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 느 2:11-20
제 목 : 느헤미야의 성전 재건
일 시 : 90,5,9.(95년 11월 12일 재정리)
장소 : 늘 찬 양 교 회
요사히 전 세계가 라빈 이스라엘 총리의 사망으로 인하여 비통에 빠져있습니다. 중동평화를 위하여 그렇게도 애써왔던 이스라엘 총리가 암살되므로 가져올 팔레스틴 지역의 분쟁과 싸움이 다시금 계속될 것을 전세계가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싯점에서 느헤미야가 이방사람들인 팔레스타인들의 방해와 술책을 이겨내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단 52일 만에 무너진 성곽을 중수하고 성문을 다시 달았을 뿐만 아니라 12년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조국 재건에 이바지 한 느헤미야의 충성과 헌신의 모습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영적자세 입니다.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바벨론 포로 귀환은 모두 3차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제 1차 귀환은 고레스 왕의 귀환 조서 이후에 스룹바벨의 인솔하에 이루어 졌고 (B.C. 458년), 제 2차 귀환은 아닥사스다 통치 6년경에 에스라의 인솔하에 이루어졌으며(B.C 458년),그리고
제 3차 귀환은 아닥사스다 통치 20년에 느헤미야의 인솔하에 이루어졌습니다.(B.C. 444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토 귀환과 정착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특히 팔레스틴 땅 주민들의 방해 공작은 매우 극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정착하게 되면, 자연히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하여, 그들은 필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착을 방해했습니다. 그것은 먼저 성전 건축의 방해 공작으로 나타났습니다. 시간상 제1차 2차 때 일어난 방해공작은 빼고
제3차 포로귀환의 명분과 그 당시 느헤미야가 행하였던 업적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Ⅰ.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 느헤미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위로하심"이란 뜻으로 그는 유다 지파에 속했던 하가랴의 아들로서 페르시아 (바사)왕궁에서 신임을 얻어 아닥사스다 왕의 술 잔을 올리는 술 관원장이라는 고위 직책에 있었던 사람으로 조국 예루살렘에 대하여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주전 445년 12월(기슬르월)에 유다에서 올라온 형제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에 관한 소식을 구체적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너무도 암담하고 비참한 소식이었습니다. 이때는 에스라를 비롯한 1차.2차의 포로귀환이 이루어졌을 당시 였기에 느헤미야로서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백성들이 얼마만큼 성전재건에 잘 사역하고 있는가? 다시말해 성전재건의 사역이 얼마나 진행되었는가?를 확인하고 싶어했는데 오히려 들려온 소식은 기대와는 정반대로 백성들은 흩어졌으며 또 남은 백성들마저 큰 환난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예루살렘 성벽은
훼파되고 성문은 불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나님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문은 느헤미야 1장 5절부터 11절에 잘 나타나 있는대 이를 요약하면 " 이같은 징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임한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한 결과 인줄로 압니다. 그러나 이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의 은혜를 덧입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였는데 여기에는 3가지의 중요한 기도의 영적교훈이 담겨있다. 첫째는 죄의 자복이 있는 기도였습니다.(6-7절) 둘째 : 자기 희생적인 기도였습니다.(4,11절) 세쨰: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린 기도였습니다.(8-10절)
이처럼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기도로 시작합니다. 느헤미야는 황폐되고 고난 받는 자기백성과 고국의 소식을 듣고 인간적인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먼저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금식으로 말입니다.(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지금의 비자금 사건으로 인한 나라안의 소요를 염려하며 모여 기도할 때입니다.) 그 결과 주전 444년에 그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어느날 왕이 느헤미야의 슬픈 안색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며 " 왕이여 ! 만세수를 하옵소서 "한 후 예루살렘의 곤경을 말하면서 그 곳으로의 잠깐의 귀환과 아울러 그 인근 지역의 총독에게 조서를 내려 그곳을 통과하게 해 주시고 또한 건축에 필요한 물질도 후원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아닥사스다왕에게 청원하자 왕은 이에 기꺼이 응답함과 동시에 그가 요청한 것외에도 왕은 먼 길의 여행으로 부터 안전하게 느혜미야가 갖다 올 수 있도록 군대장관과 마병도 함께 공급해 주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만일 느헤미야가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자기의 감정을 따라 행동하였다면 이같은 응답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에스라의 1-2차 포로 귀환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치 못하고 오히려 성이 더욱 훼파되었으며 성문마저도 소화되는등 분쟁과 어려움만 있었기에 아닥사스다왕은 사마리아인들의 요청으로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금지한다는 법령들 내린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였기에 다시금 왕으로 부터 성전재건의 윤허를 얻어 내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넉달 가까이 기도함으로만 오직 주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그 결과 성전재건의 문이 열려진것입니다.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 여러분 ! 이처럼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며,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주 안에서 참 마음으로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 됩니다. 