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으며
일송 조 남 승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새해가 밝아왔다.
동양에서는 자고로 신비스러운 용을 귀히 숭상해 왔다. 그래서 궁궐이나 사찰 등의 건축물에 용의 조형물을 조각하여 신성(神聖)함속에 권위와 위엄을 나타냈다. 또한 생활도구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용이 상징하고 있는 신비한 조화성(造化性)과 영묘(靈妙)함을 아름다우면서도 성스럽게 표현하였다.
용은 적룡(赤龍), 황룡(黃龍), 백룡(白龍), 흑룡(黑龍), 청룡(靑龍)으로 오룡(五龍)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청룡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과 행운, 용기와 도전, 벼슬과 명예를 상징한다고 전해져왔다. 올해는 그러한 청룡의 해인 것이다.
주역(周易)의 첫 번째 괘인 중천건괘(重天乾卦)를 보면, 괘의 효사(爻辭)에서 육효(六爻)의 각 효에 대한 뜻을 용에 비유하여 잠룡(潛龍), 현룡(見龍), 비룡(飛龍), 항룡(亢龍)의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여기서 잠룡은 「잠룡 물용(潛龍 勿用)」으로 “잠겨있는 용이니 쓰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는 물속 깊이 들어있는 용은 아직 때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덕을 쌓으며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은 세상에 나와 활동할 만한 역량을 고루 갖추지 못하였으니 조용히 수도(修道)하며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현룡은 「현룡재전(見龍在田)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 하여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이롭다.”라고 하였다. 이는 용이 덕을 다 닦고 물에서 나왔으나 밭이라는 현실사회에 부딪혀 아직 자신의 역량만으론 혼자 나아갈 수 없는바, 자신을 이끌어 줄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는 뜻이다.
아직 젊은 나이에 넓은 세상으로 진출하였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훌륭한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받으며, 덕(德)을 더욱 밝힐 수 있도록 연마하면서 더 많은 경험을 쌓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룡은「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 하여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이롭다.” 라고 하였다. 이는 덕과 기량을 갖추어 승천하기에 이르렀으니, 천하의 일을 함께 도모할 능력 있는 훌륭한 인물들을 만나야 이롭다는 뜻이다.
비룡(飛龍)에 상서로운 채운(彩雲)이 감싸 어울리듯 사람이 최고의 권좌에 오르게 되면, 자연히 그를 따라 뜻있는 인재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다만 권력을 탐하는 아첨의 무리가 끼어드는 것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항룡은 「항룡(亢龍) 유회(有悔)」로 “높은 용이니 뉘우침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해가 만양(晩陽)에 이른 것과 같이 이미 때가 기울고 있음에도 지나치게 높은 곳에 처해 있으므로 후회가 있게 된다는 뜻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무성한 여름이 다하면 숙살지기(肅殺之氣)가 몰려오는 가을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천하를 다스려 온 자라 할지라도 물러날 때에 이르러 권세가 기울게 되면, 수족과 같이 자신을 돕던 인재들의 마음이 하나둘씩 떠나게 되어 움직임이 전과 같지 않으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고 만다.
세상인심이 이러하니 끝까지 더 잘해보고자 욕심을 내봐야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후회만 남게 될 뿐이란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권력 누수의 현상인 임기 말 증후군을 소위 레임덕(Lame duck)에 걸렸다고 말들을 한다.
용을 비유하여 설명한 중천건괘(重天乾卦)의 괘의(卦意)를 수산(秀山) 신성수(申性秀) 박사는 그의 저서 주역통해(周易通解)에서 “천지의 운행이 쉬지 않는 것과 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라(自强不息/자강불식).”라고 풀이하였다.
마찬가지로 본 괘를 풀이한 괘상사(卦象辭)에서도 “천행(天行)이 건(健)하니 군자(君子)로서 자강불식 하나니라.”라고 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만약 해와 달과 지구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자전과 공전의 규칙을 어기고 회전 방향을 바꾼다거나 잠시라도 멈추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천지만물 또한 생성성장과 생화작용이 멈추게 될 것이고, 우주 전체의 질서가 무너짐으로써 모두가 망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래서 하늘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굳세게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 역시 천지운행의 이법(理法)을 본받아 스스로 도(道)와 덕(德)의 달성을 위해 쉼 없이 굳세게 노력해야만 한다.
