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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피
ch.1 -도 착-
생산된 지 10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버스의 좌석을 덮고 있는 하얗게 바랜 옥색 비닐 커버는 그에 걸맞게 여기저기 베이고 찢어진 상처들로 지저분했다. 완충 장치 역시 엉망인지라 비포장의 시골길 상태가 시트에 닿은 엉덩이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덕분에 희경은 처음 버스에 올라타고 얼마간 멀미를 느끼며 울렁거림을 참아야 했지만 1시간 가까이 그 진동 속에 앉아 있자니 적응이 되었는지 이젠 살짝 졸음을 느끼고 있었다. 희경은 정체모를 얼룩으로 지저분한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흙길을 버스가 지나가며 피워 올린 먼지 탓에 마치 얇은 베일을 통해 바라보는 듯 뿌옇게 보이는 밖은 산으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과 계곡줄기만이 보였다. 10여분 전까지만 해도 드문드문 보였던 민가들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마을과 마을간 경계의 무인지대, 산과 산으로 가로막혀 그 사이 골짜기에 자리 잡은 산촌들만이 이어지는 지역적 특징 때문에 창밖의 풍경은 민가에서 첩첩산중으로 다시 강에서 민가로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이 길을 마지막으로 지나간 것이 언제인지 희경은 생각했다. 여름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 걱정스런 마음으로 헐레벌떡 다년간 것이 작년 여름이었으니 벌써 1년이 다된 일이다. 산골이긴 했지만 산 넘어는 바로 동해와 접하고 있었고 지난 정권 시절 공무원 비리로 바다와 접한 능선이 난개발 되는 바람에 방풍 역할을 해주던 산림이 없어지면서 마을은 수년째 여름이면 크고 작은 수해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1년이라...'
희경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무심하게 살았는지 느꼈다. 하나뿐인 친언니를 첩첩 산중에 홀로 내버려 둔 채 1년 동안 연락한번 않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자 저절로 자신이 무정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바쁜 일이 있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희경은 얼마 전 자동 응답기를 통해 들은 언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희경아. 잘 지냈니? 언니야.... 서울서 일하려니 바쁘지... 나도 하는 일 없이 바빠서 전화 한번 하기도 힘드네, 올 여름엔 한번 내려오지 않을래? 너도 머리 좀 식혀야 하지 않겠니.. 올수 있으면 연락 해줘. 바쁘면 할 수 없고...'
'바쁘긴 무슨...'
바쁘다는 건 순전히 핑계였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언니는 글을 쓴다며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어머니가 몇 년 전 병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자매였기에 그런 언니의 돌발적인 행동을 희경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서로 대화도 줄어들었고 그렇게 둘 사이는 서먹해졌다.
"덜컹!!"
튀어나온 돌부리라도 넘었는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버스가 요동을 쳤다. 덕분에 좌석 끝에 엉덩이를 걸친 채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희경은 좌석 밑으로 미끄러지려는 몸을 다급히 추스르며 바로 세웠다. 어느 샌가 창밖의 풍경은 다시 바뀌어 있었다. 도로는 지금까지와 달리 매끈하게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져 있었다. 아마도 조금 전 요동은 비포장 길과 아프팔트 포장 길 사이의 경계를 넘어가며 생긴 것 같았다. 흙먼지가 사라지자 창밖의 풍경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아까 까지 보이던 산림 대신 도로를 따라 흐르는 낯익은 강줄기가 보였다.
‘다 왔구나...’
희경은 눈에 익은 강줄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강을 건너면 곧 언니 진경이 살고 있는 덕천리였다. 강줄기와 도로 사이가 점점 넓어지는 것으로 보아 곧 다리를 건너기 위한 커브길이 나올 모양이었다. 작은 언덕을 끼고 크게 도는 커브를 지나 작은 교량을 지나면 행정구역상 덕천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커브를 지나면 저 멀리 드문드문 들어선 집들이 보일 터였다.
“어머, 저건?”
희경은 자신의 예상과는 동떨어진 풍경이 나타나자 조금 놀라며 혼잣말을 했다. 분명 기억 속의 덕천리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붉은색 푸른색의 지붕을 가진 신식 가옥과 옛날 모습을 꽤나 유지한 한옥들이 섞여 있고 그 사이사이 외양간이니 창고니 하는 건물들이 들어선 모습 말이다. 하지만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을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등성이 한쪽을 깎아 먹으며 흉물스럽게 들어선 구조물이었다. 아마도 무슨 공장인 듯한 그것은 건물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기계를 보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크기의 구 교량이 놓여있는 곳에서 강줄기를 따라 채 5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새로이 대형 교량이 건설 중인 것이 보였다. 철골 구조로 만들어진 다리는 아직 공사중인 듯 보였지만 멀리서도 상당히 넓고 큰 다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건축물과 새로 놓인 다리, 이 작은 산골 마을에 지난 1년 사이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희경은 갑작스런 언니의 연락이 이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흉물스럽지 ?"
