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은 조선 시대에 가장 오랫동안 왕이 사용하신 궁궐이다. 창덕궁을 처음 만든 것은 조선 3대 왕인 태종 때이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이 새로 지었다. 우리나라 전통의 궁궐 건축과, 한국식 정원의
아픈 과거를 가진 궁궐 ‘창덕궁’이라는 이름은 ‘백성을 위해 덕을 쌓는 궁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름과는 달리, 사육신의 참형, 연산군의 난폭한 정치, 인조반정으로 인한 광해군의 축출, 임오군란, 갑신정변, 한일합방 등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사람의 햇빛이 잘 드는 집터에는 나무를 심어서 그늘을 만들고, 햇빛이 덜 드는 곳에는 꽃을 심어 햇빛을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궁궐 정문의 이름은 가운데에 ‘화’라는 글자가 들어가는데, 이것은 왕이 ‘교화’와 ‘덕화’로서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는 3칸만 문이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2칸은 벽으로 막혀있다. 돈화문의 2층에는 종이 있었다. 이곳에서 종을 쳐 알리면 보신각종과 봉화 등을 통해 전국으로 시간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시간을 관리하는 것도 왕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돈화문의 모습과 근위대의 근무 모습>
왕이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헛된 욕심을 모두 다리 아래에 버리고, 맑은 마음으로만 왕님을 만나라’는 뜻이다. 금천교는 서울에 남아 있는 궁궐의 돌다리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북쪽에는 거북이가 있다. 다리 아래 아치 사이에는 ‘공하’라고 하는 용이 새겨져 있다. 모두 나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왕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했던 다리인 금천교> 궁궐에는 ‘정전’이라고 부르는 건물이 2개씩 있다. 첫 번째는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을 만날 때 사용하는 정전이고, 두 번째는 평상시에 왕이 신하들과 정치를 의논하는 정전이이다. 첫 번째의 경우에 사용하는 정전은 나라의 자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건물의 크기도 크고, 웅장한 모습이다. 이것을 보통 ‘법전’이라고 한다. 창덕궁의 법전은 ‘인정전’이다. 인정전의 앞에는 신하들의 벼슬의 등급이 쓰인 ‘품계석’이라는 비석 모양의 돌들이 세워져 있다. 왼쪽의 품계석에는 문관들이, 오른쪽에는 무관들이 벼슬의 품계에 따라 줄을 서서 왕께 인사를 드리거나 업무를 보고하곤 했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두 번째의 정전은 왕이 평상시에 신하들과 정치를 의논하는 곳이다. 이곳을 보통 ‘편전’이라고 한다. 창덕궁의 편전은 ‘선정전’이다. 다른 건물들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 왕이 앉는 의자 뒤에는 해와 달, 그리고 다섯 봉오리의 산이 그려져 있는 병풍이 있다. 이것은 ‘일월오악도’라는 그림이다. ‘일월오악도’에서 해는 왕을, 달은 왕비를 뜻한다. 나라의 모든 신들이 왕님께 복종한다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선정전의 옥좌(왕이 앉는 자리)와 일월오악도> 왕은 ‘월대’라고 부르는 2층의 돌 기단 위의 정전 안에서 신하들을 내려다 보고, 반대로 신하들은 높은 곳에 앉아 계시는 왕님을 우러러 쳐다보아야 한다. 인정전 용마루의 오얏꽃 문양은 원래는 없던 것인데, 광무 제국의 상징으로 고종 황제 때 만들어 붙여 놓은 것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항상 물을 담아 놓았다고 한다. 나무로 된 건물에 불을 지르기 위해 나타난 불귀신이, 드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 도망가라는 뜻으로 설치해 둔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방화수와 비슷한 역할을 한 것 이다. <화재를 막기 위해 설치했다는??? 드므>
