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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십자가 위에 나타난 지혜와 능력
본 문 : 고전 1:18-25 찬양: 연약한 내게 힘을 주시고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할렐루야? 사순절 기간 주님께서 걸어가신 행적을 따라 영적인 행적을 점검하고 부활의 영광을 위해 한 걸음씩 따라갑니다. 성경의 십자가는 핵심이고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에는 고상한 윤리도 있고, 철저한 사회정의도 있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첫째 십자가는 나의 운명을 변화시킵니다. 둘째 십자가는 나의 삶과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셋째 십자가는 나의 자랑을 변화시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사람의 운명이 변화됩니다. 이와 같은 운명의 변화가 우편 강도에게서 일어났고 바울에게서 일어났고 성자 어거스틴에게서 일어 났고 그리고 십자가를 믿는 여러분들과 저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여러분들의 운명의 변화인 것을 날마다 믿고 날마다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첫째, 십자가는 미련함과 거리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미련함과 약함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고 약하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 (고전 1:18) "이방인에게는[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고전 1:23).
십자가는 미련한 것입니다.
무식하고 불행한 인간들에게 지혜와 행복을 가져 다 줄 하늘의 신이 세상에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여 죽는다는 것은 인간적 수준에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어렵고 너무나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십자가는 또한 거리끼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 (고전 1:23).
유대인들은 강력한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했는데 십자가는 너무 약해서 그들의 기대에 거리끼는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개인과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가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약하고 너무나 무력하게 보였습니다.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었고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현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고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현대인의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현대인의 정치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합니다. 현대인의 상식에서도 벗어나고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서도 벗어나고 현대인의 개인적인 욕망에서도 벗어납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도 미련한 것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여전히 거리기는 것이요 약한 것입니다.
권력과 명예를 숭배하는 현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여전히 약하고 거리끼는 것이 되고,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현대 지성인들에게 십자가는 여전히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됩니다.
촌구석에서 태어나서 목수 일을 일평생 하다가 여러 가지의 기적을 보이셨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청년을 나의 구세주 메시야로 믿는다는 것이 미련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과 판단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판단과 그러한 생각을 지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철학자 김용옥이란 사람에게도 기독교는 한갓 조소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미련하고 약한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의 십자가는 미련하고 약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같이 미련하고 약한 십자가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파했습니다. 철학적 지혜로 복음에 옷을 입히지도 않고 정치적인 힘으로 복음에 가면을 씌우지도 않고 십자가를 있는 사실 그대로 미련한 방법으로 세상 모든사람들이 생각하는 약하고 모두가 거리끼는 방법으로 전파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하신 일을 기억해 보세요.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보호하실 수도 있었으며 자신이 어떠한 존재라는 것을 하늘의 권위로 나타내실 수도 있으셨고 자신에게 해롭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분이 지니신 신령한 힘으로 막을 수도 있으셨고 자신이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면 얼마든지 취하실 수 있는 신령한 권세를 소유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정말 미련하게 그 모든 정사와 권세를 포기하시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고 거리끼는 하나님의 만세전에 세워 놓으신 십자가라는 그 위대한 구원의 계획에 자신의 전 인격을 전폭 투신하여 생사 간에 정직히 순종하여 충성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사람의 어떠한 위대한 공적이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미련할 정도로 정직하게 순종하고 충성할 때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을 미련하게 그러나 정직하게 있는 사실 그대로 전파한 것입니다.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하여 철저하게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미련한 일을 하셨고 바울도 부활한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후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전통과 명예와 학벌과 가문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주님이 남기신 복음을 사랑했습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 사랑받아 하나님께서 하늘에 예비하신 신령한 복을 누린 사람들의 공통점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하나님 일에 정직하게 순종하고 충성을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 때문에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하였고 목 베임, 톱으로 켜는 것, 옥에 갇히는 것, 고난과 심한 매, 고문도 당하였습니다.
* 순종의 다윗과 불순종의 사울
삼하 3:1-111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가니라. 2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3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세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4네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5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6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7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을 통간하였느냐 8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히 여겨 가로되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뇨 내가 오늘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 형제와 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날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9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대로 내가 이루게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10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 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11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대답지 못하니라
* 미련하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라.
