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무엇이 실상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황궁내의 연무장이 왁짜지끌하다.
황제와 연후, 감성, 사마선녀, 추향, 이원술이 나와서 의자에 앉아 있고, 무술내시인 동창들과 어전호위인 십이검과 내전호위인 걸녀들, 근위병들이 모여서 작은 운동회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원술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열두 명씩 모여 있는 무리들을 죽 훓어 보고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입을 연다.
“에~, 동창과 근위병들이 새로 들어온 호위들의 경호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오늘 경호에 대한 시합이 있겠습니다. 우승상금은 황제폐하께서 금일봉을 하사하시고, 패한 무리들은 승리한 무리의 경호방법을 인정하고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와아!”
동창과 근위병들은 함성을 지르고, 새로 들어온 무리들은 시큰둥하다.
시합은 태사의를 가운데 두고, 태사의 위에 술잔을 올려 놓고, 술잔의 술을 지키는 것이었다.
먼저 시비를 걸어온 동창이 공격을 하고, 걸녀들이 방어를 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걸녀들은 태사의를 중심으로 팔쾌진을 펼치고, 방어준비를 마치자, 동창들이 일재히 공격을 시작했다.
진이 공격을 받자, 바깥에 포진한 여듧 명이 서서히 회전을 하면서, 붉은 채찍으로 방어망을 치고, 내부의 네 명은 방어망 사이로 채찍을 날려서 내시들을 한 명씩 낚아서 패대기를 치기 시작했다.
“무공수준이 차이가 너무 나는군!”
황제가 중얼거리면서, 추향에게 무언가 전음으로 주문을 하고, 연후는 연신 손뼉을 치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애들아! 좀 살살 다루시란다!”
추향이 호위녀들에게 외치자, 호위녀들은 마지막 남은 내시를 채찍으로 감아서 멀리 근위병들이 서 있는 쪽으로 던져 버린다.
일순, 장내는 침묵이 흘렀다.
너무 어이가 없는 일방적인 시합이라 흥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한 것 같았다.
동창인 내시가 가지고 있던 목검을 하나 주워 들고, 단상 앞으로 걸어온 걸녀중의 하나가 포권을 하며 청을 한다.
“저는 이지란이라고 합니다. 저가 혼자서 근위병 열둘을 상대할 테니, 이장군께서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허! 너무 심한 것이 아니오?”
“병사들의 훈련과 무공수련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럼, 그리해 보시게!”
“그래? 이기면, 내가 우리 호위들을 모두 의손녀로 삼겠다.”
연후도 은근히 부추긴다.
“황공하옵니다. 마마!”
이지란은 태사의 앞에서 목검을 마치 몽둥이처럼 들고, 손가락으로 근위병들을 까딱거리면서 부른다.
근위병들은 어이가 없는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우르르 달려 와서 태사의를 포위한다.
“이호위! 이거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처음에는 살살할 테니, 너무 얕잡아 보아서 실수했다고나 하지 마시오!”
근위들의 우렁찬 기합이 터지고, 일제히 태사의로 몰려 온다.
순간, 이지란의 신형이 희긋한 안개로 변하고, 덩싱덩실 춤을 추면서 근위병들을 밀어내기 시작하고, 밀려난 근위병들 사이로 이지란의 신형이 미꾸라지처럼 헤치고 다니면서, 복을 치는 고수처럼 근위들을 패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구경하던 내시들이나, 궁녀들의 탄성이 터지고, 단상에 모인 사람들은 처음 잠시 동안에는 이지란의 신기한 신법에 놀라서 감탄을 하고 있다가, 나중에는 북을 치듯이 돌아 다니면서 패고 다니는 모습에 웃음보를 터트린다.
“자, 자, 그만하게!”
이원술이 일어나서, 대결을 중지시키고, 모두를 불러 모운다.
“동창과 근위들은 모두 들어라! 강호의 무공은 이처럼 하나의 도를 이루고 있다. 여러분도 나라에 녹을 먹는 관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무인으로써 자신의 경지를 이루도록 하라!”
이원술이 훈시를 끝내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황제일행을 모시고 들어가자, 호위들은 동창과 근위병들을 위로 하면서, 숙소로 돌아간다.
황제의 내전 거실에 긴 탁자 좌우로 마치 중요한 협상을 하는 형국으로 감성 일행과 황제 일행이 마주 앉았다.
바깥에서와 달리 착 가라앉은 분위기는 어색함으로 점철되고 있었다.
“폐하! 왕부는 외국의 사신들이나, 대상들이 묵는 영빈관으로 사용을 하고, 기루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 주고, 여각이나 왕부에서 장악하고 있던 상권은 경성판관에게 맡겨서 공매토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원술은 분위기를 깨듯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의견을 개진한다.
