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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달이 공중에 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보배 달이 공중에 떠 있는 것입니까(如何是寶月當空)?"
"나는 귀를 막아버렸다(塞卻老僧耳)."
'보월당공(寶月當空)'은 보배스런 달(月)이 하늘, 허공 가운데 걸려 있는 듯이 떠 있는 모습을 말한다. '낭월당공(朗月當空)이라고도 한다. 침식을 잊을 정도로 화두를 오래 들고 있다 보면, 마치 이마 위에 두둥실 태양이나 달이 떠오른 것처럼 밝디 밝은 것이 항상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의단(疑團) 즉, 의심 덩어리라고 하는데, 선사의 말 한 마디를 의심할 대로 의심하면 이 형상도 없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뭔가 딱딱한 덩어리처럼 모여 뭉쳐지는 것이다.
깨치기 위해서는 이 의심 덩어리를 깨뜨려야 하는데, 의단독로(疑團獨露) 즉, 이 의단이 홀로 드러나면 깨칠 시절이 가까워졌다고 한다. 의단독로란 이 의심 덩어리가 우리 마음과 하나가 되어 어디를 가도 간 곳을 모르고, 밥을 먹어도, 앉아도, 오직 의심만으로 가득찬 그런 상태이다. 이것은 스스로 실행해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다.
조주가 활동하던 그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선사의 한 마디를 계속 의심해 나가거나, 부처의 형상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염불(念佛)수행 등이 있었다. 이 스님도 그러한 말을 어디선가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계속 의심하면 보배달이 허공에 걸려 있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고 조주에게 물은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조주는 "노승은 귀를 막아버렸다(塞卻老僧耳)."고 대답했다.
보배달이 허공에 걸렸다는 게 무엇인지 물었는데, '노승은 귀를 막았다' 라니, 그 스님의 말을 듣기 싫어서 귀를 닫았다는 뜻일까? 너무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 하마터면 나도 속아 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역시 조주는 오직 본분사로만 응대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되지 않겠지만, 조주는 항상 직지인심으로 수행자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 마음의 본바탕을 떠나지 않고 모든 질문이나 인연에 응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의심 덩어리가 어떻게 되든지, 깨달음이란 보아도 보는 게 없고, 들어도 듣는 게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힌트를 조금 더 드리겠다. 조주의 "노승은 귀를 막아버렸다(塞卻老僧耳)" 라는 이 대답에 만약 나라면 "스님도 역시 눈멀었군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조주의 말과 나의 대답은 그 거리가 얼마나 될까? 한번 재어보라. 한 뼘밖에 차이가 없을 것이지만 내가 좀 경솔한 면이 있었다. 헐!
422. '털끝만 한 차이라도 있으면'
한 스님이 물었다.
"털끝만 한 차이라도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毫釐有差時如何)?"
"거칠다(麤)."
"기연(機緣)에 응할 때는 어떻습니까(應機時如何)?"
"굽힌다(屈)."
'털끝만 한 차이라도 있으면 어떻습니까?'
이 말은 앞에서 여러 번 설명했다시피, 선종 3조 승찬대사가 지은 신심명(信心銘)의 첫 구절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시작된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 다만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만 않으면 훤하게 밝아지리라.'
그다음 구절은 '호리유차 천지현격 욕득현존 막존순역(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털끝만 한 차이라도 있으면 하늘과 땅처럼 사이가 벌어진다.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란다면 따르지도 말고 등지지도 말라.' 이 문장에서 털끝만 한 차이라도 있을 때는 어떤가 하고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조주는 "거칠다(麤)."고 답했는데, 추(麤)는 굵다, 거칠다는 뜻이니 털끝만 한 차이라도 있으면 미세한 차이가 아니라 매우 큰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조금 더 풀어쓰면, 승찬대사가 분별하지만 않으면 곧 깨달음의 길(道)에 접어든다고 했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의심이 있거나 동요가 있다면 깨닫기는커녕 저 높은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 벌어진다는 뜻을 '거칠다(麤)'고 표현한 것이다.
