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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찾아 2007/05/27 09:58 태허
--홍영식. 민영익을 찾아 여주를 다녀오다--
홍영식
1855(철종 6)∼1884(고종 21).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으로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아들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개화당 원으로서 서울출신이다.
고종 10년(187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 · 대교를 지냈다.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통리기무아문 부경리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부제학 · 참의 통리내무아문 사무를 거쳐 참의 군국사무 · 참의 교섭 통상사무를 역임하고 1883년 협판 교섭 통상사무가 되었다. 그 해에 보빙사(報聘使)의 부사가 되어 그 일행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어 미국 대통령 아더(Chester Arthur)를 만났으며, 정부의 기구 · 각 방면의 산업시설과 제품생산과정 등을 견문하고 일본을 거쳐 귀국한 후 1884년 병조 참판이 되었다.
그는 개화당의 중요간부로서 미국공사 푸트에게 ‘조국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는 민태호(閔台鎬) · 조영하(趙寧夏) · 민영익(閔泳翊)과 3영대장(營大將)은 죽여 마땅하다’고 공공연히 실토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우정국(郵政局)이 설치되자 총판이 되었으며 그 낙성식을 계기로 일병(日兵)의 지원 아래 김옥균(金玉均) · 박영효(朴泳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집권 사대당을 제거하고 신정부를 조직,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원세개(袁世凱)의 무력개입으로 3일만에 신정부는 붕괴되었으며, 그는 곧 대역죄인으로 사형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원되었으며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편서로는 《일본육군총제(日本陸軍總制)》 ·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 등이 있다.
민영익
1860(철종 11)∼1914.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우홍(遇鴻), 호는 운미(芸楣) · 죽미(竹楣) · 원정(園丁) · 천심죽재(千尋竹齋)이다. 민태호(閔台鎬)의 아들로 민승호(閔升鎬)에게 입양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서 민씨척족(閔氏戚族)의 거두이다.
종로구 관훈동에 살았으며 고종 14년(1877)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한 후 민비의 총애를 받아 이조 참의를 거쳐 1880년경에는 민씨척족세력의 소장 영수가 되어 1881년 통리기무아문 이용당상(理用堂上) · 별기군(別技軍)의 교련소당상(敎鍊所堂上)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오군란 후 박영효를 따라 사죄사절로 일본에, 교섭 통상사무로 해관사무를 교섭하기 위해 천진에 파견되었으며, 외아문 협판으로 외교관계의 주요임무를 담당하였다.
특히 1883년 보빙사(報聘使)의 전권대사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미국(美國)을 공식 방문하였고, 귀국길에 유럽을 경유함으로써 새로운 견문과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귀국 직후 협판 통리 군국사무(協辦統理軍國事務) · 혜상공국(惠商公局) 당상(堂上) · 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 좌영사(左營使) 등의 요직을 겸직하면서 민씨 세력을 유지하는데 전념하였다. 결국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 참여하였다가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 알렌의 응급수술로 간신히 생명을 건졌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솔선하여 서양의술을 도입하였으며 선교상의 활동을 묵인해 주기도 하였다. 갑신정변 이후에 그는 친군(親軍) 우영사(右營使) · 협판내무부사에 이어 고종 22년(1885) 10월에 한성부 판윤을 잠시 지냈는데, 당시 청국이 본정부에 유폐되어 있는 대원군(大院君)을 귀국시키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려고 천진을 방문하였다.
이 일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민영익은 상해(上海)를 경유하여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다가 귀국하였다. 그는 고종과 민비의 반청(反淸) · 친로정책(親露政策)에 반대하여 청국에 한러비밀조약 체결의도를 누설하였으나 원세개(袁世凱)가 이를 빌미로 고종폐위 음모를 추진함으로써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1886년 홍콩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홍콩에서 조선의 인삼전매권을 소유하여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한편 주미공사파견 등 조선의 주요 외교문제에 관해서 직 · 간접적으로 정부에 자문을 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낭만적 기질이 농후하여 암투가 난무하는 국내 정계보다는 자유도시인 상해와 홍콩을 오가면서 활동하다가 1905년 러일전쟁 후 상해에 정착하였다. 그는 1909년 안중근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살해했을 때 러시아와 프랑스 변호사 선임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제의했으나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고 하며, 또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실패했을 때도 변호사를 선임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1910년 일본이 국권을 강탈했을 때에 그는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펼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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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882년 5월 22일 구미 열강 중 최초로 미국과 입약함으로써 한미수교가 이룩되었다. 조미조약 체결은 어디까지나 슈펠트가 청국 이홍장의 속방정책을 거부하고 독립정책을 관철했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조선은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청에 대한 종속관계를 탈피하고 신생 자주독립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된것이다. 조미조약 체결 직후 조선정부는 국호를 「大朝鮮國」 국왕을 「大君主」로 선포하면서 청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선언한 것이다.
