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드 대학교 MBA 상담소 상담원 신성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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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 주세요.
A.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에서 남편과 15살 된 아들과 함께 살아요. 관계있는 사항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은 한국 사람인데 기독교인이에요. 불가지론자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네요. 부모님께서는 뉴욕에 사시는데 저는 매사추세츠에 와 산 지 16년 됐어요.
Q. 한국에서 태어났나요?
A. 예. 저는 1970년에 미국에 왔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38년을 산 셈이죠. 미국에서 사는 동안 한국에는 두 번 밖에 안 가 보았어요. Q. 한국과 강한 연대감을 느낍니까?
A. 아니요.
Q. 자신이 미국인이라고 생각합니까?
A. 글쎄요. 나는 한국계 미국인이지요. 양쪽 대륙에 모두 친척들이 있습니다. 나의 경험은 내가 지내온 모든 환경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요. 1970년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는 그것이 적어도 내게는 달나라로 떠나는 것과 같은 커다란 떠남이고 중대한 이별이었지요. 요즘 에는 사람들이 일 년에도 몇 번씩 (한국과 미국 간을) 오가고 Skype 란것도 있지만, 그 때는 달랐어요. 한창 자라는 나이에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나의 한국에서의 경험은 매우 제한된 것이지요. 하지만 그 때 나의 의식이 다 성장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지금 내가 한국에 산다면 마치 자신이 외국인인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한국어는 이해하지만 한국의 삶에 익숙하진 못하지요. 단순히 미국인이라기보다는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느끼는 건 환경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어떤 문화적인 면은 한국식을 고수하는 면이 있지요. 내가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느끼는 것은 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느끼시는 것과는 다르죠. 다 자라서 미국에 온 사람과 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은 다르니까요. 교육, 사회 환경 등에서 다른 규칙을 배우게 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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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자라나는 곳에 따라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말이군요.
A. 한국에서 자라는 아이에게는 정해진 규율이나 기대치 같은 것이 주어지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경향이 덜 한 것 같아요. 한국인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혹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정체성에 관한 혼돈이 올 때도 있지요. 예를 들면, 지금 이 기사가 나가게 될 잡지에서 젊은이들의 관심을 얻으려면 이들이 이곳 미국에서 성장 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과 이들이 같을 수가 없니 않아요? 이들 세대가 불교에서 찾는 것은 그리고 수행의 형태도 기존의 한국인과 다를 거란 말씀이지요. 어려서 제가 한국에서 절에 따라가 보았을 때의 기억으로는 불교란 헌신적인 것 뭐 그런 느낌이었어요. 절에 가서 귀의하고 기도하고 염불하고 그런 기억이 납니다. 저의 부모님께서 선이란 것을 알게 되신 것도 사실 미국에 이주한 후일 겁니다. 물론 제 아버님께서 그게 뭔지 알기는 하셨겠지만 실제 수행 체험을 한국에서는 갖지 못하셨을 것이란 말입니다. 한국의 불교 수행법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선불교는 일반 신도들에게 보편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희 부모님께서도 미국으로 이주 한 후 숭산 대 선사님을 만나고 선 수행을 알게 되셨습니다.
Q. 숭산스님은 한국 불교 사원이나 학교에서 공부하신 분입니까?
A. 예. 스님의 책인 “부처님께 재를 털고” 를 읽어보면 스님께서 공식적으로 스님이 되시기 전에 이미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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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웃음] 정말요?
A. 에. 그리고 그 후에 스님께서는 불교의 다양한 형태를 공부하셨습니다.
Q.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가장 힘든 점이 무엇입니까?
