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bich - Poeme, Op. 39
피비히 - 전원시 '황혼이 지면' 중 '시곡' Op. 39
Zdeněk Fibich [1850 ~ 1900]
Slovak Chamber Orchestra
Bohdan Warchal
Fibich - Poeme, Op. 39
즈데네크 피비히(Zdeněk Fibich) - Op39 전원시 황혼이 지면(Idyll At Twilight)중 "시곡(Poeme)"
즈데네크 피비히(Zdeněk Fibich, 1850-1900)는 체코의 작곡가로, 작품으로는 2개의 현악사중주, 피아노 삼중주, 파아노 사중주, 피아노 5중주, 현악과 관악을 위한 5중주 등의 실내악과 교향시, 3개의 교향곡, 사르카(Šárka), 메시나의 신부(Nevěsta messinská)를 비롯한 7편의 오페라와 3부작 히포다미아(Hippodamia)를 비롯한 멜로드라마(melodramas) 그리고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미사곡을 비롯한 전례 음악과 감정, 느낌, 회상(Moods, Impressions, and Reminiscences) Op41을 비롯한, 1890년대 부터 쓰기 시작한, 거의 400여곡에 이르는 피아노곡 등이 있다. 동 보헤미아(Bohemia) 차슬라프(Čáslav) 근처의 프세보루지체(Všebořice, 세보루치체(Šebořice)에서 태어나 프라하, 라이프치히, 파리, 만하임에서 배우고 비르나와 프라하에서 작곡하면서 교육에 종사했다. 안토닌 드로브작(Antonín Dvořák,1841-1904)이나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1824-1884) 보다 덜 알려졌지만, 19세기가 거의 끝날 무렵의 체코 음악계에 미친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19세기의 낭만주의가 체코에도 전해져 민족, 인류의 역사를 존중하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의 사상이 민족주의, 특히 체코 음악문화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면서 체코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제국(Habsburg Empire)에서의 체코 국민악파(Czech nationalism)는 융성기를 맞는다. 그리하여 체코는 처음으로 예술의 면에서 독자적인 음악을 내놓게 되었다. 시크로프(František Škroup,1801-1862)의 자국어로 쓴 오페라 "도라테니크(Dráteník)"에 의하여 시작된 체코 국민악파는 민족가극 "팔려간 신부(The Bartered Bride)"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Má vlast)", 현악 4중주 "나의 일생에서(Z mého života)" 등의 표제를 가진 관현악이나 현악4중주곡을 쓴 스메타나에 의하여 정점에 이르렀다.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의 음악예술을 높인 드보르자크는 독일음악의 영향이 보이는 순수기악곡을 많이 썼으나 그것은 슬라브적인 색채가 짙다. 그러나 다음의 즈데네크 피비히나 요제프 보후슬라프 푀르스터(Josef Bohuslav Foerster,1859-1951)의 대에 이르러서는 민족적 색채가 희박해지고 다시 국제적인 작풍이 강해져 국민악파의 전통에 바탕을 둔 오페라 "예누파(Jenůfa 또는 그녀의 의붓딸, Její pastorkyňa)"를 써서 '체코의 무소르크스키'로 불렸던 레오시 야나체크(Leoš Janáček,1854-1928)의 작품도 근대적 경향을 다분히 가지게 되었다.
피비히의 아버지는 체코 산림청 공무원으로, 피비히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하는 귀족의 산림 영지에서 다양한 나무들과 함께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독일계 빈 사람으로 9살이 될 때 까지 어머니로 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15세가 될 때까지 프라하에서 체코어를 하는 중등학교(gymnasium)를 다니다가 이후 빈으로 가 독일어를 하는 중등학교에서 2년을 보낸다. 이후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로 가 3년 동안 이그나즈 모셀레스(Ignaz Moscheles, 1794-1870)로 부터 피아노를, 잘로몬 야다스존(Salomon Jadassohn)과 에른스트 리히터(Ernst Richter)로 부터 작곡을 배웠다.
이후 파리에서 지낸 뒤, 프란츠와 이그나츠 라흐너(Ignaz Lachner)의 동생인 빈센츠 라흐너(Vinzenz Lachner)와 만하임(Mannheim)에서 수학한 뒤, 그의 공부를 끝낸다. 이후 수년간은 프라하로 돌아와 부모과 함께 살았는데, 여기서 첫번째 오페라 작품 "부코비나(Bukovina)"를 작곡하는데, 작품은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의 대본작가인 카렐 사비나(Karel Sabina)의 대본으로 만들어 졌다. 23세에 루제나 하누소바(Růžena Hanušová)와 결혼하여, 리투아니아(Lithuania)의 수도인 빌뉴스(Vilnius)에 거주하게 되는데, 녀기서 성가대 지휘자의 자리를 갖게 된다.
