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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수//사진//약력//대표작품
◉약력
*출생(학력)/경남 합천 출생(1950), 진주고등학교 졸업(1970)
*등단/『한국수필』추천 등단(1991)
*저서/『아내의 앞치마』(1991),『순결보다 아름다운 것』(1992),『물매화』(2006)
*문단활동/마산문인협회 회원, 한국아파트신문에 고정란 ‘윤용수의 에세이’ 게재(1996년부터-)
*기타(마산과의 인연 외)/결혼(1971)과 동시 마산에 정착
*E-mail/<yongsoo9709@hanmail.net>
*주소/(631-200)마산시 대외동 1번지 배진아파트303호
*전화·휴대폰/055-242-9709, 010-2587-9709
♣대표작 5편 :
윤용수/아내의 앞치마 외 5
아내의 앞치마
나는 앞치마를 좋아한다.
시집온 색시가 첫날 아침에 두르고 나온 봉황을 수놓은 앞치마도 좋고, 나락 이삭을 주워 담는 어머니의 광목 앞치마도 좋다.
고기 상자를 나르는 어부의 비린내 나는 앞치마도 좋고, 가사 실습을 하는 여고생의 하얀 앞치마도 좋다. 삼거리 입구에 호떡 굽는 아줌마의 꿀물 묻은 앞치마도 좋고, 포장마차를 하는 곰보 아저씨의 국방색 앞치마도 좋다.
앞치마를 두른다는 건 뭔가를 하기 위한 출발이다. 앞치마를 두른다는 건 희망찬 겸허의 시발이요, 어둠을 밀쳐내는 새벽의 호루라기다.
앞치마를 질끈 허리에 동여매고선 엉뚱한 생각을 할 수 없다.
시작과 끝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르며 앞과 뒤가 다른 변덕스런 세상에도 앞치마는 임산부의 순수처럼 밝은 미소만 고집한다.
세상이 다 변해도 어머니의 품안 온기는 변하지 않는다. 세상이 다 변해도 앞치마 또한 온기를 변하게 할 수 없다.
생명이 잉태한 처음 고향이 깊은 사랑에서였다면, 삶의 헤어진 옷자락을 꿰매는 오늘의 고향은 앞치마가 아니던가. 절망과 가난의 수액이 몸뚱이를 휘감아도 강기슭을 기어오르는 십자가의 몸부림처럼 낮은 자리인 정강이에서 펄럭이는 앞치마는 정녕 우리의 고향이다.
나는 앞치마를 사랑한다.
그 중에서도 아내의 청보라색 앞치마를 사랑한다.
시린 가슴을 더욱 깊이 갈아엎고 태양보다 뜨거운 해바라기 꽃을 피워내는 텃밭이 아내의 앞치마다. 서러운 시간들을 삭이고 삶이란 거창한 이름 아래 쩔렁거리는 동전 몇 닢이, 순결한 씨앗으로 싹이 돋아 정갈한 잎사귀를 피워낸다. 빈 그릇에 담겨지는 동전의 낟알들이 모이고 모여 계단을 오르는 아파트도 장만하고 보통예금 통장에 아라비아 숫자를 늘어가게 만든다.
길다란 좌판 하나에 연탄화덕 네 개 놓고 오뎅, 튀김, 순대, 호떡을 파는 반월시장의 골목지기가 나의 아내다. 그렇다고 얼굴에 수심이 있는 것도 아니요, 무능한 남편 원망할 줄도 모른다. 책을 좋아한다고 정기구독도 주문하며 눈이 나빠질까봐 형광등도 자주 갈아준다.
가난은 나의 영혼을 맑게 해주며 아내의 앞치마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깨우쳐주는 불쏘시개다. 고향 들녘처럼 거짓을 모르는 아내의 앞치마, 고향 골목길의 빈 달구지처럼 가식도 위선도 모르는 아내의 앞치마는 하나에서 하나를 보태면 둘 밖에 모른다.
너무 진실하여 슬프고 너무 정의로워 고독한 앞치마, 그 앞치마를 나는 제일 사랑한다. 물 묻은 앞치마가 뻣뻣해오는 엄동이 와도 황토 언덕을 오르는 고구마 줄기처럼 가슴은 뛰기만 한다. 기립하는 씨앗들을 위해 온종일 파종을 하는 앞치마, 아직은 자정이 멀었다고 흩어지려는 교회의 종소리를 모으는 앞치마, 삼베 올에 발목을 적시는 열이레 밤에도 옹이에 심지를 돋우는 아내의 앞치마.
