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대구달성 답사자료 |
* 일 시 : 2016.12.23 (넷째 금요일) 08:00~18:00
* 일 정 : 현지 사정에 의하여 일부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마산박물관(08:00) - 육신사 – 하목정 - 화원유원지 -
--- 점 심 – 사문진 주막촌 ---
- 용연사 – 도동서원 - 마산박물관(18:00) -
* 답사인원 : 35 명
* 해 설 : 자 문 : 송 성 안 (전 마산박물관 학예사, 문학박사)
* 인 솔 : 회 장 : 고 명 천 010-3889-1288
: 이 사 : 김 인 국 010-3863-7570
마박 문화유산 답사회
2016-12차 답사자료 (2016.12. 23)
** 달성군 현황
- 역사적 : 선사이래 유구한 역사와 유·불교 문화가 살아 숨쉬는 전통적인 충효의 고장
- 문화적 : 현대와 전통, 천혜의 자연이 어우러진 문화관광 위락도시
- 지리적 : 대구의 관문도시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舊구마고속도로)과 광주-대구 고속 도로 국도5호선 등이 관통하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
- 환경적 ; 비슬산과 낙동강을 중심으로 잘 보존된 녹지 등 대구권 광역녹지축 형성
대구테크노폴리스 및 대구경북과학기술연구원(DGIST) 조성등 첨단과학기술 중심도시 조성을 통한 대구발전의 중심역할 수행
- 면적 (2015. 12. 31. 기준) : 426.67㎢
- 세대 및 인구 (2016. 7. 1. 기준)
총 210,115명(외국인포함)-(남 108,165명, 여 101,950명) 세대수 : 78,768세대
*** 육신사
- 위치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
육신사는 조선 세조때 사육신이라 일컫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등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충정공 박팽년 선생만이 후손에 의해 배향되어 오다가 선생의 현손인 계창공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어 놀라 다섯 분을 함께 향사를 지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였다.
하빈사는 1694년(숙종20)에 '낙빈(洛濱)' 이란 현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1866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에 강당건물만 중건되었다. 1974년에는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묘골마을의 옛 종가터 뒷산에 정면 5칸,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분의 육신사를 건립하게 되었으며, 1981년에 외삼문, 숭절당, 관리사, 담장등을 갖추었다.
사당 주위에는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와 태고정(보물 제 554호)이 있으며,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된 도곡재(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2호가 있다.
* 태고정
- 지정번호 ; 보물 제554호지정년월일1971년 12월 6일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2
- 시대조선 ; 성종 10년(1479)규모1동
태고정은 1479년 (성종 10)에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건립한 것이다. 원래는 종가 안에 붙어있던 별당 건물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25)에 불타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이를 1614년(광해군 6)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일자형 건물로, 각각 2칸씩 대청마루와 방을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태고정은 그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며, 조선 전기 건축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인 가치가 크다.
* 도곡재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32호지정년월일1974년 12월 10일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0
- 시대조선 ; 정조 2년(1778)
도곡재는 사육신 중 한 분인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묘골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대사성을 지낸 서정공 박문현(1789-1875)이 주택으로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19세기 중엽부터 도곡공 박종우(1587-1654)의 후손들이 공부방으로 사용하면서 선생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 부르게 되었다.
박종우는 인조 때의 문신으로 낙재 서사원을 사사하였고, 한강 정구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문장과 행의가 추앙되었다고 『대구읍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도곡재는 조선시대 남부지방 양반가옥의 실례를 잘 보여주며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이 3개 권역으로 분리되어 일곽 안에 잘 보존되어 있다. 좌측으로 낸 대문채를 들어서면 남향하여 사랑채에 해당하는 도곡재가 자리하고 사랑채 우측에 연한 중문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안채와 우측의 고방채가 자리하여 튼 구자형(口字形)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인 도곡재는 원래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였으나 후대에 재실로 사용하면서 왼쪽에 퇴칸 1칸을 달아 내고 대청을 넓혀 누(樓)처럼 꾸몄다.
** 하목정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36호지정년월일1984년 5월 21일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목정길 56-10
- 시대 ; 조선 선조 37년(1604)규모1동소속종파전의이씨 예산공파종중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 1604년(선조 37)에 세운 것이다.