1. 철저한 순종
성경 전체 중에서 순종에 관한 가장 중요한 말씀을 들라고 하면 사무엘상 15장 22절 하반 절의 말씀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순종하라’ 사울의 범죄를 통해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신앙의 성숙이라는 것,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미련하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을 대비하고 있는데 사울의 집은 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순종했고 다윗의 집은 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 전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떠나지 않는 가정이 되고 싶습니까? 다윗의 집과 같이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하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 순종을 못하고 어떤 때는 다가오는 유혹이 너무 강렬해서 순종 못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해서 순종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떠한 불순종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를 엄청난 재앙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보다 똑똑합니까?
우리의 판단이 하나님보다 더 낫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이전에 이제까지 내 판단대로 살아왔잖아요. 내 잘 도는 머리, 내 좋은 판단, 나의 종합적인 분석, 그래가지고 이 정도로 파탄이 났으면 두 손 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내 이성이나 내 경험의 판단이나 능력 가지고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끼는 것들 (사실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을 미련하게 믿고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를 증거 할 때를 보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사람이 설교하는 것, 곧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과 부끄러움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그것을 거리끼어 내 마음 편 한대로 하고 싶고 내 마음먹은 대로 하고 싶은 연약한 인생을 통하여 자기의 뜻을 부인해야만 하는 십자가의 도를 증거 하게 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똑똑한 사람들이 30-40분 증거 하는 말씀에 인생이 변화될 것 같습니까? 매번 설교 때마다 저는 제가 작성한 설교 문을 가지고는 여러분들이 변화될 것 같지 않아 오히려 책자로 두툼하게 묶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고,
차라리 한평생 주님만을 위하여 살다가 자신의 목숨도 초개같이 버린 위대한 순교자들이 남긴 순교 열전을 읽어보라고 하면서 복사해서 쪽지로 나누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지, 나의 정결치 못한 입술로 증거 하는 것을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이 보입니다. 설교하는 이 일이 분명히 미련해 보입니다.
그런데 내 머리 써서 접근하는 것 가지고는 사람들이 변화가 안 되는데 전도의 미련한 것을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방법 곧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그 명령 그대로 증거 하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다 알고 가는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여러분 결혼생활이 뭔지 알고 갔습니까? 직장생활이 뭔지 알고 갔습니까? 초등학교 때 중학교가 뭔지 알고 갔습니까?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대개 믿고 가는 것입니다. 믿고 가다 보니까 승리하더라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가져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미련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다윗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삶의 고난 가운데서 굉장히 영리하고 판단을 잘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윗의 매순간의 시점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다윗만큼 미련한 사람이 없습니다. 미련하게 믿은 사람입니다. 거인 골리앗이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렇게 판단하겠지요.
‘전력(戰力)적으로 상대가 안 된다. 그렇다면 가만 가만 뒤로 가서 기습공격으로 뒤통수를 쳐야 된다.’ 이렇게 판단할 것 같은데 다윗은 거인 골리앗 앞에서 미련하게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고 나가잖아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여러분 이것이 작은 일입니까? 우리는 별것 아닌 것 같이 생각하지만, 칼이 정말 별것 아닙니까? 우리 교회도 가끔 예배 도중에 난동을 부리던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교역자들이 실제로 싸움은 못 해도 말은 잘하잖아요. 그런데 5cm 되는 칼을 들고 눈앞에 딱 나타나기만 해도 마비가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영화 같은 데를 보면 툭 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온몸에 힘이 빠져버리고 또 어떤 교역자의 표현에 의하면 심장 약한 사람은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오줌을 누는 사람도 있답니다.
칼이 만만한 것입니까? 게다가 골리앗이 들고 있는 칼이 만만한 칼입니까? 무지 큰 칼이었겠지요? 그런 것을 들고 있을 때 칼과 창과 단창 -얼마나 무장을 많이 했는지- 그것이 만만한 것입니까? 그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다윗은 미련하게 나가잖아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그것을 통해서 승리를 주십니다.