다시 "기연(機緣)에 응할 때는 어떻습니까?" 라고 물으니, "굽힌다(屈)."고 대답했다. 기연(機緣)이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을만한 인연을 말하는데, 선가(禪家)에서는 공부하는 수행자가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큰 선지식을 만나 곧바로 도(道)를 깨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런 인연을 만나면 '굽힌다'고 하니 조주의 노파심이 간절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수행자를 깨우치기 위해선 개에게 절이라도 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개나 소들이 깨치도록 매일 손을 흔든다.
423. '옷을 털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사문의 행입니까(如何是沙門行)?’
조주선사는 손을 펴서 옷을 털었다.
'사문의 행(沙門行)'이 또 나왔다. 도를 닦는 승려들이 행할 바가 무엇입니까? 그냥 쉽게 말하여 도(道)를 닦아서 터득하는 것이다. 어떻게 터득하는가? 사람의 성품을 볼 수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조주가 직지인심으로 손을 펴서 옷을 툭 털어버리는 행동을 한 의미를 알아채면 된다. 무슨 뜻인가? 전등록에 나오는, 달마대사가 인도에 있을 때 제자였던 바라제 존자와 이견왕(異見王) 간의 대화를 잘 살펴보라.
‘이견왕이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다. 바라제 존자가 대답하길, “성품을 보는 사람이 부처입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대사는 성품을 보았습니까?” 존자가 대답했다. “저는 이미 성품을 보았습니다.”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나는 보지 못합니까?” “지금 작용하고 있는데도 왕이 스스로 보지를 못합니다.” “만약 작용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것이 나타날 때는 여덟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 여덟 가지의 길을 말해 주시오.”
바라제 존자가 게송으로 대답했다. “태(胎)속에서는 몸이요,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이요, 눈으로는 본다 하고, 귀로는 듣는다 하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며, 손으로는 움켜잡고, 발로는 걷고, 펼치면 세계를 덮고, 거두어들이면 티끌 속에 들어가며, 아는 이는 이를 불성(佛性)이라 하고, 알지 못하는 이는 정혼(情魂)이라고 합니다.”
자, 여러분! 이제 확실히 느낌이 오는가? 이제 무엇이 마음이고, 성품이고, 도(道)요 선(禪)인지 확실히 아시겠는가? 도(道)가 작용하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손으로 잡고, 발로 걷고, 눈으로 개를 보고, 입으로 말하고, 세상에서 매일 쓰는 곳에 도가 있다. 선(禪)이 중국에서 활짝 꽃을 피워 우리나라로 건너왔지만 이미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에서도 계속 이어져 왔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제 비록 온 몸으로 체감(體感)하지는 못한다 해도, 도(道)가 무엇인지는 이해할 것이다. 길을 가다가도 손으로 이것저것 스쳐 보라. 길가의 꽃, 나무, 전봇대, 서 있는 차량, 담벼락, 돌, 뒹구는 병 등등. 이런 사물들을 감촉으로 느껴 아는 그것은 손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마음(성품)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 성품이 바로 그대의 부처, 법신불이다. 이것을 알면 부처가 되지 않으려야 안될 수가 없다. 이것도 마음을 훈련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424. '아무도 모른다'
"조사와 부처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은 곳은 어떻습니까(祖佛命不斷處如何)?"
"아무도 모른다(無人知)."
이 질문도 물음에 답이 나와 있는 경우이다. '불조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은 곳'은 바로 우리 마음이다. 자기 주인공인 마음이 없다면 부처고, 조사고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다. 그곳은 어떠한지 물으니, 조주는 "아무도 모른다(無人知)" 고 대답한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처음 양나라 무제를 만나 대화할 때, 양무제가 "제 앞에서 말하는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달마는 "불식(不識)" 이라고 답했다. 이 불식(不識)이란 말도 모른다는 뜻이다. 붓다, 달마, 조주, 그 누구도 이 마음의 진정한 정체는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견성(見性)이라고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고 해도 이 마음의 진면목을 완전히 알 수는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다. 알고 나서 어디까지 갈지는 끌까지 가봐야 한다.