'하목정' 이라는 정호(亭號)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곳에 머문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이종문의 장남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 준 것인데, 당나라 왕발(王勃 : 649-676)이 지은 등왕각기(騰王閣記) 서(序)에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落霞與孤鶩齊飛)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秋水共長天一色)" 라고 쓴 데서 따온 것이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인 부연(附椽)을 달지 않은 것이 관례였으나, 인조의 명으로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사랑채로 사용하는 이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우측 1칸에는 앞쪽으로 누 1칸을 첨가하고 뒤쪽으로는 방 1칸을 더 만들어 평면이 정자형(丁字形)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붕의 양쪽 추녀를 조금씩 잘라 처마끝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방구매기 수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적이다. 건물 내부에는 김명석, 남용익 등 명인들이 남긴 시액(詩額)이 걸려 있다.
*** 화원유원지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로1길 40-14
화원읍은 사방이 꽃동산처럼 아름답다는 그 이름처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성산리, 구라리가 자리한 서북쪽의 경관은 특히 빼어나다. 신라 경덕왕이 그 풍치에 반해 아홉번이나 들렀다 하여 이름 붙여진 '구라리'나 낙동강이 성산을 휘감아도는 '성산리' 일대는 옛부터 호걸과 가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화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싶다면, 화원유원지 내의 성산 자연전망대를 찾는 것이 좋다.
성산(해발 85.3m)은 북쪽 낙동강을 향해 절벽을 드리운 천연의 요새로, 옛날 동·서·남 편에 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했다고 한다. 지금도 성산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쌓아 올린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화원의 명성은 화원유원지가 조성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화원유원지는 일본인이 맨처음 조성했으며, 1958년에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했다. 현재 유원지 내에는 안동댐 수몰지구에서 옮겨온 고가 2채와 동물원이 있으며, 수영장·잔디밭, 광장 등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추고 있다. 시원한 강바람, 토성과 동물들, 울창한 숲이 조화를 이룬 화원유원지는 손색없는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 사문진 주막촌 – 화원유원지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로1길 42-1
사문진은 과거 경상도 관아와 대구지역 일원에 낙동강 하류로부터 유입되는 물산을 공급하고 이 지역으로부터 다른 지역으로의 물산운송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낙동강의 대표적인 나루터였다. 옛날 보부상들이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대구로 오는 뱃길로 이용되었으며, 1900년 3월 26일 미국선교사 사이드 보탐에 의해 그 당시 “귀신통”이라 불린 한국 최초의 피아노가 유입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또한 1932년 일제 강점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촬영지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문진 나루터가 사문진교가 완공되고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기존의 식당가가 철거되는 등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2013년 “주막촌 복원” 등 도심형 수변 공원 조성 계획을 통해 명품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 피아노 장승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 이수자인 김종흥씨가 국내 최초 유일한 피아노 장승을 만들었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보통 마을 입구나 길가 또는 절의 입구에 세운다. 잡귀와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여 주는 수호신으로 요즘은 개인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 사문진의 지명 유래
"화원읍 본리리(인흥마을)에 있었던 인흥사(仁興寺)라는 큰절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절사(寺)를 써 사문진(寺門津)으로 불렀다."는 설과 "강가의 모래가 있어서 사(沙)자를 쓰고 포구를 통해서 배가 소금 등을 싣고 들어오고, 이 지역의 물건이 다른 지방으로 가는 문이라 해서 사문진(沙門津)으로 불렀다."는 설로 전해 오고 있다.
- 낙동강의 대표적인 나루터
사문진 나루터는 조선 세종 28년에 설치돼 성종때까지 40년간 무역 창고 (화원창)지로 활용되었으며, 이곳에는 대일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한 왜물고가 있었다. 사문진은 과거 경상도 관아와 대구지역 일원에 낙동강 하류로부터 유입되는 물산을 공급하고 이 지역으로부터 다른 지역으로의 물산운송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옛날 보부상들이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대구로 오는 뱃길로 이용했다.