갑작스런 목소리에 희경은 짐짓 놀라며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건너편 자리에 구부정하게 기대어 앉은 노파가 보였다. 화려한 꽃무늬가 프린트 된 몸빼 바지에 갈색 가디건과 그 밑으로 보이는 노란색 티셔츠 차림의 노파는 누런 느낌의 회색빛으로 바랜 백발을 뒤로 넘겨 하나로 묵었음에도 탄력을 잃은 머리가 여기저기 끊어진 기타줄 마냥 삐져나와 있었다.
"그렇네요.. 작년에만 해도 저런 건 없었는데..."
"작년이라... 저놈 만들기 시작하기 직전에 왔었나 보구먼... 하긴 급하게도 만들었지.. 무슨 대단한 걸 만드나 했더니..."
"뭐하는 곳이에요?"
"늙은이가 뭐 아나... 우리 아들놈 말로는 무슨 퇴비 만드는 곳이랴.."
퇴비라.. 아마도 화학 비료를 만드는 공장을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공장 이름이나 ‘비료’라는 글자라도 커다랗게 내걸었을 법도 한데 공장에는 아무런 표식도 보이지 않았고 그런 점은 더욱 건물에 대해 수상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아가씨처럼 젊은 처자가 우리 마을엔 웬일인가.. 누구 만나러 왔어?"
"예.. 언니를 만나러 왔어요."
"언니? 이름이 뭔데?"
"진경이에요.. 노진경"
"아구... 진경이 알지.. 내가 진경이야 알지. 진경이 동생이였구먼. 작년에 내가 발목을 다쳐서 읍내 병원에 누워 있는 바람에 못 봤었는데..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다 했더니.. 언니를 닮아서 그랬었네 그려...."
"그런가요?"
언니를 알고 있다는 노파의 말에 희경은 맘속으로 가지고 있던 노파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그리고 순간 시골 마을 버스에서 만난 노인네가 얼마나 무서운 짓을 할까봐 경계를 하고 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오랜 도시생활 속에서 몸에 밴 습관이었다. 다리를 건너 덕천리 가운데 있는 정류소에 도착할 때까지 희경은 노파와 드문드문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언니네 집으로 갈꺼지.. 나도 같은 방향이니까 같이 가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희경의 손을 잡으며 노파는 친근하게 말했다.
"그러세요. 저도 와본지 오래 돼서 길이 가물가물했거든요"
"그렇지.. 아가씨 같은 도시 사람은 산길 찾아가기 힘들어."
노파는 연신 웃으며 희경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아마도 심심하던 차에 길동무가 생긴 것이 기쁜 것 같았다. 희경은 틈틈이 노파의 말에 응대하며 멀리 보이는 공장을 살펴보았다. 숲에 가려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하얗게 피어오르는 증기가 그 속에서 무언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버스가 길을 돌아 나간 이후로 주위가 굉장히 조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잔잔하게 들리는 강물 소리라던가 수풀 사이를 간간히 스치듯 지나가는 산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긴 했지만 예전에 왔을 땐 이보단 더 다양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해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기분 나쁜 적막 속에서 오로지 노파의 수다만이 들려왔다.
폐차 직전으로 보이는 구형 소나타는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정도의 좁은 산길을 따라 조심스레 달리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현일은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가로 누운 기훈을 보았다. 반쯤 뜬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은 차 천정만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고 좌석 밑으로 축 쳐진 왼팔은 차가 흔들림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기훈의 오른손이 슬그머니 바지춤으로 향하더니 자신의 허리띠 버클을 풀려고 하는 것이 보이자 현일은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하며 콧소리를 냈다.
"야 이놈의 자식아, 그래도 형사란 녀석이 그렇게 약해서 어디 쓸래?"
현일의 농 섞인 핀잔에 기훈은 고개를 현일 쪽으로 돌리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낸다.
"선배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 정말 산길이 처음이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임마, 다 큰 어른이 그렇게 심하게 멀미하는 건 처음 봤다"
"제가 원래 좀 예민해서 멀미를 잘 하는 편이에요~~"
기훈은 중얼 거리듯 간신히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실상 현일의 말에 일일이 대답하는 일 조차 힘겨워 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오른손은 연신 풀리지 않는 벨트의 버클을 이리 저리 매만지고 있었다.
“형사님 진짜로 멀미 심하게 하시네요.”
조수석에 앉은 채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수가 입을 열자 기훈은 짜증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빠져 있어라, 나중에 뒈지기 싫으면.”
“그럴 힘이라도 남아 있으시려나?”
“뭐라고 이 새끼가 진짜... 우욱!!”
태수의 대답에 기훈은 성질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순간 차가 심하게 요동을 치자 구역질이 올라오는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다시 뒤로 눕고 말았다. 기훈의 헛구역질에 현일은 깜작 놀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야 토할 거 같냐? 그럼 말해 세워줄게, 알았지 토할 거 같음 말해 창피해 하지 말고 괜히 창피하다고 참다가 남의 차에다가 게우지 말란 말이야 알겠냐?"
"알겠어요... 우욱!"