이후 2년간의 불행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의 아내가 쌍둥이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1874년 다시 프라하로 돌아와, 1900년 죽을 때까지 지냈다. 1875년 피비히는 아내 루제나의 동생이자 가극의 콘트랄토(contralto) 가수인 베티 피비초바(Betty Fibichová, 결혼전 성 히누소바(née Hanušová)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전 제자이자 애인인 아네슈카 슐조바(Anežka Schulzová)와의 문제로 1895년 히누소바를 떠난다. 슐조바와 피비히의 관계는 그의 예술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사르카(Šárka)를 비롯한 이후의 모든 오페라의 극본을 그녀가 쓰게 되며, 또한 작품 41번의 "감정, 느낌, 회상(Moods, Impressions, and Reminiscences)"에 영감을 주었다.
피비히는 초기 생애를 형성짓는 동안 그가 테어난 보헤미아를 비롯해,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에서 살며, 다양한 문화적 교육을 받았다. 모국어인 체코어 만큼이나 독일어에 능해, 주로 웨버(Weber), 멘델스존(Mendelssohn), 슈만(Schumann)과 같은 초기에 자신이 빠졌던 독일 작곡가와 이후 와그너(Wagner)로 부터 영향을 받아 독일 낭만주의 방식으로 작곡하였다. 초기 오페라와 약 200여곡에 이르는 초기 노래들은 모두 독일어로 만들어 졌으며, 이 작품들과 그의 교향곡과 실내악은 체코 비평가들이 아닌 독일 비평가들로 찬사를 받았다.
피비히의 오패라들이 세익스피어(Shakespeare)나 쉴러(Schiller), 바이런(Byron) 같은 체코 외적인 요소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의 모든 오페라 작품은 체코에 남겨졌다. 피비히는 슬라브 민요의 일종인 둠카(Dumka) 같은 보헤미안 민속 멜레디와 춤을 기반으로 하여 실내악을 만들었으며,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Má vlast)"에 영감을 받아 처음으로 민족주의 경향의 교향시 "자보이, 슬라보예와 루덱(Záboj, Slavoj a Luděk)"(op37)을 작곡하였으며 또한 폴카(polka)를 자산의 현악 4중주 A 같은 실내악에서 사용하였다.
1874년 프라하로 돌아온 후, 리차드 와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 이론을 준수하는 피비히의 음악은 프라하 음악계로 부터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스메타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메나타의 후기 작품은 체코의 보수적인 관객 앞에서 와그너 풍의 음악 드라마를 선보임으로써 많이 시달린 바 있었다. 피비히에 대한 명렬한 비평은 "헤디(Hedy)", "사르카(Šárka)", 아르코나의 함락(Pád Arkuna)" 같은 명백한 와그너풍의 후기 오페라들은 언급조차 않았으며, 1884년 스메타나 사후에, 이 문제는 더욱 격화되었다.
하여 체코의 음악학자 오스타카르 호스틴스키((Otakar Hostinský)와 같이. 극립극장과 프라하 음악학교 창설에서 제외되었으며, 이로 인해 개인 작곡 사무실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엠마누엘 흐발라(Emanuel Chvála), 카렐 코바로비치(Karel Kovařovic), 오타카르 오스레첼(Otakar Ostrčil)과 즈데네크 네예들리(Zdeněk Nejedlý)를 비롯한 학생들 사이에서 이 개인 스튜디오는 많은 존경을 받았다.
피비히의 음악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많은 호응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는 스승의 사후, 이들 제자들의 노력 덕분으로 특히 네예들리(Nejedlý)의 많은 격론을 불러일으킨 연속된 논문 발표와 지난 오류를 바로 잡는 기사들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피비히의 음악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이후에는 네예틀리의 편견된 입장을 다루는데 많은 부분의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시곡"은 관현악을 위한 목가(牧歌, Idyll) "황혼(At Twilight)"(1893)의 중간부의 칸티레나(cantilena)를 체코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얀 쿠베릭(Jan Kubelik)이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고부터 유명해졌다. 프란시스 웹스타(Paul Francis Webster)는 "시곡"에 영어 가사를 붙여 팝송 "나의 달빛 마돈나(My Moonlight Madonna)"를 만들었고, 1933년 윌리엄 스코티(William Scotti)가 곡조를 대중적으로 편곡하였다.
글 출처 / https://blog.naver.com/chanwoolee/221401032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