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시풍속
고사 상에 돼지머리를 올리는 이유? 고사(告祀) 란 ? 간단히 상을 차려 소원을 비는 형식. 굿에 가무가 수반된다면 고사는 간단한 비념으로 대신한다. 상량문을 올리는 상량고사, 봄에 출어하기 전에 마을의 선주들과 어민들이 함께 올리는 뱃고사, 개업 때에 하는 열림고사 등은 소원성취를 바라는 심정을 잘 보여준다. 가정에서는 음력 10월 상달에 오곡을 거두고 나면 1년 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며, 햅쌀로 떡을 빚어 집안의 신(神)인 성주·조왕(?王)·문신(門神)·철륭·삼신(三神)·터주·칠성단(七星壇) 등에 바친다. 또는 집 뒤의 장독대에 청수만을 떠놓고 간단한 비념으로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풍물패가 하는 고사굿도 있다. 경상도의 지신밟기굿, 전라도의 마당밟기굿, 강원도의 고사굿 등은 마을 풍물패가 하는 고사굿들이다. 강원도의 경우, 고사굿은 음력 정월 보름부터 수일 동안 한다. 이때 굿하는 행위를 '친다'고 하는데, 서낭굿을 친 다음 길군악을 치며, 마을로 내려와서 집집마다 들러 고사굿을 치는데, 대문 앞에서 문전굿을 치고서, 황덕굿·성주굿·지신굿을 치면 주인은 고사반(告祀盤)을 차려놓는다. 마루에 소반을 놓고 쌀 한 그릇 놓고, 그 위에 실 한 타래와 돈 몇 푼을 놓은 다음 작은 그릇에 청수를 떠놓고 촛불을 켜놓는다. 실을 놓는 것은 자손의 명이 길라는 뜻이다. 주인이 고사반을 차려놓으면 풍물을 그치고 상쇠가 고사반 앞에 서서 고사소리를 하며 고사를 드린다. 지역에 따라서는 고사반을 꽃반이라고도 부른다. [차례] [용왕(龍王) 먹이기] [용왕제] [진주의 세시풍속]과 [유태인의 세시풍속] [ BT ] 당뇨병 치료용 돼지고기, 한화 개발 - 그 의미 [결론] [용왕(龍王) 먹이기] [정의]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개울이나 강가, 바닷가에서 제수를 차리고 그 해 소원을 비는 세시풍속. [개설] 용왕 먹이기에 있어 용은 수신으로 호법신 또는 호국신의 역할을 한다. 민간 신앙에서는 비를 가져오는 우사(雨師)이고, 물을 관장하는 수신이며, 사귀를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벽사의 착한 신이다. [연원] 농경민족인 우리에게 물은 생명처럼 소중하므로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지내고 어로를 생업으로 삼는 어촌에서는 배의 무사와 풍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용왕제를 지내기도 한다.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개울이나 강가, 바닷가에 가서 제수를 차리고 집안의 평안과 그 해의 소원과 사고방지, 풍어 등을 빈다. 내륙지방의 용왕먹이기는 풍어제의 기능은 없고 방죽이나 내에서 물에 빠져 죽는 일이 없도록 기원하는 일이 주가 되고 있으나 도서지방에서는 풍어를 위해서 물에서 죽은 혼백을 건져 천도하는 기능이 주가 되고 있다. [절차] 날짜를 잡으면 선주, 어장사, 배타는 사람들에게서 쌀과 과일, 무명베 등 필요한 것을 거두어 제물을 장만한다 .어촌에서는 바다와 기상 조건에만 의존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농촌에 비해서 신앙과 의례적인 행사가 더 많다. 대개 정월 보름날 지내며, 백시루떡과 메 ·탕 ·나물 ·포 ·과일 ·술 등을 장만해 놓고 마을에서 나이 많은 노인이 제주가 되어 마을이 조용하고 안전하도록 치성을 드린다. 용왕먹이기를 할 때는 언제나 밥상을 차리고 깨끗한 문종이에 밥을 4봉지 싸서 놓고, 밥 4봉지를 바다에 던진다. “동쪽으로 한 봉지 동해바다 용왕님남쪽으로 한 봉지 남해바다 용왕님서쪽으로 한 봉지 서해바다 용왕님북쪽으로 한 봉지 북해바다 용왕님”라고 하면서 물에 고면서 고기씨라 하면서 쌀 4줌을 물에다 던진다. [현황]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점이 있지만 특히나 진주를 포함한 경상도의 해안가 도시들은 해운, 수산업 등 바다와 연관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용왕 먹이기에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다. [참고문헌] ? 하종갑, 『진양민속지』(진양문화원, 1994) ? 『진주시사』(진주시사편찬위원회, 1995) [용왕제(龍王祭)] [정의] 매년 음력 3월 초 조수간만의 차로 회동마을과 모도 사이의 바다가 열릴 때 올리는 제의. [개설]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마을에서는 진도군의 주도로 매년 ‘신비의 바닷길 축제’를 개최하면서, 축제의 일환으로 마을 공동제사로 행해졌던 제의 양식인 영등제를 지낸다. 영등제는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사당에서 뽕할머니에게 제를 올리는 것이다. [명칭유래] 한국의 농·어촌에서 일반적으로 봉사되는 풍신제를 영등제라고 하는데, 진도군 금계리 회동마을의 경우 역시 도서 해안지역의 일반적 영등제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영등사리’라 불리던 것이 축제화되면서 영등제라 불리게 되었다. [연원] 영등제의 주신은 뽕할머니로, 뽕할머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화가 전하고 있다. 옛날에 이 마을은 호랑이의 침입이 심해서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한 마을 주민들은 뽕할머니만 마을에 남겨놓고 떼배를 타고 물 건너 모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다. 혼자 남은 뽕할머니는 뿔치바위에서 날마다 가족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용왕님께 빌었다. 그러던 음력 2월 15일, 뽕할머니는 다음날 무지개를 타고 가족을 만나게 해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날이 새고 나니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서 바다가 무지개 모양으로 갈라졌다. 