나는 아내의 앞치마 냄새를 사랑한다.
그건 튀김 냄새도 아니요, 순대냄새도 아니다. 오뎅 냄새도 아니요, 호떡 냄새만도 아니다. 뒤벼리 응달을 기어오르는 이끼 냄새 같은 것이요, 어느 포구의 발동선에 감기는 해초 냄새 같은 것이다. 통깨 뿌리고 참기름 넣은 잉어회의 초장 냄새는 분명 아니다. 경전선에 시동을 거는 순환열차의 엔진 냄새 같은 것이요, 아기가 욕심 없이 빠는 엄마의 젖꼭지 냄새 같은 것이다.
막노동판에 나간 장인어른이 저녁에 양말을 벗을 때의 냄새 같은 것이요, 고향 찾아 태평양을 가로질러 오는 연어의 아가미 냄새 같은 것이다.
코로써 맡는 냄새가 아니라 가슴으로 맡아야 할 냄새이기에 아내의 앞치마 냄새를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상추쌈의 된장 냄새요, 순대의 막장 냄새지만 그건 어머니의 냄새요, 고향의 냄새요, 태극기를 펄럭이게 하는 무색의 바람 냄새를 얼싸안고 있다.
눈물보다는 미소를 창출하기에 바쁜 장삼자락의 향기 같은 것이기에, 골 깊은 밤이 와도 정녕 외롭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또 아내의 앞치마 색깔을 좋아한다.
어느 유명한 화가가 있어 저 앞치마의 색깔을 창출해 낼 수 있으랴. 천년 묵은 바위 밑의 물 때 색깔 같기도 하고 신라시대의 재실지붕 골짜기에 돋아난 초목의 색깔 같기도 하다.
때로는 파도에 멍이 든 조약돌의 색깔이요, 소나기를 몰고 오는 구름의 색깔이다. 어떨 땐 갓 찍어낸 연탄의 색깔이요, 태풍이 지나간 바다의 색깔이다.
그건 삶의 색깔이요, 터널을 빠져나가는 희망의 색깔이요, 살아갈 날들에 대한 준비의 색깔이다.
나는 아내의 앞치마 색깔을 사랑한다.
처음으로 대륙을 발견한 백인 선교사의 꿈에 부푼 흰 돛단배의 색깔이 저런 것일까. 아니면 막다른 골목을 돌아 깊은 원시림에서 자란 풀꽃의 색깔이 저런 것일까. 모두가 소라껍질보다 더 단단하게 마음을 닫지만, 아내의 앞치마는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가 드나들 정도로 열려 있다. 색깔이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아 그만큼 정이 더 가는지도 모른다. 일찍 뜬 별 하나를 좌판에다 묶어놓고 손이 시려 가슴으로 얘길 하는 난전이지만 청보라빛 앞치마가 있어 신이 난다.
덤 하나를 얹어놓고 떨이를 외치는 음색은 창공으로 흩어지지만, 앞치마 속을 파고드는 온기가 있어 겨울밤도 짧기만 하다.
돌멩이 밑의 가늘고 노란 싹이 한 그루의 자작나무를 꿈꾸는 것처럼 순수한 외가닥 색깔의 그 앞치마를 사랑한다.
나는 또 아내의 앞치마에서 나오는 소리가 좋다.
그건 노동의 소리요, 대가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무릎에 걷어차이는 동전의 소리는 하나에서 하나를 보태면 셋이 된다는 시너지효과는 탐하지 않는다.
5백 원 내고 3백 원어치 사가면 2백 원 거스름돈 내어주는 가감의 원리밖엔 모르는 앞치마다.
계곡물의 처음이 시작되는 소리요, 엄동에 봄을 준비하는 새싹들의 소리다.
깊은 산골 대웅전에서 울려나오는 목탁의 소리요, 시골 예배당에서 울려나오는 찬송가 소리다.
분수를 알고 능력을 아는 동전의 소리가 꿈틀대는 아내의 앞치마를 사랑한다. 색깔과 냄새와 소리가 하모니를 이룬 아내의 앞치마는 황금 들녘을 꿈꾸는 밑거름의 합창이다.
나는 출근하기 전에 시장을 봐다 준다. 새벽의 어시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제각기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들이 삶의 구심점 같아 예사롭게 보이질 않는다. 인간이 떠드는 최고의 지식보다도 허리에 질끈 동여맨 저 앞치마들이 얼마나 지혜로운 삶의 정수리인가.
