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에 앞서 king crimson이라는 카페에서 '시인 열전'이라는 해괴망측하고 조악한 연재를 시작하고 있는데..물론 뭐 일종의 자료 올리기 작업에 불과하지만..-_-;;
오늘 '김남주'시인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다가 그냥 뷰데이에도 소개하고 싶어서...헤헤헤 -_-;;(아 이 근천스러운 웃음..싫다..ㅠ.ㅠ)
뭐 어쨌든..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공선옥 작가가 쓴 김남주 시인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실어 놓았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중 한 사람이자 공지영식의 '잘난 여성들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여자로서 살아가고 살아 가야만 하는 보통 사람들' - 그네들의 절망이 오히려 그 길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금 재생하는..
그런..이야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혹시나 기회가 되시면 한번쯤 읽어 보셔도 좋을 듯 싶군요!
시인 김남주 연보
- 1946 (01) : (10. 16) 전남해남군 해남읍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봉수,
어머니 문일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1964 (18) : 광주일고 입학, 입시위주의 획일적 교육제도에 반대하여 이듬해 자퇴
- 1994 (49) : 2월 13일 새벽 2시 30분 췌장암으로 별세.
유족으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 군이 있음.
- 2000. 5. 20 광주 중외공원에 민족시인 김남주시비 건립
『진혼가』, 연구사, 1984
편지 1
산길로 접어드는
양복쟁이만 보아도
혹시나 산감이 아닐까
혹시나 면직원이 아닐까
가슴 조이시던 어머니
헛간이며 부엌엔들
청솔가지 한 가지 보이는 게 없을까
허둥대시던 어머니
빈 항아리엔들 혹시나
술이 차지 않았을까
허리 굽혀 코 박고
없는 냄새 술 냄새 맡으시던 어머니
늦가을 어느 해
추곡 수매 퇴짜 맞고
빈 속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 앞에
밥상을 놓으시며 우시던 어머니
순사 하나 나고
산감 하나 나고
면서기 하나 나고
한 지안에 세 사람만 나면
웬만한 바람엔들 문풍지가 울까부냐
아버지 푸념 앞에 고개 떨구시고
잡혀간 아들 생각에
다시 우셨다던 어머니
동구 밖 어귀에서
오토바이 소리만 나도
혹시나 또 누구 잡아가지나 않을까
머리끝 곤두세워 먼 산
마른 하늘밖에 쳐다볼 줄 모르시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다시는 동구 밖을 나서지 마세요
수수떡 옷가지 보자기에 싸들고
다시는 신작로 가에는 나서지 마세요
끌려간 아들의 서울 꿈에라도 못 보시면 한시라도 못 살세라
먼 길 팍팍한 길
다시는 나서지 마세요
허기진 들판 숨가쁜 골짜기 어머니
시름의 바다 건너 선창가 정거장에는
다시는 나오지 마세요 어머니
조국
우리가 지켜야 할 땅이
남의 나라 군대의 발 아래 있다면
어머니 차라리 나는 그 밑에 깔려
밟힐수록 팔팔하게 돋아난 청맥이고 싶어요
날벼락 대포알에도 그 모가지 꺾이지 않아
남북으로 휘파람 날리는 피리이고 싶어요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남의 나라 병사의 발 아래 있다면
차라리 나는 그 밑에 밝혀
석삼 년 가뭄에도 시들지 않는 풀잎이고 싶어요
그 잎새 달빛 머금은 이슬에 젖어