“큭큭큭”
다시 기훈이 헛구역질을 하자 태수는 고소하다는 듯 혼자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현일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으로 태수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았다. 그러나 태수는 억울하다는 시늉을 하였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시경 강력반 형사인 현일과 기훈 두 사람과 달리 태수는 얼마 전까지 흔히 말하는 조폭이었다. 폭력 사건과 관련되어 현일에게 조사를 받으며 알게 된 사이였던 그가 갑자기 찾아와 살인 사건을 신고하겠다고 한건 이틀 전이었다. 그의 말로는 자기네 보스가 사람을 죽이고 야산에 몰래 묻어 버렸다고 했다. 시체를 옮길 때 자신도 함께 했기 때문에 자세한 위치는 알고 있고 시체를 조사하면 보스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나올 거라고 했다. 처음엔 조금 황당하기도 했지만 현일은 곧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조직 내분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고의적 살인에 사체 유기 게다가 범인이 전과자라면 눈감고 재판해도 종신형이었다. 조직의 생리상 우두머리 자리를 오래 비울 수는 없었다. 옛날 같으면 보스가 풀려날 때까지 수발들며 조직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의 조폭들은 철저하게 경제논리로 움직인다. 다시 말해 조직은 와해되거나 재편이 될 것이다. 아마도 태수를 서로 보낸 건 그 와중에 머리를 잡아보려는 조직 내 간부일 것이다. 벌써 현일은 두 세놈 정도 후보를 골라놓기까지 했다. 두목 녀석은 살인 사건으로 잡아 넣고, 움직임을 감시하다가 세력 경쟁 벌인답시고 전쟁이라도 치르는 기미가 보이면 나머지 녀석도 줄줄이 엮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생각대로 안 된다 하더라도 미제로 남을 뻔 한 살인사건 하나는 해결하는 것이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선배님..."
"왜 그래?"
"차좀 세워 주세.. 우욱.."
기훈의 헛구역질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현일은 급하게 차를 세웠다. 차를 세우자 기훈이 헐레벌떡 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그 상황에서도 창피했던지 숲속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가더니 곧바로 몸을 숙인 채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웩.. 우욱.. 우그그그극!!!"
자신들도 차에서 내린 현일과 태수는 오랜 시간 앉아있어서 뻐근한 관절을 움직이며 풀어주었다. 그 와중에도 숲속에서 연신 들려오는 기훈의 구역질 소리에 둘은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 애썼다.
"아 자식 진짜 별나네..."
"그러게 말입니다, 허허허."
현일은 허허 거리는 태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더니 불을 붙였다.
“야, 김태수. 그런데 너 위치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럼요, 제가 운전하고 직접 삽질까지 했는데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현일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곤 자기도 한 대 물고 싶었는지 담배를 찾으려 주머니를 뒤지며 태수가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원래대로라면 너도 공범이야, 사체 유기라고. 그게 얼마나 큰 범죄인지 알어?”
“왜 또 그러십니까? 그래서 자수하지 않았습니까, 자! 수! 자수해서 광명 찾자. 모르십니까?”
담배를 못 찾았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태수가 말했다. 현일은 그런 태수의 모습을 보며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기훈이 들어간 숲 쪽을 바라 보았다.
"기훈아 다 끝났냐? 시간 없다!"
두어 차례 토사물을 쏟아낸 기훈은 더 이상 뱉어낼 것이 없는지 쪼그려 앉은 채 바닥에 연신 침을 뱉고 있었다. 기훈은 현일의 외침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닥에 침을 뱉고는 무릎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알겠어요..."
어찌나 심하게 토악질을 했던지 기훈의 눈은 벌겋게 충혈 된데다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기훈은 소매로 눈을 훔치고는 심호흡을 했다. 찝찝한 위액의 쓴맛이 입안에서 느껴졌다. 기훈은 어제 식당에서 후식으로 집어온 사탕을 찾아 주머니를 뒤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으로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이 햇볕을 가리며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순간 기훈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으아아악!!"
갑작스레 수풀 속에서 들려온 기훈의 외침에 현일과 태수는 서로 놀란 눈으로 마주보았다.
"뭐야 저거..."
둘은 헐레벌떡 소리가 들린 수풀 속으로 뛰어갔다.
"무슨 일이야 기훈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기훈을 일으켜 세우며 현일이 물었다. 기훈은 수풀 속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저거.. 때문에."
기훈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본 현일과 태수는 자신들도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곳의 수풀들은 다른 곳과는 달리 푸른색이 아닌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말라 붙은 피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근처에 흩어져 있는 물체들은 분명 한때는 살아 숨 쉬던 생물의 것이었음에 분명한 토막들이였다.
"젠장 이게 뭐야..."
현일은 조심스럽게 수풀 속으로 다가갔다. 순간 그의 발밑에 무언가 물컹한 것이 느껴졌다. 현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 방금 전 기훈이 게워놓은 토사물위에 서있는 자신의 발이 보였다.
"씁...."