먼동이 트고 해가 솟기 전에 팔아야만 단속반의 호루라기를 면할 수 있다.
한눈을 팔고 다른 마음을 먹을 시간이 없다. 앞치마에 쏙 들어가는 애호박만한 저녁의 행복을 위해 시린 손이 굳어지는 줄도 모른다.
먹물 빛 앞치마에 진솔의 씨앗이 움트는 그 새벽에 나는 삶의 용기를 배운다. 바다에 던지는 어부의 그물 같은 앞치마에서 나만의 지혜와 철학도 배운다. 나는 아내의 앞치마를 볼 때마다 퍼내어도 줄지 않는 한 개의 옹달샘이요, 삶의 마디에 묻은 얼룩을 지워주는 표백제라 생각한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풀 묘책은 없다 해도 마음과 마음이 모여 일궈내는 한 개의 아름다운 신용장이 있어 이 겨울도 춥지만은 않으리라.
그 누군들 저마다의 앞치마를 차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오.
최일선에서 나보다 한발 앞장서는 앞치마는 자랑하지 않는 노동이요, 포기하지 않는 도약이다.
나도 꿈을 먹는 청도라지 빛 앞치마를 하나 갖고 싶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내의 앞치마와 같은 걸 하나 갖고 싶다.
그건 초지일관과 전력투구와 일편단심이 들어있는 앞치마이기 때문이다.
그건 희망과 꿈과 사랑과 내일이 들어있는 앞치마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치마를 좋아한다.
간이역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고속버스를 이용하자는 아내를 설득시켜 완행열차를 타기로 했다.
결혼 당시만 해도 이곳 마산에는 역이 세 군데나 있었다. 신마산역, 북마산역, 구마산 역으로 분류되어 한밤중이라도 기적소리를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3역이 통합되어 외곽으로 옮겨간 후 열차에 대한 기억은 자연히 멀어져 갔다. 결혼을 하고서 군대 간다고 머리 빡빡 깎은 채 손을 흔들던 때가 엊그제인데 벌써 내가 불혹을 넘어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의 간이역도 엔간히 흘러갔나 보다.
간이역을 그대로 질주하는 급행열차는 왠지 정이 안 간다. 하기야 지금은 빨라야 되고 고급이어야 하니 간이역을 일일이 들를 겨를이 없을 게다. 아이를 업고 보퉁이를 머리에 인 어머니, 망태기를 어깨에 걸친 아버지, 생머리 처녀와 쑥대머리 총각이 있는 간이역은 소박한 삶의 샘터이다.
만나는 즐거움이 있고 헤어지는 아쉬움이 있는 곳이 간이역이다. 떠나야 하고 보내야 하는 흰 손수건이 있는 곳이지만 슬픔은 때때로 더 큰 기쁨을 맞이하기 위한 자양분이 아니던가. 늙으신 역장님의 미소가 이정표 그림자에 물들면 간이역은 한 폭의 담수화가 된다. 선산을 지키는 한 그루의 등 굽은 늙은 소나무처럼 끈끈한 인정이 배어있고 포근한 사랑이 담겨있어 질펀한 여유가 묻어나는 곳이 간이역이다. 혹시나 해서 허겁지겁 달려가면 통학 열차는 어김없이 연착을 해 나의 지각을 모면케 해주었다.
나의 간이역이 경전선 철로 가에 붙은 문산역 뿐이랴. 이불 보따리 하나 들고 부산으로 대구로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돌아다닌 것도 철로 없는 나의 간이역이었다.
한 해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올해는’ 하고 다짐을 할 수 있는 건 간이역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부지런하고 겸허하게 산다 할지라도 완성이란 건 어려운 일 아닌가.
나를 돌아보게 할 수 있고 앞으로의 행보에 충전을 가할 수 있어 간이역은 더없이 좋다. 경오년이 얼마 남지를 않았다. 산도 들판도 내년을 준비하느라 바쁜 모양이다. 지력을 높이고 자양분을 더하기 위해 겨울 햇살을 듬뿍 받아야 하리라. 열차는 간이역이 있어 외롭지 않다. 간이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어 신이 날게다. 아픈 흔적을 숨기고 입 빼문 동백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묵은 바위에서 새로 태어난 햇살보다 더 싱그러운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그냥 빠르게 지나가면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간이역은 시골 사람들의 몫이요, 가난한 사람들의 차지이다. 화려한 불빛도 없는, 요란한 소리도 없는 곳이지만 유자 빛 향기가 배어있고 건강한 땀 냄새가 있는 곳이다.