목마른 고개 넘고 오시는 님의 입술 적시고 싶어요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랑이
남의 나라 돈의 무게에 있다면 그 밑에 깔여
밤송이로 까지는 피묻은 처녀의 골짜기라면
그 아픔에 지는 어둠 하늘의 비명이라면
참말이제 참말이제 마을 떠난
내 누이의 식칼이고 싶어요 등에 꽂혀
놈들의 가슴에 꽂혀 피 흘리는
옛 사랑의 무기 죽창이고 싶어요
우리가 지켜야 할 땅이
흰둥이 군대의 발 아래 있고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깜둥이 병사의 발 아래 있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랑이
달라에 눌리는 중압 아래 있고
그리고 우리가 불러야 할 자유의 노래
놈들이 총검 아래 숨지는 그림자라면
어머니 참말이제 나는
청맥이고 싶어요 풀이고 싶어요
바람보다 먼저 눕기도 하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기도 하는
어머니 참말이제 참말이제 나는
식칼이고 싶어요 죽창이고 싶어요
총알보다 대포알보다 먼저 꺾이지만
그들보다 먼저 꽂히기도 하는
노래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다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나의칼 나의피』, 인동, 1987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워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나의 칼 나의 피
만인의 머리 위해서 빛나는 별과도 같은 것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와도 같은 것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만인의 만인의 만인의 가슴 위에 내리는
눈과도 햇살과도 같은 것
토지여
나는 심는다 살찐 그대 가슴 위에 언덕에
골짜기의 평화 능선 위에 나는 심는다
자유의 나무를
그러나 누가 키우랴 이 나무를
이 나무를 누가 누가 와서 지켜주랴
신이 와서 신의 입김으로 키우랴
바람이 와서 키워주랴
눈가 지키랴, 왕이 와서 왕의 군대가 와서 지켜주랴
부자가 와서 부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이, 판검사가 와서 지켜주랴
천만에! 나는 놓는다
토지여, 토지 위에 사는 형제들이여
나는 놓는다 그대가 밝고 가는 모든 길 위에 나는 놓는다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
파도로 험한 사나운 뱃길 위에
고개 넘어 평지길 황토길 위에
사래 긴 발의 이랑 위에 가르마 같은 논둑길 위에 나는 놓는다
나 또한 놓는다 그대가 만지는 모든 사물 위에
매일처럼 오르는 그대 밥상 위에
모래 위에 미끄러지는 입술 그대 입맞춤 위에
물결처럼 포개지는 그대 잠자리 위에
구석기의 돌 옛무기 위에
파헤쳐 그대 가슴 위에 심장 위에 나는 놓는다
나의 칼 나의 피를
오, 자유를 자유의 나무여
학살·1
몸매가 작아 내 누이 같고
허리가 길어 내 여인 같은 나라여
누구의 하늘도 침노한 적이 없고
누구의 영토도 넘본 적이 없는
비둘기와 황소의 나라 내 조국이여
누가 너를 남과 북으로 갈라 놓았느냐
누가 네 마을과 네 도시를 아비규환의 아수라로 말들어 놓았느냐
누가 허리 꺾인 네 상처에 꽃잎 대신 철가시바늘을 꽂아 놓았느냐
정전위 판문점에서 너를 대표한 자 누구이며
도마 위에 너를 올려 놓고 초치고 장치고 포치고 자치고
내 조국의 운명을 요리하는 자 누구냐
입으로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뒷점에서는 원격조종의 끄나풀로 꼭둑각시를 앞장세워
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민중들을
계획적으로 (너희들 표현으로는 전략적으로) 학살하는 아메리카여!
