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 오늘의 내가 있기 까지
이 동규
나는 우리나라 문향인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읍내에서 약 10리(3.5㎞) 외곽에 있는 농촌마을에 있었다. 나는 한 학년에 한 반(60명)뿐인 장흥동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매일 학교 다녀오면 책보는 어딘가 던져버리고 소 풀 먹인다며 집을 나서 맘껏 산등성이에서 뛰어 놀고 해질녘에 집에 들어오는 것이 일과였다. 소설책이나 무협지를 좋아하여 이웃집이나 일가에서 빌려 밤새워 읽었다. 물론 사랑방에서 동무들이랑 노는 일에는 빠지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장래 뭐가 되겠다는 포부는 전혀 없었다.
54년만에 만난 국민학교 동창들 2013. 1. 19
이 동규
서울이 멀지 않다고 한번
올라 오라한다. 한번 보자고 한다.
평기의 성화에 못이긴 척
서울 나들이를 했다.
모두 일어선다. 나를 모른다. 나도 모른다.
세월이라는 깊은 늪 때문만은 아니다.
우등상을 한 번도 못 타본
달리기에서 한 번도 1등을 못해본
학예회에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반장이나 부반장을 한 번도 못해본
키도 작아서 한 번도 눈에 띠지 못한
숫기가 없어 한 번도 남 앞에 나서지 못해본
나였기에
54년만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옛 모습을 못 찾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그래도 소주 몇 잔 오가고
그 시절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자
타임머신은 54년 전으로 순간 이동을 한다.
아 그래, 그랬었지
기억 나
너희는 정말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구나
몇 시간의 만남으로
초등학교 졸업 사진과 너무 다른
주름진 얼굴, 드러난 광대뼈
없어진 머리칼이
기억을 못하게 가로 막지만
그러나 어쩌랴
우리 모두 인연의 동아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꿈
- 이동규
꿈이었지만 선명했다
덩니미 저수지가 보이고
흰 구름 낮게 걸쳐있는 당뫼산도 보였다
시골 어린이 그 시절처럼
소 돌보는 핑계로 책보는 내팽개쳤다
당뫼산 소는 제 알아서 풀 뜯고
나는 동무들과 화랑놀이로 몸에 땀 차면
덩니미 저수지에 그냥 뛰어들었다.
사 년에 한 명씩 사람을 잡아먹고 산다는
물귀신 따위는 아랑곳없이
물뱀과 뒤엉켜 두어 바퀴 휘젓다가
불현듯
소 생각
둑으로 기어나와
목청껏 소를 부른다.
삐비 풀 삐죽대는 산등성을 타고
하늘을 향해 뛰어 오르는
오늘도 나는 덩니미 저수지를 물뱀처럼 휘젓고
당뫼산 등성에서 푸른 하늘로 날아오른다.
* 당뫼산 : 장흥 억불산 밑의 공동묘지가 있는 산등성이로 월평에서 500메터 정도 남쪽에 있음, 억불산 밑의 조그마한 산등성으로 공동묘지가 있음
* 덩니미 저수지 : 억불산 밑의 안양쪽 저수지로 당뫼산 너머에 있음
그리고는 읍소재지에 있는 장흥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고등학교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전남지역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인 광주일고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장흥중학교에서 잘해야 한두 명 합격하는 고등학교여서 분명히 과욕인데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결과 3학년 때는 난생 처음으로 우등상이라는 것을 탔다. 성적도 전교생 360명 중 5등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고등학교는 입학시험도 치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집안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하시던 가내 수공업이 거덜이 났던 것이다. 재산인 논밭도 팔고 상머슴 노릇하던 암소까지 처분하여 빚잔치를 벌여야 했다. 그러니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도 하고 싶고 장흥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한 달 쯤 집에 있다가 같은 생각을 가진 동네 친구와 함께 무작정 보따리를 싸서 소위 가출을 했다. 몰래 쌀을 훔쳐서 여비를 장만하고 훌쩍 광주로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사글세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밥도 할 줄 몰랐다. 겨울이라 방은 춥고 손은 몹시 시렸다.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밤중에 일어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달 동안을 이렇게 지내는데 돈은 다 떨어지고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여 3개월 만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쳐버리겠다는 청운의 꿈은 한달 만에 일장춘몽으로 끝이 났다. 왜냐하면 할머님께서 자취방까지 손수 찾아오시어 내년에는 반드시 고등학교에 보내줄테니 그만 장흥으로 내려가자고 나를 설득하신 때문이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짐을 싸서 시골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나의 가출은 1개월여 만의 해프닝으로 끝난 것이다.
