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탄생 70주년… "생일 축하해 이소룡"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대역 맡았던 '당룡' 김태정
'한국인이 대역' 극비로…
촬영하는 8개월 동안 홍콩 호텔서 '감금 생활'
'목표 이뤘으니 됐다'자살 시도했는데…
"'이소룡 분위기 나네' 홍콩서도 대만서도 찍고…
한국에 와서는 정윤희와 미국선 장 클로드 반담과"
1973년 7월 20일 오후, 홍콩 비콘힐에 있는 여배우 베티 팅 페이의 아파트에서 배우 이소룡, 영화사 골든하베스트 사장 레이몬드 쵸우가 영화 '사망유희'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었다.
쵸우가 먼저 저녁 약속 장소로 떠났다. 이소룡이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팅 페이는 근이완제가 포함된 진통제와 아스피린을 건넸다. 약을 먹은 그가 잠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계는 스타를, 영화는 주인공을 잃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미완성인 채로 그와 함께 묻히는 듯했다.
몇년 뒤, 공동제작사인 골든하베스트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이소룡 대역'을 모집했다.
흑·백인까지 세계 각처에서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거듭된 오디션 끝에 최종 선정된 이는 한국에서 온 스물네살 청년, 김태정이었다.
본명보다 예명 당룡(唐龍)으로 더 알려졌지만, 한국 영화계에서는 잊힌 인물이었던 김태정(57).
이소룡 탄생 70주년 행사 참석차 잠시 방한한 그를 만났다.
이소룡에 미치다
―고등학교를 중퇴했더라.
"어머니가 부산에서 손님 100명이 들어와도 표시가 안날 정도로 큰 횟집을 했다.
운동을 좋아했지만, 공부는 싫었다.
부산 동아고 1학년을 다니다 무작정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 아무도 모르게 서울행 그레이하운드에 올라탔다.
서울에 온 첫날, 남산에 갔다가 야바위꾼에게 가진 돈을 모두 털렸다.
그 길로 무교동 고깃집에 들어가 철판을 죽도록 닦았다.
그 다음엔 호떡장사.
그래도 운동은 계속 해야겠기에 레슬링 영웅, 김일 선수의 체육관에 들어가 소림사 무술인 18기를 배웠다."
―이소룡이란 존재를 안 건 언제인가.
"1973년 7월 27일이다.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한 '정무문'을 봤다.
사람이 순수하게 자기 몸으로 저렇게 빠른 동작을 할 수 있다니, 하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당시엔 피아노줄 달고 날아다니는 무협 영화가 태반이었다.
이소룡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날부터 이소룡 영화 개봉 때마다 수도 없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동작 하나하나를 다 외웠다."
―극장 갈 돈이 있었나.
"호떡 팔아선 하숙비 내고 밥을 사먹으면 끝이었다.
무작정 극장에 찾아가 '제가 제2의 이소룡이 되면 꼭 갚을 테니 영화를 보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다들 미친놈이라고 하면서도 영화를 보여줬다."
―당시 이소룡 흉내 낸 사람은 많지 않았나.
"나는 오직 이소룡만 생각했다.
하숙방 벽은 물론 천장에도 이소룡 사진을 붙였다.
18기를 수련하며 몸을 만들고, 이소룡처럼 보이려고 거울 앞에서 이소룡 걸음걸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법,
특유의 씩 웃는 모습을 따라 했다. 철공소에 가서 파이프와 개 줄을 용접해 쌍절곤도 만들었다.
쌍절곤을 돌리다 머리에 혹이 나고 온몸에 멍도 수두룩했다.
하루는 이소룡이 꿈에 나타나 직접 지도해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했나.
"이소룡처럼 머리 기르고, 도복 입고, 이소룡 걸음걸이로 명동을 활보했다.
사람들이 미친놈이라고 수군대고 낄낄대며 웃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카메라가 나를 따라오며 찍고 있는 것이라고 최면을 걸었다."