보아다오, 너희들과 너희들 똘만이들이 저질러 놓은
범죄를. 범죄와 음모와 착취로 뒤덮힌 이 땅을
보아다오, 너희들이 팔아먹은 탄환으로 벌집투성이가 된 내 조국의 심장을
보아다오,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보아다오, 대검에 찔린 아이 밴 어머니의 배를
보아다오, 학살된 아이들의 청량한 눈동자를.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
조국은 하나다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모르게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권력의 눈 앞에서
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자본가 개들의 이빨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나는 이제 쓰리라
사람들이 오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오르막길 위에도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사나운 파도의 뱃길 위에도 쓰고
바위도 험한 산길 위에도 쓰리라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나는 이제 쓰리라
인간의 눈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맨 처름 보게 되는 천장 위에 쓰리라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밥 위에 쓰리라
쌀밥 위에도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이 쓰는 모든 말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탄생의 말 응아 위에 쓰리라 갓난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말 위에 쓰리라
저주의 말 위선의 말 공갈협박의 말…
신과 부자들의말 위에도 쓰리라
악마가 남긴 최후의 유언장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이 세워 놓은 모든 벽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남인지 북인지 분간 못하는 바보의 벽 위에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좌충우돌하다가 내빼는 망명의 벽 위에
자기자기만이고 자기환상일 뿐
있지도 않는 제3의 벽 위에
체념의 벽 의문의 벽 거부늬 벽 위에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순사들이 순라를 돌고
도둑이 넘다 떨어져 죽은 부자들의 담 위에도 쓰리라
실바람만 불어도 넘어지는 가난의 벽 위에도 쓰리라
가난의 벽과 부의 벽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갈보질도 좀 하고 뚜장이질도 좀 하고
그래 돈도 좀 벌고 그래 이름 좀 팔리는 중도좌파의 벽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라고
나는 또한 쓰리라
노동과 투쟁의 손이 미치는 모든 연장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목을 베기에 안성맞춤인 ㄱ자형의 낫 위에 쓰리라
등을 찍어 내리기에 안성맞춤인 곡팽이 위에 쓰리라
배를 쑤시기에 안성맞춤인 죽창 위에 쓰리라
마빡을 까기에 안성맞춤인 도끼 위에 쓰리라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인 삼팔선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대문짝만하게 손바닥만한 종이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오색종이 위에도 쓰리라 축복처럼
만인의 머리 위에 내리는 눈송이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바다에 가서도 쓰리라 모래 위에
파도가 와서 지워버리면 나는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세월이 와서 긁어 버리면 나는
수를 놓으리라 가슴에 내 가슴에
아무리 사나운 자연의 폭력도
아무리 사나운 인간의 폭력도
지워 버릴 수 없게 긁어 버릴 수 없게
가슴에 내 가슴에 수를 놓으리라
누이의 붉은 마음의 실로
조국은 하나다라고
그리고 나는 내걸리라 마침내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에 내걸리라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키다 장대 같다는 양키들의 손가락 끝도
언제고 끝내는 부자들의 편이었다는 신의 입김도
감히 범접을 못하는 하늘 높이에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 볼 수 있도록
겨레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삼팔선 밤에
눈보라가 친다 삼팔선의 밤에
정작 어디메서 불어오는 줄도 모르는 바람은
내 외투깃을 여미게 하고 자꾸만 눈은 내려
군화를 덮고 무릎까지 허리까지 덮고 나는
눈에 파묻혀 철모를 쓰고 총을 멘 허수아비가 되어
보초를 서고 있다 삼팔선의 밤에
누구의 밤을 지키고 있는가 이 밤에 나는
내가 지키고 있다는 세상의 재산이란 무엇이며 누구의 것인가
내가 지키고 있다는 생명이란게 또한 누구의 생명인가
나는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그 무섭던 밤을
토지의 무상분배 쪽에 왼손을 들었다고 해서
지주가 불러들인 경찰의 습격을 받았던 아버지의 밤을
그날 밤 어머니는 흰옷의 아버지를 어둠 속으로 넣었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누이의 등에 업힌 나를 황소눈으로 쏘아보았다
그것니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였다
내가 훨씬 커서 부잣집 담살이로 들어갔을 무렵
내가 귓가로 들었다 마을 어른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그 사람 아직도 오포산에 숨어 있을거여"
"아녀 반란군은 국방군한테 죄다 소탕됐단거여"
"누가 알아 태박샌 줄기타고 이북으로 내뺐는지"
뭐라 하실까 만약 어딘가에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미제군화를 신고 눈속에 묻혀 미제 철모를 쓰고
북산(北山) 가슴에 미제 총을 겨누고 있는 나를 두고
뭐라 하실까 나라 국졍지키는 용사라 하실까
눈보라가 친다 삼팔선의 밤에
정작 어디메서 불어오는 줄도 모르는 바람은
내 외투깃을 여미게 하고 자꾸만 눈은 내려
군화를 덮고 무릎까지 허리까지 덮고 나는
눈에 묻혀 철모를 쓰고 총을 멘 허수아비가 되어
보초를 서고 있다 삼팔선의 밤에.