“그건 조정에서 의논을 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 재산들은 황실의 개인 재산임으로 황실의 어른께서 직접 결정을 하시고, 조정에 그런 비답을 주시면 됩니다.”
“알겠소! 단, 공매된 대금은 왕부에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그 사안에 따라 나누어 주고 황실에서 직접 위로의 말을 전하게 하시오.”
“영명하신 판단입니다. 내관은 기록하여 정리하고, 폐하의 재가를 얻어서 의정부에 제시토록하라!”
이원술의 대화가 끝나자, 다시 침묵에 싸인다.
“에헤! 여기는 사석인데, 숙부는 괜한 말을 해가지고, 나를 곤란하게 만드시네! 그래, 사형! 언제 따나실 참이우?”
“예, 황궁을 나가는 대로 곧 출발해야 할 것같습니다.”
“저는 딱히 누구편은 아니지만, 두 분 중원 형수님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고, 사형은 아마 초죽음을 벗어나지 못할 걸요?”
황제의 귀티나는 얼굴에는 묘한 짓궂은 웃음이 퍼지고, 감성의 얼굴에는 수심이 번진다.
“황제! 이게 무슨 이야기요?”
연후가 화들짝 놀라며, 황제와 감성을 빤히 쳐다본다.
“어머님! 전에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저가 천선곡에 있을 때, 저를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사시사철 천선지에 빠뜨린 저에게 무공을 사사해 주신 분 말입니다.”
“그래요. 아주 고마운 사형이시라던데?”
“그 분이 저에게는 큰 형수님이 되신답니다.”
“뭐라구요? 아이구! 우리 낭자들이 큰 일이 났구만!”
“하하하하하!”
추향, 사마선녀, 감성의 고개가 더 숙여진다.
“저의 목숨을 구해준 선동공자도 보통 악동이 아니던데요?”
이원술이 거들자, 황제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는다.
“하하하하! 숙부에게는 천하의 성인군자처럼 대한 것이라오. 저의 귀가 왜 이렇게 축 늘어진 줄이나 아시우?”
황제는 자신의 늘어진 귓볼을 쓰다듬으며, 묘한 미소를 짓는다.
“누가 당겼습니까?”
“말도 마시우, 숙부! 이게 다 그 막내 악동 사제에게 당한 것이라우!”
“에이 설마요!”
“여기에 계시는 우리 대사형은 더 했으면 더 했지,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는다고 하던데요?”
“자, 자, 이건 농담으로 할 이야기가 아니로구나. 돌부처도 시앗을 보면 돌아 앉는다고 하던데 말씀이야. 그래, 감공은 무슨 묘안이라도 있는가?”
연후는 아예 한 술을 더 뜬다.
감성은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포권을 하며, 연후에게 불쌍한 표정으로 애걸을 한다.
“마마! 부디 묘책을 헤아려 주십시요!”
“그럼, 내가 묘책을 이를 테니 그대로 하시겠는가?”
“예, 저의 내자들과 저의 목숨만 구할 수 있다면야 무얼 못하겠습니까?”
“우하하하하!”
황제와 이원술은 박장대소를 하고, 연후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 간다.
“내가 선녀와 희선이를 딸로 맞이해야겠네! 그럼, 자네는 내 사위가 되는 셈이지. 황제에게는 두 명의 손위 누이가 생기고, 한 사람의 매형이 생기는 것이 되는게야, 어떤가?”
“황공하옵니다. 그러나, 선곡에서는 세사의 인과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 답니다.”
“그럼, 그것은 받아드리는 것으로 하고, 결정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줄 터이니 걱정마시게, 사위!”
연후는 내시를 불러 지필묵을 준비시키고, 황실에서 쓰는 고운 종이 위에다가 [소조동지숙(小鳥同枝宿)]이라는 글을 적어서 금낭에다 곱게 접어 넣어서 감성에게 건낸다.
“자, 자, 오늘은 딸이 두 명에다, 사위까지 얻었으니, 본후에게는 커다란 홍복이 있는 날일세. 크게 잔치를 벌여 볼까요, 황제?”
“예, 어머니, 모후의 은덕에 저도 형제가 생겼습니다.”
“사형은 벌써 아내를 세 명씩이나 얻었는데, 그 못난 사제는 지금 무얼하는 게요?”
“면구스럽습니다. 저도 곧 사형을 본 받겠습니다.”
“호호호호, 그래야지요.”
밤이 늦게까지 조촐한 연회가 벌어지고, 황제의 천선곡에서의 추억담으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특히, 이원술의 괴사는 사람들을 섬찟하게 할 정도로 몰입을 시켰고, 선동의 비운연 수련법은 사람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감성은 언듯언듯 그림자가 지는 연후의 표정을 보면서, 자리를 정리한다.
