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신한평이 그린 ‘이광사 초상’(1774, 보물 제1486호). 자세와 표정에서 다소 침통한 분위기가 드러난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을해옥사 연루 이광사 유배지서 부인 향한 그리움 시·제문속에 고스란히 남겨
이광사(李匡師, 숙종 31년(1705) ~ 정조 1년(1777))는 조선의 문신, 서예가이며, 현대 한국학전주정종의 왕자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후손으로 호조판서 석문 이경직양명학자(강화학파)로 육진팔광(六眞八匡) 중의 한 사람이며 서예가로서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하였다.(이 서체는 중국서체의 범주에서 벗어나 조선화(朝鮮化) 되었다는 의미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 불린다.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
경종 1년(1721) 부친 예조판서 이진검은 노론 4대신을 탄핵하던 중 밀양으로 유배(이광사는 당시 17세)되었다가 죽었고, 영조 31년(1755) 나주괘서사건으로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처벌을 당할 때 이에 연좌되어 함경북도 부령 으로 유배(51세)되었다.
사건 당시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이 소식을 들은 부인 문화 류씨가 자살하였다.
이후 부령에서 재지의 문인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신지도(薪智島)(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 로 이배(58세)되었으며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향년73세).
이광사가 죽은 이듬해 2월 아들 형제가 선조들이 묻혀있는 경기도 장단 송남(長湍 松南) 거창지에 어머니 류씨와 동분합장 하였으며, 현재 그의 묘역이 군사분계선비무장지대(DMZ) 의 수풀 속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일찍 전(前) 공조판서 백하 윤순(白下 尹淳)에게서 글씨를 공부하여 진서(眞書),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했고 원교체 라는 독특한 서체를 이룩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代表作)으로는 <행서 4언시>(行書四言詩, 서울대 박물관 소장), 1746년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흠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 간송미술관 소장), <산수도>(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22년 유배의 삶 ‘음악 연주하듯’ 승화-
요즘 주류예술은 돈과 직결된다. 이유는 예술이라는 꽃은 시장에서 화상과 관객이 피워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대가는 부자일 수밖에 없고 명작은 수천, 수억원을 호가한다.
‘이 작품 돈 냄새가 난다’는 시쳇말을 거론 안해도 돈을 먹고 자라는 예술은 응당 돈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간혹 사람냄새가 그리워 작가 스스로 외딴 곳에 궁지(窮地)를 파고 극한 상황을 연출하지만 붓을 놓는 순간 작품은 시장을 향한다.
그래서 작가는 배고파도 배고프지 않고, 외로워도 외롭지 않지만 예술의 자리까지 인간이 돈에 밀려났다는 점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타락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통시대 명작은 전적으로 혼자 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유배라는 강제된 궁지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외로움을 오직 붓 한 자루로 감내해야 한다. 요컨대 한 인간을 송두리째 평생 빨아 먹어야 피는 꽃이라고나 할까.
# 예술은 진정 시련을 먹고 자라는가
우리 문예사에서 작품과 생을 맞바꾼 예는 허다하다. 500권이 넘는 다산의 저작은 18년 강진유배의 대가다. 18세기 조선예원의 영수인 표암의 존재는 과거길이 막힌 30년간의 안산 고행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 추사체 또한 제주유배 8년과 그 이후의 결정이다.
그러나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생애는 고통으로 치면 이들을 다 모은 것이다. 1728년 이인좌 난으로 소론이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 원교는 출사를 단념하고 근 20년간을 야인으로 백하 윤순과 하곡 정제두를 사부로 글씨와 양명학 공부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차라리 원교 일생에서는 다행이었다.
원교의 진짜인생은 1755년 소론일파의 연잉군(훗날의 영조) 제거 역모사건(나주괘서사건)의 실패로 가담자 모두가 장살·옥사되는 가운데, 왕족의 후예이자 예술적 천품이 참작되어 영조가 원교에게 사약 대신 유형(流刑)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원교 스스로 이천리 유배 길을 나서는 1755년 3월30일을 성은(聖恩)으로 다시 태어난 생일 날로 삼을 정도였다.
원교는 조선의 최북단 함경도 부령에서 7년, 다시 최남단 절해고도인 전라도 신지도에서 15년간 도합 22년간을 유배지에서 살다죽었다. 요컨대 원교는 죽도록 유배지에서만 희(喜)·노(怒)·애(哀)·락(樂)을 모두 글씨에 담아냈던 것이다.