『솔직히 말하자』,풀빛시선21, 1989
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
그대만이
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
나를 살아 있게 한다
감옥 속의 겨을 속의 나를
머리 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가슴 가득히
뜨건 피 돌게 한다
그대만이
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
그대는 내게 왔다 기적처림
마지막 판가름 한관 승부에서
보기 홉한 패배로 내가 누워
해적 선의 바다에서
난파선의 알몸으로 내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떠돌 때
그대는 왔다
파도 속의 독백처림
비밀을
비밀 속의 비밀을 속삭이면서
그때 내가 최초로 잡은 것은
보이지 않는 그대 손이었다
그때 내가 최초로 만진 것은
대낮처림 뛰는 그대 젖가슴이었다
그때 내가 최초로 맛본 것은
꿈결처럼 감미로운 그대 입술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술잔으로 그대 이름을 떠을
광숙이 !
그대가 아녔다면
책갈피 속의 그대 숨결이 아녔다면
내 귓가에서 맴도는 그대 입김이 아녔다면
오 사랑하는 사람이여
지금의 내 가슴은 얼마나 메말라 있으랴
지금의 내 영혼은 얼마나 황량해 있으랴
세계를 잃고 그대 하나를 내 얻었나니
그대 이름 하나로 우주와 바꿨나니
나는 만족하나니
사랑만이
지금은 다만 그대만이 그대
내 안에 가득한 행복이나니
참아야 한다오
세월이 주는 이 중압을
이겨야 한다오
감옥이 주는 이 한속 이 추위를
새벽같이 일어나 새벽을 깨고
벌거숭이 온몸에 찬물을 끼얹고
싸워야 한다오 싸워야 한다오
씹고 또 씹어 골백번 되씹어
운동부족 소화불량의 이 섭생과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생팔의 이 악순환과
식단 3일의 이 허기를
살기 위해
살아 남기 위해
살아 남아 살아 남아
다시 한번 그대 입술 위에 닿기 위해
목놓아 다시 한번 그대이름 불러보기 위해
님이여
『사상의 거치』,창작과비평사, 1986
가엾은 리얼리스트
시골길이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흔해빠진 아카시아 향기에도 넋을 잃고
촌뜨기 시인인 내 눈은
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을 본다
바닷가가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모르고
농부의 자식인 내 가슴은 제방 이쪽
가뭄에 오그라든 나락잎에서 애를 태운다
뿌리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른
가난한 시대의 가엾은 리얼리스트
나는 어쩔 수 없는 놈인가 구차한 삶을 떠나
밤별이 곱다고 노래할 수 없는 놈인가
돌멩이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많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즘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대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이좋은 세상에』, 한길사, 1992
대통령 하나
미군이 잡아준 터에
대한민국이 태어나고 마흔 몇 해
그동안 몇 십년 동안 성조기 아래서
대통령도 서너 개 있었다 없었다 했다
하나는
제 나라에 살지 못하고 남의 나라 섬으로 끌려갔다
하나는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총에 맞아 술잔에 코 박고 쓰러졌다
하나는
제 집에 살지 못하고 절간으로 쫓겨났다
대통령이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그 한 사람으로
나 태어나고 자라고 마흔 몇 해
나는 왜 나를 친애까지 했던 그들을
이를테면 이아무개 박아무개 전아무개 같은 이들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사기꾼 폭력배 정상배 매국노 반역자…
그 따위 이름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하는가
혹시는 내 입이 워낙 더러워서 그러는 것일까
혹시나 내 출생이 워낙 천해서 그러는 것일까
나 태어난 이 강산에서
아름다운 이름의 대통련 하나 갖고 싶다
나 죽어 이 강토에 묻히기 전에
아름다움 추억의 대통령 하나 갖고 싶다
자본가들 정치헌금이나
주둔군의 총구에서 튀어나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산과 들에서
공장에서
조국의 하늘 아래서
흙 묻은 손과 땀에 젖은 노동의 손이 빚어낸
그런 대통령 하나
이 좋은 세상에
아들은 쇠파이프에 머리가 깨진 채
피바람 오월 타고 저 세상으로 가고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 저항하다
쇠고랑 차고 감옥으로 가고
어머니는 감옥에 저 세상에 남편과 자식을 빼앗기고
가슴에 멍이 들어 병원으로 가고
옷가지 챙겨 들고 아버지 보러 감옥에 가랴
밥반찬 보자기에 싸들고 어머니 보러 병원에 가랴