1883년 5월 19일 초대 주한 미국전권공사 푸트와 독판교섭통상사무 閔泳穆과 비준문서가 교환됨으로써 양국간 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이룩되었다. 조미조약 제 2조의 “양국 수도에 전권공사를 파견 주재한다”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푸트는 서울 정동에 미국공사관을 개설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미국수도 워싱턴에 상주공사관을 개설, 전권공사를 파견할 형편이 못되었다. 이에 푸트의 건의를 받아들여 견미 조선보빙사를 파미하게된 것이다
갑신정변 거사 당일 행동지침 중에 하나는 우정국 옆 별궁에 방화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별궁에 불이 나면 4영사 등은 화재 진압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형세이니, 이때를 기하여 4영사를 모두 제거하도록 했다.
민영익은 행동대원 윤경순. 이은중이 맡고, 윤태준은 박삼룡. 황용택이, 이조연은 최은동. 신중모가, 한규직은 이규완. 임은명이 맡았다. 즉, 행동대원 두 사람이 영사 한 사람씩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들은 무기로 단검 1자루와 단총 1자루씩 휴대하도록 했다..
그러나 거사 당일 별궁 방화에 차질이 생겼으나, 그런 가운데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우정국 연회장은 소란스러워졌다. 연회 도중 김옥균의 빈번한 출입을 수상하게 여겼던 민영익이 제일 먼저 나갔는데 피투성이가 된채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놀라서 뿔뿔히 흩어져 달아났다. 이에 원래 계획했던 4영사의 처단은 실패했다.
정인보선생의 <담원문록> 민영달전 중애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어 인용한다.
'갑신년(1884.12.4) 10월 우정국난이 일어나 민영익을 찍어 땅에 넘어뜨렸는데 다들 벌써 죽었다고 하였다. 창졸간의 변이라 감히 가 보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영익은 승호의 아들(양자)이라 영달과 본래 친했으며, 영달 또한 승호에게 덕을 보고 있던 터요, 게다가 평소에 협기가 있었으므로 분연히 "내가 가겠소" 하고서는 젊은 애들 몇을 데리고 바로 우정국으로 다다랐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영달이 앞장서 몇 사람을 쳐 넘기고서는 영익을 일으켜 자기 등에 업자, 발은 벌써 문짝을 차고 내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마주 들고 거리로 나섰다.'
민영익은 미국인 선교사 알렌에 의해 살아난다.
이에 반해 홍영식은 정변이 3일 만에 진압될 때,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끝까지 임금을 호위하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그렇게 이 두사람의 운명은 바껴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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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사월 초파일인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오늘 여주를 갔다오기로 하고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10시 36분 매표소에서 여주를 말하니 10시 40분 출발하는 버스이니 서둘러 버스타러 가라한다. 12시 10분에 여주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위치도 정확히 모르는 민영익의 묘를 찾다가 오늘 하루해를 아무런 소득 없이 보낼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여주군 향토유적 7호로 지정되어 있고 위치도 소개가 되어있는 홍영식선생의 묘로 먼저 가기로 결정했다. 흥천면 가는 버스를 정류소에 붙은 버스시간표에서 확인해 보니 12시 40분 출발으로 나와있다. 점심을 식당에서 먹기에는 시간이 촉박해 간편하게 또 김밥을 샀다. 흥천가는 버스 기사에게 문장초등학교 가느냐고 했더니 간다길래 탔는데 버스요금이 이천 백원이라 한다. 버스는 마을 마을 마다 돌아서 1시 25분에야 문장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에 나를 떨구고 갔다.
문장초등학교로 갔다. 학교 운동장에 체육을 하는 학생들이 뛰놀고 있을뿐 조용하다. 왼쪽 길을 따라 걸었다. 오백 미터 쯤 가다 보니 홍영식선생묘 900m 라는 팻말이 나온다.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팻말은 갈랫 길마다 보인다. 200m 라는 팻말과 함께 오르막으로 길을 오르게 되어있다. 팻말이 없었다면 찾기가 힘들었을 볍한 곳이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서니 홍영식선생의 묘가 나타난다. 외로이 자리잡은 유택.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문장리(驪州郡 興川面 文章里) 야산에 묘비 없는 무덤 1기가 외로이 서 있다. 무덤에 오르는 길목과 무덤 주변에는 잡초와 돌맹이가 제멋대로 흩어져 황량하기 짝이 없다. 제물을 놓을 상석조차 없는 이 무덤은 산밑 어귀에 '郵政局總辦 贈諡 忠愍公洪公英植之墓'라는 안내판만 없다면 어느 야산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주인없는 무덤으로 잘못 여겨질 것 같다.