한편 모도로 피난 갔던 사람들 또한 식수 부족으로 곤란을 겪어 다시 호동마을로 돌아오려던 차에 바다가 무지개 모양으로 갈라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가 무서워 꽹과리를 치면서 돌아와 보니 바다가 갈라진 것은 하나님의 조화가 아니라 뽕할머니의 정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뽕할머니는 사람들을 만난 후 얼마 되지 않아 기진해서 죽었다. 뽕할머니는 죽어서 신령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인데, 마을사람들은 뽕할머니가 신령이 되었다고 해서 영등이라고 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회동(回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부터 매년 뽕할머니를 위한 제를 모셔 그 이름을 영등제라 했다. [절차] 회동마을에서 이루어졌던 전통적인 영등사리를 말할 때 제의 절차, 뿔치바위, 영등할머니, 치등, 치등의 난장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것이 영등사리를 이루는 요소들이다. 이 요소들 중에서 치등과 치등에서 벌어지는 난장은 진도 회동의 영등사리가 다른 지역의 영등제와 다르다는 것을 구별짓게 하는 것이다. 제를 지내기 위한 제비 총액은 나락 1가마 값 정도가 든다. 제비는 각 집마다 내며, 동네 유지들과 공을 들이려는 몇 집에서 더 많이 낸다. 중년에는 부락 기금으로 충당했다. 제수는 주과포와 돼지머리 하나다. 뽕할머니 제사에는 밥과 술과 주과포만 진설하고 용왕제(龍王祭)에만 돼지머리를 진설한다. 제를 지내고 남은 음식은 부락 주민들이 함께 먹는다. 영등제를 지낸 다음 용왕제를 지낸다. 용왕제에는 음식을 차리고 메와 술만을 올리며 유교식 제례는 지내지 않는다. 이유는 유교에는 용왕제라는 제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때도 제관들은 메와 술을 올린다. 큰 굿을 할 경우 용왕제는 당골이 주관한다. 당골은 용왕제에서 무굿을 한다. 마을제와 갯제, 또는 용신제를 함께 지내는 사례는 전남의 도서·해안지역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 경우도 마을제는 유교식으로, 갯제는 고사 지내는 방식으로 지내거나 당골이 주관한다. 제터인 뿔치바위는 마을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약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노인들은 걸어가기에 힘든 험한 바위지대에 있는 약간 넓은 분지다. 치등은 존재 자체가 신비를 내포한다. 그리고 영등사리의 본질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신비를 느끼게 한다. 치등은 마을 옆 해변 제터인 뿔치바위와 모도를 잇는 육계도다. 원래 물 밑에 잠겨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영등사리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치등의 평상시 수심은 5m 정도고 물이 제일 많이 빠져도 2m를 유지한다. 그런데 영등사리 일곱물 때(오후 6시 30분쯤) 그 모습이 드러난다. 치등의 규모는 길이 2.8km, 폭 50m, 높이 1m 정도이다. 금호도와 모도 양 섬의 영향으로 조류가 치등을 향해 양쪽에서 밀려와 그 경계선에 흙과 모래, 기타 부유물을 퇴적시켜 치등을 만들었다. 치등(육계도)은 새벽 6시, 오후 6시 두 번 드러나는데, 이를 ‘물이 갈라진다’ 또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라고 표현한다. 치등이 드러나는 자연의 신비 현장에서 사람들은 난장을 벌인다. 물이 갈라지면 사람들은 치등에 들어가 맘껏 놀고 또 조개, 소라, 낙지, 미역, 톳, 청각 등을 채취하는 것이다. 회동 영등사리는 남부 의신면 5개 마을, 북부 고군면 6개 마을 청춘남녀들이 모여 논다는 점에서 다른 마을굿과 구분된다. 마을사람들이 지내는 뽕할머니 제사와 용왕제가 끝나면 의신면과 고군면의 젊은이들이 뿔치바위에 모여든다. 의신면에서는 돈지, 옥대, 연주리, 초사리, 동치 등지에서 오고 고군면에서는 오일시, 오산, 지막, 향동, 모사, 벌포 등의 마을에서 온다. 물이 빠지는 석양 시간까지 100여 명의 젊은 남녀가 모인다. 모두 젊은이들인데, 회동까지의 거리도 멀고 제터인 뿔치바위로 들어는 길이 험하고 치등에 들어가 노는 것도 젊어야 할 수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만 모이는 굿판이 되었다. 제장에 모인 사람은 100여 명이지만 회동의 젊은이들은 20여 명 내외로 회동 사람들보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더 많다. 회동은 의신면과 고군면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여 이들이 모여 놀이하는 목에 해당된다. 영등사리 때 치등에 모여 놀면서 서로 대립하는데, 대립되는 세력은 의신면의 초사 들판 세력과 고군면의 향동 들판 세력, 그리고 의신면의 돈지 들판 세력과 고군면 오산·지막 들판 세력이다. 이들은 각기 규모가 비슷해서 서로를 경쟁상대로 인식해 영등사리에서 맞선다. 물이 빠져 치등이 드러나면 남자들은 치등을 걸어다니면서 놀고, 여자들은 낙지?반지락?소라?미역?해삼 등을 잡는다. 젊은이들이 어울려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채취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뻘을 던지고 밀고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논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희롱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여기서 남자와 여자들이 벌이는 시비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이 장면을 연애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들도 남녀 불문하고 밀치고 뒹구는 일이 벌어져 마을 사이의 싸움으로 변하는 사례도 있다. 돌아가는 길에 패를 지어 북장구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길놀이가 펼쳐진다. [현황] 영등축제의 주신은 뽕할머니다. 전라남도 진도 사람들의 역사는 영등축제 주신인 뽕할머니의 생애와 일치한다. 전설이나 신화에 지역의 역사체험이 상징화되어 담겨 있다는 신화적 원리가 이 경우 들어맞는다. 신의 본풀이가 집단의 역사체험을 잘 반영하고 있다면 그 신은 집단의 상징으로 표상되고 정체성의 준거가 된다. 