이럴수가? 난 꿈인가 했다. 십여개월 다녔지만 이처럼 예쁜 아가씨가 이거리에 살고있는줄 여태 본적도 없었거니와 이처럼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이 여기에 살고있다니? 그자체가 신비에 가까웠다. 하도 이상해서 "혹시 푸캇에 다니느냐?" 고 했드니 아니라고 고개를 흔든다.(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 푸캇(읍소재지 정도의 자그만 규모에 귀국병사들이 가서 준비할정도의 온갖 상품도 팔고 술집도 있는 거리) 은 윤락가의 꽁가이가 있는 곳이기에 실수를 저지른게 아닌가? 아는지? 그녀는 생긋웃으며 모든걸 이해한다는듯이 그리고 날 안심이라도 시키려는듯 "브~시 헝꺼"(적이 없으니) 안심하라고 한다. 그리고 나를 구석진 골방으로 안내했는데 그곳 어두컴컴한 골방엔 늙고 병든(?) 노인 한사람이(아마 간호하다 나온듯)손을 잡으며 잘 왔다는 듯이 반겨준다. 그들의 할머니라고 소개한다. 어른을 앞세우는게 맘에 든다. "하우 올드 아 유" "세븐 틴" "왓스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즈 앙(An)" 홍하사가 귀국후 미미사진관(중곡동)에서 "손수건" 과 "약혼반지" 를 끼고 2년후 다시가기로 하고 찍은 사진. 11년전 "유성온천" 에서 V.V.K 전우총회를 열고 뒤풀이(1박)하면서 찍은사진(좌로부터 신용봉전우(2023/2/10 의정부 "이금회"전우모임 총무, 김주황전우, 오동희 전우,김일근(전)회장,김해수회장, 오석문해병전우,신유균부산(전)부회장, 뒤 전우(?),고두승제주부회장,장교출신(예비군중대장),전주의 경찰간부출신, 전주의 김종철전우, 그리고 홍하사 찍음. |
첫댓글 오늘 이금회에 오신 전우님은 열명으로, 김정식선배님 고참님으로 부지런하시구요 새로온 동향의 이무환전우 건강이 월등히 낳아지신 해병의 정종회전우(이댁 사장누이가 동생이신데 오늘은 병원에 입원관계로 빠지셨네요)홍하사에게 보훈병원에 있었던 뉴스를 전해주신 김영균회장님 모싸이트 쥔장이 김영배선배님께 사과 하는듯하지만~.
무엇보다 멀리 방배동에서 늘 빠짐없이 참석하시는 대관령 김영배선배님 감사드리고
또한 건강이 좀 좋아지신 이현태(전)회장님, 박대명선배님, 신춘섭초대(V.V.K회장)님
늘 차량으로 회원님댁까지 차량봉사하시는 신용봉 전우님 늘 고맙습니다.복받으세요.
감사해요.
그 때 이미 복음의 본질이 마음에 계신 듯 합니다. 사랑, 화평, 섬김,
아련한 추억 입니다. 난 중사로 백마 사령부에 근무하며, 부대앞 동산에 헬기타고
수색정찰인가 나 갔다가 포탄에 맞아 불에탄 산에서 사진들 찍다가 인솔 장교에게
야단 맞은 기억 밖에 없는데, 맹호 부대에서 근무하신 홍 하사님 하나님이 지켜 보호해
주셨군요,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이 건강하시고, 삶이 복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유일하게 관심을 갖어주시고 꼬리글 달아주시니 말입니다. 오늘 BFW
(제가 화요도시락 배달하는 U.N이 인정해준 단체)에서 '튀르키예' 지진피해복구모금캠페인
한다기에 울최집사가 조금넣는걸 한판 눌렀습니다.너무 많은피해가, 십시일반 조금이라도~
울 최 집사님이나, 홍 집사님이나, 길에서 마주 쳐도 몰라볼 가는성이 더 많을듯함.
그러나 내 마음엔 두분이 반갑고, 또 자랑 스럽습니다. 다정하게 가까이 있습니다.
신명기 30장15절에 "생명과 복"의길, 마5장13절 이하에 "소금과,빛" 의 삶을 사시는
것이 느껴 지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늘 승리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목사전우님! 오늘부터 시작된 '겨울방학 4세대 특새'(특별새벽기도)입니다.저는 평소에는 글 좀
쓰다보면 어느새 최집사 새벽예배 가는시간이~ 저의 경우엔 늦게자고 늦게 일어나는 체질이라
새벽기도 참 어렵드라구요. 조금전 동대문시장에서 돌아왔는데 내일 새벽기도가,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