또한 다윗은 평생 쫓아다니던 자신의 대적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여러 번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정말 우리가 보기에는 미련한 행동을 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내가 죽일 수 없다’고 하고 놓아주잖아요. 미련하지요. 그러나 지내놓고 보면 어차피 죽을 사람입니다. 다윗은 정말 미련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었지요. 정말 미련하게……
[삼하 2:1-4] 1그 후(後)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城)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2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女人)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3또 자기(自己)와 함께한 종자(從者)들과 그들의 권속(眷屬)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各) 성(城)에 거(居)하게 하니라 4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族屬)의 왕(王)을 삼았더라 혹(或)이 다윗에게 고(告)하여 가로되 사울을 장사(葬事)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그 후 사울이 죽어서 이스라엘 권력의 공백기 상태가 왔습니다. 그러면 올라가서 점령하면 되는데 헤브론 앞에서 올라갈지 안 올라갈지 만날 묻잖아요. 뻔한 답을 가지고 묻잖아요. 당연히 가야 될 것인데 그것을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순간마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상식과는 관계없이, 사람들의 판단과는 관계없이 말씀이라고 하면 무조건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다윗의 삶을 한마디로 묘사한다고 하면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번 십자가의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마음이 약화 되고 나의 판단이 강해져서 방황하는 인생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 나도 다윗과 같이 미련하게 믿게 해 주십시오. 미련할 정도로 철저히 믿는 그런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철저한 충성
또 한 가지 우리가 살펴야 될 사람이 아브넬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을 통해서 배울 것은 배신하는 인생을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망령된 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이라는 사람이지요. 아브넬은 원래 사울의 부하 였습니다. 사울이 죽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내세워서 모든 권세를 누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배신을 밥 먹듯이 하고 충성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불한당 같은 기회주의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결코 사람이나 하나님을 배신한 자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보니까 바울을 배신했던 알렉산더, 후메네오 다 버렸습니다. 돈 때문에 나라를 배신한 발람 선지자를 버렸습니다. 심지어 악한 주인이라 할지라도 주인을 배신하는 자를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브넬의 예를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아브넬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버립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해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이스보셋을 세웁니다. 말씀을 저버렸지요.
7절을 보니까 자신의 주인인 사울의 첩을 범하잖아요. 자기 주인을 배신한 것이지요. 8절을 보니까 이것을 책망하는 이스보셋에게 도전하면서 협박합니다. 또 한 번 변절합니다. 변절, 또 변절, 그리고 배신…… 기회를 보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양다리 인생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셨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땅을 팔아서 헌금한다고 하면서 일부의 돈 숨겨놓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죽였습니까? 모두가 다 이런 식으로 죽어야 될 것 같으면 우리는 벌써 다 죽었겠지요.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영적인 칭찬도 얻고 금전적인 유익도 얻으려고 하는 처세술 세상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요즘 말로 얘기해서 양다리 걸치는 인생, 이것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단 마음으로 충성스러운 인생, 그런 모습으로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 주십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신앙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러운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보통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충성스러운, 배신이 없는 그런 하나님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로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다윗의 가문을 통해서 미련할 정도로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말씀대로 미련하게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또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유익을 따라 배신하는 인생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 인간관계 가운데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는 지혜와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미련함과 약함인 동시에 지혜와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실패 작품도 아니고 하나님의 실패 작품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의 아우성과 로마 군인들의 무력에 밀려서 어쩔 수 없어서 예수님이 힘이 부족하고 하나님이 다급해지셔서 응급처치로 다급하게 저질러진 실패 작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만세 전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최상의 걸작품입니다. 물론 희곡적 작품은 아니고 비극적 작품이지만 그런데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지혜와 능력이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최고의 감동과 감격이 어우러진 걸 작품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십자가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작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만들어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기 전 인간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아담이 불순종하시기도 전에 십자가의 사건을 계획하셨습니다.