앞의 서술이 고향을 떠나 방황하는 뽕할머니의 자손들, 즉 진도 사람들의 역사라면 1970년대 이후 회동의 역사, 또는 진도의 역사는 뽕할머니의 기도, 또는 신통력의 증거들이다. 따라서 뽕할머니는 영등축제의 신인 동시에 회동의 신이고 진도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회동마을의 영등제는 전통적인 마을 공동의 제의에서 지역 축제로 확장된 경우이다. 군이 주관하는 영등제는 1976년부터 시작되어 2006년까지 29회째가 되었다. 처음에는 ‘영등살 놀이’로 불렀고 7회 때부터 ‘영등제’라고 불렀으며, 14회인 1991년부터 ‘영등축제’로 개칭했다. 그리고 현재인 2006년에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축제’라고 부르고 있다. 초기에는 영등살 놀이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치루었으며 회동 주민들의 역할이 뚜렷했다. 축제의 내용은 뽕할머니 기원제, 용왕제, 영등살 놀이(진도만가, 진도들노래, 소포농악, 진도강강술래)로 진행되었다. 1980년 제3회 영등살 놀이의 경우 1일 행사로 양력 4월 16일 10시 30분부터 17시 30분까지 치루어졌는데 당시에는 용왕제, 뽕할머니 기원제, 만가, 들노래, 농악, 강강술래가 공연되었다. 초기의 영등살 놀이에서 회동 주민들은 뽕할머니 기원제와 용왕제의 제비를 군청으로부터 받았지만 제수를 준비하고 제관을 선정하고 제 지내는 일을 외부의 간섭 없이 수행했다. 하지만 10여 년 후인 1990년대에는 축제일이 3일로 확대되고 관광객의 수뿐만 아니라 신문과 방송 등의 보도 취재진도 전국 단위로 확대되었다. 1998년 21회 영등축제는 전야제, 본행사(의식 및 영등살 놀이), 부대행사로 구성되어 3일 동안 치뤄졌다. 이상과 같이 회동마을의 영등제는 점차 관을 중심으로 주도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회동마을 사람들이 영등제를 영등축제로 확장시킨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농업사회의 해체와 산업사회로의 전환 구도는 회동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회동마을의 청년들만이 아니라 영등사리에 참여했던 많은 청년들이 일할 곳을 찾아 외지로 이주하는 사례가 잦아지자 당시의 마을 지도자들은 영등사리의 지속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영등사리의 위기는 곧 마을의 위기로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뿔치바위를 매개로 한 군과의 협상에서 뿔치바위의 훼손을 대가로 영등사리의 축제화를 지원받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영등할머니에 대해 상당히 확신에 찬 믿음을 지니고 있다. 주민들의 생각은 제터인 뿔치바위를 훼손시키더라도 영등제 자체만은 보존하려 했으며, 1970년대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또 마을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생각했다. 새마을 운동의 과정에서 군에서 해안선 작업 도로를 내면서 영등제의 제터인 뿔치바위를 훼손시키려 하자 주민들을 동원하여 반대운동을 펼치는 한편 길을 내는 조건으로 군으로부터 영등제를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아 낸다. 주민들은 뿔치바위라는 신성공간을 훼손시키는 대신 군청이라는 세속적 힘을 마을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관의 지원을 받은 현대의 영등축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영등축제 관련 업무를 군청 문화관광과에서 전담하고 있다. 군이 영등제 활성화를 위해 주력한 부분은 정부의 관광진흥정책에 대응하는 일, 홍보하는 일, 연행 인력을 조직화하는 일, 시설을 확충하는 일 등이었다. 영등제 행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군청에서는 ‘진도군 영등축제행사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군청이 주도하여 조직했는데, 군청을 중심으로 군번영회와 문화원이 참여하였다. 추진위원회에서는 축제 본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군내의 각 공연단체, 문화 단체와 교섭하여 출연 교섭을 하고 또한 준비 상황을 점검한다. 한편 행사를 잘 치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산 확보, 교통 대책, 관광객 안내, 홍보, 특산물 판매 대책 등을 세우고 실천한다. 축제 본행사는 뽕할머니 제사와 진도 민속 공연인데, 초기에는 각 단체들이 출연하여 공연했다. 용왕제와 뽕할머니 기원제는 회동 마을 사람들이 담당했고 만가, 들노래, 농악, 강강술래는 각 전승단체에서 담당했다. 그리고 관광객이 회동에 접근하기 용이하도록 도로와 주차시설을 확충하고 공연장과 치등 주변을 정비하여 관광객이 관람하고 치등 현장에 불편 없이 들어갈 수 있도록 단장하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마을의 영등제는 영등할머니 제사, 용왕제, 치등에서의 난장이 어우러진 굿판이었다. 영등할머니 제사와 용왕제는 회동 주민들의 신성 제사이고, 치등에서의 난장은 주변 마을 사람들의 몫이었다. 힘있는 두 지역의 경계에 위치한 미약한 민촌 마을의 입장에서 마을의 정체성을 보장하고 번영을 보장하는 사회적?종교적 장치로 연행된 영등사리는 이제 영등축제라는 세계적 축제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회동 주민들과 진도 지역의 엘리트들, 그리고 군의 정성과 지혜, 자본이 투자되었다. 전라남도 진도의 역사와 진도 주민들의 삶을 상징하고 있는 회동과 뽕할머니의 신화를 소재로 한 영등축제는 진도의 문화상징이다. 