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처 사형 선고 받으심
넘겨주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예수께서는 신성모독자이자 정치적 반란자로 붙잡혀 |
묶이고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
그분은 종교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이라는 맷돌 사이에서 가루가 될 밀알이셨다. |
그분은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사명에 충실했다. 즉 '눈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 |
고, '앉은뱅이들'을 다시 자기 발로 일어서도록 도와주고,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
소외상태에서 해방시켰는데, 이는 모든 면에서 우리 인간을 염려하는 사랑의 하느님 |
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림에서 예수께서는 가야파와 빌라도 앞에 서 있다. |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권력구조의 대표자들이 |
다. 가야파는 토라 두루말이를 꽉 붙잡고 있는데, 그것이 그에게 성스러운 하느님의 율 |
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만에 찬 찡그린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 |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셨기 |
때문이다. 오른쪽에 빌라도가 있다. 이는 심각한 종교적 갈등에 빠져들어간 세속적 권 |
력을 대변한다. 빌라도는 이 갈등을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한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 |
는 붉은색 옷을 걸치고, 빌라도는 '무죄'의 물에 자신의 손을 씻는다. 대야의 물이 핏빛 |
으로 빨갛게 물들어있다. 이것은 그가 이 살해모의의 공범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 살해공모에는 종교 지도자와 세속적 권력자의 손은 함께 협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
두 사람의 시선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판관들 앞에 상체 |
를 드러낸 채 고개 숙이고 있다. 그리고 그가 걸친 옷의 붉은 색은 왕이심을 드러내는 |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
빼지도 아니한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긴다'(이사 50,5-6)는 말씀처럼 내 맡 |
겨진 자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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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처 첫 번째 넘어지심
모퉁이의 머릿돌
제4처 성모님을 만나심
아무 말이 없으심
제5처 시몬이 함께 십자가를 짐
유일한 아들
'그들은 그로 하여금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
얼굴 둘, 몸 둘, 손 넷, 무거운 들보 하나가 있다. 그들은 이 들보를, 짓누르는 십자가 |
들보를 어깨에 짊어졌다. 마치 그들이 짐을 짊어지는 일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그들 |
이 어떻게 자세를 고수하는지 눈길로 더듬고 싶어진다. 팔 하나는 공동의 짐을 감싸고 |
, 다른 팔 하나는 상대방을 감싸고 있다. 복음서는 키레네 출신의 남자를 시몬이라 말 |
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농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처형장 |
으로 가고 있는 행렬과 만난다. 왜 그가 병사들에게 호출 당했을까? 시몬은 들보를 꽉 |
움켜잡고 나르기 시작한다. 지거 쾨더는 이 그림에서 복음서의 진술로부터 벗어나 자 |
기 자신의 길을 간다. 시몬은 예수 앞에서 십자가를 운반하지 않고, 예수와 함께 십자 |
가를 짊어진다. 이로써 시몬은 우리에게 다른 시각을 일깨워준다. 두 얼굴은 얼마나 |
닮았는가! 얼굴 생김새, 눈, 코, 입, 수염 등 이 두 사람이 혼동될 정도로 비슷하다. 다 |
만 푸른 옷을 입은 사내는 얼굴에 자기 일의 색채를 띠고 있다. 붉은 옷의 사내는 창백 |
한 얼굴에 모욕당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뒷면에 있는 그들의 팔은 서로 교차되어 상 |
대방의 몸을 감싸고 있다. 그들은 함께 하는 일로 서로 얽혀있는 살아있는 십자가이다 |
. 두 사람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 시몬은 눈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십자가를 |
억지로 짊어지게 되었지만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나는 여기 있 |
는 내 형제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와 연대하겠습니다. 우리 둘이 짊어질 겁니다. 서 |
로 부축하며 짊어질 겁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들의 고통에 너무 |
깊이 관여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그들은 나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는 |
이 고난의 길을 끝까지 가겠다. 그리고 시몬, 그대는 나의 길을 함께 갈 것이다.' 우리 |
는 연대성을 이보다 더 분명히 말해주는 그림을 볼 수 없다. 예수께서는 고통 당하는 |
인간, 즉 '십자가를 진 사람'과 연대한다. 우리가 시몬처럼 짊어지게 된 십자가를 받아 |
들이고, 그 무게가 우리를 압박한다면 그때는 미리 그런 징후를 지녔고, 그 징후에 자 |
신을 내어준 분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를 받쳐주고 나와 함께 십자가를 |
짊어질 것이다. 그는 인간들의 형제이다. 그를 통해 우리의 고통을 나누면 고난의 길 |
을 넘어 희망의 오솔길에 이를 것이다. |
제6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드림
진정한 이콘
베로니카는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루가가 전하는 유일한 언급은 예수께서 탄식하 |
는 여인들 곁에 잠시 머무는 장면뿐이다. 그러나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14처 때문에 우 |
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4세기경부터 깊은 신앙심 때문에 예수의 고난의 길을 따라하기 |
시작했을 때, 그 당시 생겨난 전설에 따르면 그 이름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나타난 |
다. 그녀의 이름은 베로니카(Vera Ikona, 이 이름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합성어이다) |
로, 진짜 형상을 의미한다. 전설은 이 여인을 고수한다. 그녀의 수건에 고난받는 자의 |
얼굴이 찍혔고, 이 수건으로써 치유효과가 생겨났는데, 황제 티베리우스가 이 수건 덕 |
분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붉은 옷의 여인은 루가가 말하는 예루살렘의 딸들 중 하나였 |
을 수 있다. 그들은 형장으로 이어지는 길거리에 서 있다. 유죄판결을 받은 자가 걸어 |
가는 길을 내기 위해 병사들이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왜 그때 |
한 여인이 충동적으로 수건을 꺼내 땀과 피로 얼룩진 그의 얼굴 앞에 내밀었을까? 그의 |
얼굴은 막 이루어진 접촉에서 생긴 네거티브 사진처럼 뒤에 남아있다. 이 그림은 어떤 |
사명을 전하고 있다. 베일 뒤에 있는 여인의 눈은 계속 끌려가는 예수를 더 이상 바라 |
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흑인을 바라보는데,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빈 대접을 |
들고 음식을 구걸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본양식이 필요하다. 온정에 대한 간 |
청이 구체적으로 필요한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의 가르 |
침에서 그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 |
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
제7처 두 번째 넘어지심
당신과 더불어
제8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돌보기
제9처 세 번째 넘어지심
아멘!