"죄송.. 합니다... 선배님"
기훈은 무안한 듯 고개를 돌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바닥에 구두 밑창을 문질러 닦아내며 현일은 문제의 수풀 쪽으로 다가갔다. 우거진 덤불들을 들춰내자 피투성이 조각들을 더 잘 살펴볼 수 있었다. 벌써 부패가 시작되며 파리가 꼬이기 시작한 살덩어리에 붙어있는 털가죽이 보였다. 일단 사람의 것은 아니란 얘기였다. 짧고 억세 보이는 황갈색의 털은 낯익은 것이었다.
“대체 그게 뭡니까 형사님?”
어느새 현일의 뒤로 다가온 태수가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아무래도 노루나 사슴 종류 같은데... 머리가 안보이니...”
"그런 모양이네요. 그런데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놓고 갈리는 없고... 짐승이 저지른 짓 같은데요. 뭔지는 몰라도 이 산에 맹수가 돌아다니는 모양입니다."
현일은 수풀을 뒷걸음으로 빠져 나오며 말했다.
"젠장.. 총 들고 나오길 잘했네. 사람시체 아니면 빨리 가자! 이러다 해 떨어진다."
셋은 다시 차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묘한 긴장감이 차안에 돌고 있었다. 노루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짐승이 산속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은 은연중에 일행의 기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현일은 운전석으로 돌아와 시동을 걸었고 차는 다시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루를 저 꼴로 만들 정도면 덩치가 엄청나게 큰 녀석이겠죠?"
한동안 앞만 바라보고 있던 태수가 현일에게 물었다.
"모르지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을지도. 내가 아는 한 남한 땅에 그렇게 큰 육식동물은 없어."
현일은 수풀 속에서 본 광경을 다시 곱씹으며 대답했다. 동물 사체 중에는 발기발기 찢어진 다리 부분도 있었다. 발굽이 달려 있는 가늘고 곧은 다리는 대략 1m는 넘어 보였다. 노루가 됐건 사슴이 됐건 간에 어림잡아 선키가 성인 남성 정도는 되는 동물이었단 얘기다. 그런 동물을 저렇게 발기발기 찢어 버릴 정도면 얼른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대형 곰 정도였다. 게다가 흩뿌려진 피의 양이 많았을 뿐 현장에 남아있는 살점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동물의 머리 부분도 보이지 않았다. 부패 정도로 보아 그리 오래 된 사체도 아니었으니 무엇이 되었든 그 동물을 죽인 무엇인가가 없어진 부분을 먹어 치웠다는 말인데 그건 한 마리가 먹어치우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다. 분명 여러 마리의 포식자에 의한 흔적이란 현일의 추측이 맞을 터였다. 순간 무엇인가가 산길 옆 숲속에서 튀어나와 주행 중인 차 앞으로 튀어 나왔다.
'끼이익~~!!!'
"우왓!!"
순간 셋은 모두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인가가 운전석 쪽 창을 급하게 두들기고 있었다. 현일은 브레이크 페달을 죽어라 밟고 있던 발에 힘을 빼며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며 차 앞에 팔을 벌리고 서있는 작은 체구의 남자를 보았다. 포장은커녕 고르지도 않은 좁은 산길이여서 빨리 달리진 못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치어 버렸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에 현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수는 창문을 내리고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미쳤어!!!”
조폭답게 대뜸 욕부터 뇌까리는 그였지만 상대는 그런 태수의 태도는 아랑곳 않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 사람이... 저기 사람이...”
개량 한복 스타일의 상의에 몸빼 바지 차림의 남자는 무언가에 놀랐는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다. 처음엔 차에 치일 뻔한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현일은 그의 행동에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더듬대지 말고 말을 해!”
태수는 그런 남자의 상태는 관심도 없다는 듯 여전히 강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고 뒷자리에 퍼질러 있다 급정거의 반동으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기훈도 몸을 추스르며 좌석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무슨 일인지 살피고 있었다. 현일은 차문을 열고 나와 남자에게로 다가가며 물었다.
“진정하고 말해 봐요. 무슨 일입니까?”
“사람이... 사람이 죽었어요!”
남자의 말에 현일은 표정을 굳히며 태수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찾고 있던 시체를 이 남자가 먼저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현일의 눈짓에 태수는 그럴 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내 젓고 있었다. 시체가 있는 장소와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거나 아니면 깊이 파묻어 그리 쉽게 발견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현일은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안절부절 하고 있는 남자에게 보이며 말했다.
“저희는 경찰입니다. 진정하시고 무슨 일인지 차분히 얘기해 보세요.”
현일의 경찰 신분증에 남자는 조금 마음이 놓이는지 스스로 가슴을 다독거리며 흥분을 가라 앉히려 노력하였다. 가쁘게 내쉬던 남자의 숨소리가 금세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남자는 마른 침을 한번 삼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고개 위쪽에 사람이 죽어 있어요. 세상에... 얼마나 흉하던지.”