홍영식(洪英植)은 우리 나라 근대식 우편제도의 창시자. 1884년 갑신년(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양력 환산 12월 4일) 안국동(安國洞)에 우정국(郵政局)을 세우고 초대 우정총판을 지낸 홍영식의 묘소는 64년 이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64년 진기홍(陳淇洪)씨 (遞成會理事)는 충남 당진에 있는 충민공의 손자 석호(錫皓, 28)를 통해 무덤을 찾아냈다. 진씨 등 체신관계인사들은 그해 12월 3일 석호씨와 충민공조카 홍영복(洪永福)씨 (이포국민교장), 이포(利浦)우체국장 이광옥(李光玉)씨(43)의 안내를 받아 무덤을 찾아보고 깜짝 놀랐다.
역적으로 몰려 봉분도 하지 못한 채 평장(平葬)된 이 무덤에는 떼가 거의 없었고 안으로 물이 스며드는 등 황량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
진씨와 이씨 등은 이 사실을 체신부에 알리고 곧 손질을 해주도록 진정했으나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5년 동안 개수되지 못했다.
이천(利川)우체국장 김진걸씨와 진씨, 이씨 등이 백방으로 뒤어 다닌 끝에 69년 4월 간신히 5만원의 자금을 마련, 묘지 개수공사에 나섰다. 그러나 자금부족으로 봉분을 높이고 묘지주변미화정리만을 했을 뿐 상석과 묘비는 건립하지 못한 채 공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체신부는 지난 4일 홍영식이 우정국을 창립한 날인 '체신의 날'기념행사를 벌이면서도 또 한번 '묘비 없는 선각자의 묘소'를 외면했다. [여주=姜大衡기자]'
묘소를 살펴 본뒤 부근에 남양홍씨의 다른 묘소라도 있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위로 올라갔으나 찾지못하고 결국엔 길을 헤메다 내려왔다.
2시 20분 버스가 다니는 도로로 나왔다. 길건너 문장수퍼에 가서 생수를 한통 사면서 가남면 안금리로 가는 방법을 물었더니 가게의 젊은 여자분이 자세히 모른다. 버스를 기다리며 김밥을 먹었다. 김밥을 다먹었는데도 버스는 아니온다. 수퍼에서 여자분이 나를 부른다. 수퍼에 물건 배달오는 사람에게 물어보고는 안금리 가려면 여주로 가지말고 이천터미널로 간뒤 그곳에서 태평리 가는 버스로 바뀨ㅓ타고 다시 안금리로 가는게 좋다하며 안금리 가는 버스가 많지 않으니 어쩌면 택시를 타야할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버스가 먼저 오는 것을 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천 가는 버스가 먼저 왔다. 3시 15분 버스를 타고 이천으로 갔다. 요금이 천 사백원이다. 이천에 도착해서터미널 건너편으로 가서 태평리가는 버스를 쉬고있는 기사 들에게 물으니 조금 있으면 출발한다고 기다리라고 했다. 4시 20분 8-1번 버스를 탔다. 태평터미널까지 요금이 천 이백원이다. 다섯시에 태평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안금리로 가는 버스는 4시 40분에 떠난 뒤였고 안금리로 가는 다음 버스는 8시 반 차가 있어 터미널 앞으로 나와 탹시를 탈수 밖에 없었다. 5시 5분에 탹시는 안금리로 출발했다. 7분 지난 5시 12분에 안금1리 도착했는데 요금이 칠천원이다. 마을 입구 나무 그늘에 쉬고 있는 노인에게 길을 물었더니 근처에 민씨묘가 없고 안금2리로 가보라해서 길을 따라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 왼편 산자락에 묘가 있어 확인하고 돌아 나오기도 했다.
오른편 언덕위에 비행기가 보이고 승진항공이라 표시되어있다. 안금2리 부락 안내 표석 아래 마을 유래에 관계된 글 중에 마을 뒷동산 너머에 군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민진후산생 뵤와 신도비, 그리고 명성황후 부친 민치록 명성부원군 묘비와 신도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대법사 가는 길로 200m 쯔 가니 민진후선생 신도비가 나왔다. 그길로 올라서니 여흥민씨 묘역이 조성되어 있었다.