# 차라리 음악인 원교 글씨
그림 1. 이광사(1705~1777), ‘오언시팔곡병’(五言詩八曲屛) 중 6폭 부분, 72×38cm, 종이에 먹, 한빛문화재단 소장.
그래서 그런지 원교의 글씨에는 유독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기 어려운 다양한 표정이 포착된다. 그중에서 날고 뛰는 행서(그림1)는 원교체의 진수인데, 작가의 성정(性情)과 기질(氣質)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다산과 같은 인물들은 반전이 심한 원교 행서를 “자형(字形)이 가증스럽다”고 혹평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씨에 개성을 그대로 담아내는 인물로는 원교를 따를 수 없다.
역사적으로도 그의 글씨를 놓고 스승인 백하와 서로 우열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하는 비록 초서라 하더라도 온화하고 단정하지만, 이광사는 행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자체라도 반드시 우울한 심기를 떨치듯 삐뚤삐뚤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규상은 ‘서가록’에서 “연기현감 황운조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원교글씨의 경악할 만한 면을 헐뜯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의 기걸(奇傑)한 기질로 액운이 쌓임을 만났으니 반드시 편안하지 못한 심기가 붓끝에서 울려나온 것일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것 같다.
하나의 획을 긋고 하나의 글자를 씀에 울림이 기세가 등등하고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진실로 은갈고리나 쇠줄 같아 용이 날고 호랑이가 뛰는 듯한 기상이 바탕에 있다”(그림2)고 할 정도다.
요컨대 원교의 글씨는 획 하나 하나의 음악적 리듬에 자신의 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는 데 가장 큰 특장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것은 ‘서가록’에서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노래하는 사람을 세워두고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일 경우에는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썼으며, 노랫가락이 평조(平調)일 경우에는 글씨에도 평조의 분위기가 서려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글씨가 추구하는 바는 기(氣)라고 할 수 있다”고 한 데서 확인된다.
# 진·당 고법과 전서·예서를 동시에 구사
그림 2. 이광사, ‘침계루’(枕溪樓), 편액, 전남 해남군 대흥사 소재.
그렇다면 원교글씨의 토대나 이상은 어디에 있는가. 원교의 문필은 고조부인 이경직·경석, 증조부 이정영, 조부 이대성은 물론 백부 이진유, 부친 이진검, 숙부 이진급 등이 타고난 명필임에서 확인되듯이 집안내림이다.
여기에다 당시 과장(科場)에서 시체(時體)로 통하던 당대 최고명필 백하 윤순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원교예술의 골간이 된다.
원교 스스로도 “내가 30세 이후로 고인의 필법을 전적으로 학습하였지만 필의(筆意)를 깨닫게 된 바는 백하에게서였다”라고 하였다. 요컨대 원교는 왕희지를 토대로 김생 이래 우리 글씨는 물론 중국의 당·송·원·명의 글씨맥락을 소화해낸 백하의 창경발속(蒼勁拔俗)한 글씨미학과 학서(學書)방법이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교의 글씨는 백하와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송은 물론 위·진 고법에서 거슬러 올라가 전서와 예서로 된 여러 비석 글씨를 아울러 구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원교가 왕희지를 근본으로 둔 옥동 이서나 공재 윤두서는 물론 백하 등 선대 명서가들의 서예이념을 공유하면서도 그 이전의 전·예서에 뜻을 두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교가 자신이 지은 ‘서결(書訣)’에서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왕희지 고첩(古帖)이 없었는데, 오로지 옥동과 민성휘 집에서 얻어 본 낙의론(樂意論)과 동방삭화상찬(東方朔畵像讚) 두 첩에서 내 평생 필력을 얻었다. 무릇 고첩은 모두 모각(摹刻)을 거듭하였으니 오늘날 왕희지의 본색을 정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한(漢)·위(魏)의 여러 비석글씨는 원래 각을 전하고 있어 심획(心劃)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이 두가지 첩을 여러 비석글씨와 비교하여 익혔다”
고 고백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요컨대 원교는 오체일법(五體一法)을 주장하며 이미 추사가 목표를 삼았던 왕희지 근본의 해서나 행초 중심의 첩학파는 물론 이전의 전·예서 등 비학파의 성과까지 동시에 실천해낸 선구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 너무 심한 추사의 원교비판
그러나 원교 글씨의 이러한 성취에 대해 정작 추사는 ‘서원교서결후(書員嶠書訣後)’에서 원교가 먹을 가는 법, 붓 잡는 법도 제대로 모르고, 구양순과 안진경 글씨를 일률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추사는 청에서 들어온 급진적인 비학파 이론을 토대로 원교가 왕체 소해법첩과 ‘순화각첩’ 등 첩학의 본래 결함도 모르고 있거나 한·위의 여러 비석글씨의 품평상의 오류까지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추사의 이러한 비판은 지금까지 본 대로 사실과는 다른 측면이 많을뿐더러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어 원교서예의 예술적 성취를 평가절하케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영조가 왕위에 오르고 소론이 실각되면서 “왕손 집안 많은 식구가 생매장당하듯” 몰락하고 이광사는 벼슬은 물론 생계조차 꾸려나갈 수 없는 몸이 된다.