누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눈물 보일 겨를도 없다면서
꽃 한송이 사들고 내일은 동생 보려 무덤 찾겠다네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창비시선128, 1995
시인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행복하다
세상이 법으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그래도 행복하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시인은 필요없다
법이 없으면 시도 없다
서울의 달
별 하나 초롱초롱하게 키우지 못하고
새 한 마리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서울의 하늘
물 한모금 깨끗하게 마실 수 없고
고기 한 마리 병들지 않고 살 수 없는
서울의 강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공기 한 바람 상쾌하게 들이켤 수 없는
서울의 거리
나는 빠져나간다
지옥을 빠져나가듯 서울을 빠져나간다
영등폰가 어딘가 구론가 어딘가
시커먼 굴뚝 위헤 걸려 있는 누르팅팅한 달이
자본의 아가리가 토해놓은 서울의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김남주, 친정 큰오빠같은
공석옥(소설가)
내게 있어 김남주라는 이름은 시쳇말로 눈물의 씨앗이다. 누가 김남주라는 이름자만 입에 올려도, 누가 잠깐 글에 김남주라는 이름자만 써놓아도 내 눈에 눈물부터 돌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네게 이제는 몰락한 친정 오라비다.
그것도 큰오라비다.
처자식 두고 무정하게 떠나 버린 내 살가운 피붙이인 친정 오빠. 그래서 나는 그 이름자만 떠올려도 코끝이 찡해 오고 눈물이 도는 것이다.
알량한 직업 근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김남주 선생님과 같은 연배의 사람들을 내 삼촌,
혹은 큰오라비쯤으로 상정해 두고 어떤 소설하나를 구상한 적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억척스럽도록 부지런하다. 대부분의 마을분위기가 그렇듯 술 많이 마시는 것 자체가 부정시되고 술주정하는 사람의 품성자체를 전한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뵌적은 없지만 김남주 선생님의 아버님 또한 내가 어려서 보아 왔던 내 고향 어르신들하고 비슷한 풍모와 성품을 지닌 분 같았다. 내가 살던 마을에도 비록 '노랭이' 라는 별명은 얻어 가지고 계시지만 해 나면 일하고 해 떨어지면 자는 식으로 부지런한 생활을 하시는 분이 계셨다. 그리고 노랭이라는 별칭이 결코 그분을 폄하하기 위하여 지어낸 것이 아님은 마을 사람 누구나 공감하는 바였다.
노랭이라는 말 속에는 일정 부분 질시 섞인 존경의 염마저 포함된 것이었는데, 어떤 분이었냐 하면 실제로 머리가 아주 노랗기도 하거니와 아들들 대학 공부 시키려고 노랭이처럼 굴지 않으면 안 되었던 평생을 사신 분이었다.
일단 이녁 것이 되면 절대 함부로 내놓지 않기가 그분의 생활 신조였다. 동네사람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고 동네 사람누구보다 늦게 잤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은 일하는 시간이었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아무리 캄캄해도 불을 켜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헤서 아들들을 대학 공부 시켰다.
큰아들은 노랭이 아버지의 바람대로 대학 나오고 유학갔다와서 출세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였고 이후에는 그 아버지의 애간장을 다 녹이는 삶을 살았다. 동네에 노랭이의 둘째 아들이 왔다네, 하는 소문은 어쩐지 으스스한 데가 있었다. 내게는 집안 삼촌뻘 되는 노랭이 영감 둘째 아들. 1970년대 초반쯤 되었을 때, 내가 이제 겨우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였던 것 같다. 노랭이 둘째 아들, 내가 석이아재라 불렀던 그 삼촌이 빨갱이라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고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사람들은 노랭이 영감의 집 앞을 지날때도 왠지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빨리 지나갔다. 그 집 사람들도 동네 사람들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지나쳤고 그 집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한참 재미나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은 우물가에서 하시는 말씀이, 불쌍해도 삘갱이 구신이 젤 불쌍타고도 했다. 염라대왕도 삘갱이는 무서워한다고.