“의모님! 이렇게 불러도 되겠습니까?”
“암, 그렇구말구요!”
연후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술잔을 들며 호쾌하게 웃는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일도 있었고, 너무 정이 들어서 저희가 불쑥 떠나기가 송구스럽습니다. 의모님을 모시는 호위무녀들은 강호를 두루 잘 알고 있는 개방출신입니다. 그리고, 황제폐하를 모시는 호위들도 표두들로써 어느 누구보다 강호와 백성들의 삶을 잘 알고 있지요.”
“우리 사위가 장모와 매제가 적적해 할까봐서 걱정을 해주시는구려. 고맙네! 그러니까, 가끔씩 들려 주시게.”
“예, 꼭 그렇게 하지요.”
감성일행은 자정이 지나서야, 여각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이원술이 마차를 끌고 들이닥쳤다.
“이장군님, 어인 일로 아침부터 행차십니까?”
사마선녀가 나가서, 이원술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객실로 안내했다.
“어인 일이라니요? 두 분 공주님께서 시댁으로 가시는데, 최소한의 격식은 갖추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번거럽게시리, 너무 과한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황제폐하께서 말리시지 않았다면, 아마 커다란 행열이 되었을 겁니다.”
“이게 다 뭡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황제께서 천선곡의 식구들에게 보내시는 선물에다, 황후께서 하사하신, 두 분 공주마마를 위한 물품들이 들어 있다고만 들었습니다.”
감성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골머리를 아파하는데, 갑자기 낮선 말이 들려 왔다.
“아~따, 행님! 내 좀 보이소!”
뒤쪽에서 구랫나루가 멋진 사내가 낮선 복장을 하고, 손을 흔든다.
“어? 자네는 조나리가 아닌가? 여기는 어떻게?”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난 사내는 개경에 있던 조필상이었다.
“말도 마이소. 해동에는 나라가 바뀌고, 새왕조가 들어서서 난리도 아닙니다. 저는 명국에 오는 사신을 호위하는 무관으로 왔지예!”
“그랬구먼, 출세했네그려?”
“다 행님 덕이지예, 저가 모시던 조영무장군이 대장군이 되면서, 저도 덩달아 한자리 차지안했습니꺼.”
이원술이 고려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통에 뻘쭘하게 서 있다가, 감성에게 눈짓을 한다.
“아, 저가 개경에 있을 때, 사귄 친구입니다. 해동에서 사신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띄고 왔다는군요.”
“그럼, 이번에 조선에서 왔다는 벽력검의 고수가 저 분입니까?”
“그렇게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검에는 일가를 이루고 있었지요.”
“알려졌다마다요, 대명군부에서도 조선의 벽력검 조필상이라면, 대적불가라는 대우를 받지요.”
“대적불가라니요?”
“수장대결이나, 비무는 필패이니 피하라는 군부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은어이지요.”
감성은 웃으면서, 조필상을 불러서 이원술을 소개하고, 조필상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많이 성장했나 보구나!”
“아니라예, 남들이 자꾸 추겨주는 통에 남사스러워 죽겠는기라예.”
“이장군님은 명나라의 개국공신이시며, 대명군부의 수장이시니라, 여러가지를 잘 의논해서 도움을 받도록 하거라.”
“고맙심더, 잘 하겠심더.”
이원술이 역관을 불러서, 조필상과 같이 여각을 떠났다.
왁짜지끌하던 여각에 다시 평온이 찾아오고, 정리한 짐들을 마차에 싣고, 경성의 표국으로 출발했다.
추향은 항주의 대명표국과 전장을 소우에게 이미 넘겼고, 홍화여각을 인수해서, 항주의 목밀여각에 그 관리와 영업을 일임시키고, 기루는 인수하여, 홍매에게 넘기고, 인수대금은 수익으로 분할상환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지시했다.
추향은 근간의 사연과 일들을 서찰로 적어서, 용소도에 보내고, 사마선녀는 곤륜산에 기별을 넣었다.
드디어, 쌍두마차가 경성의 성문으로 나갔다.
감성은 깊은 감회에 빠졌다.
천선곡을 떠나, 중원으로 들어온 세월을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조금 모자라는 칠년이로군!”
“뭐가요?”
추향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불쑥 묻는다.
“내가 중원에 들어온 날짜를 계산해 보았지.”
“뭔가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잘못되었나?”
추향이 말을 전음으로 갑자기 바꾼다.
[그게 아니고, 마부석에 있는 마부도 너무 조용하고, 멀리서 누군가가 우리를 미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후후! 마부는 개방의 황숙부이실 것이고, 우르르 따라 오고 있는 무리들은 소걸아를 비롯한 개방감찰일 게다.]
