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창덕궁 복원정비 |
① 창덕궁은 태종 5년(1405) 창건 당시 만든 금천교부터 인조 14년(1636)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만든 옥류천, 정조 1년(1776)에 지은 주합루, 순조 4년(1804) 인정전, 순조 28년(1828)에 건립한 연경당, 헌종 13년(1847) 낙선재, 일제강점기 순종 14년(1920) 경복궁의 건물(교태전, 강녕전 등) 철거 부재를 활용하여 건립한 대조전, 희정당까지 권역에 따라 다양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어 어떤 특정한 시기를 복원의 기준 연도로 정하기는 어렵다. ② 따라서 창덕궁의 외조(돈화문에서 진선문, 궐내각사 구역), 치조(진선문에서 인정전, 선정전 구역), 연조(희정당, 대조전, 동궁권역 구역), 후원(삼조의 궁전 담장 밖의 주합루권역, 연경당권역, 존덕정권역, 옥류천권역 등)의 4개의 구역을 일정한 권역에 따라 기준 연도를 달리하여 복원 정비했다. ③ 창덕궁의 전통조경 복원정비 시 중요한 고증 자료로는 동궐(창덕궁, 창경궁) 내부와 외부의 건물, 나무, 산, 언덕 등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동궐도(1826~1830), 동궐도형(1900~1907), 궁궐지(17~18세기/숙종 연간, 19세기/고종 연간), 일제강점기 촬영한 흑백 사진 등이다. ④ 이러한 고증 자료와 함께 조선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나무를 종합해 보면, ㉠ 외조 공간에는 회화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전나무 등의 교목류와 매화, 복숭아 등 화목류이다. ㉡ 치조 공간은 정치 공간으로 나무를 식재하진 않지만, 정전인 인정전 뒤편 화계의 대나무가 있다. ㉢ 연조 공간은 왕, 왕비, 세자 등의 생활 공간으로 건물이 집중적으로 건립되어 있어 건물과 근접해서는 나무식재를 가능한 하지 않았지만 건물 뒤편과 좌우 화계에는 사계절 꽃과 단풍, 설경 등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앵두나무, 매화 등 화목류와 원추리, 비비추 등 야생화가 주를 이룬다. 건물과 담장 사이에는 소나무, 느티나무, 배나무, 감나무 등 교목류와 화오에는 복숭아, 매화, 진달래, 철쭉 등 화목류가 식재되었다. 특이한 점은 대조전과 화계 사이의 마당 공간에 소나무를 분경(盆景) 형태로 배치해 놓았다는 점이다. 궁궐지역(인정전 등) 뒤편 배경림은 송림이다. ⑤ 후원 공간은 문헌 등에 의하면 기화요초를 식재했다는 기록과 후원 숲에서 자생적으로 자랄 수 없는 고산식물인 오래된 주목이 연못과 건물 주변에 자라고 있다. 연경당 등 건물 및 연지 주변에 회화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다. 특히 휴식하면서 책을 읽었던 공간인 존덕정과 폄우사 옆 오래된 은행나무, 친잠례를 위해 식재한 뽕나무, 유실수로는 밤나무 배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다. 이러한 식재수종 등으로 볼 때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자연지형과 식생을 보존하면서 공간과 성격에 맞게 외부의 수목을 도입하여 식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공간과 성격에 맞는 수목을 식재하여 복원 정비하였다. ⑥ 창덕궁은 북악산 응봉에서 내려오는 자연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건물과 연못 등이 위치해 있다. 그러나 터를 잡고 건물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절・성토로 인해 경사면이 발생하게 된다. 인공적인 경사면을 주변의 자연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기 위해 몇 개의 단을 만들어 괴석, 굴뚝, 정자 등의 점경물(點景物)을 배치하고 꽃, 나무 등을 식재하여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되면서 사계절 아름다운 경관을 가깝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계단식의 단을 우리는 화계라 한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보다도 많은 화계가 만들어졌다. 궁궐은 장대석으로 화계를 조성하였으나 예외적으로 창덕궁 연경당은 양반 가옥의 형식에 맞게 지은 집으로 선향재 뒷편 화계도 양반가옥의 격에 따라 30㎝ 정도의 사고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⑦ 창덕궁의 화계는 사계절 아름다운 꽃과 열매, 단풍 등을 건물 내・외부에서 가장 가깝게 보고, 느끼고, 가꾸고, 즐길 수 있는 공간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조선시대까지는 잘 유지 관리해 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초화류와 화목류 등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크게 자란 나무, 무분별하게 식재한 외래수목, 실생 수목 등으로 훼손되었다. 