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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수련 3년만에 호흡의 길이는 30초로 늘고 임독(소주천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음)을 돌리고, 12경과 14경을 유통시키고, 365혈(대주천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음)로 기운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청산선사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는 동안 숨을 몇 번 쉬시냐는 제자의 질문에 두 번이라고 대답하셨다. 두 시간에 한 번의 호흡을 하시는 그분의 경지를 이해하려면 나는 얼마나 열심히 수련을 해야 하는가?
기운은 함부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임독(임맥과 독맥으로 기를 운용)을 처음 돌리던 날, 나는 기운을 돌리는 즐거움에 취해, 한 달 가까이 계속된 가뭄을 몰아내기 위해 북상한 태풍의 은혜를 바라보며 30분 동안 계속 임독을 돌렸었다. 뜨겁게 몸을 달구는 기운과 일시에 전 국토의 가뭄을 해결하는 태풍이라는 대자연의 힘을 바라보며 희열에 들뜬 것도 잠시 갑자기 나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지며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독맥(등 쪽 척추를 따라 올라가는 기를 위한 길, 임맥 = 몸 앞부분으로 내려오는 기운을 위한 길)을 따라 올라가던 기운이 목을 넘지 못하고 똑똑 떨어져 내리며 가위에 눌리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놀라서 기운의 유통을 멈추고 편안히 쉬었더니 잠시 후 몸은 다시 정상을 되찾았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사범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무리하게 임독을 돌리면 몸을 다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두세 번만 돌리는게 좋고 나중에 수행이 깊어지시면 조금씩 횟수를 늘리면 됩니다.”
건강의 회복도 계속 상향곡선을 긋지는 않는다. 수련을 하면 할수록 몸은 계속 부드러워진다. 그러다 부드러움의 극에 달하게 되면 몸의 어느 구석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다시 더러운 그 무엇이 혈관 속으로 쏟아져 나와 근육과 뼈 마디마디를 뻣뻣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럴 때엔 수련에 회의를 느낀다. 나는 과연 올바른 길 위에 서 있는가? 불신의 마음이 찾아들어도 이미 세상의 모든 방법을 다 써본 뒤인지라 할 수 없이 효과를 느낀 유일한 방법인 국선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긴 세월을 두고보면 틀림없이 나의 몸은 끊임없이 좋아지고 있다.
난 철저하게 스스로의 생명력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아무리 더워도 선풍기를 틀지 않는다. 어지간히 추워서는 난로 옆으로 가지 않는다. 아무리 아파도 약을 먹지 않는다. 안경을 벗어 던졌다. 내 몸에는 자동 온도 조절장치가 있다. 약을 쓰면 자체 면역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안경으로 초점을 조절하면 눈이 스스로를 적절한 상태로 되돌리지 않는다. 나의 몸과 정신을 제외한 그 어느 것도 믿지 않는다. 더 이상 나의 능력으로 인생을 유지할 수 없다면 삶을 접는 것이 낫다.
주기적으로 치질에서 피가 터진다. 치질이 터지는 날에 화장실은 온통 피범벅이 된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듯이 줄줄 소리를 내며 흘러나온다. 길거리를 걸어가다 피가 저절로 흘러 바지를 버리는 일이 허다하여 할 수 없이 대형 생리대를 구해서 차고 다니기도 하지만 어떤 때엔 양이 너무 많아 효과가 없다. 현대 과학으로 따지면 나는 이미 죽었어야 한다. 피를 그렇게 토하고도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시기가 지나면 나의 몸은 한 단계 도약한다. 머리가 점점 하얗게 변해 늙은이가 다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에 차 있다. 머리는 틀림없이 다시 검어질 것이다. 벌써 말기에 접어든 치질도 몰아낼 자신이 있다. 헛된 희망이라도 관계없다. 절망에 취한 인간보다는 희망에 들뜬 사람의 인생이 더욱 가치 있기에 건강의 관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억지로라도 나 자신에게 확신을 가진다.
“도에 관심있으십니까?”
시내로 나가면 우리는 무수히 많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들은 진명실리단에서 포교를 나온 사람들이다. 강증산 선생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무수히 많은 종교의 한 분파이다. 그분도 일반 병자는 숱하게 치료를 하고 무덤에 들어간 자도 살리는 등 살아서 온갖 기적을 행하셨다 한다. 그분의 소지품 하나가 하나의 종교단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성배가 울고 갈 판이다. 이들은 주문 수련을 주로 한다. 그러나 순수 수련단체라기보다는 역시 종교단체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들의 경전은 실로 놀라운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오란이나 기독교와 천주교의 그것인 성경의 많은 부분이 악마의 언어들로 채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던 경험과는 달리 이들의 경전은 너무나 착하고 선량하여 정말 하느님의 언어인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하느님에 반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라는 전자의 가르침에 비해, 이들의 하나님은 자신들을 비난하는 이교도조차도 아직 복음을 만나지 못한 존재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관용을 보여준다. 종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경전의 가르침에 있지 않고 경전에 대한 인간의 해석 방식과 주변에 모여든 사람의 수로 판단된다는 사실이 뼈에 저리게 슬프다. 고귀한 생각을 모신다고 해서 항상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정말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 걸까?