제10처 옷 벗김을 당하심
누구의 것?
'그들은 내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
요한복음이 이야기하듯이 '위에서 아래까지 이은 곳 없이 통으로 짠' 예수의 하얀 옷가 |
지가 색상이 화려하고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 그림의 중심에 있다. '한 조각'으로 된 예 |
수의 이 속옷을 놓고 병사들이 제비를 뽑았다. 이 속옷은 이미 고대 교회에서 나눌 수 |
없는 교회의 일치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독일 남서부의 |
트리어(Trier) 도시에 있는 성의(聖衣) 순례 때, 그곳에서 보게 되는 성의는 많은 사람 |
들에게 구체적인 인간 예수에 대한 감동적인 추억이 되었다. 이런 해석을 배경으로 하 |
여 지거 쾨더의 그림이 구성되어 있다. 이 그림은 우리의 시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
,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생각하도록 자극을 줄 것인가? 이 그림에서는 예수의 옷가지 |
주위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주된 세 흐름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앞쪽에 금빛 |
나는 제복을 걸친 그리스 정교회 사제가 있고, 그의 옆쪽으로 검은색 가운을 걸친 프로 |
테스탄트 목사가 있으며, 그의 맞은편에는 진홍색의 주교관과 옷을 걸친 로마가톨릭 |
주교가 있다. 이 세 사람 모두 함께 숭배하면서 예수의 옷 한 조각을, '그들'의 조각을 |
잡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유산에서 '그들'이 지니는 몫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
핏빛처럼 붉은 깃발을 든 검은 피부의 사람이 이 경건한 전원적인 풍경을 망치고 있다. |
묘사된 '성의'(聖衣)에 흐트러지고 쪼개지는 십자가 형태로 찢어진 틈이 보인다. 분리 |
된 채 있는 종파 사이에서는 복음 역시 '그리스도의 몸'을 쪼갠 것에 대한 분노를 없앨 |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유산에서 자신의 몫에 자족적으로 만족해 |
하면서 그 유언의 본뜻을 망각하고 뒤로 제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유언이 여기에서는 |
십자가의 그림자 속에 제시된다. 지나치기 쉬운 십자가의 그림자가 붉은 색 깃발을 든 |
흑인에게로 이어진다. 이것은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적인 질문이 된다. 우 |
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들의 어려움과 다시 섞이지 않는 |
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오히려 그 해방시키는 구원의 힘을 죽이게 될 것이다. |
제11처 십자가에 못박히심
마주보고
'그곳에서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
이 그림은 얼마나 낯선 광경인가! 골고타에서 눕혀져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의 |
모습은 없다. 이 그림은 우리의 감상 습관을 방해한다. 이 그림은 우리의 시선이 가는 |
방향을 바꾸고 마치 우리를 십자가의 길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 그림은 우리로 |
하여금 예수님의 눈으로 보게 한다. 팔다리를 뻗고 십자가에 누워 예수님의 눈으로 |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게 한다. 그 하늘에서 죽은 검은 태양이 그를 내려다본다. 화환 |
형태의 얼굴들이 누워있는 자, 다시 말해서 나를 내려다본다. 마치 내가 해부될 준비 |
를 하고 수술대에 누워 있는 것 같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갑옷으로 무장한 로마 병사 |
가 망치를 격렬하게 내리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즐기면서 |
도 깔보는 히죽거림 외에, 깊이 생각하는 표정도 찾아볼 수 있다. 당황하는 표정도 있 |
고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있으며, 슬퍼하는 표정도 있다. 어떤 사람은 손으로 얼굴 |
을 가린다. 또 어떤 사람은 성서 두루말이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
있고 또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예언들이 그에게 암시되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
찌른 사람을 바라볼 것이다.' 자신을 고난받는 예수와 일치시키고 '못 박힌 존재', |
즉 묶이고 못 박혀 고정된 존재에 대한 고유한 경험을 이 그림 속에 옮겨놓도록 화가 |
가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서 행동의 자유를 몽땅 빼앗지는 않아도 |
우리를 못박아 고정시키는 것으로 질병과 장애, 직업상 그리고 가족관계상 피할 수 |
없는 부담, 다른 사람들의 선입견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 |
이 곤경과 고난과 비참함 속에 못 박혀 고정되어 무기력하며, 내맡겨진 채 놀라서 쳐 |
다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들이, 민족 전체가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 곳에서 사람 |
들이 구경하고 있고, 세계의 언론들이 방관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런 곤경을 알고 있 |
다. 그는 이런 곤경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우리 중에서 '형언할 수 없는 텅 빈 눈구 |
멍'(그림의 형상)을 바라본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의 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제12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대학살(Holocaust)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
십자가 아래에 있던 백인 대장의 외침,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 | ||||||||||||||||||||