따라서 화계에 크게 자라서 화계를 밀어내고 있는 수목, 외래수목 등 부적합한 수목은 제거하고 화계의 콘크리트 뒤채움을 걷어내고 석축을 보수하였다. 수목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흙을 객토한 후 화목류(앵두나무, 산철쭉 등) 등은 원칙적으로 궁궐 화계에 자라는 나무에서 씨앗을 받거나, 가지를 채취하여 사릉양묘장에서 후계목으로 키운 수종을 식재하여 복원하였다. | |
동궐도 | ①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건축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한 가로 576cm, 세로 273cm이며 순조 30년(1830)에 불타버린 환경전과 순조 34년(1834)에 중건된 통명전, 경춘전 건물은 없고 터만 그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제작 연도 연대는 1826년~1828년 경으로 추정된다. ② 16폭의 비단에 먹과 채색 물감으로 당시 궁 안에 실재했던 누정, 다리, 담장은 물론 연못, 괴석 등의 조경과 궁궐외곽의 경관까지 세밀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화원들의 뛰어난 화공기법과 정밀성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동궐도는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궁궐 연구와 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1) | 궁궐권역(외조, 치조, 연조) |
① 창덕궁 궁궐지역은 많은 건물이 철거되거나 화재로 소실되고, 건물 내・외부가 변형되었다. 또한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1901~1989. 4.30)와 덕혜옹주(1912~1989. 4. 21)가 1989년까지 낙선재에서 생활했다.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 서거 이후 진선문, 숙정문, 외행각, 궐내각사를 복원하였고, 낙선재권역은 변형시킨 고건물을 보수 정비했다. ② 건물 복원 지역의 수목 등은 사전에 이식하거나 제거하고, 건물 복원에 맞추어 조경을 정비했다. | |
가 | 외조공간 |
① 돈화문과 금천교, 궐내각사 지역에는 일제강점기 고건물을 철거하고 이왕가 행정에 필요한 건물을 건립하면서 주변에 향나무 등 외래수목과 공간에 맞지 않는 왕벚나무, 은행나무 등을 식재해 놓았다. 이를 건물 복원에 맞추어 정비한 후 매화나무 등 화목류와 느티나무, 소나무 등을 식재하였다. ② 그러나 금천교 어구 주변에 식재한 소나무 등은 동궐도 고증으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음으로 이식이 필요하고, 회화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의 수목으로 경관을 유지하여야하고, 돈화문에서 금천교까지의 박석포장과 어도(御道) 복원정비도 필요하다. ③ 오랫동안 서울시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율곡로를 지하차도로 만들어 동궐과 종묘의 주맥의 지형을 회복하고, 돈화문 차도를 Y자 형태로 우회시켜 월대를 복원 정비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시에서는 도로 우회에 따른 돈화문 건너편의 좌・우 주유소를 매입해 철거하고 한옥 건물로 신축하여 전시관 및 체험 공간으로 만들면서 창덕궁 앞의 불량한 경관이 개선되었다. | |
나 | 치조공간 |
① 치조 공간인 인정문 앞은 순종이 타는 자동차의 진출입 등을 위해 넓은 도로를 만들고 좌・우에 향나무(진선문 앞 열식으로 식재되어 있던 향나무는 굴취하여 청와대 영빈관 조경용으로 분양), 왕벚나무 등을 식재하고 건물지 뒤의 터는 잔디밭을 조성해 놓아었다. 이를 인정전 행각 복원 시 정비(이식 제거 등) 하였다. ② 또한 인정전앞 조정을 품계석과 박석을 걷어내고 연못과 모란 밭으로 훼손시켜 놓은 것을 해방 이후 품계석을 복원하고 잔디를 식재했었다. 1986년 창덕궁 궁궐 지역에 철거된 전각과 변형된 건물 등을 복원 정비하기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행각 등 건물복원과 함께 잔디밭을 원형에 맞도록 박석으로 포장하여 복원하였다. ③ 인정전 뒤편 화계는 서쪽 일부 지역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동궐도의 그림도 대나무로 추정되어 동쪽지역도 서쪽 화계와 연계될 수 있도록 대나무를 식재하였다. | |