―'사망유희'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1976년쯤 골든하베스트가 우리나라 신문에 세계 곳곳에서 이소룡 대역을 구한다는 신문 광고를 냈다.
'내가 아니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 프로필 사진이 없어서 사진관을 찾아가 '제2의 이소룡이 되면 꼭 갚겠다'고 통사정했다.
도복 입고 창덕궁에서 사진을 찍었다.
프로필 사진을 홍콩과 미국에 보내고 남은 사진을 국내 영화사에 보냈다.
8개월쯤 지나서 골든하베스트에서 연락이 왔다.
기뻤지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망유희'에 대역이 출연한다는 게 당시에는 극비였다던데.
"사망유희를 찍는 8개월 동안 감금생활을 했다.
1만8000달러의 높은 개런티를 받고, 하얏트 호텔에서 먹고 자며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영화사측에서는 외부 사람을 절대 만나선 안 된다고 단서를 달았다.
촬영은 스튜디오에서 거의 다 이뤄졌고, 스튜디오와 호텔만 오갔다.
생전에 이소룡이 찍은 부분도 볼 수 없었고, 촬영 내용도 당일 아침에야 알았다."
―첫 영화 출연인데 어려움은 없었나.
"영화에선 파괴력 있어 '보이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몰랐다.
NG가 18번이나 난 적도 있었고, 힘 조절을 잘못해서 촬영 중에 이가 두 개나 부러지기도 했다.
이소룡 따라 하기만은 자신 있었는데 호텔방과 화장실에 이소룡 사진을 붙여놓고 처음부터 다시 연습했다."
―영화에선 어떤 모습으로 나왔나.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이나, 어둠 속에 있는 장면 식으로 나왔다.
지금 와서 보면 어설픈 부분이 많지만, 당시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망유희가 극장에서 개봉했을 땐 어땠나.
"홍콩에서 영화를 봤는데 좀 창피했다.
화면에서 나를 본 게 처음이었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사망유희'를 보려고 줄을 길게 섰다는 얘기를 듣고,
그토록 꿈꾸던 제2의 이소룡이 됐다는 생각에 너무 뿌듯했다."
- ▲ 이소룡 때문에 인생이 바뀐 김태정씨. 그의 예명인 당룡마저‘맹룡과강’에서 이소 룡이 연기한 주인공 이름이다. 김씨가 카메라 앞에서 이소룡 특유의 포즈를 취했다. /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이소룡 때문에 미치다
'사망유희'가 흥행에 성공하며 당룡은 홍콩 영화계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영화제의가 몰려왔고,
그는 6개월을 쉬고 1979년부터 '사망탑'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이소룡의 기록 필름을 일부 쓰는, 이소룡 유명세에 편승한 영화였다.
그때 불현듯 공허함이 밀려왔다고 했다.
―어떤 종류의 허무감인가.
"제2의 이소룡이라는 목표를 이루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
촬영장에서 불현듯 허무감이 찾아왔다.
새벽에 호텔방에 혼자 앉아 양주를 마시다 미리 사놓은 수면제 100알을 모두 삼켰다.
일어나보니 병원 침대 위에 호스를 입에 물고 누워 있었다.
병원에서 일주일 입원했다가 촬영장으로 복귀했다."
―돈이나 여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가.
"홍콩에서 최고대접을 받았다.
여자 문제도 아니었다.
판소리를 하는 아버지가 가족보다 예술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어린 시절부터 나도 예술을 하면 절대 가정을 꾸려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18기를 가르쳤던 스승님은 '여자를 화살촉처럼 피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여자는 내 살을 파먹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독신인 것 같다."
―자살 소동 이후엔 문제가 없었나.
"사망탑 촬영 막바지에 한국촬영이 있었다.
또다시 '언제까지 죽은 이소룡에 얽매여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가위로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이발소에 가서 하얗게 삭발을 했다.
액션 배우라 가발을 쓸 수 없어 6개월간 촬영이 중단됐다."
두 번째 영화 '사망탑'도 흥행에 성공했다.