‘희정당’은 왕님의 주무시는 곳이다. 왕도 정치를 잊고,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공간이 왕이 주무시는 곳인 침전이다. 원래의 희정당은 창덕궁 화재 때 불타 없어지고, 현재의 희정당은 일제가 경복궁에 있던 ‘강령전’을 해체해 옮겨 세운 것이다. 경복궁의 강령전은 후에 이 희정당을 보고 다시 세운 것이다. <왕의 침전이었던 희정당>
경복궁의 넓은 평지에 있던 ‘강령전’을 좁은 산자락에 있는 창덕궁의 ‘희정당’ 자리로 옮기다 보니, 마당의 넓이에 비해 건물의 크기가 지나치게 크다는 느낌을 준다. ‘대조전’은 왕비가 지내시는 곳이다. 궁궐의 중심에 있다고 해서 ‘중궁전’, 혹은 ‘중전’이라고도 한다. 중전에 사시는 분이라고 해서 왕비를 ‘중전마마’라고 부르는 것이다. 현재의 대조전은 경복궁의 중전인 ‘교태전’을 옮겨 세운 것이다. 왕비가 계시는 곳이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중전(왕비의 처소)이었던 대조전> 대조전 왼쪽에 ‘흥복헌’이라는 작은 건물이 붙어 있다. 큰 건물인 대조전에 가려 그냥 지나치기 쉬운 건물이지만, 바로 이 건물이 1910년에 우리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준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왕비였던 순정효황후 윤씨가 옥새를 숨겼지만 결국은 친일파인 윤덕영 등에게 빼앗겨, 우리나라는 35년간 일본의 식민지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던 흥복헌>
경훈각은 대조전 뒤편에 있는 건물이다. 지금은 1층 건물뿐이지만, 본래는 2층 건물로서 1층이 ‘경훈각’, 2층은 ‘징광루’였다. 2층의 징광루에 오르면 당시 궁궐 밖의 풍경이 잘 보였을 것이다. 바깥세상을 함부로 나갈 수 없었던 왕비는 이곳에 올라 궁궐의 바깥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경훈각>
왕이 타던 가마와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빈청’이란 정승 판서 급의 높은 신하들이 왕님을 만나러 궁궐에 들어왔을 때, 혹은 왕을 만나 뵌 후 자신들끼리 정책을 의논하던 곳이다. 이곳을 차고로 만든 것은 일본 사람들이다. 정조 왕이 화성(수원)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으로 참배를 가다가, 쉴 때 사용하던 시설이라고 한다. 왕 전용의 조립식 휴게실인 셈이다. <빈청이 있었던 장소인 어차고>
희정당의 동편에는 ‘성정각’이 있다. 이곳은 왕세자가 학자들과 책을 공부하고, 정책을 토론하며 수양을 쌓던 곳이었다. 원래의 내의원은 인정전의 서쪽에 있었다. 이곳이 내의원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 때부터였다. 담의 가장 낮은 곳에서 들여다보면 당시의 의사들이 약재를 빻던 돌절구가 눈에 보이다. <세자의 거처였던 성정각, 나중엔 내의원으로 이용되었다>
낙선재는 왕의 장례식 기간 중에 왕비가 지내시는 곳이다. 건물에 단청을 하지 않은 까닭도 경건하게 지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건물에는 애달픈 사연이 많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거처하시던 곳이고,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가 이곳에서 노년을 보내시다 돌아가셨다. 또한 일본의 왕족과 어쩔 수 없는 결혼을 했던 덕혜옹주(옹주는 후궁의 딸이다.)가 시댁과 남편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정신 질환을 얻어 국내로 돌아와서, 이방자 여사의 병간호를 받으며 쓸쓸히 죽어간 곳도 이 낙선재였다. <슬픈 역사를 가진 낙선재>
부용정은 ‘부용지’라는 연못가에 세워진 ‘亞(아)’자형의 정자이다. 부용지는 직사각형의 모양이고, 연못 가운데에 둥그런 섬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전통적인 동양의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부용정은 주변의 경치와 어울려 아름다운 자연미를 보이고 있다.