문인들은 그의 글씨가 “의기가 지나쳐 속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며 폄하하기 일쑤였다.
첫째 부인은 쌍둥이를 낳다 죽고, 그가 옥사에 갇혀 극형을 당했다는 소문에 두번째 부인도 자결한 외롭고 불행한 생이다. 하지만 두 아들 이영익과 이긍익을 통해 강화학의 기개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조선의 고유한 서예법인 동국진체를 확립한 <서결>과 경학, 패관잡서, 문자학의 방대한 지식을 집대성한 <두남집>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시련과 유배의 세월이 길었던 덕이다. 진실이 극에 이르면 단순해진다.
(상기 세 문단은 한겨레신문에서)
원교가 수체(水體)로 현판을 쓰자, 절에 화재가 멈춰
입력 : 2016.01.21 14:25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8):이광사와 송시열과 우리 산하(中)]
지리산에는 유서깊은 3대 사찰이 있지요. 구례쪽 화엄사, 하동쪽 쌍계사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구례 천은사(泉隱寺)는 신라 덕흥왕 3년(828년) 인도 승려 덕운조사가 창건했습니다. ‘샘을 숨기고 있다’는 이름처럼 처음에 이 절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습니다. 절에 ‘샘’이란 말이 붙은 것은 전설 때문입니다.
지리산 천은사 극락보전에 걸린 현판이다. 이광사의 작품이다.
천은사는 조선 숙종 5년때인 1679년 단유선사에 의해 중건됐는데 샘 주변에 구렁이가 자주 나타났습니다. 한 스님이 무심코 그 뱀을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절에서 살생을 한 여파는 컸습니다. 그후 샘이 말라버려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샘이 마르자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글씨를 써주었습니다.
원교는 글씨를 물흐르는 것 같은 수체(水體)로 썼다고 합니다. 그후 이 절에는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은사에는 절의 입구격인 일주문에 붙은 ‘지리산 천은사’부터 극락보전(極樂寶殿), 명부전(冥府殿) 등 세곳에 원교의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극락보전에 모두 13마리의 용(龍) 장식이 있으며 좌우에 황룡과 청룡의 머리가 조각돼 있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보제루(普濟樓)는 원교의 제자인 창암 이상만이 썼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재주가 뛰어난 창암은 하루에 1000자 쓰기를 꼭 채웠는데 그로 인해 벼루가 세개나 구멍이 났고 붓은 1000자루가 닳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지리산 천은사를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리산 천은사로 가는 길에 있는 수홍루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평이 나있다.
원교의 글씨는 전남 해남 대흥사에도 있습니다. 대웅보전과 대웅보전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침계루(枕溪樓), 천불전(千佛殿), 해탈문(解脫門)입니다. 대웅보전의 원교 글씨 옆 불당엔 앞서 말한 것처럼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이 걸려있지요.
전남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이다. 이광사의 글씨를 본 추사 김정희가 떼어내라고 했다가 다시 붙였다는 일화가 있다.
오랜 유배를 끝내고 풀려난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주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네. 유배되지 않았으면 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했을거야.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현상을 좇다보면 자신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쫓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법일세. 제주도가 그걸 가르쳐줬네.”
이 말에 초의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습니다. “추사께서 성불(成佛)하려나보오.”