굿이 지향하는 마을과 마을의 화해와 화합, 민중 고난의 해방, 신이한 이적을 통한 종교적 신성, 난장의 흥겨움 등이 진도의 전통문화를 통해 표현되고 있어서 그 의미가 다른 어떤 축제보다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진도군지』(진도군·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2007)[진주의 세시풍속]과 [유태인의 세시풍속] [정의] 해마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관습적으로 되풀이 하여 행하는 생활풍습과 의례. [개설]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오랫동안 살아가다보면 특정한 관습이 생기고 해마다 반복됨으로써 세시풍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시풍속은 살고 있는 지역의 자연적인 조건, 역사적인 경험, 또 그 지역민이 형성하고 있는 사회적인 특성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다. 세시풍속은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특징 역시 지닌다. [진주의 세시풍속] 일찍이 우리 민족은 농업과 어업을 생활수단으로 삼아온 까닭에 태음력을 사용하여 왔다. 따라서 진주의 세시 풍속을 음력 월별로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정월 1) 설날 음력 1월 1일은 설날이라고 부르는데 진주에서는 한자의 원단, 세수, 연수, 정초라는 말은 잘 쓰지 않고 설, 설명절, 정월 초하루, 정월 명절, 정초, 정초 명절 등이라고도 부른다. 설은 신일이라고도 하여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도록 타이른다. (1) 설빔 새해를 맞이하여 새 옷을 지어 입거나 사서 입는데 이를 설빔이라고 한다. 근래에 와서 남자들의 전통적 한복차림이 적어져서 아쉽다. 설빔으로 옷을 갈아 입은 뒤에 차례를 지낸다. (2) 차례[茶禮] 가족과 친척이 모여 4대 봉제사를 지낸다. 선조를 승모하면서 선조들의 가호로 가화만당, 문중번창, 병액이 구제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다. (3) 세배, 덕담, 세뱃돈 차례가 끝나고 나면 자리를 정리하고 앉아서 집안의 어른들을 모시고 조부모, 조모, 부모, 백숙부모, 형제 등의 차례대로 아랫사람이 세배를 올리면서 “과세 안녕하셨습니까”, “오래 사십시오”, “더욱 건강하십시오”라고 인사를 하면 절 받은 윗사람은 “새해에는 복 많이 받게”, “새해에는 소원성취(사업, 출산, 대학입학 등)하게” 등의 덕스러운 말로서 절하는 사람의 신분에 맞게 축복을 하는데 이를 덕담이라고 한다. 덕담이 끝나면 윗사람이 절한 사람에게 돈을 주는데 이것을 세뱃돈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웃 친척이나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하던 돌림세배의 풍속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4) 성묘(省墓) 설날의 행사가 끝나고 조상의 무덤을 찾아서 무사히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인사를 올리는 성묘를 한다. 이때 약간의 제사 음식을 묘 앞에 차리는데 이를 성묘제물이라고 한다. 진주지방에서는 “당일성묘”라고 하여 성묘를 다음날로 미루지 않는다. 성묘를 가는 길에서나 성묘하고 쉬는 동안 집안의 역사와 함께 조상들의 학문, 벼슬, 효제 충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가정교육, 문중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5) 세찬, 세주 설날 차례를 위하고 가족 또는 세배 오는 손님의 대접을 위해서 준비한 여러 가지 음식을 세찬이라고 한다. 세찬 중에 흰떡 가래(무교병)를 만드는데, 흰떡이라 하고 가래를 썰어 국을 끓이면 흰 떡국이라 한다. 진주에는 흰 떡국을 차례에 잘 올리지 않는다.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한다. 세주란 설날에 축복을 받으며 마시는 술인데 데우지 않고 마신다. 세찬은 이웃에 나누어 먹는데 도시화가 되고부터는 이런 풍습이 줄어들었다. (6) 진주비빔밥 제사를 지내고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밥을 먹일 수가 없어서 밥, 나물, 탕국, 고추장, 참기름을 섞고 비빔밥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데 이것이 진주비빔밥의 유래가 된 것이다. (7) 진주탕국 쇠고기, 해산물, 두부, 무 등으로 깔끔한 탕을 만드는데 이를 진주탕국이라 한다. (8) 진주보탕국 비빔밥을 먹을 때 함께 나오는 국으로 탕국에 쇠고기, 콩나물, 선지 등을 넣고 끓여서 만든 국을 보탕국이라고 한다. (9) 진주장국밥 보탕국에 밥을 넣은 것을 보탕국밥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시장이나 주막집에서 팔 때 진주장국밥이라고 한다. 쇠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넣으면 돼지장국밥이라고도 한다. (10) 복조리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조리 장수들이 문 앞이나 안에 조리를 넣어 두고 가서 다음날 낮에 조리값을 받으러 온다. 조리를 사 두면 복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복조리라고 한다. 옛날에는 조리장수가 “복조리” 또는 “복조리 사이소”라고 외치며 다녔고 집안에 필요한 수량만큼 사기도 했으나 지금은 조리 대체품이 나와서 일상품이 못 되니 조리장수가 억지로 맡겨서 돈을 받아 간다. (11) 설날씨(일기점) 설날 날씨로 농사일기를 점쳤다. “설은 질어야 좋고 보름은 맑아야 좋다”고 하였는데 날씨는 비나 눈이 와도 바람이 심하게 불지 않아야 연중 농사일기가 알맞게 좋아진다고 하였다. 2) 정초 십이지일(正初 十二支日) (1) 유모일(모충일), 무모일 설날부터 열이틀날까지의 12일 동안을 일진에 의해서 털날[有毛日, 毛蟲日], 털 없는 날로 나눈다. 쥐, 소, 호랑이, 토끼, 말, 염소, 원숭이, 닭, 개, 돼지는 털 날이요, 용, 뱀은 털 없는 날이다. 설날이 털 날에 들면 풍년이 오고 털 없는 날에 들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호랑이가 든 날, 즉 인일이 재수가 좋다고 하여 이 날에 가게 문을 연다. (2) 패일(敗日), 삼패일(三敗日) 매월 초닷새날은 패일이라 하여 불길한 날이어서 밖에 출행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패일은 액이 있다고 하여 부정한 것을 보거나 접하는 것을 꺼려했다. 정월의 5일, 14일, 24일은 삼패일이라고 해서 매사를 삼갔고 특히 여인들은 바느질하는 일을 삼갔다. (3) 인일(人日) 정초에는 남의 집에 가서 잘 유숙하지 않지만 특히 7일에는 밖에 가서 자지 아니한다. 