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몇몇 인물들을 정치계쪽이나 유튜버들이나 카페내부의 인물등을 심리학적 정신학적으로는 어떤 판단을 내릴수있을까 싶어 시간을내어 살펴본결과 이런결론을 내본다. 아마 가장 근접한 결과이지 않을까 싶은데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며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타인을 경시하다 못해 일상 생활에 문제를 야기하는 정도의 병적 성격 성향으로 성격장애의 하나. 단순히 왕자병/공주병의 극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보다는 무의식의 기저에 자리한, 자신이 잘나야만 한다는 병적 방어기제가 주요 병태.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했다. 아름다운 미소년이었던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식음을 전폐하고, 몇 날 며칠을 바라보다가 그만 수선화가 되었다는 이야기. 주목할 만한 부분은 나르키소스가 사랑에 빠진 건 자신이 아니라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겉으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완벽하게 만들어진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고대 그리스인의 통찰에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는 나르키소스의 에피소드가 여럿 등장하는데, 어린 시절의 부모에 의한 과보호와 그러면서 동시에 주어지는 정체성에 대한 학대,[1] 자아도취,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뒤에 이어지는 빠른 평가절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코)에 대한 잔인성 등 현대의 자기애성 성격장애에 딱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더불어, 나르키소스와 사랑에 빠졌던 에코는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캐릭터인데, 이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쉽게 빠져드는 동반의존(codependency) 성향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심지어 나르키소스의 어원을 다시 따라가면 '무감동'으로 해석되는 '나르케'로 이어지는데, 공감능력의 부재가 나르시시스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임을 생각해 볼 때, 고대 그리스인의 깊은 성찰에 다시금 놀라게 된다.
학계의 견해는, 자존감을 유지할 내적 안정감과 수치심에 대한 인내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자존감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억지로 자신이 우월해야만 한다는 집착을 가지는 것으로 판단한다. 일반적으로,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이 낮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자존감의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 즉, 좋을 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다가 사소한 타격이라도 입으면 바닥에 쳐박히는 식으로 변화가 심한 형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2][3]
일반적으로 건강한 자존감의 성장에 유아-소아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실제로 상당수의 자기애성 성격장애 환자들이 자존감 형성에 가장 중요한 어린 시절에 주변인, 특히 부모의 폭력, 무시, 방임, 학대와 같은 트라우마와 심각한 애정결핍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자녀의 행동에 한계를 설정해 주지 않고 부모가 지나치게 오냐오냐 키우는 것도 위험 요인인데, 이 또한 정상적인 부모와 자식 간 애착 관계와 자존감, 정서의 건강한 발달에 방해가 되기 때문으로 본다.
하버드 의대 교수, 정신과 의사인 주디스 루이스 허먼(Judith Lewis Herman)은 저서에서 어린 시절에 정신적 외상을 입은 아동 학대 피해자들의 심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학대자를 진정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아동 피해자는 뛰어난 성취자가 되기도 한다. 아이는 자신에게 요구된 어떤 것이든 하려고 한다. 아이는 부모를 공감적으로 보살피기도 하고, 훌륭한 살림꾼, 학업 성취자, 혹은 사회적 관습의 전형이 될 수도 있다. 절박하게 부모의 환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아이는 이 모든 과제에 완벽주의적으로 열중한다. 성인기의 삶에서, 이렇게 조급하게 강요된 경쟁은 상당한 직업적 성공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대개 수행하는 자기를 진짜 자기가 아닌 거짓 자기로 지각하기 때문에, 세상 속의 어떠한 성취도 아이 자신의 이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인정은 오히려 아이의 확신을 확증할 뿐이다. 아무도 자신을 진실로 알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비밀과 진짜 자기의 모습이 밝혀지면, 사람들은 자신을 피하고 멀리할 것임을. 학대받은 아동은 극단적으로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더욱 긍정적인 자기 정체감을 구원받으려 한다.