그러자 추사는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보게 초의. 내가 지난번 제주도로 가기 전에 떼어내라고 한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혹시 지금도 있나?”
초의선사는 “그거 어딘가 헛간 구석에 있겠지. 나는 잘 버리지않는 성미니까”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추사는 “그 현판을 다시 달고 내 글씨를 떼어내게. 그땐 내가 잘못보았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헛간에 있던 원교의 글씨가 살아난 과정입니다.
전남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의 글씨도 이광사의 것이다. 지금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가 여기 머물고있다.
원교의 글씨는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명부전, 만경루(萬景樓) 현판에도 남아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전남의 유서깊은 두 사찰인 대흥사와 백련사가 모두 원교의 글씨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고창 선운사의 천왕문(天王門), 선운사 성보(聖寶)박물관에 보관 중인 ‘정와(靜窩)’라는 글씨도 원교의 것입니다. 정와는 ‘조용한 작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변산반도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과 설선당(說禪堂)도 원교의 작품이지요.
그런데 기인이사 시리즈를 취재하며 전국을 다니다보니 원교못지않게 글을 남긴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이었습니다.
지금 이 부분을 쓰면서 저는 경이롭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원교가 살아 생전 고초를 겪은 것이 노론과의 불화한 집안 내역 때문인데 그 노론의 영수가 송시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당쟁사가 복잡하기 짝이 없어 며칠을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기서 잠시 사색당파의 분화과정을 요약해봅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김정희와 초의선사, 그리고 우암 송시열
입력 : 2016.01.21 14:24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8):이광사와 송시열과 우리 산하(上)]
기인이사 32편 ‘김정희와 초의선사와 대흥사’편에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 선생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대흥사에 걸린 원교의 글씨를 보고 추사는 “그는 우리 글씨를 망친 인물”이라고 화내며 초의선사에게 현판을 떼라고 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원교의 글씨를 다시 달라”고 했습니다. 사가(史家)들은 이 일화를 “자기 필체를 최고로 여겼던 추사가 귀양살이 후 겸손해졌다”고 평가하는데 당시 그 글에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여러분이 짐작하듯 ‘동국’은 우리나라, 즉 당시의 조선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진체’는 무엇일까요?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왕희지체니 뭐니 하는 중국의 서법(書法)을 모방했습니다. 17세기 후반들어 조선에도 ‘우리 식의 독자적 서체’가 나옵니다. 그 역사를 살펴보면 옥동(玉洞) 이서(李緖·1662~1723) 선생을 선구자로 꼽습니다. 이서는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사설’의 저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의 형이었습니다. 그는 벼슬이 낮았지만 서예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서 선생의 글씨가 보고 싶다면 전남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에 가볼 것을 권합니다. 윤선도 선생의 집안인 녹우당은 뒤 덕음산에 빼곡한 비자나무가 바람이 불 때 비오는 것같은 소리를 낸다고 해 붙은 이름인데 ‘녹우당’이라는 글씨가 이서의 것입니다.
전남 해남 녹우당을 옆에서 본 모습이다. 원래 서울 명동에 있던 것을 통째로 실어날라 세운 것이라고 한다. 여기 동국진체의 창시자인 이서의 글씨가 걸려있다.
그가 남긴 ‘필결(筆訣)’이라는 책은 최초의 글씨 비평서이자 이론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서 선생의 서맥(書脈)은 이후 공재 윤두서(1668~1715),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 원교(円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에게 이어졌습니다. 더 정확히 계보를 따지는 이들은 동국진체의 전수를 공재 윤두서와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 외증손 다산 정약용, 방산 윤정기, 춘계 윤홍혁의 줄기와 윤두서윤순이광사로 내려오는 줄기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첫째 줄기는 해남 윤씨 계열이지요.
역사가들은 대체로 동국진체의 완성자로 원교 이광사를 꼽습니다. 원교 이광사는 명문집안 자손이었습니다. 그의 선조가 조선의 두번째 임금 정종의 왕자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李眞儉)이었으며 원교는 넷째 아들이었지요. 호는 원교, 혹은 수북(壽北)을 썼습니다.
전남 해남 녹우당에 걸린 '예업'이라는 글씨가 이서의 것이다. 예술의 본향이라는 뜻이다.