황토색 띤 간이역의 벤치는 구약성서 첫 장처럼 언제나 펼쳐져 있고, 기름때 색깔을 띤 간이역의 개찰구는 싱싱한 삶의 지렛대이다.
갓 뽑은 푸성귀를 손에 들고 머리엔 콩자루를 이고 등에는 아기를 업은 새댁이 반성역에서 올라탄다.
친정나들이란다. 아무리 안 가져 가려해도 역에까지 갖다 주는 바람에 가져가는 것이란다. 이 빠진 할머니의 수다가 떠들썩하다. ‘겉으로는 그래싸도 친정에 오면 뭐 가져갈 게 없나 살피는 게 딸자식이더라고’ 새댁의 얼굴이 빨개진다. 다 엎어봐야 돈으로 값을 매긴다면 얼마나 될까. 어머니의 주름진 인정을 외면치 못해 아이 업은 몸으로 힘에 부치는 걸 받았을 텐데------
이러한 것이기에 간이역은 맥을 다한 폐광이 아니라 용틀임하는 꿈이 숨겨진 보물섬이다. 나의 삶을 다짐해 보고 추슬러 보고 반성해보는 사랑의 버팀목이 간이역이다.
열차가 문산을 지난다. 꿈 많던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대통령도 꿈꾸고 장군도 꿈꾸고 박사가 되었다가 시인도 되었다가 한 곳이다.
진주에서 개천예술제가 열리는 날이면 도둑 기차도 많이 탔었지. 열차가 개양을 향해 고갯길을 오른다. 옛날에는 열차에 내려 뛰어가기도 했던 곳이다.
언제나 열차보다 내가 더 빨랐었다. 문득 열차 안이 허전하여 생각해보니 떡 파는 장수가 안 보인다. 비좁은 통로로 떡함지를 이고 다니시며 아들, 딸 공부시킨다는 늙으신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은 보이질 않는다. 단속하는 차장이 나타나면 부랴부랴 다음 칸으로 몸을 숨기곤 했었는데. 이렇게 완행열차와 간이역은 물기 촉촉한 애환과 정들이 많다.
역사(驛舍)를 뒤덮고 있던 담쟁이 넝쿨보다 질긴 우리의 텃밭이었다. 때로는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어 썰렁하지만, 그 넉넉하고 묵직한 색상은 우리의 내일을 받쳐주는 고임돌이 아니던가. 영원한 한 그루의 상록수요, 희망을 일으키는 삶의 내재율이다. 어머니의 화장기 없는 얼굴처럼 수수하고 호남댁내 머슴처럼 수더분하던 간이역은 시골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었다. 사돈끼리도 만나고 친구끼리도 만나고 연인들의 곁눈질도 만나는 곳이다. 분위기가 없어 더 정직해질 수밖에 없고 더러 낼 게 없어 더 진실해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아름다운 구슬 하나하나가 모여져야 보기 좋은 진주 목걸이가 되는 것처럼 충실한 간이역이 모여져야 종점의 영광이 있으리라.
우리의 눅이진 삶일망정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건 이와 같은 이치가 아닐까. 열차가 개양터널로 접어들며 진주가 가까워져 온다.
외길 철로 가에 진솔한 냄새를 풍기는 간이역을 닮으리라 다짐하며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아본다.
곡선은 사랑이다
나는 곡선을 사랑한다.
어느 것 하나 직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는 나의 삶이기에 곡선을 더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시대는 자꾸 변해 모두가 지름길을 택하고 수직상승을 꿈꾸다 보니 곡선 같은 것은 천덕꾸러기가 되어가는 오늘이다.
자고 나면 신소재로 최첨단의 하이테크가 쏟아지니 휴머니즘은 어느 골방의 할아버지 천식처럼 가르릉 거린다.
직선화되어가는 인간의 지혜 앞에 봄이 와도 제비 한 마리 둥지를 틀 곳이 없고, 위급한 일 생겼다고 이웃 대문 두들겨도 인기척 하나 없다.