실로 쉼 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자연의 이법(理法)에 따라 밤과 낮이 바뀌고 사계절의 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도(天道)의 힘찬 음양운행(陰陽運行)을 주역에서는 “건(乾)은 원형이정(元亨利貞)하니라.” 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늘은 태초에 맨 처음으로 시작되어 이루어진 우주의 으뜸이요 근본으로서, 무변광대(無邊廣大)한 공간에 음양의 기운이 가득하기에 형통하고 이로우며 바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늘(乾/건)은 양의 기운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사계절의 으뜸인 봄을 생성시키고(元德)/원덕), 여름이 되면 산천초목이 짙게 푸르러 무성하니 형통하게 되며(亨德/형덕), 음의 기운이 몰려오는 가을이 되면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거두어들이게 되니 이롭게 되고(利德/이덕), 음이 성하여 추운 겨울이 되면 음의 기운이 양의 기운을 품어 안고 간직하여 쉬게 하니 곧고 바르다(貞德/정덕)고 한 것이다.
하늘이 이렇게 사철 변함없이 베풀고 있는 네 가지의 덕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여 하늘의 사덕(四德)이라고 한다. 인간 역시 이러한 하늘의 사덕(四德)을 본받아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하는 인간의 사덕(四德)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올바른 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덕(四德)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정신을 한시도 잃지 않고 지키며,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강불식(自强不息)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강불식이란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몸과 마음을 굳세게 다지며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계속 적인 발전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통하여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는 굳센 정신적인 자세와 그를 위한 실천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스스로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개인적인 능력을 향상시키고자하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덕목과 지혜, 도덕과 윤리적인 가치를 추구하여 내면의 성장을 이루어 공동의 선(善)에 기여하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다.
청룡의 해에 바라는 꿈
희망찬 청룡의 새해를 맞아 저마다 꿈을 가지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새로운 각오와 계획을 안고 힘차게 출발했을 것이다.
올해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는 해이다.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으며 전국적으로 각 지역에서 총선에 출마하고자 하는 정치인이나 정치지망생들이 영예로운 당선을 꿈꾸며 큰 기대에 부풀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 사람들처럼 거창하고 큰 꿈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소박한 소망이 있다. 난 그저 당뇨로 쇠약해진 아내가 더 많이, 아프지 않고 온 가족이 건강하길 바란다. 그리고 일상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으며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올해 들어 작은 손녀는 초등학교 이학년이 되고 큰 손녀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손녀 둘이서 나란히 스쿨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였는데, 작은손녀가 이제 혼자서 학교에 다니게 되어 언니의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질 것만 같다.
또한 큰 손녀는 걸어서 등하교를 할 수 있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어 퍽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등하교 길의 안전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난 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차를 이용하여 학원엘 등 하원 시키고 있다. 아이들 돌봄 문제로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고 있는 세태에서 조금이라도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보람을 느낄 수 있어 아주 즐겁게 지낸다.
더욱이 학원엘 오가며 차내의 좁은 공간에서 손녀들과 정겨운 대화를 할 수 있어 행복하기 그지없다. 손녀들로부터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는 가하면, 해주고 싶은 말들을 전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손녀들과 대화를 하면서 전통적인 밥상머리교육이 학원등하원길 교육으로 전환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올해 중학생이 되는 맏손녀
올해에 맏손녀가 중학생이 된다. 그동안 초등학교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된 것과, 운 좋게 걸어서 통학할 수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을 크게 감사하며 큰 손녀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
얼마 전 맏손녀가 입학하게 될 「영훈국제중학교」에 입학승낙서를 접수하고 돌아오면서 “아휴! 학교공부를 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라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많은 양서(良書)들을 읽으면서 자연과 더불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다져야 할 나이에, 오직 교실과 공부방에서만 책 속에 묻혀 살아야 하는 오늘날의 학생들 처지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생각할수록 학과과정이 만만치 않을 국제중학교에 입학을 지망한 손녀가 기특하고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손녀딸의 각오가 단단하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한편으론 초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환경과 시스템에서 수업이 진행될 것이니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란 걱정 또한 없지 않다.