원교의 일생은 파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가 열일곱되던 해 아버지 이진검은 노론(老論) 4대신을 탄핵하다 임금의 미움을 받아 경남 밀양으로 유배됐습니다. 이진검은 거기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여기서 ‘노론 4대신’이 누구인지를 살펴봅니다.
노론 4대신은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를 말합니다. 그들은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아들없이 병치레를 자주하자 국본(國本), 즉 세자를 빨리 정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세자로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밀었다는데 있지요. 그러자 노론과 반대편인 소론측은 반대 상소를 올리는 한편 “노론 4대신이 경종을 시해하려했다”며 무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전남 해남 녹우당에 걸린 '정관'이라는 글씨도 이서의 것이다. 선비는 홀로 있을 때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노론 4대신은 역모죄로 처형됩니다. 훗날 노론 4대신 무고사건은 당시 승지였던 김일경(金一鏡)이 목호룡이라는 사람에게 사주했음이 드러납니다. 영조가 즉위한 후 김일경 부자(父子)와 훈련대장 윤취상 등 수백명이 노론의 반격을 받고 제거됩니다.
이때 훈련대장 윤취상의 아들이었던 윤지가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전남 나주로 옮겨 귀양살이를 계속했습니다. 윤지는 부친의 죽음을 복수하기위해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1755년 나주괘서사건, 나주벽서사건, ‘윤지의 난’이라 불리는 ‘을해옥사’를 일으킵니다. 나라를 비방하는 격문을 벽에 붙인 일이 발각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소론은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습니다.
이때 50살이던 이광사는 큰아버지 이진유(李眞儒)가 나주 괘서사건으로 처벌을 받게되면서 연좌돼 이듬해 함경북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됩니다. 원교는 그때 죽임을 당할 뻔 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의금부에 끌려가자 하늘에 대고 통곡하며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요”라고 애원했다는 것입니다. 영조는 그 이야길 듣고 그를 살려줬습니다.
녹우당은 비자나무 숲에 바람이 불 때 비오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이광사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문인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치던 것이 ‘선동죄’로 몰려 이번에는 전남 완도군 신지도(薪智島)라는 곳으로 다시 귀양을 간 것입니다. 이때 이광사의 나이는 58세, 그는 거기서 15년을 살다 죽었습니다. 이광사가 죽은 다음해 2월 원교의 아들 형제가 유해를 경기도 장단 송남(松南)으로 옮겨 어머니 류씨와 합장하지요. 원교의 무덤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어 사람들이 갈 수 없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유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이렇게 불운하게 살았으면서도 그는 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하 윤순에게 글씨를 배운 그는 진서(眞書), 초서, 전서, 예서에 통달했고 마침내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했습니다. 글씨뿐 아니라 산수화, 인물화 등에도 능했습니다.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유배할 때 길러낸 제자가 많습니다. 이가운데 해남 대흥사에 그의 필법이 전해지게된 것은 즉원(卽園·1738~1794)스님, 아암(兒庵)스님같은 제자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아암스님이 다산과 교우하는 훗날의 혜장스님이며 그 제자가 추사와 친교를 맺은 초의선사였습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8):이광사와 송시열과 우리 산하(下)]
동인, 서인은 조선 초 분화됐지만 연원은 고려 말기로 넘어갑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선비들은 고려에 절의를 지킨 사림파(士林派)와 새 나라 건국에 협조한 훈구파(勳舊派)로 나뉩니다. 당연히 조선 초는 요직을 장악한 훈구파의 것이었지요.
정몽주를 흠모해온 사림파는 지방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인재를 축적합니다. 그러다 선조 대에 들어 훈구파를 제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 사림파가 갈라진 것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 때문인데 선조 초기에 이 벼슬을 놓고 갈등이 벌어집니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심의겸이 “김효원은 훈구파였던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며 반대하지요. 이때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인 동대문, 심효원의 집이 한양 서쪽인 서대문쪽이어서 양쪽을 동인-서인으로 불렀습니다.
소쇄원 부근에 있는 환벽당은 우리 정자 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글씨가 우암 송시열의 것이다.
동인은 선조 22년, 즉 1598년 일어난 정여립의 난으로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립니다.
동인에 속했던 이발이 정여립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정여립의 난 후 처형됐는데 당시 그를 구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유성룡이 외면했다는 이유지요. 이발의 죽음에 동정적인 인물들은 북인, 유성룡을 따른 인물들은 남인으로 분파되는데 이는 이발의 집이 한양 북악(北岳)에, 유성룡의 집이 경북 안동에 있었기에 남인으로 불려진 겁니다. 이후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남인은 갑술환국으로 몰락합니다.