직선에는 이기와 독선이 숨어 있고, 불손과 교만이 함께하는 모양이다.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아 소쿠리도 만들고 바지게도 만들고 멍석도 만들던 때는 인정도 넘치고 사랑도 범람해 오늘처럼 이렇게 밤길 걷기 겁나지 않았다. 비틀고 꼬아지는 곡선에는 포옹이 있고 화합이 있어 사랑이 움트고, 단결이 있고 결속이 있어 믿음이 함께 했다. 남도의 육자배기와 바닷가의 씻김굿이 곡선이며, 요단강을 거슬러 오르는 물줄기와 섬진강에 방생하는 두 손이 곡선이기에 , 초승달의 새순처럼 우리네의 가슴에 푸른 꿈이 출렁댄다.
정말이지 곡선은 어느 외진 모퉁이에 손을 녹이는 모닥불이요, 심장 한복판을 흐르는 삶의 개울물이다. 겨우내 혹한과 폭설만 품에 안은 채 인고의 세월로 봄을 맞는 산을 보라. 때로는 어머니의 젖무덤이 되었다가 때로는 누나의 잘록한 허리가 되었다가 하는 곡선이 아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슬픈 것이라면 나는 정원의 장미보다 구름 뒤집어 쓴 낮달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나의 몫이요, 나의 길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힘의 원천은 곡선에 있다. 천하장사의 들배지기가 곡선이며 한라장사의 호미걸이가 곡선이요, 4번 타자의 홈런이 곡선이며, 너와 나의 끌어안음이 곡선이 아니던가.
곡선은 소망과 희망의 선이요, 베풂과 나눔의 선이다. 농축된 삶의 에너지가 팽창된 것이 곡선이리라. 대웅전 법당에서 두 손 모아 절을 하는 할머니의 허리가 곡선이며, 정화수 떠놓고 야삼경에 손을 비비는 어머니의 기도가 곡선이다. 백년해로 기약하는 신랑신부의 맞절도, 만고의 효녀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드는 것도,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도, 헐레벌떡 숨 가쁜 이에게 버들잎 물바가지에 띄우는 것도 곡선이다.
사랑의 강도가 너무 무거워 곡선을 그리는 것일까.
나는 곡선을 사랑한다.
어루만지는 인정이 있고 쓰다듬는 행복이 있고 얼싸안는 온기가 있어 곡선이 좋다. 부딪쳐도 좌절하지 않고 돌아나가는 지혜가 있고, 깨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굽어나가는 용기가 있어 곡선이 좋다.
어차피 삶이란 곡선이 아닌가. 그것도 가난하고 재주 없는 우리네 삶에 있어선 무엇이 나타날지, 무엇이 부딪칠지 모르는 벼랑을 돌아나가는 곡선이 아닌가.
빤히 바라다 보이는 정원을 향해 난 직선코스는 애시 당초 나의 몫이 아니다. 나의 눈높이로 내려앉은 빨랫줄이 묵은 씨앗들을 달고 신음소리를 내어도 목마른 입술을 축일 수 있는 건, 그것이 나의 분신인 곡선이기 때문이다.
곡선에는 정이 있고 눈물이 있다. 고개 숙인 고백이 있고 , 마주하는 진실이 있고, 양보하는 겸허가 있다. 곡선은 사랑의 비둘기며, 행복의 초원이며, 평화의 총아이다.
그러기에 던지는 화염병이 곡선이고, 쏘아대는 최루탄이 곡선이며, 아내의 잔소리가 곡선이고, 선생님의 회초리가 곡선이다.
질통지고 계단을 오르는 막노동꾼의 허리가 곡선이며, 희망으로 빈 그물을 던지는 어부의 허리가 곡선이며, 소망으로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허리가 곡선이다.
그러기에 곡선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전진의 선이요, 희망의 선이다.
담장 위의 줄장미가, 계단 밭둑의 호박넝쿨이 서로 보듬고 뒹굴며 나아가질 않는가.
너와 나의 끈끈한 정을 연결시켜 주는 알매흙이요, 너와 나의 고통을 나누어 갖게 하는 사춤자갈이 곡선이다.
칭칭 감기는 냉면이며 국수의 면발이 곡선이기에 맛을 더한다.
우리의 당기순이익이 비록 등 굽은 고등어 한 마리라 해도, 눈물 나도록 가슴이 뛰는 건 거기엔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차가 평균되지 않아 비밀적립금도 통화대용증권도 없는 삶이라 해도, 우리가 울지 않는 건 거기에 막돌이 놓인 징검다리의 곡선 때문이 아닌가.