다 | 연조공간 |
① 연조 공간인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으면서 원래의 강녕전과도 완전히 다르게 건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당 공간은 4면을 행각을 둘러 폐쇄된 공간으로 만들고 마운딩(낮은 언덕이나 구릉을 만듬)한 후 소나무, 눈주목, 회양목, 영산홍 등 수목과 이끼를 식재하고 자연석을 배치한 전형적인 일본식 중정을 만들어 놓았다. 수목, 자연석, 이끼 등을 전부 없애고, 마운딩 처리한 흙을 걷어낸 후 마사토를 깔아 평탄화 시켰다. ②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 공간으로 원래는 대조전을 중심으로 수많은 부속 건물들이 에어싸고 있었다.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재건된 희정당과 대조전의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③ 대조전 마당, 경훈각 등 행각과 연결된 건물사이 폐쇄 공간에 희정당 앞마당을 일본식 중정과 같이 조성해 놓은 것을 중정을 없애고 복원 정비하였다. 다만, 소나무는 크게 자라 경관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제거하지 않고 보존하였다. | |
⇨ 현 시점에서 볼 때 대조전과 부속 건물에 인접하여 크게 자란 소나무는 상부의 가지 등에 의해 지붕의 기와 동파, 건물의 습해 등을 유발하고 있고, 뿌리는 기단부를 훼손할 우려가 있어 높아 제거하고, 동궐도와 같이 소나무를 분경하여 식재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 |
④ 희정당・대조전 권역 화계는 남쪽의 건물지역을 제외한 동・서・북의 3면의 절개지를 화계로 만들고 후원과 공간분할을 위해 담장을 설치했다. 단풍나무 등 활엽수의 씨앗이 발아하면서 화계의 장대석 사이에서 크게 자랐고, 일부 지역은 나지로 집풀만 무성했다. ⑤ 화계의 식재 하였던 반송(다행송), 소나무 등 일정한 주기로 교체해 주어야 하나 유지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크게 자라 화계의 장대석을 밀어내고 있었다. 따라서 외래수목(가이즈까향나무, 노무라 단풍 등) 등을 제거하고, 대조전 동쪽으로 하게 원래부터 자라고 있었던 앵두나무, 산철쭉 등의 수종을 북쪽과 서쪽의 보완식재 하고 비비추, 옥자마, 들국화 등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지는 다년초화류를 식재하여 화계의 경관을 회복하였다. 또한 큰소나무 등을 제거하고 작은 소나무 등으로 교체하였다. ⑥ 그러나, 아직도 크게 자란 수목이 화계에 자라면서 장대석을 밀어내고있어 태풍, 대설 등의 자연재해에 의해 넘어질 경우 고건물 피해 등이 발생할 우려가 높으므로 이를 제거하고 낮은 수목으로 식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앵두, 철쭉 등의 화목류, 야생화 등의 지속적인 보안식재와 함께 지속적인 유지 관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 |
⑦ 낙선재 화계는 장대석을 보수하면서 시멘트콘크리트로 뒤채움해 놓아 수목과 식물이 자랄 수 없는 화계공간을 만들어 놓았고, 식재되어 있는 수목도 화계에 맞지 않는 가이즈까향나무, 회양목 등이 자라고 있어 화계의 경관을 저해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화목류와 초화류 등을 식재할 수 있도록 장대석 콘크리트 뒤채움을 제거하고 배수가 잘 되도록 잡석 뒤채움으로 개선한 후 사질양토에 부엽토를 섞어 토양을 개량하였다. 담장, 굴뚝, 괴석과 어울릴 수 있도록 산철쭉, 앵두나무, 매화 등의 화목류와 옥잠화 등 다년생 초화류를 식재하여 정비했다. ⑧ 낙선재 앞 넓은 마당은 이방자화사가 생활하면서 건립했던 불필요한 시설물 등을 철거하고, 매화, 산수유, 살구나무 등 화목류를 식재하였고, 우물을 발굴하여 복원 정비하였다. ⑨ 승화루 앞 화계는 크게 자라서 건물을 가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계의 장대석도 훼손시키고 있어, 일부 반송을 솎아베기하였으나 근본적인 개선이 되지 못했다. 반송을 전면적으로 제거하고 작은 반송으로 일부 교체하되 화목류와 초화류 등을 보완식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⑩ 또한 희정당・대조전・낙선재 권역은 1920년대 일본인들에 의해 변경되었다. 그러나 동궐도 등의 고증에 맞게 복원하기는 현 시점에서 어려움이 많고, 경복궁 건물의 이전 건립 등 그 당시의 연결된 역사도 함께 보존할 필요가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현재 넓은 공간은 북악산 응봉에서 창덕궁-종묘로 연결되는 지형의 주맥을 보존하는 방향에서 지형과 수목의 식재가 필요하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