갑술환국은 1694년의 사건을 말합니다. 중앙 정계에서 수세에 몰려있는 남인은 1689년이 기사환국(장희빈을 둘러싼 서인과 숙종의 갈등)으로 기사회생했는데 불과 5년이 안돼 다시 치명상을 입습니다.
이유는 역시 장희빈의 자식 때문이었습니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숙종으로부터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려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훗날의 경종)에게 의존하던 남인은 서인들의 민씨 복위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뿌리부터 끊어놓으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권력의 정점이던 숙종이 이미 장희빈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남인의 영수 민암이 사사되고 중심 인물들은 유배를 떠납니다. 여기서 요약하자면 동인에서 나뉘어진 북인은 남명학파(조식), 남인은 퇴계학파(이황)로 불립니다.
소쇄원 제월당의 글씨도 우암의 작품이다. 우암은 조광조를 존경했으며 학포 양팽손을 통해 양산보 일가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서인은 숙종 때의 경신환국(1680년) 때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는데 경신환국은 남인의 영수 허적이 자신의 할아버지 잔치에 왕만이 쓸 수 있는 용봉차일, 즉 기름을 먹여 비가 새지않는 천막을 임금의 허락없이 냉큼 가져다 쓴데서 비롯되지요.
비가 오는 것을 알고 허적의 집에 용봉차일을 보내려던 숙종은 허적이 벌써 가져간 것을 알고 남인을 실각시키고 서인을 중용합니다. 몰락한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파(노론-송시열), 온건파(소론-윤증, 윤휴)로 갈리며 서인도 분화한거지요.
소론은 이인좌의 난으로 몰락하고 노론은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동정적인 시파와 비판적인 벽파로 나뉘었으니 한국사회는 서인의 나라, 그중에서도 노론의 나라였던 셈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 보수의 맥도 상당히 그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암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당파싸움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본디 서인이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뉠 때 노론의 영수(領袖)격인 인물이 그이기 때문입니다.
우암은 효종, 현종 두 임금이 세자시절에 스승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같은 명칭으로 격상됐지요. 그는 1633년 경릉참봉으로 벼슬길에 나서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행판중추부사 등의 요직을 지냈습니다.
낙화암이라고 쓰여진 붉은 글씨가 우암 송시열의 작품이다.
우암이 유명하게된 것은 조선시대의 각종 논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송논쟁, 즉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숨졌을 때 효종이 몇년 상을 치러야하는 지를 놓고 격론이 붙었을 때 1년동안만 상복을 입어도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했지요.
우암은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에 반대하다고 숙종의 미움과 남인의 사주로 전북 정읍에서 사사(賜死)됐습니다.
하지만 1756년(영조 32년) 영의정에 추증됐고 평소 그를 존경하던 정조는 우암을 송자(宋子)로 격상시켰습니다. 공자-맹자-순자-묵자와 같은 반열이 된 거지요. 그가 남긴 유고(遺稿)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됐는데 조선 유학자가운데 도통(道統)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인물은 우암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만 이름이 3000회 이상 등장하지요.
우암의 글씨 가운데 제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충남 부여 낙화암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巖)’, 전남 담양 소쇄원에 있는 제월당(霽月堂),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소쇄원 근처에 있는 환벽당(環碧堂), 정암 조광조선생 유허비 등입니다.
전남 승주에 있는 조광조 선생 유허비문도 송시열이 직접 쓴 것이다. 글씨가 모범생의 것처럼 보인다.
우암은 서예도 도학(道學)의 한 갈래로 생각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글씨를 아름다움보다는 심획(心劃)이자 덕성(德性)의 표출로 보면서 마음을 수련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자세는 퇴계의 글씨를 평한데서 잘 나타납니다. 우암은 퇴계의 서첩을 보고 이렇게 평했지요. “따뜻하고 도타우며 편안하면서도 화목한 뜻이 뚜렷이 필묵의 테두리 밖에 나타나 있으니 옛 사람들의 덕성이 어찌 오직 언행이나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
재미있는 것이 조선일보 이한우 선임기자의 평입니다. 이 기자는 “우암은 평소 길이 정해지면 옆을 쳐다보지않은 인물이었다. 글씨를 봐도 그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일체의 기교가 없는 정법(正法), 마치 모범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은 필체다.” 저도 그의 견해에 상당부분 동감했습니다.