용서와 화합의 고리인 곡선은 위선을 내포한 아량도 아니고 가식을 포장한 겸손도 아니다. 모나지 않아 끊이질 않고 독선이 없어 토라질 줄도 모른다. 네가 있어 눈물 젖은 두만강도, 소양강 처녀도, 낙동강 칠 백리도, 감칠맛 나는 노래가 되나보다.
박 넝쿨 하나 올릴 수 없고 제비집 하나 지을 수 없는 직선의 인정 없음을 서러워하노라. 상냥한 남쪽 바람이 목련의 봉오리를 터뜨리고 민들레를 피게 하고 목화송이를 벌어지게 하며 둔덕에 호박꽃을 어루만지는 건 물기 머금은 곡선이다. 시커먼 꽁보리밥 된장에 척척 비벼 숟가락 서너 개 꽂아주면 내려앉는 파리 떼 쫓을 겨를도 없이 바가지 밥을 잘도 먹던 우리였건만, 서투른 나이프 들고 포크질을 해대면서 영양을 찾고 교양을 들먹거리는 오늘날엔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허기지게 하는 것일까.
포기배추 발길에 차이고 쌀이 남아돌면서 사장님도 많고 박사님도 많건만, 법원에 서류가 밀리고 대문에 자물쇠가 많아지고 교도소가 만원이 돼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심코 흘린 밥알 죄 받는다 얻어맞고 숟가락 힘없으면 복 나간다 쥐어 박힌 그때는 부모 자식 간의 정도 그렇게 많았건만, 배가 부른 오늘날엔 귀찮다고 갖다버리는 부모, 자식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려워 손잡을 수 없고 미심쩍어 마음 열 수 없는 건, 곡선을 사랑할 줄 모르고 직선을 욕심내기 때문인지는 아닐는지------
나는 곡선을 사랑한다.
종달새가 꿈을 안고 보리밭 위를 날아오르는 그런 곡선, 그리움을 가득 안고 해안을 향해 달리는 파도와 같은 그런 곡선을 사랑한다.
곡선은 또한 신명을 가졌다. 아침 이슬 머금은 산딸기의 휘어진 가지, 돌아가는 열 두발 상모, 왕소금 한 알에 취해 망향가를 불러대는 목로주점, 제일목공소의 박 영감 대팻날에 묻어나는 파편, 무논에 개구리가 뛰어 오르는 비상, 산복도로를 오르는 25번 시내버스의 엔진소리, 곰삭아가는 된장독, 김칫독, 곡선의 신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미적분을 풀 묘책은 없다 해도 등에다 자기 집을 지고 다니는 운명과 같은 달팽이의 나선형 곡선을 생각하며 먹을 가는 타원형이 되던 낚시 줄을 던지는 포물선이 되던 언제까지나 주어진 나의 곡선을 사랑하리라.
나는 곡선을 사랑한다.
향단이와 방자
나는 춘향이보다 향단이를 좋아한다.
나는 이도령보다 방자를 좋아한다.
춘향이의 곧은 절개를 몰라서도 아니고, 이도령의 장원급제를 시샘해서도 아니다. 정말이지 춘향이의 일편단심 사랑을 질투해서도 아니고, 이도령의 암행어사 출두를 부러워해서도 아니다. 그저 왠지 춘향이보다 향단이가 좋고 이도령보다 방자가 좋다.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한 자괴심인지도 모르겠지만 순전히 나의 취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골을 넣기 위해 아웃사이드에서 중앙으로 패스를 하는 축구선수나, 한 점을 내기 위해 희생번트를 대는 야구선수가 좋아 보이는 이치라고나 할까. 정치마저 내로라는 주역들을 위해 참모진은 잠들지 못한다. 민주화를 외치고 국민소득을 끌어올리는 건 누가 뭐래도 현장의 이름 없는 사람들 때문이 아닌가. 춘향이와 이도령의 만남을 위해, 사랑을 위해, 향단이와 방자의 사랑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신이 내린 사랑의 샘물이 어찌 춘향에게만 있었고, 연보라의 설레임이 어찌 이도령에게만 있었으랴. 꽃 피는 봄은 향단이에게도 있었고 단풍드는 가을은 방자에게도 있었다. 끓어오르는 사랑의 불길이 춘향보다 못하지도 않았으련만 향단이는 오늘도 춘향의 심부름을 간다.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다는 천년의 사랑이 이도령보다 못하지도 않았으련만 방자는 오늘도 이도령의 심부름을 간다. 높은 하늘만 어디 하늘이더냐. 하늘이 너무 낮아 머리가 데이는 상것의 하늘도 하늘이라면 하늘이 아니겠는가.