생존자의 친밀 관계는 보호와 보살핌에 허기져 끌려 다니고, 버림받고 착취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구원을 쫓아 생존자는 보살펴 주는 특별한 관계를 약속해 줄 것 같은 강력한 권위를 지닌 인물을 찾는다. 애착을 형성하게 된 새로운 사람을 이상화하면서 그는 지배받거나 배신당할 것이라는 지속적인 두려움을 저지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불가피하게도, 선택된 구원자는 환상 속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이 실패에 실망하면서, 그는 분노에 찬 채 자신이 그토록 찬미했던 바로 그 사람을 모욕한다. 대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갈등에도 강렬한 불안, 우울, 분노가 유발된다. 경미한 냉대에도 과거의 무정한 방임이, 경미한 상처에도 과거의 계획적인 잔인함이 생존자의 마음 안에 되살아난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고 해도 이러한 왜곡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왜냐하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생존자의 언어적, 사회적 기술이 부족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자는 반복적으로 구원, 불의, 배신의 드라마를 상연하는 강렬하고 불안정한 관계 양상을 발달시킨다.[4][5]
물론 어릴 때의 트라우마로 모든 사람이 자기애성 성격장애 범주를 보이는 것은 아니므로, 개인의 감수성 차이도 중요한 인자가 될 것이다. 실제로 일란성 쌍둥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들에서는 유전적 소인이 환경적 소인보다 더 크다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안 중 하나는 패배이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힘의 논리에 완전히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흑백논리에 의해 사람을 승자와 패자 둘로 나눈다. 패배하면 상대방에게 굴복하고,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은 승자가 되어 자신을 무시하고 비웃고 짓밟을 것이고, 자신은 패자가 되어 목소리와 권리를 모두 잃을 것이라는 불안이다. 이들이 가진 방어기제는 트라우마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상대를 먼저 공격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줄 만한 상황을 미리 방지하여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어기제는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와 결핍을 준 부모와 동일한 방어기제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가 가진 트라우마와 병식을 대물림받게 된다.
그 때문에 상대는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르시시스트의 부정적인 감정을 전이 받게 되고 관계에 따라 싫어하는 감정, 상황을 개선해 주고 싶은 걱정, 똑같이 되돌려 주고 싶은 복수심 등이 생겨나는 감정의 역전이가 생기게 된다. 즉, 상대방은 나르시시스트가 전이한 부정적인 감정을 대신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상대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나르시시스트에게 되돌려줄 경우, 스스로를 보호했을 뿐인데 상대가 공격한다 생각하여 자신은 무고한 피해자로 생각한다.
물론 이들도 인지 지능(Intelligence Quotient)은 정상인과 같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더라도 어느 순간 자신이 도피했던 죄의식을 직면 하게 되는 시기가 온다. 또한 반복된 대인관계 패턴으로 불안을 느끼는 것에 익숙해지고, 쌓이게 되며, 죄의식을 받아들이는 고통보다 죄의식으로 부터 도피하는 과정이 더 고통스럽게 되어 신경증을 만들게 된다. 때문에 신경성 두통, 불면증 등을 앓고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심지어 육체적 질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
반복적인 자기상의 손상으로 나르시시스트는 만성적인 불안과 공허감, 우울감, 무능감,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런 지옥 같은 기분에서 벗어나게 해줄 강렬한 자극 거리를 찾거나, 자신을 칭송함으로써 긍정적인 감정을 전이해 주거나,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전가할 대상을 찾고, 문제가 생기면 외부의 탓으로 원인을 돌리기 때문에 평생에 걸쳐서 같은 대인관계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타인을 이용하거나 교묘히 조종하고 착취하는 근본적인 감정은 수치심과 적개심이다. 이들은 타인을 믿지 않으며 사람을 조종하거나 공격할 때에 부정적인 감정과 불안이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첫댓글 사상이 신념이 되면 나타나는 현상인데,
증오의 정치 대립의 정치 혐오 정치의 결과 입니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 60~70년대로 회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