나는 그를 따라 나섰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 단체이기에 포교인들이 온 길거리를 가득 채우는지 알아나 보자. 서면 중학교 뒷길에 있는 조그마한 포교당으로 들어선다. 밖에서 보면 그저 평범한 가정집에 불과하다. 삼층으로 오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다리 아래에서부터 상체로 타고 오르는 무척이나 선량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싼다. 이렇게 맑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것을 보니 정말 착한 사람들의 모임이구나. 그 날 입도치성을 드리고 일주일 가량 그 사람들과 함께 주문 수련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수련이 아니라 포교에 있다. 종교와 관계없이 수련만이라도 계속 해볼까했으나 육체를 도외시하고 특정인을 하느님으로 숭배하는 그들의 방식은 나와 맞지 않다. 대단히 과학적이고 훌륭한 한국 무술의 종가인 기천문으로의 외도도 시도했다. 지금도 가끔 그곳에서 배운 검술과 권법의 기초동작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다. 종교는 정신에 치우치고 무술은 육체에 치우친다. 종교에 참여하자니 건강에 회복이 없고, 무술에 심취하자니 아직은 몸이 따르지 못한다.
몇몇 종교를 기웃거리면서 아쉽다고 느낀 것은 그들이 육체를 너무 하잘것없이 취급한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이 내용물이라면 몸은 그것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 아무리 크고 훌륭해도 내용물이 보잘 것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용물이 아무리 고귀하다해도 그릇에 구멍이 나거나 너무 작거나 부실하다면 담을 수가 없다. 몸과 정신의 관계는 이러하기에 모름지기 수양이란 정신과 육체를 함께 보양해야 하는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육체 속의 고귀한 정신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고, 선량하지 못한 정신이 담긴 튼실한 육체는 무식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에만 집착한다면 몸만 갈고 닦아 정신에서 부족함을 드러내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어떤 사람이 이까짓 육체에 집착하여 무엇을 하나 하며 나의 수련에 모욕을 가해 왔을 때 나는 그의 얼굴에 한 방 먹여 깨우쳐주고 싶었다.
‘왜 때려!’
‘소중한 정신도 아니고 하잘 것 없는 육체를 때린 걸 가지고 뭘 그리 화를 내시오?’
그의 식사를 못하게 하여 깨우쳐 주고 싶었다.
‘내 밥!’
‘정신의 양식이면 충분하거늘 이까짓 밥 한 공기로 몸을 먹여 무엇하시려오?’
종교는 근본적으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그릇된 믿음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혼란과 절망 속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하다. 특정 종파에 몸을 담으면 자연스럽게 집단적 사고에 의해 옳든 옳지 않든 자신들만의 믿음으로 그들만의 신념체계를 형성해가며 외부에 배타적인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그 배타성을 인정하지 않고 보다 우수한 사고를 세상에 전파하기 위함이라고 교언영색을 한다. 자신의 사고가 남들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배타의 원천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우수하면 남들도 우수하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복잡함과 우수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어떤 단체이든 구성원 전체를 사탄의 길로 이끄는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믿음과 사실을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사실이란 삼척동자도 명확히 알 수 있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그 외의 나머지는 믿음이라는 이름을 지닌 집단의 의견에 불과하다. 의견이란 더러는 옳고, 더러는 환상에 지나지 않아 진리로 취급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믿음은 보다 훌륭한 믿음이 나타났을 때엔 언제라도 자리를 양보할 줄 아는 자세를 키워야 한다. 그러나 양보하면 패배라고 생각하는 일반적 사고체계는 종교로 하여금 계속 고집을 부리게 만든다.
그렇지만 필연코 죽음으로 돌아가는 우리 인생에 종교적 믿음이 없다면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존재가치는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타종교를 무시하고 낮추어 말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모든 종교가 함께 공정한 합법적 틀 내에서 경쟁해 나간다면 참 하늘의 뜻에 어긋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집단의 주도권 다툼이 가세하면 사건은 무척 복잡해진다. 세상에는 엉터리가 주류를 이루어 옳고 바른 생각을 탄압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주도권을 쥔 자들은 거짓을 통해 권력과 돈을 움켜쥐니 차라리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아무 관계없는 일반인이나 그 지배로 인한 희생양들의 부화뇌동은 더욱 참혹하다. 자신의 의지박약함을 탓하지 않고 사랑하는 말의 머리를 자르는 김유신의 잔악무도함에 결연한 의지의 표출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처럼, 트럼펫을 울리며 진군하여 자신들의 조상을 도살하는 기병대의 출현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인디언 보호구역의 미국인 꼬마 인디언들처럼...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수술하기 위해 마취로 죽인 것처럼 보였다가 살아나게 하는 일로 하느님처럼 숭배 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분은 너무 순수해 때 묻지 않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진정한 하느님이라고 실토한다. 유럽에서 전쟁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슈바이처가 걱정하자 옆에 있던 흑인이 걱정스럽게 한마디 덧붙인다. “아이고, 그러면 열 명도 더 죽었겠네요!” 수백만을 죽이고도 각종 명분으로 우수한 문명이라 자랑하는 서양인들이 열 명이 최대 살육의 한계인 천사 미개인들의 고귀한 정신을 어찌 하늘로 모시지 않을 수 있는가? 아무리 위대한 경전도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 아래에 있건만 세상에서는 상하가 거꾸로 된다.
인간은 상상하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진리는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 되는데 발전적이고 평화적이고 이타적인 상상으로 자신을 고정시켜 재앙의 가능성을 줄여 나가는 존재가 바로 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