이 날 손님이 집에 와서 자고 가면 그 해는 연중 불운이 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득이 손님과 잘 수밖에 없는 경우가 되면 주인과 손님을 머리를 반대로 두고 거꾸로 자야만 했고 그러면 액운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4) 곡일(팔곡일) 8일은 곡식날이라 하여 봄에 심을 곡식을 준비하면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이 날 외양간, 돼지우리, 닭장을 쳐서 밭에 내며 보리밭에 거름을 준다. 정초에 칠일 쉬고 처음 일하는 날이 된다. (유태인의 레위가 삼가야 하는 7일과 같다) (5) 안택(安宅) 정초에 좋은 날을 택하거나 14일에 집안의 태평, 무병, 소원성취를 빌기 위하여 무당, 경문쟁이, 점장이를 불러 경을 읽고 굿을 한다. 안택굿에 쓰인 음식은 이웃과 나누어 먹는다. 요즈음은 상점, 영업용 차량 등에 굿을 많이 한다. [유태인의 레위가 한국에서는 무당(다윗이 드라빔을 입고 춤을 춘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이나 경문쟁이(:말씀을 봉독하는 자)나 점장이(:예언을 말하는 자) 등으로 탈바꿈 한 듯하다.] (6) 동신제 [유태인의 방백을 선출하는 행사]동신제는 마을의 평안, 무사, 풍년 등을 위해 마을사람 중 웃어른을 뽑아 제사를 지낸다. 요즈음은 제주(유태인의 방백)의 삼가는 여러 가지 일과 목욕재계의 번거로움 때문에 마을 사람 중에서 제주를 추천하기도 한다. 동신제는 산제, 당산제 등이 있는데 보통 14일에 행하고 요즈음은 보름날 아침에도 한다. (7) 널뛰기 여자들의 정월놀이로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널뛰기(시이소오: 정의, 균형감각, 불평등해소)이다. 진주 근방에서는 설은 여자명절, 추석은 남자명절이라고 하여 여자들의 놀이가 많이 이루어진다. (8) 윷놀이 (말판의 의미 : 5 - 3 - 3 = 11 : 가장 짧은 길, 5 - 5 - 5 - 2 : 중간 길, 5 - 5 - 5 - 2 : 가장 먼 길) 진주에서는 윷놀이에 쓰이는 윷을 탱자나무 가지를 8㎝전후로 끊어서 만들어 논다. 손 끝으로 재주를 부리지 못하게 접시에 얹어서 던진다. 동네놀이에서는 2m간격으로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던지며 가마니 밖으로 떨어진 것을 낙이라 하여 무효로 친다. (9)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정초에서 대보름 사이에 많이 날린다. 진주에서는 12월부터 연을 띄우며 해변가에서는 여름에도 띄우는데 바람 부는 절기 때문이다. 또 진주에서는 임진왜란 중 진주성대첩 때 11월 어느 날 정평구가 큰 연을 타고 폭탄을 터뜨렸다는 기록도 있어 연을 더욱 애호하고 있다. 특히 진주는 서로의 연줄을 끊어 먹는 겨루기 식의 연줄끊기가 유명하다. 연을 하늘 높이 날리며 자새질로서 얼르기, 뒤엎기, 옆차기 등을 하는 묘기는 연놀이의 가장 오묘한 기술로 친다. 어린이들은 꼬리연을 자새 없이 긴 줄에 매어서 뛰면서 날리기도 한다. (10) 돈치기(投錢) 3m쯤의 거리에 일정 형태의 그림을 그리고 가로줄 중간에 둥근 돌을 놓고 돈을 던진다. 돌에 가까운 돈 주인이 첫 번째 돈치기를 한다. 한꺼번에 맞추기에서 연이어 치다가 맞히지 못하면 다음 차례에 넘긴다. 돈이 겹치거나 세 겹 이상일 때도 한 번 맞히면 돈을 맞힌 사람이 가진다. (11) 산치기 돈을 거는 노름이다. 산주가 주먹 안에 몇 개의 돈을 쥐고 홀수, 짝수 또는 1,2,3으로 돈을 건 사람이 불러 맞추는데 못 맞히면 산주에 돈을 주는 놀이이다. (12) 점복(占卜) 가. 토정비결 정초에 ‘한 해의 재수는 설날에 있다’고 하여 연초에 닥쳐올 운수가 어떠할지 알고 싶어서 점을 치는데 토정 이지함의 토정비결을 많이 본다. 나. 윷점 윷을 세 번 던져서 64괘에 맞추어서 신수를 풀이한다. 요즈음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3) 입춘일(立春日) (1) 春祝(춘축), 춘첩자(春帖子) 입춘일은 천세력이 정해져 있는데 대개 연초에 드는 경우가 많다. 입춘일에는 도시나 시골, 농촌 할 것 없이 각 가정에서는 화선지에 축원의 글을 써서 대문, 광, 안청, 문기둥에 붙인다. 이를 춘축이라 한다. 시인들의 좋은 시를 써 붙이는 것은 춘첩자라고 한다. (2) 금식수(禁食水) 13일부터 하루를 한 계절로 쳐서 13일은 춘절, 14일은 하절로 ‘누더름날’이라고 하며 늦여름이라는 뜻이다. 15일은 추절, 16일은 동절로 친다. 14일인 누더름날 또는 누더름날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이웃사람을 청하여 대접한다. 특히 다른 성받이 세 집 밥을 얻어먹어 식보(食補)하면 한해를 몸 건강히 지내고 복(福을) 얻는다 하여 아이들을 친히 아는 세 집에 놀러 보낸다. 그런데 다만 음식을 주거나 먹는 대신 물을 청해서도 안 되고 물을 주지도 않는다. 물을 청하지 않기 위하여 매운 김치를 먹지 않는다. 농사짓는 집에서는 식수를 남에게 주면 여름 폭우 때 논과 밭의 두렁이 무너진다고 하여 꺼린다. (3) 제웅(處容) 14일 밤에 액년 나이로 직성이 든 사람의 집에서는 제웅을 만들어 거리나 개천에 버린다. 남자는 11살된 사람을 축으로 하여 아홉 살씩 올린 20, 29, 38, 47, 56세의 사람이고, 여자는 10살을 축으로 아홉 살씩 올려서 19,28,37,46,55세의 사람이 해당된다. 액년이 든 사람은 한 해동안 모든 일이 뜻대로 안 될 뿐 아니라 화를 입거나 병이 들어 불행을 당하게 되므로 제웅으로 미리 액땜을 한다는 뜻이다. 제웅은 짚으로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배나 허리 부분에 돈이나 쌀을 넣고서 액년이 든 사람의 생년월일을 적은 종이를 넣어 동여매어서 버린다. 이 제웅의 돈을 줍고자 제웅에 손을 댄 사람이 대신 액을 가져간다고 한다. 이전에는 동네 아이들이 돈을 찾아서 제웅찾기를 하였으나 지금은 제웅을 잘 건드리지 않는다. 제웅의 유래는 신라의 처용고사에서 비롯된다. (4) 사주, 적선 정초 14일 이후로 액이 든 사람들은 시주나 적선을 하면 그 해 집안이 화평하고 복을 받는다고 여겨 스님이 오면 시주하고 거지가 오면 동냥돈을 준다. 이를 ‘적선한다’고 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액운이 멀리 간다고들 한다. 신앙심이 두터운 부녀자들은 절을 찾아 시주도 한다. 