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죄인들의 공동체 알고 바라는 선하고 의로운 지향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정말 정말 좋겠다. 죄는 나를 분열시키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 분열의 상처를 입힌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처럼 죄는 나와 공동체를 마비시켜 제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하느님은 내가 온전해지기를 바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나도 그리고 우리도 완전해져야 한다(마태 5,48). 완전은 완벽함이 아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한 사랑이고 서로에 대한 끝없는 자비다. 그가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에게 해주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기를 바라고 또 기도 중에 그렇게 결심할 때는 영혼이 아홉 번째 하늘에 올라와 있는 거 같다. 하지만 현실은 바닥이다.
교회라는 말은 공동체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삼위일체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고, 우리는 분열된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으니 교회가 죄스러운 걸 부끄러워할 건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생각하고 묵상할 필요도 없다. 지금 나 그리고 우리 현실이 그렇다. 누구와 누구는 친하고, 누가 누구를 싫어하고, 칭찬에는 인색하고 험담에는 열을 낸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는 죄스럽지만 우리 기도는 절대 그렇지 않다. 하느님 앞에서 저 이웃의 불행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악이 어떻게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겠나. 미사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 그리고 기껍지 않고 내키지 않지만 싫어하는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그렇지 않고 좋아하는 이들끼리만 좋아하고 싫음과 미움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굳이 아까운 시간 내서 미사 성찬례에 참석할 필요 없다. 이방인도 범죄자 집단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하느님은 하실 수 있고 내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데려온 그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 그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병이 나서 회복되기를 바랐음은 당연하다. 그가 예수님을 믿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친구들은 믿었다. 그는 친구들 덕분에, 그들의 믿음 덕분에, 그들의 기도 덕분에 나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그러니까 여기서 용기는 믿음으로 해석된다. 할 수 없다고, 하기 싫다고 그냥 내버려 둘 게 아니라 용기를 내고 세례성사와 영성체의 은총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거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이것을 믿지 않고, 사람이 하느님처럼 용서할 수 있음을 믿지 않는 건 오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악한 생각을 품는 거다. 예수님은 거기 있던 율법 학자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예수님, 저는 이웃의 기도 덕분에 삽니다. 사랑이 자신을 향하면 죄가 되기 쉽지만 이웃을 향하면 선이 되고 기적을 일으킵니다. 오늘도 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싫어하는 이웃을 위해 하는 기도만큼 입과 몸도 그렇게 되게 도와주소서. 아멘.
구속주회 이종훈 macario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