다시 고향 월평마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동네에서 놀다보니 또래의 아들과 함께 부락공동체를 만들어 청소도 하며 네 쪽 짜리 마을 소식지를 냈다. 마을 노래 가사를 직접 지어 곡을 붙여 불렀다. 동네 두레운동이었다. 이렇게 놀면서 집 밥을 먹으니 너무 좋았다. 오후에는 소 풀 먹이로 당뫼산 덩님이 저수지로 가고, 비오면 돼지 꼴 베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닭서리, 토마토 서리, 참새잡기 등을 하며 사랑방에 모여 놀다 보니 시간이 잘도 갔다. 어느 듯 9월이 되었다. 다시 고등학교 입학시험 공부를 시작하였다. 초꽂이에 불을 켜서 공부하는 통에 아침에 보면 콧구멍이 시커멓게 그을렸다. 그러다가 전기가 들어왔다. 특선은 아니고 일반선이어서 밤 9시가 되면 어김없이 전등이 꺼졌다. 그러면 다시 석유심지를 꽂은 초꽂이 불의 흔들리는 불빛에서 공부를 했다. 그해 12월에 광주에 사는 먼 친척집에 식비 대신 쌀자루를 들쳐 메고 가서 전남에서 가장 어렵다는 광주일고 입학시험을 봤다. 음악이나 미술이 특히 약해서 그 부분 문제는 솔직히 말해서 찍었다. 합격자 발표가 났다. 1번부터 100번까지 사이에서 세 명이 합격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였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찍은 것 중에 몇 문제가 맞은 것이 분명했다. 광주일고의 합격은 고향 월평마을에서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학원은 어디를 다녔느냐, 어떻게 공부했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나는 학원도 다니지 않았고, 순전히 혼자서 교과서를 외다시피 했고 남들이 다 보는 참고서 몇 권을 중심으로 공부했을 뿐이어서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어떻든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결단을 통해서 내 인생의 중요한 첫발을 내디뎠다. 도시에 와서 우선 좋았던 것은 학교 도서관에 책이 많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서 살았다.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과 싯다르타는 여러 번 읽은 것 같다. 그런데 시골에서 놀고 지내던 버릇이 어디 가랴. 1학년 때는 반 친구들과 함께 북동탁구장이라는 곳에서 주말을 온통 보냈다. 2학년 때는 친구의 형이 하는 당구장에서 몰래 당구를 치며 보냈다. 학생출입금지라는 동방극장에 이태리영화를 보러갔다가 담임선생님한테 들켜 교모까지 뺏겼으나 시인이시던 선생님은 자작시 “오월은 출렁이는 동해바다....” 를 읊으시며 한바탕 문학적으로 충고하고는 훈방하여 주셨다.