본관 여흥. 자 정순(靜純). 호 지재(趾齋). 시호 충문(忠文).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아들이다. 숙종 계비 인현왕후의 오빠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숙종 7) 생원이 된 뒤, 16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삭직되고 귀양살이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복직되었다. 정언(正言) ·부응교를 거쳐, 169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대사간·강화부유수·형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706년 의금부 지사(知事)로서, 유생 임보(林溥)가 세자모해설(世子謀害說)을 발설하여 일어난 옥사 때 왕 앞에서 함부로 논죄하다가 탄핵, 파직되었다. 그 해 의금부판사로 승진하였으나, 소론(少論)의 탄핵으로 다시 면직되었다.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돈령부판사 ·예조판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1718년 숭록대부에 올랐다. 내국제조(內局提調)로서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뒤에 개성부유수를 지냈다. 글씨에 능하였고, 문집에 《지재집》이 있다.
여주군 가남면 안금2리 산56-1에 있다.
조선시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아버지. 본관은 여흥(驪興). 여주군(驪州郡)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에 살았고, 벼슬은 첨정(僉正)을 지냈다. 그가 죽은 뒤인 1866년(고종 3) 딸인 민씨가 왕비가 됨으로써 고종의 장인으로 영의정·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에 추증되고, 부인 오씨는 해령부부인(海寧府夫人), 이씨는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에 봉해졌다.
'민비는 풍수에도 광신적인 집착을 보였다. 민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은 1858년 여주 금교리에 안장되었는데, 민비는 1866년부터 자신이 시해당하기 1년 전인 1894년까지 28년 동안 무려 네 번이나 친정아버지의 무덤을 옮겼다. 여주→제천→이천→광주(廣州)→보령 순서로 7년에 한 번꼴로 이장하였던 것. 마지막 이장지인 충남 보령의 무덤 터는 당시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소개한 곳이었다. 신도비는 충청남도 보령시(保寧市)에 있었는데 현 위치로 최근에 이장했다, 김병학(金炳學)이 글을 짓고 민영목(閔泳穆)이 글씨를 썼으며 민영준(閔泳駿)이 편액(扁額)을 전서(篆書)하였다. 시호는 순간(純簡 '
< 명성황후와 친정아버지 묘 / 네 번 이장, 조선 왕실 몰락 재촉 [주간동아]풍수지리 2005/08/20 10:59>
일을 마친후 차도로 나오니 6시 33분이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수만 없어 여주 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내쳐 걸어갈 생각였는데 운이 좋았는지 여주 방향에서 버스가 와서 얼른 손을 들고 버스를 탔다. 6시 40분이다. 태평터미널에서 서울 가는 버스 시간을 보니 7시 5분 차가 있다. 사천 오백원에 동서울행 버스를 타고 나왔다. 오늘의 목표가 완결되어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집에와서 대법사에 관한 글이 인터넷에 있어 참고로 올려본다.
한때 국모로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비운의 왕비였던 민비, 즉 명성황후와 그의 아버지인 민치록과 인연이 깊은 곳이 바로 이곳 대법사이다.
대법사는 1971년에 창건된 신생사찰이지만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부터 절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으며, 이곳 대법사가 여흥민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선 숙종 때의 일로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閔鎭厚)의 묘를 사찰인근 임야에 쓰면서 부터이다. 이후 묘소를 관리하며 살아가던 명성황후의 부친 민치록(閔致祿)이 꿈에 미륵불을 현몽하고는 땅을 파서 미륵불을 발견하고, 법당을 새로 지어 불상을 봉안했는데 부인 한산이씨가 정성으로 불공을 드려 낳은 자식이 바로 명성황후라고 한다. 그 후 명성황후가 후일 고종의 비로 책봉되자 절을 원당사(願堂寺)로 개칭하였으며, 민씨 일가의 성원으로 절은 더욱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 원당사는 사라지고 오늘날의 대법사로 거듭나게 되었는데 절을 새로 창건한 대원(大元)스님 또한 어느 날 꿈에 현몽한 대법사라는 서책을 보고 절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 원당사의 발자취는 대웅전에 모셔진 미륵불을 통해 느껴볼 수 있다. 이 석불은 한때 사찰에서 석고를 발라 좌불을 만들고 금칠을 해 모시기도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석고는 떨어져나가고 원래의 모습인 지금의 돌부처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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