A. 지금은 그 점에 크게 신경 안 써요. 그런데 제 생각으로 가장 어려운 점은 때로 서로 충돌하는 가치와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는 두 문화가 내 안에서 부딪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저는 자라면서 늘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는데요. 한국 여자아이에게 주어지는 기대치 같은 것, 어떤 성적을 받아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고, 인생이 어떤 순서로 풀려야 한다는 것이 있었죠. 거기서 오는 걱정과 긴장도 많았어요. 성적이 잘 않 나오면 어쩌나? 좋은 대학에 못 가면 어쩌나? 한국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면 어쩌나? [웃음]. 그러나 열려있는 가능성도 있었죠.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친하던 유대인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애가 금요일 밤 같은 때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 했어요. 어찌나 놀랐던지. 걔는 나와 데이트 하잔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어울리자는 뜻이었는데, 내게는, 내가 자라난 가족의 분위기에서는 금요일 밥에 애들과 우르르 나가서 사회생활을 갖는다는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집에 오면 숙제를 하고 부모님의 가게에 가서 도와드리고 그것이 내가 아는 인생의 전부였으니까요. 친구는 학교에서 만나는 거지, 방과 후나 주말에 따로 또 만나서 논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Q. 그러니까 동시에 두 세계에 살았군요.
A. 그렇죠. 이민 2세인 한국계 미국인들은 제 얘기에 쉽게 공감하실 거라고 봅니다만. 제가 자란 브롱스는 한인들이 별로 없었어요. 한인들이 많은 곳에 살았거나 교화에 나갔다면 사회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구조가 있었을 테니 사정이 좀 달랐겠지요.
Q. 지금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A. 임상 심리학 공부를 했어요. 현재 하버드 대학에 학습연구소에 상담원으로 일합니다. 학문이나 신상발달의 문제로 학생들이 상담을 하러 오는 곳입니다.
Q. 학교의 상담교사 같은 겁니까?
A. 비슷해요. 그런데 개인 상담지도의 성격이 더 강하지요. 학생들의 학습 지도/ 조언도 하지만 저희연구소의 초점은 개인 학생들의 경합입니다. 성적이 잘 않나오거나 미루는 습관 능률이 잘 안 오르는 등의 학습의 어려움, 혹은 불안감, 대인관계의 문제와 같은 성격문제 등. 일반 상담소나 정신 건강원과 우리 연구소의 차이점은 배움과 학습문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학생과 일 대 일로 만나 상담하는 일입니다. 오늘은 논문이 잘 안 써져서 고민인 대학원생을 만났어요. 그냥 불안감이 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여학생의 경우는 가족들과의 관계 불화로 인해 학습이나 일에 집중 할 수 있는 능력에 방해를 받은 겨죠
Q. 어떤 수행을 주로 하셨나요?
A. 선 수행이죠. 선원마다 다르지만 아침에 108배를 하고 염불을 하고 선을 시작하죠. 저녁때는 다시 염불을 하죠. 제 생각에 관음 선원에는 여러 가지 의식의 수가 다른 곳 보다 적은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국 교민사회에 있는 절 등에서는 지금까지 해오던 의식을 고수하는데, 이곳 생활의 정서와 필요에 더 맞는 수행형태로의 수정도 고려되어야 할 것 같아요. 2세 한국인이 한국식 불교에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은 뭔가 의무적으로 할 것이 많은 것 같은 반면에 거기에서 유용성을 찾지 못한다는 거예요.