옛날에는 다리를 놓은 월강공덕, 샘을 파주는 정천 공덕, 세금을 물어 주는 세금공덕 등이 있어 시주에 공덕비도 세워 주었으나 지금은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 4) 대보름 (1) 달집 그을기 지금은 전통 민속놀이의 보전이라는 캠페인이 벌어져서 설날에 고향 찾기와 달집태우기와 달맞이놀이가 성행하고 있다. 달집은 남강변의 고수부지나 동네 넓은 터에 나무와 대나무를 얽어서 집을 짓는다. 달이 떴다는 소리와 함께 달집에 불을 지른다. (2) 연날리기 달집에 불을 지르면 미리 송액이라고 쓴 연을 연줄 껏 날리던 것을 끊고 얼레를 달집에 던져 불태운다. 동네 아낙네 중에 남자아이를 못 낳은 여성은 달집 기둥이나 얼레가 타고 남은 것을 주워 간다. (3) 달맞이 대보름날 달집 옆에서 솟아오르는 달을 보려고 모여 드는데 달맞이라고 한다. 달을 보면 합장하면서 제각기 기원을 한다. (4) 달 점 달을 보고 한 해의 기상을 점치는데 달빛이 희면 비가 많이 내리고 붉으면 한발이 심하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달빛이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 달이 남으로 기울면 해변에 풍어가 들고 북으로 기울면 산마을에 풍년이 든다고 했다. (5) 귀밝이술 보름날 이른 아침에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해서 찬 술을 한잔씩 마시는데 ‘귀밝이술’이라고 한다. 술을 데우지 아니한다. 부녀자도 마시는데 귀밝이술을 마시면 1년 동안 좋은 소식을 듣는다고도 하며 귓물이 나지 않는다고도 한다. (6) 부럼 보름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밤, 호도, 잣, 은행 등을 깨무는데 부럼이라고 한다. 1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말고 무사태평하고 만사가 뜻대로 되기를 기원한다. 나이 수대로 깨물지만 노인은 몇 개만 깨문다. (7) 약밥 약밥은 보름날에 먹는다. 약밥은 찹쌀, 대추, 밤, 꿀, 잣을 섞어 쪄서 만드는데 검붉은 빛이 나고 단맛이 있으니 오래 두고 먹어도 좋다. 약밥은 독특한 맛으로 잔치상에 오르는 음식이다. 약밥 만드는 유래는 삼국유사의 사금갑조에 기록된 소지왕과 쥐, 까마귀의 이야기(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에서 비롯된다. 보름날, 상원날은 까마귀날이라고도 하는데 약밥으로 까마귀에게 제사 지내는 민속이 생긴 것은 오래된 것이다. (8) 오곡밥 보름날에는 보통 다섯 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 지은 밥을 먹는데 이것이 오곡밥이다. (9) 삼성식(三姓食), 백가반(百家飯) 보름날에는 각기 성이 다른 세 집안의 밥을 얻어먹어야 그해의 운이 좋다고 하였다. 또 하루 세 번 먹는 밥이 삼성식으로 하루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하는데 이는 옛말이 되었다. 또 백집밥을 얻어먹으면 좋다고 하였는데 그 만큼 집안과 동네의 많은 사람과 사귄다는 뜻이 된다. (10) 복쌈 보름날에는 밥을 김이나 취에 싸서 먹는데 이를 복쌈이라고 한다. ‘진주복쌈’은 상추쌈이나 배추쌈을 싸서 먹을 때 속잎은 바깥으로 하고 겉잎 쪽에 밥을 싼다. (11) 진채식(陣菜食) 보름날에 호박고지, 무말랭이, 외고지, 가지나물, 버섯, 고사리 등 여름에 말려 둔 나물을 삶아 먹는데 이를 진채식이라 한다. 진주에는 요즈음 시장에서 다섯 가지 이상의 나물을 사 와서 진채식을 만든다. 진채식을 먹으면 여름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12) 오광대놀이 진주지방에는 예부터 보름날 밤에 동네마당거리나 타작마당거리에서 동네 어른이나 청년들이 장작불을 피우고 오광대놀이를 하였다. (13) 줄다리기 진주에서는 줄싸움을 두 번 했는데 첫 싸움은 정월 16일에, 두 번째는 추수 뒤에 하였다. 늦가을에 하는 줄싸움은 굉장히 큰 행사였다. 첫 번째 줄싸움은 대보름날 달집 태운 다음 날 줄다리기(줄싸움)를 한다. 진주줄싸움은 동서로 나누어 줄을 다리는데 북문거리, 남강배다리, 객사를 잇는 남북을 경계로 하여 사람들이 편을 나누어 줄을 만든다. 수줄과 암줄은 동서 번갈아 정한다. 암줄도래에 수줄을 넣고 2m정도의 줄 비녀(꽂을대:꽂대)를 가로질러 꽂는다. 진주는 풍년기원제로 줄다리기를 했는데 이기는 쪽에 풍년이 들고 진 쪽에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이때 진주농악도 동서로 나누어져서 진풀이 굿을 하며 흥을 돋우었다. 워낙 큰 행사라 1939년을 끝으로 재현되지 못했다. 줄다리기에 소년들이 참석하여 다치거나 신발을 잃어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14) 숯불놀이 달집 태운 다음에 동네 아이들은 숯불놀이를 한다. 양철조각이나 깡통에 못 구멍을 뚫고서 그 속에 장작을 태운 숯불을 넣고 1m~1.5m의 줄을 달아서 빙빙 돌린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붉은 남강을 남북으로 끼고 붉은 불꽃이 둥근 원을 그리는데 한 개의 그림 같다. 자기 동네 아이끼리 멀리 던지기의 내기도 한다. 아이들이 돌아갈 무렵 남북에서 숯불을 던지는데 이를 숯불싸움 이라고 한다. (15) 지신밟기 보름달 동신제 등을 지내고 나면 동네의 부자집을 찾아서 농악대를 앞세워 지신밟기를 한다. 지신밟기에서 거둔 돈을 동네 행사비 또는 길 닦기, 새미치기 등의 동네재정으로 쓰인다. 진주의 지신밟기는 매구쫓기라고도 하고 매구놀이라고도 한다. 농악을 매구치기라고 한다. (16) 더위팔기 보름날 아침에 일어나서 집안에서는 남매끼리 동네에서는 친구들에게 먼저 이름을 부르고 무심결에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라” 라고 말하는데 이로써 더위를 판 셈이 된다.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않고 미리 기다렸다가 ‘내 더위 사라가’고 해도 더위를 팔게 된다. 요즈음은 집집마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있어 더위팔기는 싱거운 놀이가 되었다. (17) 개보름 보내기 개는 아침, 저녁 또는 낮에도 먹이를 주는데 대보름날에는 종일 먹이를 주지 않는다. 대보름날에 먹이를 주면 개가 마르고 파리가 잘 붙는다고 한다. 사람이 밥을 굶으면 속담처럼 ‘개 보름 쉬듯 한다’라고 하고, 편히 노는 사람을 ‘개 팔자’라고 한다. 2. 2월 1) 새경날, 머슴날 2월 1일이 되면 농사짓는 집에서는 머슴들에게 일 년의 품삯을 정하는데 이날을 새경날이라고 한다. 20세가 된 머슴은 이날부터 어른대접의 품삯을 받으며 술대접도 받는다. 