[고전 2:7-8] 7오직 비밀(秘密)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智慧)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榮光)을 위(爲)하사 8이 지혜(智慧)는 이 세대(世代)의 관원(官員)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萬一) 알았더면 영광(榮 만세전(萬歲前)에 미리 정(定)하신 것이라光)의 주(主)를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아담 하와가 불순종하신 후 뱀에게 경고하시는 과정에서 재차 만세전에 당신계서 세우신 십자가의 사건을 이루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창 3: 15)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리고 아담에서 양의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실 때 벌써 십자가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爲)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께서 출애굽 전날 밤 모세와 아론에게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 "(출 12)고 명했을 때 이미 십자가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민 21)고 명했을 때 이미 십자가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로 하여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라고 (사 53: 5)에 예언하게 했을 때 이미 십자가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사람이 만들어 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신적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첫 설교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행 2:23).
인간의 배신과 인간의 불법이 십자가 사건을 발생케 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모두 미리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배신과 불법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나타난 신적 작품입니다.
1) 첫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절묘한 지혜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함께 어우러져서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구원의 은혜의 손길과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공의 심판의 손길이 함께 어우러져서 나타난 지혜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면서도 동시에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나타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일이 다른 종교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종교인 기독교에만 있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이 범한 죄악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몸에 모두 쏟아부으시므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고, 그리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꾸는 모든 죄인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십자가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나타난 곳입니다. 은혜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와 공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함께 나타난 곳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를 멸시하거나 조롱하거나 대항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A. J. 에어나 김용옥 같은 교만위에 무식이 겹쳐서 건방진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를 멸시하고 대항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 세상과 우주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감히 멸시하거나 대항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외형적으로는 약해 보입니다. 실패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곳입니다. 죄의 삯으로 사망이라는 저주 받을 인간을 구원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나타난 곳입니다.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실 십자가는 유대인과 로마인은 물론 사탄이 보아도 약해 보였고 실패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성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느 인간 누구도 해 보지 못했고 해 본 일도 없고 생각조차 할수 없으며 또 그러한 능력도 없는 인간을 멸망시킬 세 가지 원수들을 깨eM려 부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멸망시킬 세 가지 원수들은 죄악의 세력과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와 인간 자신의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 세 가지 원수들의 세력을 깨트려 부셨습니다.
1. 십자가는 죄악의 세력을 깨뜨렸습니다.
[롬 5:19] 한 사람의 순종(順從)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罪人)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順從)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義人)이 되리라
예수님이 이세상의 모든 죄악의 세력을 모두 자기 몸으로 받아 십자가 위에서 용해 시켜 버렸습니다. 원죄와 유전죄와 자범죄의 모든 독소들을 자기 몸에 받아서 녹여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들이 범한 죄악이나 허물 때문에 인간들을 처벌하라고 부르짖는 마귀의 아우성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2. 십자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깨트려 부셨습니다.
[히 2:14]자녀(子女)들은 혈육(血肉)에 함께 속(屬)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貌樣)으로 혈육(血肉)에 함께 속(屬)하심은 사망(死亡)으로 말미암아 사망(死亡)의 세력(勢力)을 잡은 자(者) 곧 마귀(魔鬼)를 없이 하시며
사실 마귀는 예수님이 탄생한 때부터 예수님을 생명을 노렸습니다. 광야에서는 40일 금식하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므로 자기가 승리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귀를 결정적으로 때려눕힌 곳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마귀는 죄지은 인간은 대적할 수 있었으나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을 대적할 권리는 없었습니다. 마귀는 인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므로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을 대적하는 결과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마귀의 세력을 깨트려 부시는 승리였습니다. (골 2:15)
3. 십자가는 인간 자신을 깨트렸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원수는 인간 자신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탐욕적이고 위선적인 인간 자신이 인간의 스스로의 원수였습니다. 십자가는 인간 자신을 깨뜨려 부신 곳입니다. 인간의 최고 모델인 예수님이 인간 자신을 깨뜨려 부신 곳이 바로 십자가이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을 깨뜨려 부실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 2:20).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들의 세 가지 원수들을 깨트려 부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과 같이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말씀을 맺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누구에게 그렇습니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살아가므로 온 영육 간에 구원을 얻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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