중학시절은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황금 같은 시기이다. 중학교의 학업성과에 따라 고등학교 교과과정의 수업능력이 좌우될 뿐만 아니라, 결국 대학교까지 연계되는 단계로서 일생의 학업과정전체에 대한 주춧돌을 놓는 중차대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바뀌어가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까지 견뎌내야 하는 어려운 때이기도 하다. 사춘기의 홍역을 겪으면서 마음이 들뜨거나 혼란스러울 수도 있으며, 때론 충동적이고 반항적인 심리가 싹틀 수 있어 자신의 감정관리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사춘기의 중학생활에 슬기롭게 적응하여 학생본분을 지키며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선, 학생본인 스스로 자중자애(自重自愛)의 정신과 적극적인 마인드컨트롤(mind control)의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선생님과 학부모 역시 한시도 방심치 말고 중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지도하고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미래의 주역인 학생을 훌륭한 인재로 키워 인류사회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도록 교육을 제대로 시킨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교육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이면 칸트가 “교육은 인간에게 부과된 최대최난(最大最難)의 과제이다.”라고 하였겠는가?
참으로 “자식을 낳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기르는 것이 어렵고(生子非難 養子難/생자비난 양자난), 자식을 기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養子非難 敎子難/양자비난 교자난). 자식을 기르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음은 부모의 허물이요(養子不敎 父母之過/양자불교 부모지과), 훈도를 엄하게 하지 않음은 스승이 게으른 것이다(訓導不嚴 師傅之惰/훈도불엄 사부지타).”라는 고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를 왜 하는가?
학생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학문적 지식의 가르침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지켜야 할 도리를 비롯한 사회적 예의와 공동체정신 등, 인격형성에 관한 모든 것을 지도받으며 공부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부를 왜 하는가?’라는 것부터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 앎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함이며, 깨달은 만큼 인격적으로 성숙되고, 배움을 실천과 행동에 옮겨 올바르고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함에 있다.
또한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어 지적 수준을 높이고, 창의력과 사고력을 키워 문제해결을 위한 지혜를 넓힘과 함께, 적성에 맞는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여 사회적 역할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함이다. 더 나아가 정의로운 시민정신을 길러 국가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함에 있다고 할 것이다.
율곡선생은 초학자들을 위해 쓴「격몽요결(擊蒙要訣)」이란 책에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을 하지 않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삶을 통하여 인류사회에 기여하는데 있다.
독일의 칸트는 “지식은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며,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발전을 위한 필수요소이다.” 그리고 “지성은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하다.” 라고 하였다.
또 공자는 옳은 것을 보고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며 “견의불위 무용야(見義不爲 無勇也)” 라 하였다.
배움을 통하여 지성과 지혜, 양심과 인격, 올바른 시민정신을 갖추었다면 불의(不義)와 맞서 당당히 싸울 줄 알아야 하고, 옳은 일엔 몸을 던져 그 일을 해내고자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용기야말로 우리의 전통 선비정신인 것이다.
학생의 본분과 기본을 지켜야 한다.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학생이라면, 우선 학생으로서의 본분과 기본을 지켜야 한다. 학생으로서 학생답게 외모와 품행을 단정하게 하고 예의바른 생활이 습관화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선생님을 극진히 존경하고 선생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존중해야 한다. 교육은 배우고자 하는 학생의 자발성이 전제되어야만 교육의 효과가 높아지게 된다. 따라서 스스로 배움에 대한 강한 의지와 의욕을 가지고 수강에 임해야 하며 학업에 집중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중국의 탕왕은 목욕대야에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이란 좌우명을 새겨놓고, “진실로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원하거든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하라.” 라고 하였다.
새롭다는 것은 전과 다르게 향상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향상의 정신과 의지가 강해야 공부에 열정을 쏟을 수 있다. 「오늘보다 나은 새로운 내일!」 현재보다 나은 발전된 미래! 이러한 꿈을 가진 학생만이 열심히 배우고자 하고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학생만이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학생은 학업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미리미리 챙겨 빈틈없이 준비하고 항상 수강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생으로서 불필요한 물건의 소지나, 학업과 관련이 없는 잡념(雜念)에 정신을 빼앗겨 아까운 시간이 소비되게 해선 절대로 안 된다.
인터넷게임과 같은 잡기와 가까이하며 노는 재미에 빠지게 되면 마음을 돌려 잡기가 쉽지 않으므로 절대로 한눈을 팔아 선 아니 된다.
이러한 것들이 학생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이자 기본인 것이다. 기본(基本)은 다른 말로 근본(根本)이며, 근본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의 뿌리인 것이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다는 근심이엽무(根深而葉茂)란 말처럼 근본이 튼튼하고 기본이 바로서야 한다.
유학의 기본서인 대학(大學)에 “기본난이(其本亂而)하면 말치자부의(末治者否矣)” 라는 말이 있다. 그 근본이 어지러워지고서 말단이 다스려지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학생이 학생으로서의 본분과 기본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흐트러지게 되면, 공부 또한 제대로 할 수 없게 되고 만다는 진리를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공의 비결은 정성과 근면이다.