홍콩 쇼브라더스, 일본 도에이 영화사에서도 출연 제의가 왔다.
그는 198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잘나가고 있는데 왜 한국으로 돌아왔나.
"내 나라에서도 작품을 해보고 싶었다.
마침 들어온 작품인 코믹액션 '아가씨 참으세요'의 상대 배우가 톱스타였던 정윤희씨였다.
당시엔 성룡 스타일의 코믹 액션이 붐이었다.
이소룡 대역이 아닌 김태정 자체로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영화계는 어땠나.
"촬영현장에서 내 의견은 깡그리 무시됐다.
촬영 환경도 너무나 열악했고, 그저 빨리 찍기에 급급했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정윤희씨와도 대사 이외엔 말도 섞지 않았다.
서귀포에서 '바닷물이 너무 맑죠? 사람의 마음도 비치면 참 좋겠네'라고 한 게 정윤희씨에게 유일하게 한 말이다."
―또 사고를 쳤다더라.
"한국 영화계에 실망하고 술을 마시다 술자리에서 주먹을 휘둘러 상대방이 전치 18주의 부상을 입었다.
합의금 500만원이 당장 필요해 싸구려 대만 영화 '쌍배'를 찍었다.
그저 이소룡 분위기 나게 한 달 만에 찍었다.
완성된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우연히 리버사이드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홍콩에서 온 오사원 감독을 만났다.
미국에서 액션 영화를 준비 중이라며 출연을 제의했다.
미국 비자 받기가 힘들어, 안성기, 장미희씨 주연의 '깊고 푸른 밤'(감독 배창호) 촬영팀에 들어가 미국땅을 밟았다.
그들이 영화 찍는 동안 나는 장 클로드 반담의 데뷔작인 '특명 어벤져'에 출연했다."
다시 이소룡을 꿈꾼다
―미국에 불법체류했던 건가.
"이소룡이 태어나고 성공한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미국 어딜 가든 차이나타운에 있는 마피아들이 환대를 해줬다.
홍콩에서 알게 된 지인들의 소개로 샌디에이고, 댈러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을 전전했
다. 불법체류를 하다가 88년에 영주권을 받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에 살고 있다.
방탄·불연재료와 낙하산을 만드는 사업을 하며 영화 제작비를 모으고 있다."
―그토록 싫어했다는 공부도 했다던데.
"이소룡도 '맹룡과강'을 제작하고, 감독도 했다
. 더 이상 허수아비가 아닌 직접 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사설 학교에서 1년 2개월 동안 연출을 공부했다.
수업료는 다른 학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벌었다.
시나리오도 3편 정도 써놨다."
―왜 다시 이소룡 얘기를 하는 건가.
"이소룡은 내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그로 인해 당룡이 탄생했고, 그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다. 어쩌면 그를 알게 된 것이 나에겐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젠 운명을 거스르기보단 따르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든다."
―운명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건가.
"이소룡을 늘 따라 했던 것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려고 한다.
20년 전부터 액션 영화를 구상해왔다.
작가 이일목씨와 함께 시나리오를 썼고, 지난해 완성했다.
제목은 사망지로(死亡之路)로 정했다
. 할리우드에서 영어로 촬영할 생각이다.
사망유희, 사망탑에 이은 '사망' 시리즈의 3번째 작품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 목표다.
이 작품 이후 미련 없이 영화계를 뜰 생각이다."
이소룡의 죽음으로 대역을 쓰고, 짜깁기로 완성한 영화 '사망유희'는 이소룡 영화 중 최악의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김태정이란 대역의 '몸'을 빌려 이소룡 유작은 완성됐다.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이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은둔한 채 복수를 감행했듯, 김태정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20여 년을 살았다. 이소룡이라는 존재로부터 한평생 벗어나지 못했지만 행복하다고 말하는 김태정은 다시 태어나도 이소룡의 후계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질긴 인연의 단면이 김태정의 인생에 있었다.
첫댓글 이소룡 멋진 사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