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31일 목요일 일기.
5월은 여왕의 계절이라 하고 꽃의 계절이기도 한다. 4월에 이어서 5월에도 꽃구경도 다니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도 다녔다. 5일 어린이날에는 아내와 함께 딸의 회사인 삼성전자에서 가족초청 축제에 다녀왔다. 딸의 가족은 말레이시아로 여행 중이어서 아내와 내가 가서 어린이에게 주는 선물도 받아오고 점심도 대접받고 왔다. 13일에는 한강 서래섬 유채꽃 축제에, 20일에는 중랑천의 서울장미축제에, 22일에는 교회 등반대회에 참여하여 대전 계족산 황톳길과 계족산성 등산, 27일에는 부천 백만 송이 장미원의 장미 축제에 아내와 함께 다녔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속에 우리도 빠지지 말자고 하면서 다녔다.
나 혼자서도 많이 다녔다. 7일에 청명산-매미산 일주, 9일에 광교호수공원 일주, 19일에 원주 소금산과 출렁다리, 26일에 파주 마장호수 둘레 길과 흔들다리에 다녀왔다. 소금산과 마장호수는 유명관광지가 되어 수많은 인파속에 끼인 여행이었다. 수도권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인지 축제를 하는 곳이나 유명관광지에는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을 많이 목격한 5월이었다. 시골에 가면 사람이 없어서 길을 물어보려고 사람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수도권에는 넘쳐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공평한 지역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생활하기 좋은 조건 때문에 수도권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것 같다. 균형 있는 지역 발전이 아쉬운 우리나라의 형편인 것 같다.
2일과 3일에는 1박 2일로 광주에 다녀왔다. 모교회인 계림교회가 건축을 완공하고 입당예배를 드린 후이기에 완공된 모습을 보고 싶은 것과, 곽애남 권사가 작년 11월에 소천 했을 때, 장례식장에 잠시 들려서 조문을 했고, 장지까지 동행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해남에 있는 그의 묘에 성묘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녀왔다. 이집사가 광주 망월동에 있는 우리 부모의 묘를 자주 찾아다니며 관리를 해주고 있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기도 했다. 해남에 가서 곽권사 묘와 그곳에 간 기회에 외가의 산소에도 들려서 성묘를 하고 왔다. 나주에 있는 이집사의 집에서 1박했고, 왕복 길에 강진의 설록차 차밭과 무위사, 나주 혁신도시에 있는 빛 가람 전망대, 영산강의 승촌보 등지의 관광도 했다. 완공된 계림교회의 모습은 좋았다. 종탑에 여자 설립교인 세 사람을 상징하는 세 개의 종은 너무 감격스러웠다. 세분 중에 한분이 우리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5월의 어버이날을 기해서 딸의 배려로 뷔페식당에 가서 식사도 했고, 미국의 며느리에게서 500달러의 송금도 받았다. 넉넉하지 못한 것 같아 사양했으나 자식의 도리를 조금이나마 하고 싶어 한 것 같아 받았다. 부모를 생각하는 아들딸이 있음에 더 행복하게 해준다. 아파트 경로당에서 웃음치료 강사가 매주 금요일에 오게 되어 참여했고, 영은교회 노인대학과 보건소 노인대학에도 다니면서 유익한 시간들을 갖기도 했다. 오랜만에 안경 유리도 교체했고, 아내의 스마트폰도 딸의 도움으로 새것으로 교체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도 있고, 부부의 날도 있다. 어버이날에 자녀들이 부모들을 대접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우리도 딸 가족의 배려로 고급 뷔페에 가서 비싼 음식을 대접받았다. 뷔페식당에 노인들을 모시고온 젊은이들로 가득한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노인들이 자식들 외의 친족들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닐 가 하는 생각을 내 경우를 보며 느끼게 된다.
8남매인 내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를 써 보려고 한다. 큰 누나부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자녀 5남매 중에 큰조카 성모가 1년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 전화로 안부를 전하고 있고, 그 외의 조카들은 남이나 다름없다. 성모의 전화로 소식을 듣는 정도이다.
작은 누나 부부는 살아계셔서 명절에 내가 찾아가기도 하고 가끔 전화로 소통하고 있다.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한 가운데 계시기에 수원으로 와서 살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분들의 자녀 4남매는 전혀 소통이 없어 남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바로 밑의 동생 정량이는 세상을 떠났고, 제수와 3남매 자녀들은 수원에 이사 와서 가까워져서, 명절 때나 생일날 등에 서로 오가며 지냈으나, 요즈음에는 오가지도 않고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을 받고 있다. 두 아들이 40이 넘은 나이에도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상황이다.
여동생 화자는 간호사로 독일에 가서 살면서,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남매를 두었는데, 지금은 남편 없이 혼자 살고 있는 것 같고, 서너 번 다녀가기도 했지만, 해외동포가 되어 거의 연락도 없이 지낸다. 한국에 대한 미련도 없는 것 같고, 부모나 형제들에 대해서도 무심하게 지낸 동생이다. 중학교 졸업 후, 간호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며 집을 떠났고, 이 후 계속해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떠났기에 집과의 정이 희미한 것 같았다.
여동생 숙이는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남편과 3남매 자녀들을 남겨두고, 1988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남편이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 딸인 지숙이는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지만, 아들 둘은 40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것 같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병든 딸의 간호와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살았다. 조카들 중에 유일하게 지숙이가 명절이면 우리에게 홍삼선물을 보내주고 있다.
다음에 남동생 기형이는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어려서부터 말썽을 많이 피웠는데, 중학교를 4년만에 졸업하고, 택시 기사로 일하며 마음대로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서 지금은 미국에서 형제들 중에 가장 잘살고 있다. 두 번 여자와 이혼 하고, 세 번째 만난 여자가 재미 교포로 대학 졸업 후,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어서 경제적으로도 유복하고, 무엇보다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며 아껴주어서 딸 하나와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근래에는 매년 한국에 와서 좋은 시간들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있다.
막내 동생인 상률이는 아내와 딸 둘과 생활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내와의 불화로 술을 많이 먹다가 간경화로 죽었다. 잘못 만난 여자 때문에 50대에 떠났다. 딸 둘은 결혼할 때 소식을 주어서 결혼식에 참석했지만 결혼 후의 소식은 전혀 없어서 남이나 다름없다. 나와 막내만 대학까지 공부했고, 막내는 농산물 유통공사에 다니면서 활발하게 직장생활도 했는데, 여자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이 동생의 삶을 망친 것 같았다.
여덟 중에 넷이 죽었고, 넷이 살아있지만 둘은 미국과 독일에 살고 있어서 해외동포이고, 서울 작은누나와 내가 가끔 소통하며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거의 소통이 없는 조카들은 모두 거리가 멀고 남이 되어 있는 형편이다. 내 아들도 미국에 살면서 며느리와 아내가 가끔 전화 통화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소통이 없다. 아들이 고3이 되어 기숙사 생활로 집을 떠난 것이 되었고, 이후 서울대학에 들어가고, 미국유학을 가면서 미국생활이 시작되어 가족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 같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것이 소통의 필요가 없어진 것 같다. 2000년도에 미국으로 간 아들은 그동안 3번 한국에 다녀갔고, 1년에 명절과 생일에 서너 번의 전화를 할 뿐이어서 아들 역시 해외동포로 여길 수밖에 없다. 세상이 발달하면서 살기에 바쁘고, 도움 없이도 각자 살아갈 수 있기에 만들어진 개인주의가 친족 간의 소통도 멀리하는 것 같다. 모르겠다. 우리 집안의 특수 상황일 수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