회사에 취직을 하신 아버님 덕에 2학년부터는 하숙을 하였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었다. 고3이 되자 바로 모의고사가 실시되었다. 480명 중 180등이었다. 이 성적으로는 서울대를 합격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탁구, 당구 등 온갖 잡기를 끊고 서울대에 들어간다는 목표를 세워 공부에 전념하였다. 마지막 모의고사에서는 7등까지 올라갔다. 그 실력이면 서울대의 어느 학과를 진학하건 수석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서울대로 가면 무슨 과를 갈 것인가? 처음에 담임선생은 의대를 권했다. 그러나 의대는 수업연한이 너무 길어 집안 형편상 가기 어렵다고 말하자 그렇다면 서울대 중 가장 경제적으로 적게 먹히는 농대를 추천했다. 대학만 졸업할 수 있다면 하는 당시의 나의 소망과 맞는 것 같아 결국 농대로 진학하였다. 다행히 수석이었다. 대학학비와 기숙사비는 대부분 장학금으로 해결했다. 우리 집안에는 한문만 수학하였지 아무도 새로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내가 최초로 고등학교와 대학을 간 것이다. 그 당시 집안에서 나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히 내 진로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몸에 박힌 말
이동규
예전엔 어머니가
운동회에서 3등 공책 타오면
“와따 잘 했다”
중3때 우등상을 탔다고 내밀었더니
“와따 잘 했다”
턱걸이지만 광주일고 들어갔다고 말씀드리니
“와따 잘 했다”
서울대학에 합격했다고 하니
“와따 잘 했다”
80이 훨씬 넘은 요즘엔
출근한다 인사드리면
“일찍 댕겨오너라”
서울 다녀온다고 인사드려도
“일찍 댕겨오너라”
외국 갔다 오겠다 말씀드려도
“일찍 댕겨오너라”
퇴근했다고, 저녁 밥 먹고 왔다고 고하면 항상
“일찍일찍 댕겨라?”
대학생활은 문학, 역사, 종교, 어학공부 그리고 여행 등으로 보냈다. 다행히 학기 중 데모가 항상 있었기 때문에 대학 수업은 별로 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는 금서였던 막심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 필사본을 빌려 밤중에 몰래 보던 기억도 난다. 좋아하는 시를 모아 공책 “나의 낭송시” 한권을 만들기도 하였다. 당시 펜팔로 알게 된 여학생과는 삶과 사랑 등에 대해 한 번에 원고지 100매에 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한때 불교에 심취하여 수원 마하사라는 절에서 여름방학을 통째로 보낸 적도 있었다. 또 당시 대학생에게만 통했던 무전여행으로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하였다. 물론 곳곳에 있는 친구 집을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내 고향 장흥은 걸어서 다녀보아야 한다며 도보로 보림사, 천관산 등 을 여행하였다. 근대 역사를 공부하다가 한용운, 전봉준에 심취하였다. 서울에서 하는 광주학생운동 기념사업에 참여하여 “학생운동”이라는 잡지를 편집하고 전봉준에 대해 글을 써 발표도 하였다. 영어, 일어, 독어를 틈틈이 공부하였다. 그리고 ROTC를 하다 보니 대학생활이 살같이 지나갔다.
ROTC는 통역장교로 근무하였다. 복무를 마치고 농협중앙회에 입사하였다. 그간 닦아온 영어실력 덕분에 외국인을 교육 ․ 훈련시키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책임자급으로 승진하였다. 다행히 승진고시 성적이 우수하여 연수원에 가면 공부를 좀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연수원교수를 지망하였다. 연수원이 대전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79년에는 영어시험으로 뽑는 이태리 ILO(국제노동기구) 훈련과정에 선발되었다. 이태리 토리노에 5개월간 파견되어 협동조합 지도자과정을 이수하였다.