동구 밖 천하대장군 장승도 황혼이 오고 어둠이 내리면 님이 그리워 그 큰 눈망울을 껌벅이는데, 이슬보다 더 고운 속살을 가진 향단이와 방자는 주인님의 사랑을 위해 둘이 손잡고 야간도주를 할 계획도 할 줄 모른다. 지명수배를 당해도 그때는 CCTV도 고속도로도 없어 산 넘고 물 건너 깊이깊이 숨어들면 찾기도 상당히 어려웠을 텐데 말이다.
원초적인 자신의 사랑들일랑 티격태격 눈 흘김으로 얼버무리고, 주인의 사랑을 위해 망을 보고 있는 향단이와 방자가 왜 이리 눈물 나도록 아름다우냐.
아마도 틀림없이 천상에서 금지된 사랑을 하여 잠시 지상으로 유배를 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도령의 말고삐를 잡고 춘향 집을 찾아가는 방자의 발걸음이 경쾌한 걸, 춘향 사랑에 들뜬 이도령이 향단이 때문이란 걸 까마득히 모르리라. 초롱불 밝혀들고 춘향보다 한 발 앞서 이도령의 집을 찾아가는 향단이의 발걸음이 사뿐사뿐한 건 방자가 거기 있기 때문이란 걸, 이도령만 생각하는 춘향이 어이 알리요. 태백의 여름 해바라기보다 더한 순정을 가진 향단이, 원시림의 여름 폭포 물줄기보다 더한 정열을 가진 방자, 이들 때문에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이 포도 알처럼 익어가지 않았을까.
나는 춘향이보다 향단이가 좋다. 나는 이도령보다 방자가 좋다. 춘향이 곤장 맞을 때 향단이도 울었다. 이도령 거지 되었을 때 방자도 가슴 아팠다.
이도령이 장원급제한 걸 이도령의 글재주로만 돌리지마라. 향단이와 방자의 지극정성도 한몫 했으리라.
향단이와 방자.
어찌 그 옛날에만 있었으리요. 오늘 이 도시의 회색 하늘 아래에서 성공신화를 위해 달리는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밑거름이 되는 향단이와 방자가 있다. 자식의 합격만을 위해, 자식의 성공만을 위해 긴긴 밤 철야기도로 두 손 모으는 어머니가 향단이다. 남편의 출세만을 위해, 남편의 건강만을 위해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아내 또한 오늘의 향단이가 아닌가. 자신의 안일과 행복은 보류하고 직장에서, 바다에서, 들판에서 가쁜 숨 몰아쉬는 아버지가, 남편이 오늘의 방자가 아니던가.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박수를 바라지도 않는다. 조명을 받으며 인터뷰를 원하지도 않는다. 향단이와 방자가 무슨 욕심이 있고 무슨 속셈이 있어 오밤중에 심부름을 한 것은 아니질 않는가. 가식과 위선이 하도 많아 판단이 어렵고 선택이 힘겨운 오늘이다.
안동의 제삿밥만 헛제사밥이랴. 헛웃음이 있고 헛눈물이 있어 마음 주기가 어렵고, 이해타산의 복선이 있어 사랑마저 어려운 오늘, 향단이와 방자의 순수가 그립다.
낮은음자리에서 화합을 외치고 구석진 곳에서 조화를 이루며 어렵고 힘든 곳에서 사랑을 외치는 구도자가 향단이와 방자라면, 내가 너무 지나치게 아부를 하는 것일까. 타인을 위해 등대가 되고 타인을 위해 이정표가 되며 타인을 위해 촛불이 되는 게 향단이와 방자라면, 또 내가 너무 지나치게 아양을 떠는 것일까.
세상은 그래도 향단이와 방자 같은 사람이 있어 앞으로 나아간다. 기회주의란 뜻도 모르며 이해타산을 따지지도 않는 남도의 구수한 사투리 같은 사람들, 남도의 얼큰한 된장국 같은 사람들, 향단이와 방자 같은 너와 내가 있어 오늘도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시원하다.
따뜻한 가슴과 가슴, 포근한 마음과 마음, 진실 된 믿음과 믿음, 향단이와 방자 같은 사람과 사람이 있어 오늘밤에도 별이 빛난다.