동네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렀고 순사하도 나타나면 누군가는 그 순사한테 노랭이 영감네의 동정을 꼬나바치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을 것이, 그러면 애국자가 되는 까닭이었다. 내 집에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라든가 숨겨 주는 인정보다 신고하는 애국 정신이라는 말이 전혀 이물감 없이 받아들여지던 시대였으니까. 석기아재의 아버지, 노랭이 영감이 죽었을 때 빨갱이 아들이지 아부지잡아먹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아부지 잡아먹은 아들은 그때 감옥에 있었다.
내가 아는 김남주 선생님의 이력 또한 그와 흡사한 데가 있다. 70년대, 우리삼촌, 작은아버지, 큰오빠 또래들의 바란 찬 이야기다. 우리 고모, 언니들은 그때 공장에 다녔다. 파리한 얼굴로 머리에 스카프를 동여매고 가발공장, 방직공장, 봉제 공장, 신발 공장에 다녔다. 그 언니들이 바로YH언니들이었고 동일방직 언니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산골아이였다. 대처로 나간 삼촌, 언니, 오빠들은 그리워하며 나도 얼른 커서 그들처럼 대처로 나갈 꿈을 꾸는, 국어책에 나오던 소설 「요람기」속 코흘리개였다.그때 시골에서 농사짓거나 머슴을 살았던 삼촌, 오빠들 중 두셋은 지금도 촌에서 농사짓고 산다. 혹은 아내가 집을 나간 홀아비로, 혹은 애초에 장가조차 가보지 못한 농촌 총각으로, 그리고 그들은 벌써 40대 후반 50년대들이 되었다. 그때 월남치마 입고 게다짝 같은 샌들 신고 우리 집에 '누에 추리러' 왔던 큰애기들은 촌에서 농사짓던 삼촌들, 큰오빠들의 아내가 되었다. 그때 시골에서는 정부에서 그러라고 권장한 바도 있고 수출도 잘 되어 대량으로 잠업을 했었다. 따로 잠실이 있는것도 아니고 사람 자는 방에 누에덕을 만들어 아파드같이 차곡차곡한 채반 속에서 누에들이 뽕 갉아먹는 소리를 낼 때는 마치 비가 오는 듯했다. 그 누에들의 암수를 갈라내는 작업을 인근 마을에서 벌이 나온 큰애기들이 밤새워 했고, 그녀들이 그 작업을 하는 밤에는 담 밖에서 총각들의 휘파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얼마 뒤에 하우스라는 것이 하우스 안에 고추 농사를 짓는 일이었고 목장을 만들어 젖소를 기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우스 농사 짓던 젊은 부부들 열에 아홉은 빚을 지고 고향을 떴다. 그들이 고향을 뜨던 날까지도 석기아재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광주로 고등학교 유학을 떠났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다가 도중에 그만두고 결혼을 하여 애기 엄마가 되어서 친정 동네에 갔을 때, 석기아재가 감옥에서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몹쓸 병에 걸렸다고 했다.
김남주 선생님이 생전에 잘부르던 노래가 「돌아갈 곳 못 되더라 내 고향」이라고 했다. 돌아갈 곳 못 되더라 내 고향. 사무치는 애증이 느껴진다. 그래서 석기아재도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던 것일까. 한번고향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숱한 우리네 삼촌, 고모,
혹은 언니, 오빠들. 한스러울 뿐이다.
내가 김남주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2,3년 무렵이다. 서울 인사동의 어느 술집에서였다.