남자는 자신이 목격한 광경이 떠오르는지 다시 얼굴이 하얘지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현일의 팔꿈치 근처를 쥐어 잡으며 말을 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이 산에서 4년째 심마니로 일하고 있는 이병태라고 소개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타던 그는 한 시간 전쯤 평소 자주 다니던 산길에서 평소 보지 못했던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산길 한가운데 흥건하게 고인 핏자국 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그런 광경을 봤던 병태는 아마도 불법으로 놓인 덫에 걸린 동물의 흔적이려니 생각했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낯익은 물건이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워크맨이요?”
“예, 워크맨... 카세트 말입니다. 그 친구가 줄기차게 들고 다녀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거든요.”
“친구라면, 아는 사람이었단 말입니까?”
“예, 여기서 같이 일하던 산이라는 심마니였어요.”
남자는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지만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았는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현일은 확인을 위해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하지만 소지품만으로 신원을 확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 뿐이라면야 그렇죠... 그 친구가 확실하다니까요.”
이번엔 밖으로 나와 차체에 기대어 서있던 기훈이 병태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시체도 있었다니까요! 그 친구 목만 덩그러니 남아선 날 노려보고 있었다고요!!”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걸으며 희경은 노파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파는 물어보지도 않은 언니와 관련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언니 진경이 시간만 나면 산길을 홀로 걷는 걸 즐긴다거나 마을 대소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해 손길을 도와 평판이 좋다는 얘기뿐 아니라. 몇 안 되는 동네 노총각들의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얘기까지 들려주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고개 너머 마을에서도 총각들이 서울서 온 아가씨를 구경하러 오곤 했지만 혼자 있길 즐기고 강가에 앉아 몇 시간씩 아무 말도 없이 강물만 바라보고 앉아 있곤 하는 그녀의 모습 때문인지 최근엔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재미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언니와 관련한 화제가 떨어지자 노파의 관심은 새로 들어선 공장으로 이어졌다. 자신도 공장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모르는 듯 대부분이 추측에 의한 것들이긴 했지만 그중 객관적인 내용만 추려 보자면 공장이 완공되어 정상 가동을 시작한 것은 두어 달 전이었고 공사 중에 오염과 관련하여 마을 사람들의 민원이 있었지만 구청에서 나온 사람이 환경관련 시설이라며 걱정할 것 없다는 설명회를 가진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타지인들 이었고 매일 큰 버스가 근처 도시까지 왕복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새로 놓이는 다리도 아마 그 버스를 위한 것 이란 게 노파의 추측이었다. 나름 대로라고 부를 수 있는 주로를 따라 걷던 둘은 길옆을 차지한 논두렁 사이로 난 샛길로 들어섰다. 마을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는지 얼마 못가 주민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노파는 그것이 밭에서 무언가 일을 하고 있던 사람이던 하릴없이 서성이고 있던 노인이던 간에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서서 희경의 소개를 해댔고 그 통에 언니의 집으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꽤 늦어졌다. 하지만 희경은 그런 시골방식의 삶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시멘트로 포장을 깐 좁은 길가 수풀 속에 자전거를 튀여 놓은 채 풀려버린 자전거 체인을 다시 끼워 넣으려 애를 쓰고 있던 박 노인과 얘기를 나누게 된 것도 역시 노파가 희경을 박 노인에게 소개시킨 데서 부터였다.
"그랬구먼, 진경이 처녀 동생이라... 이쁘게 생겼네"
노인은 인심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체인에서 묻어난 기름으로 새까매진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어떻게 한 것인지 몰라도 그런 손으로 닦았음에도 용케 노인의 얼굴에는 기름때가 묻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 갈려구 자전거는 끌고 나오셨어요?"
노파는 또다시 이야기를 풀어내려는 듯 먼저 박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있잖아, 거 뭐냐... 동천이네 셋째... 길복이. 그녀석하고 몇몇 친구 놈들이 어젯밤에 놀러나가서는 영 소식이 없다지 뭐야, 그 집도 그러려니 하다가 아침까지 연락이 없으니까 마을 사람 모아서 지금 찾아보고 있는 중이야."
박 노인의 설명에 노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구먼.. 나는 장에 다녀오느라 까맣게 몰랐네, 근데 길복이 녀석들이면 지난번에도 말도 없이 서울에 놀러 갔다가 3일 만에 돌아온 놈들 아니여?"
"그렇지. 그래서 다들 심각하진 않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맘으로 마을 한 바퀴 돌아보고 있는 거지, 근데 이놈이.."
박 노인은 조금 신경질이 났는지 쓰러져 있던 자전거를 슬쩍 발로 찼다.
"갑자기 말썽이네 그려..."
"에구.. 내가 뭘 알면 도와줄터인데... 욕 좀 봐요."
"그래요, 어.. 거기 뭐냐.. 진경이 동생, 아가씨도 잘 왔어... 즐겁게 놀다가 가요.."
"예 감사합니다."
희경은 다시 자전거를 고쳐보려고 주저앉는 노인에게 살며시 인사를 하며 노파와 함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연락이 안되는 건가요?"
"애들은 무슨.. 이제 고등학생이니 철도 들었을 나인데.. 원 워낙 말썽들이 심해서..."