-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 촬영지
이 곳 사문진나루터는 대구 출신 영화감독이었던 이규환 감독이 1932년 9월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의 촬영지이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한국영화 중 『아리랑』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사실주의 영화로 평가되며 뱃사공 부녀를 통해 일제 식민지 침탈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 국내 최초 피아노 유입지
1900년 3월 26일 대구 지역 교회로 부임한 미국인 선교사 사이드보탐 부부가 한국 최초로 피아노를 낙동강 배편으로 실어와 이 곳 사문진나루터에 내려 짐꾼 20여명이 사흘간 대구 약전골목의 선교사 자택으로 옮겼다. 당시에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은 주민들은 빈 나무통 안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겨 여겨 통안에서 귀신이 내는 소리라 하여 귀신통이라 불렀다고 한다. 달성군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2013년 9월 뮤지컬 『귀신통 납시오』를 제작공연 하였으며, 2012년부터 달성군 개청 100주년을 맞아 전국 최초로 100대 피아노 콘서트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향우에는 화원동산에 피아노 박물관을 지을 예정이다.
*** 용연사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용연사길 260
용연사는 비슬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사찰로 달성군 옥포면에 소재한다.
진입로 입구에 조성된 벚꽃길이 유명하며, 계곡 입구에 이르면 용연사의 명물 '옥연지'가 나타난다.
용연사는 912년(신라 신덕왕 1년) 보양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몇차례 중수, 재건을 거쳐 지금의 건물은 영조 4년(1728)에 세웠다.
용연사 적멸보궁 뒤뜰에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세존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조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이중기단 위에 석종형 탑신을 세우고 팔부신상, 사천왕상으로 조각한 이 석조계단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석조예술품으로, 보물 제 53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용연사 금강계단
계단(戒壇)이란 수계의식, 득도식 등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해지는 신성한 곳으로 금강계단이라고도 한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두고 있으며, 계단의 앞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전각을 설치하였다. 통상 적멸보궁은 일반적인 전(殿)이나 각(閣)보다 법당으로서의 격이 높은데, 내부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으며 법당 바깥에 설치한 계단이나 사리탑에 모셔진 진신사리를 예배의 대상으로 한다.
이곳에 봉안된 사리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의 고승인 자장법사가 중국에서 구법(求法)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와 두 함(函)에 넣어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1592) 때 통도사의 사리탑이 파괴되어 사리를 도난당하였다. 그 후 사명대사에 의해 다시 수습되고, 또 서산대사의 명에 따라 한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한 함은 통도사에 안치토록 하였다. 그러나 전란과 사명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에 일시 봉안하였으나 현종 14년(1673) 5월 5일 이곳 용연사에 탑을 건조하고 봉안하게 된 것이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방형의 이중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상층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상(八部神像)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여 동서남북 사방팔방을 수호하게 하였으며, 하층기단에는 네 모서리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을 1구씩 배치하였다. 이들 팔부신상과 사천왕상은 예리한 조각기법은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을 이루어 단조로운 사리탑에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부가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석조 예술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본보기가 되고 있다. 다만 도난의 우려가 있어 사천왕상 4구는 별도 보관 중이고 현재 현장에는 모조품이 배치되어 있다. 계단 주위를 두르는 석조 난간은 1934년에 세워진 것이다.
한편 용연사와 같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사찰은 여러 곳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643년 신라의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舍利)와 정골(頂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경남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 이에 해당된다.
* 용연사 극락전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41호
- 시대조선 : 영조 4년(1728)
용연사는 통일신라 신덕왕 원년(912)에 보양국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 1년(1419)에 천일대사가 다시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여러 해에 걸쳐 다시 지었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은 200여 칸이 넘고 승려도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영조 4년(1728)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 용연사 삼층석탑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28호
용연사 극락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바닥돌은 후대에 새로운 돌로 보수한 상태이며, 기단과 탑신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짧고 처마가 얇은데 비해 밑면에 새긴 4단의 받침이 높직하다.
극락전의 장중한 규모에 비해 석탑의 높이가 2.6m로 너무 작아 서로 잘 조화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의 조각양식이 변화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도동서원
- 지정번호 ; 국가지정 사적 제488호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
도동서원은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 대상에서 제외된 전국 47개 주요 서원 중의 하나이다.
본래 서원은 선조 원년(1568)에 지방 유림들에 의해 현재 서원이 있는 곳에서 약9km 정도 떨어진 비슬산 동북기슭에 쌍계서원으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선조 37년(1604) 현 장소인 대니산 기슭에 사우를 중건하고 제당과 다른건물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사림의 협조로 건립한 후 광해군 2년(1610)에 도동서원이라 사액되었다.