나!'는 복음의 혁명적인 내용, 즉 십자가형에 처해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 ||||||||||||||||||||
요약하고 있다. 예루살렘과 로마의 종교적·정치적 권력자들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 ||||||||||||||||||||
생명의 하느님에 의해 부활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로마 황제에게 고용된 | ||||||||||||||||||||
사람의 이 외침으로 복음은, 로마 황제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하는 정치적 선언과 | ||||||||||||||||||||
배치된다. 십자가에 처형된 이 가련한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이 심지어 | ||||||||||||||||||||
가장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의 삶에 얼마나 불멸의 사랑을 품고 있는지를 계시 | ||||||||||||||||||||
해준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삼는다. 예수와 율법 사이의 | ||||||||||||||||||||
대립은 분명히 너무 극단적이어서, 권력자들은 예수를 제거함으로써 그의 일을 끝내 | ||||||||||||||||||||
려고 했다. 예수는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메시지와 행동은 종 | ||||||||||||||||||||
교적·정치적, 유대적·로마적인 사회의 토대를 흔들어 놓는다. 그림은 성전의 휘장이 | ||||||||||||||||||||
찢기는 모습인데, 마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께서 양쪽 담을 허물고 있는 강한 | ||||||||||||||||||||
인상을 느끼게 한다.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을 제외시키고 그 자녀들을 죽이는 체제 | ||||||||||||||||||||
속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 ||||||||||||||||||||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은 율법을 부순다. 그게 로마의 율법이든, 시장경제의 율 | ||||||||||||||||||||
법이든, 아니면 하느님 자신의 율법, 즉 시나이 산의 율법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왜냐 | ||||||||||||||||||||
하면 '안식일이 인간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 ||||||||||||||||||||
(마르 2,27) 때문이다.
제13처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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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처 무덤에 묻히심
누에고치
'그러고 나서 그는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다' |
때는 안식일 전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율법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을 금하 |
고 있다. 그런 사건의 진행이 어땠는가에 대해 전승은 아마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 |
을 중시했을 것이다. 처형 후 이제 누가 매장을 떠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히 |
해야 했다. 심하게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외에, 행동할 수 있었던 남자 한 명과, |
아마도 안식일이 지난 후 죽은 자를 어떻게 돌볼 수 있을지를 생각해둔 여인들이 분 |
명히 있었을 것이다. 랍비 예수에 대한 성실함, 고통 속에서의 객관적 사고, 그의 죽은 |
몸에 대한 경외심 등을 이 텍스트에서 느낄 수 있다. 그 다음의 일이 모든 인간적인 |
경험을 부수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특히 정밀하게 재현 |
했을 것이다. 마치 무덤 내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은 매장 장면의 그림을 이것 |
말고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두운 공간, 즉 바위 무덤 안으로 인도되어진다. 수건으 |
로 싸매어진 예수가 있다. 그의 상처에서 나온 피가 붕대에 배어있다. 이 사람이 정말 |
로 몇 시간 전에 죽은 그 처형당한 사람이라는 표시이다. 그렇지만 캄캄해야 할 무덤 |
안에서 이 사람의 몸은 빛을 내고 있다. 죽은 자의 머리 위쪽에서는 부활의 신비의 빛 |
이 강렬하게 반짝이고, 조심스러운 표징 속에서 부활의 신비를 볼 수 있다. 신경에서 |
우리에게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는 짧은 신앙고 |
백을 하고 있다. 남녀 제자들의 증언은 부활절 이후의 만남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
그리고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매장과 안식일 다음날 아침 사이에는 신비가 놓여있 |
다. 약한 빛이 앞쪽으로 굴려진 돌 사이를 통해 무덤 안으로 스며든다. 첫 번째 연한 |
밝음은 떠오르는 태양의 전령이다. 이것은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 이상 |
이다.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끝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시작이다.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
새 날의 시작인 것이다. 부활절 아침의 예고는 모든 무덤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고, |
또한 우리를 잠들게 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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