나는 춘향이보다 향단이를 좋아한다.
나는 이도령보다 방자를 좋아한다.
강물의 여로
나는 강가에 설 때면 멍하니 넋을 잃을 때가 많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질 않고 아무 의미도 없이 한참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곤 한다. 참으로 물이란, 특히나 흐르는 물에 있어선 나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어느 유명 작가의 작품을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의 그러한 감동 같은 것이다. 저 강물의 원류(原流)를 찾아가면 아마도 한 방울씩 솟아오르는 옹달샘이거나 한 방울씩 모아진 빗물이었으리라. 상수리 잎사귀를 적시고 떨어지거나 솔잎의 바늘 잎사귀에서 떨어지거나 우선 그들부터 사랑을 베풀고 흘러내린다. 그리하여 그 아래 풀잎을 적시고 꽃 대궁을 적시고 바위며 돌멩이의 얼굴을 씻기며 땅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넘쳐나면 흘러내린다.
모든 은혜를 땅심까지 베풀었다가 나머지가 흘러내리는 게 골짜기 물이 되고 도랑물이 되고 개울물이 되어 강물로 이어지리라.
빗방울은 생김새부터가 모나지 않은 겸손을 겸비하고 있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네모나 세모가 아닌 원형이 아닌가. 먼데부터 베풀지 않고 언제나 자기가 떨어진 그곳부터 사랑을 나눈다. 자연은 욕심이 없는 탓일까. 자기 몫 외에는 더 바라질 않는다. 물기를 머금으면 버드나무도 떡갈나무도 더 이상 저장하려 하지 않는다. 흘러내리며 이웃에게로 돌린다. 그러기에 강물은 사랑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리라. 물만큼 가슴을 여는 것도 없다. 물만큼 서로 보듬는 것도 없다. 물만큼 끈질긴 것도 없다. 여러 수 천 수만의 물방울이 모이면 반가워 하나가 된다. 달빛이 내려앉는다고 별빛이 놀다 간다고 시샘도 하지 않는다. 여유와 멋을 가지고 강물은 흐를 뿐이다. 강 밑 그 아래는 얼마나 많은 사랑의 앙금이 가라앉아 있을까. 조각난 사금파리의 아픔까지도 강 밑바닥에선 사랑으로 꿈틀대리라.
심산유곡을 굽이치며 아름다운 것들만 애무를 하며 흘러온 물만은 아니리라.
망개 넝쿨에 자빠지고 찔레나무에 피 흘리며 흘러내린 물도 있질 않겠는가.
그러기에 서로가 서로를 더욱 거부하지 않고 한 몸이 된 것이 강물이리라. 강은 아래로 흐를수록 여유가 있어 보인다. 촐랑대지도 않고 소용돌이도 없다. 종착역이 가까워오기 때문일까. 그리하여 다시 증발이 되어 구름으로 떠돌다가 떨어지고 흘러내리며 윤회를 하는 것일까.
내일이면 성불을 하는 미래불이 되어 오늘을 이렇게 겸허하게 흐르는 강물은 욕심 많은 나에게 죽비가 된다.
나 이제 불혹을 넘어 강물의 중간지점을 통과해 하류 쪽으로 자꾸만 가까워진다. 강물은 초조하지 않은데 나는 왜 이렇게 초조할까. 강물은 저렇게 여유로운데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할까. 언제나 가슴이 허전하고 맥박이 불규칙한 건, 비우고 버려야 된다고 강물이 나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 같다.
강가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본다.
옹달샘에서 갓 나온 물줄기처럼 첫걸음을 걷고 자박자박 걸으며 뛰고 달리다 결혼을 하고 새끼들이 생기고 부대끼며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강물의 하류 쪽에 기울어져 있다. 감정은 무디어지고 감동은 작아지며 희망은 저 멀리에 있다.
그러나 어쩌랴.
아직도 강물이 되어 흘러갈 길이 저기 저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리라. 모든 것을 다 포용하며 흘러가는 대하의 물줄기는 어렵다하더라도 내 고향 들녘의 밭고랑 하나라도 적셔줄 도랑물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한 알의 물방울이 예사롭지 않다. 강물을 이루는 씨앗인 것을.
한 알의 모래알이 예사롭지 않다. 사막을 만드는 씨앗인 것을.
오늘도 강물은 흐른다.
(71.8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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