"그렇군요..."
희경은 딱히 더 할 이야기가 없자 다시 노파 쪽에서 말문을 열기 전까진 가만히 있기로 생각하고 주변 풍경으로 관심을 돌렸다. 한동안 그렇게 걷고 있자니 길 저쪽에서 잰 걸음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엔 노파보다 먼저 상대가 말을 걸어왔다.
"그려 총각들도 안녕들 하신가?"
"하하, 지난번에 말씀 드렸잖아요, 저 총각 아니라고."
노파의 인사에 두 남자 중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쪽이 웃으며 답했다. 그 사이 희경은 두 사람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만났던 마을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옷차림 이였다. 두 사람 모두 황색조의 얇아 보이는 잠바를 입고 있었고 그 안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이었다. 물론 바지 역시 활동성을 감안한 디자인이긴 하지만 정장스타일의 바지였고 신발은 나이 들어 보이는 쪽이 구두, 상대적으로 조금 젊어 보이는 쪽은 등산화에 가까운 단화였다. 희경은 그런 차림을 종종 봐 왔다. 그것은 현장에서 근무하는 화이트칼라 사원의 전형적인 차림이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그런 차림의 사람이 있을 곳은 짐작컨대 한 곳 뿐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황색 잠바 오른편 가슴 어귀에 달려있는 플라스틱 명찰이 그들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신왕 바이오 케미컬'
도저히 뭐 하는 회산지 종잡을 수 없는 애매한 영어 이름이었지만 하여간 그들이 예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웬일로 마을엔 왔어? 요샌 통 안보이더니..."
"아..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요."
연장자 쪽이 얼른 대답하기는 했으나 약간의 시차를 두었던 데다가 조금 더듬으며 얼버무리듯이 대답했다. 뭔가 숨기려 하거나 별로 정확하게 대답을 하기 곤란한 일을 하던 중이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희경은 무시했다. 이런 시골까지 와서 괜히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쪽 아가씨는 첨 뵙는 분이시네요? 할머닌 손녀신가?"
"허이구, 나한테 이런 큰 손녀가 있을려구.. 딸이면 모를까, 저기 산 밑에 사는 진경이 아가씨 동생 되는 사람이래요."
노파의 소개에 희경은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흰 저기 공장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역시 의례적인 인사로 응대했다. 그리곤 젊은 쪽이 슬며시 연장자인 남자에게 재촉의 눈길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저희가 좀 급한 일이 있어서요, 가봐야 겠네요"
"그래, 바쁜 사람 괜히 붙잡고 있었네 어서들 가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는 두 사람은 다시 아까 올 때 보다 더 급한 걸음으로 길을 따라 멀어져갔다.
"얘기 들었지 저기 공장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가끔씩 마을에 와서 일도 도와주고 얘기도 하고 그래요.."
노파는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경에게 말했다. 그러나 희경은 그런 노파의 설명보다는 급한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둘의 모습에 더 신경이 쓰였다. 무언가 감추려는 듯 보인 좀 전의 태도나 성급히 서둘러 길을 재촉하는 모습에서 뭔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내가 왜 이러지, 별일 아닌 걸 가지고... 아마도 근무시간에 마을에서 놀다가 상사에게 들켜서 급히 돌아가려는 걸어야...'
희경은 버스에서 내리면서부터 조금씩 느껴지던 알 수 없는 위화감과 불안이 그 두 사람을 만나면서 다시 느껴지자 스스로 그런 상황에 설명을 붙이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새삼스레 우습게 느껴졌는지 혼자서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자, 가요 아가씨. 조금만 더 가면 언니네 집으로 가는 길이 나오니까"
"예, 할머니."
그나마 잠시 동안 느꼈던 알 수 없는 불안감도 노파의 재촉에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사라졌다. 아마도 오랜만에 찾아온 시골의 낯선 풍경에 무의식이 만들어낸 망상이었을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여름의 따뜻한 햇살에 알맞게 달아오른 대기 속에는 그녀뿐 아니라 이곳 마을 주민 대부분이 모르는 사이 미지의 위험한 존재가 압박해오고 있었다. 희경이 1년 전 찾아왔을 때와 지금의 마을은 무엇인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공장 사람들과 헤어진 후 10여분을 더 걸어가자 희경 앞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여기 왼쪽 길 따라서 조금만 더 산 쪽으로 올라가면 언니네 집이에요"
"기억나네요, 감사합니다. 동행해 주셔서 할머니 아니었으면 한참 헤맬 뻔 했네요"
"무슨 감사는, 나중에 시간나면 우리 집에 놀러도 오고 그래요 언니가 우리 집 어딘지 아니까"
"예, 나중에 뵐게요."
