욤키푸르 전쟁은 라마단 전쟁 또는 10월 전쟁으로 불리기도 하는 전쟁으로서 1973년 10월 6일부터 26일까지 약 20일 간 일어났던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 간의 전쟁을 일컫는다. 이른바 제4차 중동 전쟁이라고도 한다.
1970년 이집트 혁명을 이끌었던 나세르가 급사하자 그 후계자가 된 사다트 대통령은 이집트의 경제 발전이 늦어진 것은 이스라엘과의 오랜 전쟁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을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각국이 동시에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해 이스라엘군이 다방면으로 신경쓰느라 이집트군에 신경쓰지 못하도록 하는 전술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이집트는 시리아, 리비아 등과 제휴하고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다시 받아들이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결국 1973년 10월 6일 욤 키푸르를 공격 개시일로 이집트와 시리아군은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1973년 10월 6일은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휴일인 욤 키푸르로 국민 대부분이 유대교 신자인 이스라엘은 자연스레 경계가 느슨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은 이스라엘의 경계선을 단숨에 돌파, 시나이 반도로 진출해 이스라엘의 거점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반에 대패를 당하고 며칠만에 지난 3차례의 중동전쟁으로 획득한 영토를 모두 잃고 자국 영토까지 침략당할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10월 10일부터 반격를 개시하여 시리아군을 괴멸시키고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 근방까지 진격했다. 이어서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군까지 격파하고 이집트 수도 카이로 100km앞까지 질주한다.
이스라엘의 반격이 성공해 이집트와 시리아가 동시에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자 국제 여론은 정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미국과 소련의 중재로 10월 22일에 정전을 선언함으로써 전쟁은 공식적으로는 끝을 맺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 전쟁에 75만명이 참전해 약 1만명이 전사하고 1만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탱크 2000여대와 전투기 500여대가 손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기습을 받은 이스라엘군도 약 3천명이 전사하고 탱크 800여대가 파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욤키푸르 전쟁은 제1차 오일쇼크를 불러오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아랍의 주요 산유국인 리비아, 이라크, 이란 등은 차례로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발표했고 이스라엘의 반격에 항의하는 의미로 10월 17일 일제히 석유 수출을 금지하면서 원유가격을 상승시켰다. 이에 당시 공급과잉 상태로 저가였던 원유가격은 순식간에 4배 이상으로 상승해 세계 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욤키푸르 전쟁은 휴일에 갑작스레 기습을 당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과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겠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휴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경계 태세를 느슨히 하지 않았다면 20일간 3천여명이 죽는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