동시에 주인집에서 음식과 술을 내어 머슴들을 즐겁게 놀게 하는데 이를 머슴날이라 한다. 2) 경칩일(驚蟄日) 경칩에는 날씨가 따뜻해서 초목의 싹이 돋아나며 동면하던 짐승도 땅속에서 나온다. 경칩에 진주지방에서는 지리산 고리수나무에 칼집을 내어 나무에서 나는 물을 마시면 위병이나 성병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약으로 먹는다. 3) 춘계석존(春季釋尊) 2월 첫 정일에는 향교에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곧 춘계석전이다. 이는 유교사회의 전통으로 유림 유생들에 의해 진행된다. 4) 청명일 청명일은 한식 하루 전이거나 같은 날이 된다. 5) 한식일 동지 뒤 105일째 되는 날이 한식일이다. 이 날은 조상의 묘에 과일과 떡 등을 차려놓고 한식차례를 지낸다. 또 조상의 묘가 헐었으면 떼를 입히는데 개사초라한다. 미신이 심한 집안에서는 한식일에 이장도 하고 석물도 세우고 산에 나무도 심는다. 6)꽃샘 2월 중에 바람이 많이 분다. 지리산의 맞바람이 불어 김칫독이 깨어진다고 한다. 꽃에 새 움이 트고 싹이 나며 꽃봉오리가 지므로 바람신이 샘이 나서 꽃을 피우지 못하게 바람을 불게 한다고 하는데 이를 ‘꽃샘’ 또는 ‘꽃샘바람’이라고 한다. 3. 3월 1) 3월 3일(삼짇날) 삼짇날에는 강남에 갔던 제비도 이 날이 되면 제 집에 들어온다고 한다. 산에 핀 진달래꽃(참꽃)을 뜯어다가 참기름을 바른 쌀가루 반죽의 떡을 지져 먹는데 꽃전이라고 한다. 진주 근방에는 녹두전이 유명하다. 삼짇날에 여자들은 머리를 감는다.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검고 아름다워진다고 한다. 2) 기자원(祈子願) 자식을 두지 못한 부녀자는 자식을 얻기 위하여 고목이나 기암을 찾아 가서 절하고 빌며 자식 잉태하기를 빈다. 이런 풍속을 기자속이라고 한다. 요즈음은 산아제한으로 많이 행하여지지 않는다. 3) 창렬사제(彰烈祠祭) 3월 첫 정일에 임진계사의 왜란에 순절한 창열사 봉안의 신위들에 제례를 올린다. 4. 4월 1) 4월8일(사월초파일) 4월초파일은 석탄절로 공휴일이다. 절에 단 등에 불을 붙이면 장관을 이룬다. 등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월등, 칠성등, 학등 등의 이름을 붙인다. 진주 근방에서는 초저녁에 3곳의 절에 둘러 오면 1년 중 발병이 나지 않고 건강하다는 풍속이 있다. 2) 봉선화 손톱물들이기 봉선화를 따서 백반을 섞어 돌로 찧은 다음 물들이고 싶은 손톱에 붙여서 헝겊으로 싸고 그 위에 실로 감아 하룻밤을 두었다가 다음날 풀면 손톱에 그대로 아름답게 물들어진다. 붉은색은 잡귀를 쫓는다고 하여 붉은 색을 즐긴다. 3) 사월 미나리강회 4월이 되면 미나리, 파 등이 제 맛을 내는데 이를 화전처럼 기름에 튀기어 먹는다. 이를 기름전이라고도 한다. 5. 5월 1) 단오 5월 5일은 단오, 수리, 수릿날, 천중절, 중오절, 단양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진주근방에는 쑥떡을 쪄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말도 있고 수리치로 나이만큼 쑥떡을 해먹기 때문에 수리날, 수리떡이라고도 한다. 2) 창포 단옷날에는 창포에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에 윤이 나고 빠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요즈음에는 샴푸 종류가 많이 나와 이 풍속은 사라지고 있다. 3) 단오부채 단오가 되면 부채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요즈음은 선비나 예술인들이 선물용으로 부채에 시구나 민속성어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서 돌린다. 4) 그네뛰기 단옷날의 여성들의 놀이로 그네뛰기가 있다. 진주 근방은 동네의 정자나무에 줄을 달고 그네를 뛰나 그렇게 성하지는 않았다. 6. 6월 1) 유두, 천렵 6월6일은 유두라고 하는데 동류두목욕에서 유래한다. 진주 근방에서는 옛날에 동네사람들이 뜻을 모아 남강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거나 아니면 아낙네 모르게 개를 잡아서 천렵이라고 하여 고기 먹고 술 마시고 강물에 목욕도 하였다. 2) 삼복 하지부터 셋째 경일을 초복, 넷째 경일을 중복, 입추일부터 첫째 경일을 말복이라 하고 통틀어서 삼복이라 한다. 복날의 음식으로 삼계탕이나 보신탕을 잘 먹는다. 단, 태어날 때 태를 목에 감고 태어난 사람이나 절에 빌어서 태어난 사람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3) 임진대첩(壬辰大捷) 및 계사순의단제(癸巳殉義壇祭) 6월 그믐날 임진대첩과 계사년 함성 때 순절한 영령을 제사지낸다. 진주와 나주의 문화원이 자매를 맺어서 이날 함께 제례에 참석한다. 계사년 창의사 김천일이 나주 출신이기 때문이다. 7. 7월 1) 칠석 견우와 직녀의 전설 속을 따라 소년에는 글공부를, 소녀에는 바느질 솜씨를 권한다. 2) 폭서 칠석날에 책을 많이 가진 사람은 책을 햇볕에 말린다. 3) 백종일 7월 15일은 백종일, 백중절, 망혼일 이라고 한다. 이날에 집안에 신주나 사당을 모시는 사람은 천신(새로 나는 음식을 올리는 것)을 한다. 4) 호미 씻기, 머슴 소태우기 옛날에는 7월 15일을 전후하여 호미 씻기날을 정하는데 초연 또는 머슴날이라고 하여 하루를 쉰다. 농가에서 농사일에 수고한 머슴을 소에 태우거나 가마에 태운 후 위로하고 흥겹게 잔치를 했다. 5) 논개제 7월 7일에는 계사년 진주성 함락 때 왜장을 안고 죽은 진주 관기 논개의 제사를 지낸다. 옛날에는 7월 1일에 기생들이 제사를 지냈다. 8. 8월 1) 추계석존 8월의 첫 정일(丁日)에는 향교에서 추계석전제를 올린다. 2) 벌초 추석 전에 조상묘를 찾아서 잔디나 잡초를 베는데 이를 벌초라고 한다. 벌초 때 조상묘에 절을 하기 때문에 벌초성묘라고도 한다. 3) 추석 추석 또는 가위, 한가위, 중추절, 가배일 이라고도 한다. 8월 15일의 추석과 정월의 설날이 명절이 되어 연휴가 겹쳐 우리나라 민족의 대이동이 이때 이루어진다. 아침에는 추석차례를 지내고 진주 사람들은 곧바로 선산에 성묘를 간다. 저녁이 되면 가족과 친척이 어울려서 달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놀이나 가족 오락회를 펼친다.