우리 늘찬양교회의 성전건축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이루어 주실것을 믿고 계속해서 뜨겁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지도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회복과 새출발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솔찍한 자기고백 으로부터 시작 되는 것임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나 오늘 또 미래에도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Ⅱ. 느헤미야는 담대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에게 있어 성전중건의 역사가 자기 마음 먹은대로 그렇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많은 않았습니다. 방해자들이 나타나 확신을 뒤 흔들어 놓고 일하던 인부들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사기가 저하 되어가며 일의 능력도 떨어져만 갑니다. 이렇게 되면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당황하기 쉽고 인간적인 생각과 절망감에 빠질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좀더 느헤미야에게 닥쳐왔던 여러가지 시험과 환난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합니다.
느헤미야 4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가 등장하여 성전을 짓는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을 비웃습니다.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고 이들대항자들의 모습은 비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괴롭히는데 이번에는 4장 7절에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공략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이들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까지 연합하여 막대한 힘을 가지고 유대인들의 성전재건을 위협해오고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4장 10절에 있는데로 중건역사를 감당하고 있는 동역자들이 "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며 부정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의 모습은 대 내외적으로 훼방을 받게되어 성벽재건의 사업이 무산될 위기까지 가게 됩니다. 하지만 지도자 느헤미야는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마음을 굳게 세우고 담대한 신앙으로 이 모든 방해자들의 방해공작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이같은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나갔는가? 그 지혜로운 방법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첫째 : 느헤미야는 제일먼저 자신의 어려움의 문제를 하나님앞에 들고 나아갑니다.
"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 여김을 당하나이다."(느 4:4-5)고 고백합니다.
이렇듯 느헤미야는 문제가 있을때마다 즉시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주님께서 맡아 주시고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느헤미야 아름다운 신앙관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느헤미야가 어려움을 당할때 그 자신 스스로가 문제 해결을 해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다가 안되면 하나님앞에 나아가 문제를 아뢰이며 도움을 아뢰인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길때마다 아주 작을 일이라 할지라도 즉각 즉각 하나님께 아룀이므로 문제해결을 해나갔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전중건의 역사를 시작하고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너무도 확신있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담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늘깨어 기도하는 사람들은 항상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둘쨰 : 동역자들을 세워 구체적인 방어책을 간구합니다.
느헤미먀는 하나님께 기도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구체적인 성벽건축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3일 동안 밤에 몰래나가 예루살렘 성을 극비리에 탐색하였습니다. 두번에 걸친 예루살렘 재건사업이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 모습 속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고 생각한 느헤미야는 홀로 성전을 탐색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입수되어진 정보를 중심으로 그 문제점과 해결책을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모으고 자신의 의견도 제시하며숙의한 결과 아주 좋은 방법이 나왔음은 물론 예루살렘과 그 주위 성읍들로 부터 일한만한 충실한 일꾼들이 곧 모여들었고 모여진 이들에게 느헤미야는 구역을 정하고 그곳의 공사 책임자를 세워 체계있게 성전재건의 일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적의 침공에 대비하여 일하는 사람을 둘로 나누어서 일부는 건축을 계속하게 하고 일부는 무기를 들고 성전을 수비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아주 느린 속도이지만 작업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적의 주요 공격은 중단되었고 미미한 적의 습격만이 있었지만 곧 물리쳐 이겼습니다. 이렇게 한결과 공사를 시작한지
단 52일 만에 많은 어려움과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성을 재건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느헤미야가 매사에 일을 진행함에 있어 겸손하게 동역자들을 세워 서로의 의견을 묻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나감으로서 매사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처럼 교회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동역자들의 손발이 구체적으로 맞아야 교회가 부흥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늘찬양교회의 성전건축과 아울러 모든 교회일도 이렇게 온 성도들의 한 마음되어 일을 분담하고 또 자원하며 주의 일을 할때에 교회는 급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세째 : 느헤미야는 지도자로서 결연한 자세로 동역자들을 권면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대 내외적으로 다가오는 시련들을 두려움속에서 대처한 것이 아니라 약해있는 형제들에게 믿음을 심으며 담대히 정면으로 대결한 것입니다.