그 안에 갖춘 지혜는 무궁무진, 끝 간 데 없이 끝없이 이어진다고 하는데 그 끝을 모르는 것이 이 마음이다. 그러니 아무도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선사들은 백두산 높이만큼 금은보화를 가져 오더라도 바꾸지 않을 보배요, 왕 중의 왕이라고 하는 것이다. 헐!
425. '방편은 방편'
"방편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權機喚作什麽)?’
"방편이라고 부르지(喚作權機)."
'권기(權機)'란 말은 부처님의 교화의 대상이 되는 근기(根機)를 일컫기도 하고, 가르치는 수단, 방법인 방편(方便)으로도 쓰고, 권력과 대기대용(大機大用, 큰 기틀 큰 작용)의 복합어로도 볼 수 있다만 여기서는 수행자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방편으로 보았다.
'(수행자들을 가르치는 수단인) 방편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방편이라고 부를 뿐이다." 도(道)를 가르치는 방법이라고 해서 깨친 선사들 간에 특별히 달리 부르는 명칭이 있는지 물어본 셈인데,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수행이나 열심히 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조주는 또한 무슨 특별한 방편 수단을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무심(無心)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리가 모두 갖추고 있는 반야 지혜의 가르침을 들려줄 뿐이다.
426. '총림이란 곳'
한 스님이 물었다.
"저는 요즘에서야 총림에 들어와서 잘 모르니 큰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총림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더욱 모르겠지(未入叢林 更是不會)."
이 문답을 보니 그냥 큰 웃음만 나온다. 이번에는 한 스님이 승려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니 조주에게 좀 잘 가르쳐 달라고 간청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총림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더욱 모르겠지." 라고 그의 마음에 충격을 준다. 조주의 말씀은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평소 생각하여 헤아리는 습성을 가진 그 스님의 마음을 하얀 백지상태로 돌이키는 방편을 펼친 것이다. 선(禪)의 가르침도 첫인상이 아주 중요한 것 같다.
원래 선(禪)에서는 경전을 인용하여 이리저리 법을 설하는 경우도 별로 없지만, 직지인심으로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찔러서 한순간에 깨달음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핵심이므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 최대한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 뒤집혀진 마음자리를 똑바로 세우고, 번뇌 망상을 떨쳐버리게 만드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몽둥이로 때리고, 고함을 지르고, 별 괴상한 행동을 사양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깨친 사람들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하겠는가? 모두 후배들을 곧바로 깨치게 만들려는 노파심에서 자신의 체면을 다 구기고, 똥오줌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괴승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까지 이렇게 한다.
요즘 세상에서도 그 뜻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禪)이 불법을 이상하게 만들었다고 비방하는 스님들도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만약 이 스님이 여기서 바로 깨달았다면, "큰스님의 은혜에 백골난망입니다." 하고 백번은 더 절을 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
427. '옛 큰스님(古德)이란'
한 스님이 물었다.
"예부터 큰스님들은 무엇으로 사람을 가르쳤습니까(從上古德 將何示人)?"
"그대가 묻지 않았더라면 나는 옛 큰스님(古德)이 있는 줄도 모를 뻔했다."
"큰스님께서 잘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옛 큰스님이 아니다(老僧不是古德)."
저 옛날부터 고덕(古德), 즉 큰 선지식, 선사들은 어떻게 수행자들을 가르쳤는지 물었다. "그대가 묻지 않았으면 나는 고덕(古德)이 있는 것도 모를 뻔했구나." 몇십 년 동안 제방을 편력한 조주가 어찌 큰 선사들을 모르겠는가마는 짐짓 능청을 떨고 있다고나 할까? 나는 큰 선지식을 잘 모른다고 하는 말이다.
어떤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그 수행자는 그저 "큰스님께서 좀 잘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간청할 뿐이다. 조주는 끝까지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니다." 라며 그 스님에게 충격 아닌 충격을 준다. 그저 본분대로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
원래 나란 존재는 없다. 중생도 부처도 없다. 무아(無我)인 내가 무슨 큰스님, 부처란 말이냐? 고덕(古德)이니, 부처니, 나니 너니 하는 모습(相)이 마음속에 티끌만치라도 남아 있으면 아직 완전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런 모든 모습의 자취를 철저히 쓸어내야 한다. 텅 빈 마음, 그것은 그저 이름을 진여(眞如)라 할 뿐이니라!