노파가 반대편 길로 걸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희경은 노파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실 언니 집으로 향하는 길은 1년 전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기에 한참 전부터 노파의 안내는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희경은 길가에 아무렇게나 돋아나 있는 긴 갈대를 뽑아들고는 이리저리 장난스럽게 흔들며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길은 꽤나 가파른 경사를 이루기 시작했고, 희경의 이마에는 송이송이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오르막을 얼마를 걸었을까 드디어 언니의 집이 보였다. 오르막이 다시 평지를 이루는 길 끝 어귀에 깨끗한 외벽을 자랑하는 작은 조립식 주택이 보였다. 놀래 주기 위해 언니 몰래 계획했던 방문인 탓에 희경은 발소리를 죽이려 애쓰면서 현관으로 향했다.
'딩...동...'
한동안 안 쓴 표시를 내듯 기계식 초인종은 탁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누구세요?"
집안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게?"
희경은 장난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어머, 희경이니?!!"
처음엔 장난스런 희경의 대답에 잠시 당황한 언니 진경의 목소리는 희경을 알아채고는 기쁨으로 호들갑스러워졌다. 이어서 문이 열리고 진경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언니 놀래주려고 그랬지 뭐."
언니는 매우 기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희경의 양손을 꼭 쥐었다.
"정말 와줬구나, 혹시나 해서 전화했던 거였는데"
"안 그래도 오려던 참이었어..."
"그래 잘 왔어, 들어가자 밖이 덥지.. 뭐 시원한 거라도 줘야지, 뭐 마실래?"
"물이나 한잔 줘"
희경은 웃으며 언니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연락 없이 지냈음에도 역시나 자매답게 둘은 어제 만났던 사이처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그런 사실이 희경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서로 떨어져 지낸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듯 희경과 언니와의 대화는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두 자매의 단란한 시간이 오랜만의 대화와 함께 지속되는 동안 창밖에는 어느새 도시보다 빠른 산골 마을의 어둠이 조용히 찾아들고 있었다.
신왕바이오케미컬의 덕천리 공장 관리팀장직을 맡고 있는 배영만이 이곳으로 발령받아 내려온 것은 공장이 한창 건설 중이던 때였다. 덕분에 이제 그에게 덕천리는 제 2의 고향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사업의 특성상 인근 주민들과의 원만한 관계가 필수적이란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을로 내려와 잡다한 일들을 도와주거나 마을 어른들과 간식거리라도 나누며 한담을 즐기곤 했다. 그러나 오늘 그가 마을 어귀를 돌아다니고 있는 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배 과장은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안절부절 하고 있는 신입을 바라보았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하자마자 이곳에 온지 4개월이 채 안 된 그에게 이번 일은 너무나도 큰 스트레스일 것이다. 회사밥 먹은 지 벌써 8년이 다되어 가는 배 과장 자신에게도 이번 일 만큼은 도저히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이런 일을 벌리는 게 아니었어..'
배 과장은 속으로 연신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애초에 이곳 덕천리 부지에 공장 부지가 정해진 순간부터 오늘의 사고는 예견 되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배 과장은 오늘의 사고가 있기까지 필요했을 수많은 우연의 확률을 계산해 보며 신이란 존재를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아마도 신이란 존재가 오늘 이 시각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을 미리 교묘하게 조작해 왔을 터였다. 그런 절대적 존재의 '농간'이 없었던 다음에야 더운 여름날 오후에 산길을 이리저리 헤매며 안절부절 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배 과장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공상을 떨쳐내며 허리춤에 달린 작은 무전기를 빼들었다.
"여기는 3조 배영만 입니다. 1조, 2조 응답하세요, 오버"
송신 버튼을 누르고 다른 팀을 부른 뒤 손을 떼자 얼마간 칙 거리는 잡음이 들려오다 곧 다른 팀의 송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1조.. 여기는 1조 김일 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 상황 보고해 주세요, 오버"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다시 응답이 들려왔다. 공장 내에서의 통신이었다면 편하게 휴대전화를 이용하면 되었지만 산을 끼고 벌이는 탐색은 고성능 무전기를 이용해야만 했다. 산 속은 아직도 휴대폰 신호가 닿지 못하는 구역이 많았다. 그러나 무전기란 장치 자체에 익숙지 않은 조원들은 중간중간 시간만 잡아먹는 이 한물간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약점에 답답해하고 있었다.
"아직 아무런 상황 없습니다.... 오버"
"알겠습니다, 2조 수신 하셨습니까? 응답해 주십시요, 오버"
"2조 수신했습니다. 저희도 상황 없습니다. 오버"
배 과장은 허리춤에 달린 인조가죽 케이스에 무전기를 집어넣으며 마을 입구에 세워 놓았던 스쿠터의 시동을 걸었다. 헬멧을 착용하며 그는 좀 전에 만난 마을 노인을 떠올렸다. 이곳 토박이라는 그 할머니는 사람 좋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그와 더불어 입이 가볍기로도 유명했다. 간신히 별일 아닌 듯 넘어가긴 했지만 조금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까 그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을 것이다. 무언가 숨기려 하는 공장 관리직원의 모습에서 좋은 이미지가 연상 될 리 없었다. 만약 그 노파가 허튼 소리라도 할 경우엔 자칫 일이 커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수색도중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마을에서 말썽꾼으로 소문난 길복이 녀석과 친구들이 사라졌다. 물론 심심하면 가출을 해대는 녀석이긴 했지만 이번엔 타이밍이 절묘했다. 게다가 산 속을 수색 중이던 2조가 수 시간 전 발견한 야생 동물의 처참한 시체 역시 그의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였어... 젠장!'