4장 14절 하반절에보면 " 느헤미야는 성에 칼과 활로 무장한 군사를 배치시키며 저희를 두려워말고 지극히 크고 두려우신 주가 우리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담대하게 싸우라."며 믿음과 용기를 백성들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같이 낙심한 사람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심어주는 활력소가 되어야 합니다. 한 주일 동안 십자군병으로서 세상과 사탄과 육신과 싸워 지친 용사들에게 다시금 격려와 새 용기와 힘을 공급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늘찬양교회가 귀한 믿음의 훈련장이 되어 많은 믿음의 용사가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Ⅲ. 느헤미야는 겸손과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바로전에 느헤미야가 동역자를 세워 함께 일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가 아주 겸손한 신앙인임을 한 눈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뿐만아니라 성벽을 재건한 후 느헤미야는 자신의 주 임무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였으므로 그 당시 제사장겸 학사인 에스라를 세워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도하도록 양보하는 아름다운 미덕속에 겸손한 신앙인의 모습과 자기 분수와 위치를 아는 진솔한 믿음의 사람임을 느낄 수 가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청렴 결백한 모습은 이외에도 성벽재건후 12년간 동안이나 유다 총독으로 앉아 있으면서도 백성의 녹을 먹지 않았으며 또 이식을먹는 귀인과 민장들을 향해 "이식(利息)받기를 그치자"고 호소했습니다.
당시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의 당면 문제는 과중한 세금과 어려운 식량난 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사 왕실에 많은 세금을 받쳐야 했는데 그에 비해 경작 조건이나 환경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기존 관료나 부호들은 가난한 자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돈을 빌려주며 과중한 담보요구와 높은 이율로 배고픈 서민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사회는 빈익빈 부익부 (貧益貧 富益富)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가난한 자들은 밭과 포도원을 빼앗김을 물론 심지어 자녀들까지 노예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성전과 성벽건축의 목적도 중요하지만 물질로 인한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어 이스라엘 공동체가 분열된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이 참으로 바라는 것이므로 어떻게든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고 단합된 모습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 생각끝에 먼저 자신이 이전 총독과는 달리 과중한 세금은 물론 총독의 녹(祿)조차 받지 않고(5:14,18절), 오히려 자신의 사재를 털어 자기에게 딸린 많은 식솔들을 먹여 살렸다.(18절) 그리고 대회를 열어 귀인과 민장들의 잘못됨을 훈계하면서(6-11절) "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니 이식을 받기를 그치라."(10절)고 호소할때에 많은 귀인과 민장들이 느헤미야의 본을 쫓아 순종하며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항상 타인에게 본(本)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말과 사역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법이다. 자신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다름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훈계 하는 지도자라면 아주 뻔뻔한 자이다. 위선자이다. 노태우 그가 보여준 위선과 가식은 많은 국민들을 분노케하고 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예수님의 본을 쫓아 그 길을 거룩하게 간 청렴결백한 지도자 였다.