우암의 글씨는 충북 괴산의 화양동 계곡에 집중적으로 남아있다고 하니 그곳도 나중에 돌아볼 생각입니다. 저는 서예에 대한 지식이 깊지는 않지만 전국의 유적을 다니다 때때로 발견하는 옛 선인들이 남긴 글씨도 훌륭한 문화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5월 4일 부인의 생일, 해마다 이날이면 창이 환해지기도 전에 아들과 며느리, 조카고 딸이며 모두 집으로 와 새벽에 생일 축하 인사를 했다.
이광사(李匡師·1705~1777) 역시 일찍 일어나 부인에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음식들을 차려 가족과 함께 좋은 날을 즐기자고 이야기를 건넸다.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가 웃으며, “내가 뭐 귀한 몸이라고 생일 때마다 번거롭게 그래요?”라고 하면, 이광사는 “아들 둘 장가 들였겠다, 집안의 마님이 되었는데, 부인이 귀하지 않다면 무엇이 귀하겠소”라는 소소한 농담을 나누며 서로 웃었다.
부인의 친정에서는 쪽빛 보 아래에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는 떡을 보내왔고 국수장국에 꿩, 고기, 생선까지 많은 음식이 차려졌다. 이광사가 장난삼아 “오늘 태어난 이가 어찌 이다지도 갑자기 웃고 말하며, 이리 금방 키가 컸으며, 젖을 먹지 않고 밥을 먹으며, 게다가 마음까지 어이 이리도 성숙한가!”라며 부인에게 애정 어린 농담을 건네면, 함께 모인 가족들은 모두 웃으며 행복한 식사를 나누었다.
이광사의 생일은 온갖 곡식과 과일이 풍성한 8월 그믐이라 아내가 아침저녁으로 별미를 장만해 상을 차렸다. 그러나 그는 일찍 여읜 부모를 생각하며 음식을 입술에 대지도 않았다. 부인은 음식을 들라 권하였지만 이광사는 끝내 들지 않아 부인은 섭섭해 울상이 되었다. 부인의 올해 생일을 맞아 지은 글에서 이광사는 그때 그 음식을 맛있게 먹어 부인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을 자책했다. 이광사는 더 이상 부인이 해준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부인이 지어준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이광사는 1755년(영조 31)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돼 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 3년이나 폐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던 유씨부인은 남편이 살아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 양반이 이러한 지경에 들었으니 어찌 살아날 리가 있겠는가? 이미 살아날 수 없다면 내 어찌 구차히 살기를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내가 우리 아버지께서 아끼고 길러주신 것을 생각하니 차마 칼로 남겨주신 이 몸을 해칠 수 없다. 남자는 이레 동안 먹지 않으면 죽고 여자는 여드레 동안 굶으면 죽는다고 하니, 여드레가 내가 이 세상에 머물 기한이다.”
유씨부인은 엿새 동안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는데 갑자기 남편에게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에 남편을 먼저 보낼 수 없다고 하여 자결하였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소문이었다.
유종원(柳宗垣)의 딸인 유씨부인은 이광사의 둘째 부인으로, 집안 살림에 관심 없는 이광사를 잘 보필하며 현명하게 집안을 유지하였다. 자신으로 인해 아내가 죽었으나, 자신의 손으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이광사의 절절한 심정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광사는 후에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 1762년(영조 38) 부령에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친 것이 문제가 돼 전라남도 신지도(薪智島)로 옮겨져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부인을 향한 그리움을 여러 시와 제문(祭文)에 고스란히 그려내었다. 유배지에 아들이 문안왔을 때 친척들의 편지가 책상에 한가득인데 부인의 글씨는 단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고, 자신이 쓴 답장도 여러 통이지만 부인에게 부칠 반 마디도 없음을 슬퍼하였다.
첫댓글 어제 예산 용궁리의 '김정희' 고택에 갔었다
추사와 원교의 불화는 유학파와 독학자 그리고
파가 다른게 큰 이유였을 것이다
김정희는 많이 아는데 원교 이광사는 잘 모른다
이광사의 삶을 조명해 봐야 겠다..(문화일보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