428. '불법은 진실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불법의 꽃이 피어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습니까
(佛花未發 如何辨得眞實)?"
"이것은 참되고 실답다(是眞是實)."
"그런 일은 어떤 사람에게 해당됩니까(是什麽人 分上事)?"
"나도 해당되고 그대도 해당된다(老僧有分 闍黎有分)."
'불법의 꽃(佛花)이 피어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진실을 판단하여 알 수 있습니까?' 깨달음의 꽃이 아직 피어나지 않았을 때란 수행인이 깨닫기 전을 말하기도 하고, 붓다가 세상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 또는 이 우주가 만들어지기 이전을 지칭(指稱)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니 석가모니 이전에 6명의 부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첫 번째 부처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어떻게 모든 법(法), 마음의 참된 모습(實相)을 관찰하여 알 수 있었겠습니까? 라는 뜻으로 풀어본다.
조주는 '시진시실(是眞是實), 이는 참되고 실답다, 전혀 거짓이 없다.'고 대답한다. 이 뜻은 첫 번째 부처가 세상에 나기 전에도 진리는 그대로 진실한 것이니, 부처가 나고, 나지 않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다. 진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참되고 실다운 것이지, 어찌 누구 때문에 또는 언젠가는 바뀔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 스님에게는 이해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말씀이다. 그 말씀은 저 같은 중생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런 진리가 해당됩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수행자이다. 조주는 그래도 친절하게 "내게도 해당되고, 그대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라고 말했다.
'그대가 깨닫지 못해서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참되고 실다운 진리는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그 진실이 바뀔 수가 있겠느냐? 그것은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 마음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생겨나지도 않아 없어지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모든 법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429. '그대가 부처'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그대는 어떤 사람이냐(你是什麽人)?"
오랜만에 부처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다. 선가(禪家)의 영원한 숙제이기도 하다. 보리, 열반, 깨달음이 무엇인지? 부처가 무엇인지? 조주는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你是什麽人)?" 하고 되묻는다. 어느 정도 수행이 되면 자기가 부처임은 이미 자각하고, 부처의 행위만을 배우고 가르침대로 따라가는 수행이라야 한다. 설령 온 몸으로 자기가 부처임을 체득하지는 못했더라도, 실제로 자신이 부처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미 모든 사람이 본래 부처임은 과거의 모든 부처, 보살, 조사, 선사들이 확실하게 증명했으니까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참선과 반야바라밀을 통해 인과 윤회로 따라온 업(業)과 번뇌를 하나씩 둘씩 벗겨내고, 부처의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교과서에 나오는 '큰 바위 얼굴'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을 확신한다. 조주의 "그대는 어떤 사람이냐?"는 '그대가 바로 부처이지!' 하고 말하는 것이다.
430. '곧바로 질러가라'
한 스님이 물었다.
"길을 곧바로 질러갈 때는 어떻습니까(驀直路時 如何)?"
"곧바로 질러가라(驀直路)."
위 원문에서 맥(驀)이란 한자는 말을 탈 맥자로, 곧장, 쏜살같이 처럼 부사로도 사용된다. 길을 똑바로, 쏜살같이 지름길로 갈 때는 어떠한가 하고 묻고 있다. 이 길은 어떤 길일까? 물론 도(道)를 닦는, 깨달음을 향한 길을 말할 것이다. 조주는 질문 그대로 "곧바로 질러가라(驀直路)."고 대답했다.
열반해탈이 바로 저긴데 머뭇거릴 새가 어디 있느냐?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곧장 앞으로, 맥을 짚어 가라고 지시한다. 화엄경에서 나오는 10신(十信), 10주(十住), 10행(十行), 10회향(十廻向), 10지(十地), 등각, 묘각 등의 52위(位)를 단계별로 거쳐 가려 한다면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선(禪)은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이다. 이 말만큼 빠르게, 곧바로 질러가야 한다. 그대는 이미 붓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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