Q. 불교가 선생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A. 매일 일상생활에서 도움이 돼요. [웃음] 그래서 계속 수행을 하겠지요.
Q. 매일 참선을 하십니까?
A. 아뇨. 노력은 하지만 매일은 못해요. 그래서 이와 같은 승가가 필요한 것이지요. 수행을 오래 안하다 보면 서먹서먹해 지고... 불교수행을 통해 저 자신이 안정되고 여유로워 집니다. 나의 일부분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죠. “만일 내게 내일이 없더라도, 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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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불교수행이 타인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A. 제 아들과의 관계가 가장 두드러지게 개선되었어요. 지금도 아이에게 잔소리도하고 소리도 지르지만, 전에 비해 여유가 생기고 아이를 포용하게 되었어요. 아이가 꼭 이루어 내야 한다는 기준치나 내가 그것을 위에 아이를 밀어붙여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진 거죠. 집착에서 좀 벗어나게 되었달 까요. 아이가 정말 해야 할 일과 내가 아이에게 부리는 욕심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어요. 뭐 아무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된 건 아니라도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 지 볼 수 있으니까 그것을 버릴 수가 있게 돼요. 만일 제가 아이에게 너는 한국인이니까 존경하는 태도를 가져야해 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대한다면 아이가 내게 때때로 말대꾸를 한달지 할 때 저는 화가 나서 못 견딜 거예요. 당장 이 녀석의 버릇을 고쳐놔야지 하겠죠. 그러나 내가 아이를 사랑하며 그 애를 지도하고자 한다는데 마음을 두면 아이를 이해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요. 불교 수행을 통해 얻은 또 하나는 제 직업의 정체성에 대해 느낀 위기감을 극복한 거예요. 자꾸 불확실해 지고 자신감이 없어져서 더 많은 지식을 쌓아야 갰다는 불안감과 강박감으로 이어졌어요. 이제는, 그것이 지식이든 물질이든, 외부로부터 이것저것 자꾸 쌓는 대신에 내부로부터 일을 해결하려는 쪽으로 기본 방법이 바뀌었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에 존재하는 노력을 하는 거죠.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다르게 표현했다면 더 멋졌을 거야”, 이렇게 계속 스스로 나무라기만 할 수는 없어요. 그런 마음이 지금도 계속 들 긴하지만 곧 놓아버릴 수 있어요. 그 어떤 중심을 마음속에 가진다는 것이 무척 도움이 됩니다. 요즘은 기회가 압박이 되기도 해요. 사방을 둘러보면 곳곳에 기회와 멋진 일들이 있는 것 같다 보면 스트레스도 쌓이고 걱정이 생기죠. “이것이 더 좋아.” “이것은 당신을 더 젊고 예쁘고 똑똑하게 해 줍니다.” 이러한 자극들은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다는 규정을 짓지요. 그걸 따라 다니다 보면 실망도 많이 하게 되고 그래서 다치기 쉬운 심약한 상태가 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탐 진 치의 모습이죠. 저는 명상을 할 때도 숭산스님의 저서인 “부처에게 재를 털고” 와 “오직 모를 뿐”을 항상 숙독합니다. 그 책에서 나오는 면담, 공안 등을 잘 이해 못하더라도 저는 숭산스님의 “오직 할 뿐”이라는 가르침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는 매순간을 노력하는 마음과 같은 겁니다. 그 자체로서 중요한 거예요. 방석에 앉아서 수행을 한다고 선수행자가 아니라고 스님을 가르치십니다. 바로 지금 내 마음을 어떻게 먹고 있느냐가 관건이지요.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마음 챙김도 중요합니다. 저는 장기간의 선원수행연수를 밭을 의사가 없기 때문에 저는 맑은 마음을 항상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지금 노력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제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래서 꽤 오랜 세월을 계속 해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관음 선원과 제가 가진 좋은 인연을 항상 감사해요.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렵고, 법을 만나기가 어렵고, 좋은 스승을 만나기가 어렵고, 득도하기가 어렵다고 해요. 이 모든 것이 다 우리 각자에게 달렸습니다.
신성림 박사 약력
▷ 1970년 가족과 함께 도미. ▷ 브롱스 과학 고등학교 졸업. ▷ SUNY 버밍햄 대학에서 심리학 학사. ▷ 뉴욕 로체스터 대학에서 임상 심리학 석사, 박사. ▷ 1995년부터 현재까지 하버드 대학 MBA 상담소에서 심리학자, ▷ 하버드 대학 학습상담국 상담자/심리학자 역임. ▷ 1970년대 초 숭산스님을 만나고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고, 지난 10년 간 일 년에 두 번씩 프라비덴스 젠 센터에서 입사에서 선 수행. ▷ 평상시에는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에 있는 오픈 메도우 젠 센터에서 수행. ▷ 관음선원 법사 수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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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국에서는 일반신도들도 승복을 으례 입으시나봅니다. 법사라서 그런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