Ⅳ. 느헤미야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으로 부터 성전재건의 윤허를 받을 때 성전재건의 일이 다 끝나면 다시금 현 위치로 돌아와 일하겠다는 약속(느2:4-6)을 하였기에 느헤미야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12년 동안의 유다 총독의 명예와 이권을 다 버리고 바사의 수산궁으로 돌아가 왕의 술 잔을 올리는 술 관원장의 일을 다시 수행했습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2년 정도 후에 왕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궁에서 술 따르는 관원장으로 썩기에는 너무 그의 재능과 인격이 아까왔던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유다 총독으로서의 일을 계속하도록 지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자기가 잠간 없었던 1-2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대하여 해이해져 있음을 보고 슬퍼하였음은 물론 성벽재건시 자신을 방해하였던 암몬사람 '도비야'를 백성들의 십일조를 저장하는 성전의 한 방에서 살도록 허락한 사실을 알고서는 제사장 '엘리아십'을 꾸짖고 도비야를 그곳에서 끄집어 내었음은 물론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거하던 모압과 암몬인등 모든 이방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습니다.(느13:3). 뿐만아니라 십일조 제도를 확립하여 성직자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10-14절)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의 소출 가운데 십분의 일을 성전에 드려 레위인들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 레위인들은 성전 봉사를 중단하고 생계를 위하여 각자의 고향이나 시골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자연히 성전이 비고, 성전 예배가 소홀해지기 시작하자 도비야같은 방해꾼들이 성전 창고에 방을 만들고 고 거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레위인들을 다시 모아 성전 봉사에 복직시키고 이들의 생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십일조 준수를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무를 다하지 않은 백성들로 인해서 성전제사가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곧 성도가 하나님께 바라기만 하고 성도의 의무를 다할지 않을 때 신앙의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다고 쉽게 거룩한 직무를 포기해버린 레위인의 태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꾼된 자가 궁핍하다고 해서 그 직무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일꾼으로서 부할 때나 빈곤할 때나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바라고 사는 성숙한 성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느헤미야는 이방인들을 추방하고 또 십일조 준수와 레위인들의 복직을 꿰하였음은 물론 안식일날 노동과 상거래를 하지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15-22절) 그 당시 아직까지도 이방인들의 상권(商權)이 유대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을 때 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 가운데는 안식일에 노동하고 또 상거래도 하는 것이 예사로운 관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할 정도로 극악한 죄악이었습니다.(민 15:32-36)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안식일을 지켜 스스로 노동의 속박에서 벗어나며, 또한 일상사의 노동에서 쉼과 안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안식일 준수를 위해 성문을 닫고 수비대를 두어 그러한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이렇게 느헤미야는 십일조의 준수와 안식일의 준수를 강조하며 신앙을 개혁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 시켰습니다. (23-31절) 당시 팔레스틴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는 가진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지역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은 많은 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가운데는 자기들보다 생활 여건이 나은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통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들간의 결혼이 성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땅에 우상이 들어오고 안식일 준수가 깨어지고 이방 방언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호와 유일 신앙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찰나에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같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 시키고 혼인한 이방 여인들을 추방하기 위해 제일 먼저 본보기로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딸과 혼인하여 가문을 번성케하고 사회적 입지를 넓히려 했던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에게 산발랏의 딸과 이혼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28절) 이렇듯 느헤미야는 성전재건의 완성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신앙개혁을 단행하였던 책임있는 지도자 였던것입니다. 우리도 외적인 숫자적 성장보다는
실제 내부의 영적성장을 더 알차게 꾀하는 늘찬양교회와 그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Ⅴ. 결론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교회에는 바른 영적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욱이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으로 온 백성이 낙심하고 있는 이때에 훌륭한 영적지도자로서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느헤미야가 다른 선지자나 지도자처럼 하나님께로 부터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받은 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조국을 사랑하는 그 일념하나로 그 놀라운 일들을 해 냈다는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꼭 능력을 받거나 또는 어떤 계시를 받은 사람들만이 지도자가 되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길 수 있는 영혼 사랑의 마음만 있다면 어누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느헤미야와 같은 신앙적 자세를 가지고 한국 교계와 특히 늘찬양교회 안에 인본주의적이고 형식적이며, 물질적인 요소가 들어오지 않도록 먼저 내 자신을 개혁하여 십일조와 주일 성수를 온전히 지킴은 물론 잡혼과 같은 부정한 모습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도록 날마다 기도로 깨어 뜨겁게 예수를 사랑하며 섬기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