무슨 일이든 성공을 위해선 마음의 중심을 잡고 진심을 다하여 부지런히 해야 한다. 공부 역시 대충대충 허투루 해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열정과 정성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성공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나태한 나머지 빈둥빈둥 노는 데에만 빠져들지 말고 근면한 자세로 쉼 없이 꾸준히 학업에 정진해야 한다.
정성(精誠)이란 거짓이 없이 참된 마음으로 온갖 성의를 다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誠)자는 정성, 공경, 진실, 미쁘다, 살피다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성(誠)에 대하여 중용에서는 “성(誠)은 하늘의 도(道)이고(誠者天之道也/성자천지도야), 성(誠)스러워지려고 함은 사람의 도리이다.(誠之者人之道也/성지자인지도야)” 라고 하였다.
또 진실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끝이니(誠者物之終始/성자물지종시), 지극한 정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不誠無物/불성무물).”
그러므로 “군자는 정성을 귀히 여긴다(君子誠之爲貴/군자성지귀).” 라고 하였다. 나아가 “정성이란 인간 스스로 자기를 이룰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밖의 모든 것을 이루어 줌으로써 구현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중용에서 성(誠)에 대하여 말한 글들이야말로 논리 정연한 해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학생이 어찌 학업에 정성을 쏟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성을 다하여 자신의 성공을 이룸은 자신만의 성장이 아니라, 주변과 사회의 모든 것에 발전적이고 선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니 성공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공부한다는 것은 개인을 뛰어넘어 국가 사회적으로 아주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평생 배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알고자 하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만물교아(萬物敎我)란 말처럼 살면서 만사만물(萬事萬物)에서 모두 배움을 얻을 수 있다. 곧 인생은 배우는 것이요 공부하는 것이다.
나의 서재엔 공맹(孔孟)이 말한「학불염 교불권(學不厭 敎不倦)」이란 글이 걸려있다. 학불염(學不厭)이란, 배우고 공부를, 함에 있어 제대로 숙지하지도 못했으면서「이만하면 되었다」는 식으로 쉽게 책장을 덮어버리면, 금세 잊어버리게 되어 쉽게 생각했던 공부가 오히려 싫증을 느끼게 되고 귀찮게 여기게 되니 이를 경계하라는 뜻이 담겨있는 글이다.
교불권(敎不倦)역시 남을 가르치는 것을 고달프게 생각하거나 싫증을 느끼며 게을리하지 말라는 뜻이다.
배움과 가르침에 있어 학생이나 스승이나 모두 귀찮게 여기고 고달프게 생각하여 싫증을 느끼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절대금물이다.
예기(禮記)에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제일 먼저 하라(敎學爲先/교학위선).”라는 내용이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수신(修身)을 하는 일이니, 결국 치국(治國)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남송대(南宋代)의 유학자인 주희(朱熹)는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란 말을 하였다. 한결같이 늘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부지런하면 어려운 일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근자필성(勤者必成)이란 말이 있듯이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성공을 하게 된다는 뜻까지 담겨있는 글이다.
공부에 싫증을 느끼지 않으려면 격물치지(格物致知)해야
학문을 배우고자 함은 사물의 이치를 깨우쳐 모든 일의 옳고 그름과 바르고 사악함(是非正邪)/시비정사)을 분별할 줄 알고, 그 앎의 정도를 넓고 깊게 하여 현명하고 성숙된 삶을 살아가기 위함이다.
또 배움은 앎을 이루어 그 아는 것을 바르게 행동으로 옮겨 가치 있게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양명은 “아는 것은 행동의 시초요, 행동하는 것은 아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기가 아는 것을 올바르게 행동에 옮기려면 무엇이든 확실히 알아야 한다.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한 채 앞으로 진도만 계속 나아가게 되면 자연히 싫증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또 이러한 싫증이 계속 쌓이게 되면 급기야 포기하기에 이르게 되고 만다.
무엇이든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앎이 어설프면 행동 또한 어설프게 되고 만다. 그래서 대학(大學)의 기본정신인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을 보면, 삼강령과 팔조목을 모두 이루기 위해선 우선 격물(格物)과 치지(致知)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격물(格物)은 사(事)와 물(物)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窮究)하여 궁극에 이르도록 확실히 아는 것이다. 또한 치지(致知)는 격물에 의해 알게 된 자신의 지식이 지극함에 이른 것이다.