그 자리엔 지금은 돌아가신 이광웅선생님도 계셨다. 맺주 몇 잔과 함께 후배들하고 즐겁게 담소하던 선생님을 훔쳐보았던 기억. 아니, 후배들이 술마시고 떠들던 모습을 한량없는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기억. 그 눈빛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전사의 눈빛이 아니라 바로 햇빛 바른 고향집 마루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동생들을 바라보는 큰오라비의 눈빛이었다.김남주 선생님은 피곤하다며 오래 있지 못하고 일어서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듬핸가, 성공회 성당에서 황석영 석방 촉구 문학제가 열리는 자리에서 「깃발」을 쓰신 홍희담 선생님과 함께 보았다. 홍 선생님은 그때 이미 몸에 이상이 와있는 상태인 김남주선생님께 드릴 거라며 인삼 농축 엑기스 두 병을 사서 한병은 나에게 주고 한병은 김남주 선생님께 주었다. 나는 성공회 마당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계시는 김 선생님을 발견하고 나에게 있던 한 병마저도 김 선생님의 호주머니에 넣어드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 까맣고 조그마한 병을 재킷 호주머니에 넣어드리자 선생님은 두 개 다 필요 없다며 다시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받지 않으려고 조금 멀찌감치 도망을갔었다.
그때 홍 선생님과 나누던 대화 중에 죽염을 먹기는 먹었는데 속이 더 아픈 것도 같다는 말씀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우와기' 라고 하는 촌스럽기 한량없는 구닥다리 물건인 재킷을 걸치고 낯빛이 완연하게 흙빝으로 변한 김남주 선생님의 퀭한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때 누구나 가슴 한켠이 절로 시려 왔으리라. 그런데도 선생님은 말했었다. "암컷도 아녀, 괜찮당게, 암시랑토 안해." 자신을 염려하는 사람들에 대고 그는 오히려 가슴을 쭉 펴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 활짝 웃으며, 지금 자신이 아픈 것은 암것도 아닌 병이라고, 이건 병도 아니라고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살마들 중에는 실제로 그의 말을 믿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천하의 김남주가 병에 굴복하지는 않으리라는 어떤 믿음 같은 것을 좌중의 사람들에게 심어 주기에 충분한 그 당당한 태도라니.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는 피붙이가 아닌데도 피부이 같은 사람들이 있다. 내게 김남주라든가, 2년 전 저 세상으로 간 광주의 연극쟁이 박효선 같은 이들이 그렇다. 생전에 개인적으로 친한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 그리고 그들이 저세상으로 갔을 때 나는 실제로 우리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실 때만큼이나 설버게 울었던 것 같다. 생물학적인 핏줄기 아닌 사회적인 핏줄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 같다.
어떤 때는 느닷없이 김남주나 박효선 같은 이들이 못 견디게그리워 혼자 목놓아 울기도 한다. 가슴이 아려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생전에 무슨 친분을 나눈 적도 없는 내가 이러는데 그 가족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참 이상도 하다. 김남주 선생님의 가족인 박광숙 선생님이나 토일이를 생각하면 또 가슴이 아려 온다.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건만 내 마음속에는 이미 박광숙 선생님이나 토일이가 꼭 내 가족같이 느껴진다. 김남주 선생님이 내 친정 큰오라비 같다면 박광숙 선생님은 큰언니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토일이는 내 조카 같다. 아빠 잃은 불쌍한 내조카. 하지만 씩씩하고 영리하고 사랑스럽고 따뜻한 눈망을을 가진.
지금도 의식이 흐려지거나 몽롱해지거나 몹시 화가 나거나 혹은 그냥 무턱대고 그리울 때면 선생님의 시집을 꺼내 읽는다. 박광숙 선생님의 수필집도 찾아 읽는다. 그러면 세상과 사물이 보다 명료해진다. 그리고 어떤 가슴으로 살아야 할지가 뚜렷해진다.
날마다 불경 한 구절 외듯 김남주 시 하나 읽는다. 그것이 내게 하루치의양식이 된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무엇보다 해안을 얻는다. 큰오라비의 자상하고 엄한 가르침을 얻는다. 이 얼마나 큰 재산을 남기고 그는 떠나갔는가.
큰오라비의 부스스한 머리, 조카도 그런가 모르겠다. 자전거를 타고 강화도 거친 바람을 뚫고 달린다는 토일이, 아빠 잃고 나서 오줌을 싸고 칭칭대싼다더니 어느새 으젓한 강화도 시골 소년이된 토일이, 그리고 그 어머니 박광숙 선생님, 참 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