지금으로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러나 이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배 과장의 예측과 일치하는 원인에 의한 것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과 마주치게 될지도 몰랐다. 어느 새 스쿠터는 공장 정문에 도착했다. 두꺼운 쇠창살과 철망으로 이루어진 정문은 이미 열려진 상태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주차장은 절반 이 넘게 차 있었다. 비상조치에 따라 비번인 근무조까지 모두 호출된 것이다. 순간 배 과장의 눈에 주차장 한쪽에 세워진 냉동차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의정부에서의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샘플을 반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이런 상황에서 연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체 공장장은 무슨 생각이지..."
배 과장은 냉동차를 바라보는 눈길을 찌푸리며 공장 입구로 들어섰다. 보안실과 연결될 카메라가 그를 확인하자 잠겨있던 문이 열렸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화학 비료 공장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곳에 이런 감시, 보안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공장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보다 더 괴이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배 과장은 신입에게 사무실로 들어가 다른 조의 상황을 계속 점검하라고 이른 뒤 자신은 공장장실이 있는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이 공장의 총 책임자이자 기업 내에서도 손꼽히는 세력가로 알려진 신경철의 사무실은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다. 실질적으로 업무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접대용 시설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락한 분위기 탓에 공장장은 주로 이곳에 머물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아.. 왔는가 배 과장, 어떻게 됐어 찾았나?"
배영만이 노크를 한 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책상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공장장은 그 큰 덩치를 일으켜 세우며 그에게 물었다. 배영만은 난처함을 감추지 못하며 답했다.
"아직 아무런 성과도 없습니다. 실험체나 실종된 수색팀 모두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조심스레 이어진 배영만의 말에 공장장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게다가? 게다가라니 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게... 산 속에서 동물 사체가 발견 되었는데 아무래도 실험체와 관련된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게다가 마을 아이들 몇몇이 역시 지난 밤 이후로 보이질 않아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배영만의 설명에 공장장은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배 과장을 의식적으로 쳐다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금 공장장의 머릿속에선 재빠르게 이런저런 계산들이 진행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쯤 되면 수완 좋다는 그로서도 이렇다 할 해결책을 쉽게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뭐.. 그 정도야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꼭 우리 쪽 사고와 연관 지을 필요도 없고."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사라진 게 실험체와 연관되어 있다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금새 돌아오지 않는다면 경찰이 개입할지도 모릅니다."
배영만은 불안함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대로 드러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장장 역시도 그 말에 조금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경찰... 이라고... 젠장.. "
공장장은 더 이상 서있지 못하겠다는 듯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양손을 미간 근처에 가져가서는 둥글게 머리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일이 복잡해지는데."
한동안 아래만을 쳐다보고 있던 그의 고개가 젖혀졌다.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대한민국 경찰 놈들이 뭘 하겠어 기껏해야 신고 접수나 하고 돌아가겠지. 수색조들한테 1시간 정도 더 찾아보고 성과가 없으면 공장으로 돌아오라고 그래 경찰 녀석들한테 보였다가는 괜한 오해 살지도 모를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실종된 1차 수색팀은 어떻게...."
"일단 지금 일만 신경 쓰자고, 그치들이야 살아 있으면 돌아오겠지..."
공장장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그런 그의 말속에 담긴 이중의 의미에 배 과장은 새삼 소름이 돋았다. 살아 있으면 돌아오겠지 라는 건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일어났을지 모르는 끔찍한 현실을 상상케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프레젠테이션 위한 샘플 반출 건은 어떻게..."
"젠장 그게 오늘인가?... 그건 내가 처리하지..."
공장장의 목소리는 점점 더 침울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때 집무실의 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예 공장장님 사무실입니다."
비서도 없는 개인 사무실인 탓에 배 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마침 배 과장에게 걸려
온 것이었다.
"그래 날세 무슨 일인가?... 뭐라구! 알았어 지금 내려가겠네."
배 과장은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공장장을 보았다.
"수색조에서 연락이 왔답니다. 1차 수색팀의 흔적을 찾았다고요..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
"그래, 잘됐구먼 다들 무사하다는가?"
"그게 아직 상황이 정확히 파악된 게 아니라서, 지금 바로 직접 가보겠습니다."
"알겠네 어서 가보게, 그리고 괜히 경찰들하고 복잡해지지 않게 조심들 하도록 이르고"
공장장의 주문에 배 과장은 착잡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답했다.
"알겠습니다"
막 문을 나서려는 배 과장을 다시 불러 세우며 공장장이 물었다.
"그런데 어디서 찾았다고 하던가?"
"소류산 계곡 근처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아직은 흔적뿐인 것 같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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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흥미진진....기다려지네요....
실험체라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건가요?
작가님 팬입니당..글을 너무 잘쓰시는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