나는 연수원 교수 요원 중 가장 젊어서 나에게는 회계학과목이 배정되었다. 당시 아무도 맡기 싫어하던 회계학이라는 전공과의 만남은 이렇게 하여 우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절친했던 농협중앙회의 선배 조언도 있고 하여 나는 바로 야간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였고 담당과목인 회계학을 전공하였다. 그 뒤 중앙회본부에 와서 근무하라는 제안도 받았으나 거절하고 대전에 남아 내친김에 박사과정까지 진학하였다. 그리고 박사과정 1년 수료 후에 충남대 회계학과 교수로 채용되었다. 운도 좋았지만 당시만 해도 박사과정을 하는 사람이 드물고, 특히 회계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것의 없었다는 점은 큰 경쟁력이었다. 그리고 학부 대학원 등의 학업성적이 거의 A학점이었다는 점 그리고 영어, 일본어, 독일어 등 어학 실력을 갖췄다는 점 등이 크게 작용을 한 것이다. 미래에 내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학부 때부터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둔 것이 기회를 붙들 수 있게 했다고 생각된다. 지나놓고 보면 미래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1982년부터 대학에서 30년간 강의와 연구를 하였다. 1980년 초반에는 거문고를 배우고 연주활동도 하였다. 1988년도에는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임윤수원장이 나와 마누라 두 사람만 앉혀놓고 박사학위취득기념 연주회를 열어주었다. 나의 전공지식을 통해 지역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서 시민단체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나는 30년간 토요일 일요일 휴일 가릴 것 없이 매일 아침 6시 연구실로 출근하였다. 그리고 오후 3시 이후에는 항상 테니스를 하였다. 연구는 주로 남이 하지 않는 분야인 비영리조직의 회계를 하였다. 저술한 전공 저서 22여권 중 대부분이 비영리회계, 학교회계, 사회복지법인회계, 정부회계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문학관련 활동도 시작했다. 대한문학인협회라는 문학모임을 통해 습작을 발표하다가 2001년 한맥문학 시부문으로 등단을 하였다. 첫 번째 시집 “몸이 말을 하네”를 내고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였다. 두 번째 시집 “몸의 말을 듣다”, 세 번째 시집 “몸에 박힌 말”을 출간하였다. 그간 생활하면서 느낀 글을 정리하여 산문집 “낭비야 가라”를 출간하였다.
특히 회계학이라는 전공이 하도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 강의를 유머러스하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평소에 모아둔 유머를 묶어 유머집 “일주일만에 유머 달인 되기”를 펴냈다. 2009년도에는 한 해에 네 권의 책을 내게 되어 두 번째의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였다. 2012년에는 좀 더 유머에 대한 체계를 세워서 “행복은 유머를 먹고 자란다”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아버님 병상을 지키면서 살아오신 일생 이야기를 녹취 ․ 정리하여“아버님 정당 이병하”라는 일대기를 냈다.
충남대의 테미교(테니스에 미친 교수)의 교주로서 테니스에 미친 30년, 회갑기념 테니스 대회 등을 개최하였다.
대학에 있으면서 일본, 중국, 유럽, 아시아 대학과의 국제교류 활동에 참여하였다. 일본 후꾸오까의 규슈산업대학과에는 국제교류 관계로 15회나 학생들을 인솔하여 방문하였고 두 차례 학술 발표도 하였다. 일본의 돗토리대학, 홋가이도 지방의 워타루상과대학과도 국제교류에 참여하였고 체코, 항가리, 뉴질란드, 호주, 중국(대련, 길림, 하얼빈), 베트남 대학, 몽골의 울라바트라대학과의 국제교류에 참여하였다.
이태리에 있으면서는 이태리 지방, 스위스,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오스트리아, 베네룩스 3국 등의 협동조합을 방문하고 여행도 하였다.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 괌, 헝거리,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스웨덴, 터키, 태국, 라오스,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미국, 홍콩, 마카오 등을 여행하였다. 일본에서는 동경, 교토, 오사카, 돗토리, 삿뽀로, 워따루 등 홋가이도 지역 등을 다녀왔다. 중국에서는 계림, 북경, 장가계, 시안, 백두산, 황산 등을 구경하였다.
현재는 충남대 경영학부 명예교수이며, 관심 분야인 비영리회계에 관련한 저서를 집필 중이다. 충남대에서는 입학사정관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전공을 살려서 대전지역의 사회경제조직(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 자활공동체 등)에 대한 컨설팅서비스를 제공하는 살림경영경제연구원 대표이사 겸 원장으로서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또한 문인으로서 호서문학회 활동, 대전문학인협회 활동, 별곡문학회(장흥) 활동, 대전중구문학회 활동 등을 하면서 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시민활동으로서는 대전충남녹색연합 대표,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고문 등을 맡고 있다. 공부란 평생하는 것이라는 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도 중국어에 도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