학문 역시 조금이라도 이해가 덜되어 확실히 알지 못할 땐, 끝까지 파고들어 선생님에게 몇 번이고 질문하고 또 질문하여 완전히 이해하고 알게 되어 그 앎이 지극함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공부가 맛이 나고 즐겁게 되어 싫증이 없게 되며, 제때에 진도를 나아갈 수 있고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수업 당시엔 잘 알아들었던 것도 복습하여 완전히 자기 것으로 여물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계속 배우게 되면 먼저 배운 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히 잊어버리게 되고 만다.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집대성해 놓은 논어의 맨 처음 문장에서 공자는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그렇다. 배움은 바로바로 제때에 복습을 하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알아서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즉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이루었을 때만이 공자처럼 싫증이 없이 기쁘게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은 자강불식(自强不息)해야 한다.
영국의 경험론철학의 시조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 라고 하였다. 다양하고 폭넓은 지식이 풍부한 소유자는 그가 걸어가는 길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자신의 지식과 지혜의 힘으로 당당하고 힘차게 헤쳐 나갈 수 있게 된다.
그와 반대로 매사에 아는 것이 부족한 사람은 그의 인생길이 어둡고 캄캄한 숲속을 걷는 것과 같아 살아가는데, 많은 불편이 뒤따르게 될 수밖에 없다.
지식과 살아가는 힘은 정비례한다. 지식이 적으면 살아갈 힘 또한 적게 되고, 지식이 많으면 살아갈 힘 역시 많아지게 된다. 아예 아는 것 하나 없이 무식하기 이를 데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 힘이 없으니, 삶이 무력해진 나머지 가슴에 희망과 꿈을 품어보지도 못하고 인생이 허무하게 되고 만다.
다시 말하건대 배우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아 한마디로 무재무능(無才無能)한 사람은 이 사회에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됨으로써 인생의 방랑자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큰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설득력일 것이다. 설득력은 화술(話術)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말은 그냥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을 잘하려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분야에 대하여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세상만사 모두가 다 때가 있다. 학생 시절은 일생동안 살아가는데, 필요한 올바른 정신과 지혜의 양식을 준비하는 아주 중요한 때이다. 또 마음에서 단 한 순간도 떠나선 안 될 이성과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인격을 갖추기 위한 시기이니 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가!
이 중요한 학창 시절의 한때를 헛되이 보내고 나면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시간과 때는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온 순간 바로 미래를 향해 속절없이 흘러 과거로 되돌아가고 만다.
지금, 이 시간 이때, 바로 현재를 헛되이 놓쳐버리고 나면 황금보다 더 소중한 이때의 이 시간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
공부할 때를 맞이한 학생들에게 당부하노니, 그 좋은 때를 놓치지 말고 촌음을 아껴 학업에 전념해 주길 바란다.
오랜 시간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심신이 지치게 될 수 있다. 그럴 땐 스트레칭도 하고 간식과 물도 마시면서 잠깐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자주 쉬다 보면 맥이 풀리게 되어 공부의 맛을 잃어버리게 되고 싫증이 찾아들게 된다. 이리되면 나태해지거나 습관적으로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며 해찰하는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지게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는 등산객이 산을 오르는 도중에 땀이 식을 정도로 너무 오래 쉬다 보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맥이 풀려 다시 올라갈 마음이 사라지게 되어 등산을 포기하기에 이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공부를 하면서 너무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힘이 들다 못해 의욕이 상실될 수도 있다. 이럴 땐 쉽게 포기하지 말고 “너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라고 말한 칸트의 말과, 로마의 시인이었던 버질(Virgil)이 말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They can because they think they can).”라는 말을 떠올리며 절대로 자신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
맹자 또한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면 되고, 할 수 있다!」라는 불굴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여 해내야만 한다.
이 나라를 짊어질 보배로운 학생들이여! 학문을 높이고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선, 스스로 쉬지 않고 굳세게 힘써 노력하는 소위 자강불식(自强不息)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정진(精進)해나가길 당부하는 바이다.
지식은 올바로 활용될 때 가치가 있다.
인도의 교육철학자 케리여사는 “현대인들이 저지르기 쉬운 세 가지의 정신적 죄악이 있다. 첫째,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이요. 둘째,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며. 셋째,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옳은 지적이고 하고 싶은 말이다. 모르면 솔직히 모른다고 말하면서 배워야 한다.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모르면서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삶을 사는 것이다. 모르면 알 때까지 배우고 익혀야 한다.