부용지에는 눈으로만 보아선 특별히 물이 들어오는 곳이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은 바닥에 4개의 샘이 있다. 세종 왕 때, 두 왕자를 시켜 이 곳에서 샘을 찾게 했는데, 왕자들이 4개의 샘을 찾았다고 한다. 숙종 때 두 샘을 수리하고, 그 기록을 비에 새겨 남겨 놓았다고 한다.
부용정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2층의 큰 건물의 이름은 ‘주합루’이다. <부용정과 주합루> 우리 나라 전통 건물에 이름을 붙일 경우, 2층 건물의 1층을 ‘각’, 2층을 ‘루’라고 부르는데, 이 건물의 1층이 바로 왕실의 도서관이었던 ‘규장각’이다. <어수문>
‘물고기와 물의 문’이라는 뜻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왕의 뜻 안에서 열심히 노력을 하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물고기가 높이 뛰어올라 ‘등용문’에 이르듯이 더욱 높이 뛰어 올라 이 문으로 들어오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어수문’은 왕만이 드나드는 문이었고, 신하들은 어수문 옆에 있는 작은 두 개의 문으로 드나들어야 했다. 허리를 굽혀야만 간신히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이다. 왕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것인지, 이 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는지, 그토록
이곳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을 진행하던 곳이었다. 과거 시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영화당 경사면 아래에 있는 창경궁의 ‘춘당대’에서 과거 시험을 보았다. 영화당에 큰 글씨로 과거의 제목을 내걸면, 아래쪽 춘당대에 앉아 있는 과거 응시자들이 각자의 실력을 발휘해 멋진 글을 지었을 것이다. 지금은 담으로 막혀 있고 춘당대도 ‘춘당지’라는 연못으로 변해 있어 그 모습을 상상만 해볼 수 있다. <영화당>
이 곳에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물고기가 등용문을 지나 용이 되는 것처럼, 어수문 위의 주합루와 규장각으로
부용지와 영화당을 지나 길을 따라 가다보면, 조그마한 건물 두 채를 만나게 된다. 바로 ‘기오헌’과 ‘의두각’이다. 이렇게 특이한 건물을 지은 사람은 정조의 손자이며,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이다. <기오헌과 의두각>
세자였던 효명세자에게 정치를 맡기고 자신은 연경당에서 지냈다. 이때부터 시작된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헌종, 철종 시대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선 말기의 혼란한 사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위대했던 왕이었던 할아버지 정조를 무척이나 존경하며 본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오헌과 의두각을 주합루 뒤쪽에 짓고, 이 곳에서 학문을 닦으며 정조 때와 같은 태평성대를 구현하기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 공이 인정되어 뒷날 ‘문조(익종)’로 추존되고,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기오헌을 돌아 나와 연경당으로 가는 입구에는 특이한 돌문이 눈에 뜨인다.
<불로문>
연경당은 순조때 일반 양반들의 생활이 궁금하였던 효명세자의 부탁으로 양반들의 가옥을 본떠 지은 99칸 집이다. 연경당은 전통 한옥의 이상형을 모두 갖춘 집으로 전해진다. <연경당>
능선 아래로 맑은 물이 사시사철 알맞게 흘러 남향한 대문 앞을 지나, 집의 동쪽에 연못을 이루어야 한다. 집이 남향을 하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며, 산세가 둥글면 그 기운이 그 집사람들의 품성을 원만하게 해주고, 대문 앞을 흘러 모인 물의 기운까지 그 집사람들에게 복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연경당을 나와 안내원을 따라 구경하게 되는 마지막 코스가 바로 천연기념물 창덕궁이 세워지기 전에 이 자리에 향교가 있어, 향교 안에 은행나무와 함께 심었던 향나무였다는 설도 있고, 창덕궁이 처음 세워질 때 이 근처에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시던 선원전이라는 건물이 있어, 제사를 올리기 위해 향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창덕궁의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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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규식이의 좌충우돌 문화재 탐사기 원문보기 글쓴이: 재은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