4) 씨름 진주는 추석 다음날부터 씨름판이 열린다. 진주에는 옛날부터 천하장사가 많이 나서 유명하다. 양점배 장사는 대소 씨름판에서 218회 연속 우승하여 유명하다. 또 1948년에 진주에서 처음으로 여자씨름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기록도 있다. 5) 소싸움 진주는 씨름판과 소싸움이 유명하다. 특히 소싸움은 전국 중심지로서 진주투우협회가 있다. 소싸움의 소는 갑·을·병의 3체중으로 나누며 토너먼트식으로 진행한다. 소싸움 때 거는 기술도 48수가 있다고 한다. 소싸움에 나오는 소는 별도 육성하며 어릴 때부터 훈련시킨다. 1960년대의 진주농고의 맹우, 의령의 의용이 등이 유명했으나 두 마리 모두 자주 소싸움을 붙여 뿔이 빠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6) 쾌지나칭칭나네 추석에 진주의 모래밭에는 씨름판, 소싸움판이 벌어지는데 이때 몇 년 만에 사돈을 여기에서 만나기도 한다. 특히 소싸움판에 동원된 농악대와 소주인의 가족, 그리고 동네후원회의 남녀노소가 어울려 소를 둘러싸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것을 쾌지나 칭칭나네라고 한다. 마치 전라도의 강강수월래와 같다. 진주는 진주농악의 12차 5진법의 진법에 따라 돈다. 진주에는 요즈음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진주전통민속놀이를 찾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울려서 쾌니자칭칭나네의 원무진법의 놀이를 즐겨 재현하고 있다. 목청이 곱고 좋은 앞소리꾼이 맨 앞에서 진을 치거나 원을 만들며 들어가면서 선창을 하면 줄을 이룬 나머지 사람들이 쾌지나 칭칭나네라고 후렴을 하며 둥근 줄춤을 춘다. 쾌지나칭칭나네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전래된 추석의 놀이이다. 9. 9월 1) 중양절 9월 9일은 아홉의 양수가 겹친다고 하여 중양절이라고 한다. 중양절에는 국화꽃의 잎을 따서 찹쌀가루 반죽에 얹거나 섞어서 단자떡을 만들어 먹는다. 이를 국화전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중양절을 중히 여겨 불꽃놀이, 용놀이, 사자놀이를 이때에 많이 한다. 10. 10월 1) 개천절 10월 3일은 개천절이다. 우리나라의 국조단군이 하늘에서 하늘을 열고 인간 세계에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또 시월을 상달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영고, 무천의 제사와 민중놀이가 열렸다. 2) 개천예술제 진주에서 1949년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기념하여 제1회 개천예술제가 창설되어 열렸다. 이것이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열리고 있는 지방문화예술제의 효시이다. 개천예술제는 계술부문과 민속부문으로 나누며 약 1억5천만원의 비용이 드는 경남예술제로 전국에서 제일 크고 으뜸으로 친다. 참가인원과 관람객이 5일간에 3백만 명이 넘는다. 3) 전국한시백일장 음력 10월3일을 전후하여(대략 양력11월 1일) 진주문화원 주최로 전국한시백일장이 촉석루에서 열린다. 전국에서 모인 약 2백명의 선비가 한복을 입고 두건 쓰고 한지에 먹물로서 칠율의 한시를 짓는 광경은 장엄하다. 4) 시제 10월 15일을 전후하여 원근의 후손들이 선조묘 앞에 모여 제를 지내는데 시제라고 한다. 시제를 시사, 시형이라고도 한다. 보통 집안제사는 사당에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데 시제는 한 번에 지내는 것이 다르다. 시제의 경비는 문중에서 내거나 묘에 소속된 전답의 수확에서 마련한다. 5) 시월김장 겨울동안 먹을 김치를 한꺼번에 담는 일을 김장이라고 한다. 진주에는 아직도 김장품앗이, 김장두레의 풍속이 남아 있다. 11. 11월 1) 동지 천세력에서 정해진 동지는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다. 11월을 ‘동짓달’이라고 하고 또 동지를 작은설이라고 한다. 동지팥죽을 먹고서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고 치는 데서 유래한다. 2) 동지팥죽 동짓날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팥죽을 쑤어 먹는다. 찹쌀로 단자를 새알만큼씩 만들어서 죽을 쑨다. 이 단자를 새삼알이라고 한다. 동지팥죽은 먼저 사당에 놓아 차례 한 다음 방, 마루에 한 그릇씩 떠다 놓으며 대문이나 벽에 수시로 뿌리고 난 후에 먹는다. 이것은 팥죽이 액을 막고 잡귀를 없애 준다는 민속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도시 밖의 산동네에서는 고목에도 팥죽을 뿌리는데 이것 또한 액을 막는 축귀 풍속이다. 3) 책력(冊曆) 동지가 다가오면 가정마다 새해 달력을 사서 벽에 건다. 주로 약방이나 상점에서는 달력을 만들어 고객들에 선사하기도 한다. 4) 진주냉면 진주냉면은 순수한 메밀로 국수를 만들고 쇠고기 육수에 꿩고기나 닭고기를 넣고 배와 삶은 계란 그리고 붉은 실고추를 얹어서 먹는다. 추운 겨울철에 먹는 것을 별미로 친다. 12. 12월 1) 나막신쟁이 날 설을 앞두고 닷새 장에 진주는 지리산의 맞바람이 불어 가장 춥다. 이날을 나막신쟁이 날, 나막신쟁이 바람이라고 하는데 음력 12월 25일 경이 된다. 나막신쟁이 날의 유래는 말티고개에 사는 나막신쟁이가 설 장날에 나막신을 팔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관가에서 대신 매를 맞아주면 돈을 준다는 청을 받고 설치레를 위하여 돈을 받고 대신 관가에서 매를 맞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독이 도져 추운 바람에 못 이겨 얼어죽었다는 이야기에 기인한다. 2) 구세배 설 명절을 위해 객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집안 청소를 끝낸 다음 어른에게 절을 하는데 금년도 무사히 다 보낸다는 인사를 겸하여 절을 한다. 이를 묵은 세배라고 한다. 3) 제석 12월 30일을 섣달그믐 또는 제석, 제야라고 부른다. 13. 윤달 평년보다 한 달이 더 있는 달을 말하여 ‘공달’이라고도 한다. 속담에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다’고 할 만큼 어떤 일을 해도 지장이나 탈이 없다고 한다. 집수리, 이사, 이장 등에도 탈이 없다고 하여 윤달에 많이 한다. 따라서 부정이나 액을 타는 일을 이 달에 하는 수가 많다.
출처: 사주박사철학원‥‥‥太極導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