또 먼저 알고 먼저 깨달은 선지선각자(先知先覺者)는 아직 깨우치지 못한 사람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감을 가지고 가르쳐 주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외면하고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정신적 죄악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피하지 말고 성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지적(知的)활동들을 통하여 공동의 선(善)이 이루어질 때 실로 배움과 지식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극진한 앎을 이루어 지식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지식이 잘못 쓰여 진다면 그것은 차라리 무지(無知)한 것만도 못하다. 만약 모든 전문 지식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지식에 의한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만의 이득이나 취하며 타인과 사회국가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안타깝게도 그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우리사회에 너무나,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국가사회에 가장 크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유일무이한 생명과 신체의 안전을 좌우하는 의사의 부도덕한 의료행위와, 세상에서 정의를 제일 잘 지켜야 할 법관의 공정하지 못한 판결행위일 것이다. 많은 국민들의 보편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편향적 재판진행과 불공정한 판결을 한다면 정의의 가치가 어찌되겠는가?
우리나라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양심이란, 법문(法文) 그대로 헌법과 법률에 의해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양심이지, 법관 개개인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신념의 양심은 아닐 것이다.
그러함에도 일부의 법관들이‘양심’이란 단어를 방패삼아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판결을 내리는가 하면, 객관적으로 그럴만한 사유도 없이 판결을 과도하게 지연시키는 등,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어 법관의 신뢰를 땅에 떨어뜨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애써 습득한 지식의 앎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나쁜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면, 그러한 앎은 곧 그릇되고 잘못된 앎으로서, 교활하고 간교하게 남을 속이는 앎이 되고 사악한 앎이 되며, 사람이나 해치는 간악하고 간사한 앎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단순한 앎이 아니라 맑고 밝게 알아서 어질고 선량한 정의로운 지식인이 되어야한다.
바르게 알고 바른 깨달음으로 정지정각(正知正覺)을 하여, 바른 마음을 가지고 인생의 바른길을 올바르게 걸어가는 정심, 정도, 정행(正心 正道 正行)을 하는 양심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희망찬 청룡의 해에 국운이 활짝 열리길
대망의 갑진년 청룡의 해에 우리나라의 국운이 활짝 열려 모든 분야에서 크게 발전하고, 온 국민이 편안하고 행복한 축복의 한 해가 되길 서원하고 기대한다.
이러한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모두가 올곧은 선진 시민정신과 근면 성실한 자세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책임성 있게 확실히 해나가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학생의 훈육에 정성을 다하고 학생은 학업에 열정을 쏟으며, 기업인은 경영활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종업원은 성실한 자세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정치인과 공직자는 정직하고 청렴 성실한 자세로 오직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국민들 역시, 튼튼한 국방력과 철저한 안보정신이 확립되지 않고선 국가와 국민의 안전보장은 불가능한 것이며, 법의 존재가치가 무너지고 준법정신이 무시된 채 국민의 인권과 자유의 보장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받아놓은 날은 빠르게 닥쳐온다고 하였든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국회는 국민의 대의 기관이며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대표답게 국민과 국가의 이익과 번영을 위한 입법 활동에 성실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질 못하다는데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정치행태의 원초적 책임이 그들을 뽑은 국민들에게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따라서 국민들이 투표를 함에 있어 각 후보들에 대한 그들의 이력과 행적, 정직성과 청렴, 인격과 능력, 가치관과 국가관, 성실성과 실천력, 정의감과 준법정신 등을 다각적으로 검증하고 판단하여 가장 훌륭한 후보에게 투표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올해의 총선은 그러한 원론적인 기준도 중요하겠지만, 여야 어느 당이 다수의 의원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국가 운영의 향방과 국가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정치적 판단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모쪼록 모든, 유권자들이 위대한 대한민국의 굳건한 수호와 번영을 위해, 원론적 기준의 적정성 여부와 정치적 판단을 함에 있어, 어떻게 해야 국가적으로 가장 옳을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냉철하고 올바르게 결정하여, 양심적인 투표가 이루어지길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또 혼기에 이른 청춘남녀들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적기에 결혼을 하고, 상서로운 청룡의 기운을 듬뿍 받아 튼실한 아이들을 모두 모두 출산하여 웃음과 행복의 꽃이 활짝 피는 甲辰年의 값진 한 해가 되길 바라마지않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