서원은 2층 누각인 수월루와 강당인 중정당, 사당을 일직축선상에 배치하고 강당 앞의 좌우에는 동·서재를 두었는데, 기능에 따라 공간을 분화시킨 배치법과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위계질서를 배푼 방법 등으로 볼 때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법의 전형을 보여 준다.
행사와 교육의 중심인 강당은 높은 댓돌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2칸반의 주심포 맞배집으로 좌·우 퇴칸은 앞퇴가 있는 1칸씩의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앞면을 개방한 대청이다. 제사를 담당하는 공간인 사당은 가구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심포 맞배집이며 정면 3칸마다 당판 문짝을 설치하였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한 맞담으로 매우 아름다우며, 맞담에 설치한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다.
도동서원은 불필요한 장식을 삼가고 간소하게 지어진 조선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서원 내 강당(중정당)과 사당 그리고 이에 딸린 담장이 유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고 전면의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은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 도동서원 중정당 사당 담장
도동서원은 조선 5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향사한 서원으로 선조 원년(1568) 지방유림에서 현풍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불렀는데 창건 5년 뒤인 선조 6년(1573)에 같은 이름으로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선조37년(1604)에 지방의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여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불렀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다. 광해군2년(1610)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도동서원은 고종 2년(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전국 650개 서원 중 철폐되지 않은 전국 47개 중요서원의 하나로 사림과 후손들의 두터운 보호 하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원은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으며, 통로와 계단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軸)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건축구성과 배치형식은 조선시대 서원건축으로서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물들의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구성 및 서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石物)들도 그 기법이 우수하다.
* 도동서원 춘추외 7점
구지면 도동리에 소재하는 도동서원에는 하사의 서책과 제기가 보관되어 있고 장판각에는 경현록 판각이 보존되어 있으며 행단 남쪽에는 3간 2열의 층각, 옛날 유생들이 바람 쏘이던 수월루, 그 남쪽 환주문 내에는 동서 각 3간의 거인재, 거의재, 또 그 위에 내삼문이란 신문안의 위판을 받들고 춘추향사를 행하는 묘우가 남서 최상단에 위치하였고 그 서편에 증반소 3간, 강당 동편에 장판각 2간이 있는데 그 중 묘우, 강당 등은 이 건물의 주축으 로 그 견치우아한 구조와 벽화, 단청은 부속장원과 함께 조선 중기 건축물중 걸작으로 일컫고 있으며 사당건물 내부에는 동서벽에 강심 월일단이란 풍경화와 설로장송이란 벽화가 각각 한폭씩 그려져 있으며 채색과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크기는 전자가 가로 130cm, 세로 94cm이며, 후자가 가로 130cm, 세로 150cm이다.
* 도동서원 은행나무
도동서원의 수문장 구실을 하고 있는 이 나무는 도동서원으로 사액된 선조 40년(1607) 에 당시 안동부사로 재직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외증손이며 퇴계선생의 고제인 한강 정구선생이 도동서원 사액 기념으로 식수한 것이라 전하며 수령이 약 400년이다. 퍼진 가지의 길이가 동쪽 30m, 서쪽 2가지 25m, 남쪽 28m, 중앙 22m 이다. 북쪽으로 난 가지가 10여년 전에 부러졌는데 가지가 부러지기 전 약 3∼4일간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이 때 나무 아래 많은 어린이들이 놀고 있었으나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전하며 부러진 가지를 치우기 위해 나무를 잘라서 차에 실으니 8ton트럭에 가득찬 무게가 되었다고 한다. 동서 남쪽의 4개 가지도 그 힘을 지탱하지 못하여 1977년에 시멘트 기둥을 세워 가지를 바쳐주어 보호하고 있다. 멀리서 이 나무를 바라보면 울창한 수풀이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잎이 무성하고 가지가 많이 벌어져 있다.
이 나무의 둘레는 무려 8.7m나 되며 높이는 25m인 은행나무로서는 보기드문 거목이다. 그동안 '말라들어가던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해 토양소독, 해충방제를 실시하고 배수로 설치, 생장촉진제 주사 등으로 치료 작업을 실시해 오고 있다. <달성군청 홈페이지 자료>
MEMO
마산박물관 문화유산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