[언제까지 따라올려고 저러나요?]
[저녁에 해가 지면, 모습을 드러내겠지?]
추향은 어릴 적의 기억 때문에 그 이후로 마차를 탄 적이 없다고 했고, 사마선녀는 돈이 없어서 난생 처음으로 마차를 타 본다고 했다.
마차가 한가한 관도로 들어서자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마부인 황대현의 마차모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거의 길에 미끄러어지듯이 달리는 마차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거의 네 시진을 달리고 나서야, 해가 기웃거리고, 마차도 서서히 멈추었다.
“부마 나으리! 두 분 공주님! 잠시 쉬시다가 가시지요?”
황대현의 변성한 목소리가 들렸다.
감성 일행은 모른 척하고, 마차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마차는 넓은 들판 가운데 서 있었고, 추수가 끝난 논에 커다란 장막들이 마차를 가운데 두고 둘러 싸여 있었다.
“사부님!”
오백여명의 목소리가 일시에 터져나오자, 맑은 가을저녁 하늘을 쨍하고 울린다.
“황숙부! 여기가 어디우?”
“눈치챘군요. 요동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들판입니다.”
“어떻게?”
“쟤들이 마차를 들고 달렸지요.”
“앗! 불싸!”
“아닙니다. 오랜만에 실컷 달려 보았는데요 뭐!”
그랬다.
이들이 마차를 들고 달리고, 말들은 아무 짐도 없이 맨 몸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어쩐지 황숙부가 마차를 잘 몬다고 했지요.”
“하하하하! 우리 여기서 송별회겸 술이나 실컷 마십시다!”
“와아!”
함성소리와 함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연회를 벌였다.
여기 저기서 춤판이 벌어지고, 노래소리가 밤을 세워 가며 울려 퍼졌다.
쉼없이 받아 마시는 술기운에 감성의 눈앞에는 용소도의 풍경이 펄쳐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노래를 부르면서 일을 하고, 아이들이 농로에서 뜀박질을 하면서 놀고 있었으며, 거쳐온 중원 곳곳에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환상에 사로 잡혔다.
용린은 넓은 중원의 한가운데에 선경의 터를 잡고자 했던 것이었다.
선인이 가져야할 가장 큰 원칙과 가치인, 이루고자하는 욕심도,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한 욕심도,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욕심도 갖지 않았으며, 독에 중독되어 의지를 상실했어도, 가족과 자신의 죽음에서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진정한 마음의 소유자였으며, 실체였던 것이다.
감성 자신은 사건의 전모가 손에 잡힐 때마다, 일희일비하며, 지나간 사건에 이끌리듯이 따라온 것이 아닌가!
무엇이 실상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누가 스스로 이루고자 했고, 누가 방관지인지 알 것 같았다.
‘사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말이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소이다. 왜 진작 다스림도 가르침도 어울림도 아니고 스스로 이로움을 이루어 세상을 초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소이까!’
감성은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일어나서, 노랫가락에 맞추어 눈물을 흘리면서 춤을 덩실덩실 춘다.
감성이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마차는 관도 옆의 나무아래에 세워져 있고, 천막이 있던 자리는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으며, 개방의 무리들도, 황대현도 사라지고, 늦가을의 햇살만 조용하게 내리고 있었다.
마부석에 올라간 감성은 말꼬비를 풀어서 다시 동쪽으로 길을 잡았다.
잠시 후에 추향과 사마선녀가 음식을 들고 마부석으로 올라 왔다.
“여기가 어디지요?”
추향이 마차의 지붕위에 서서, 소리쳐 묻는다.
“저 앞에 작은 성곽이 산계곡을 막고 있는 것이 보이나?”
“예, 저 앞산 너머에 있네요.”
사마선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추향이 돌아보니, 마차지붕에서 거의 백여장이나 솟아 올라서 이마에다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고 소리치고 있다.
“그 성이 요동성일게다. 거기서 하루 묵고 가자.”
“성이 작은데요?”
“계곡 안에는 제법 큰 마을이 있지. 요동표국과 전장이 있을 정도니까?”
“맞아요. 만주인근의 물산을 요동에서 거의 수집하고 처리를 하지요. 중원의 동쪽 관문격이 되지요.”
추향이 표국일을 상기하면서 대꾸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서쪽 관문인 가옥관에서부터 동쪽 관문인 요동까지 왔으니까, 세상끝에서 끝까지 다 와 보았네?”
“그런가? 해동을 중심으로 왜와 더 남으로 흑치족들이 사는 대양이 있으며, 북으로는 원과 더 북쪽으로 아라사를 지나면, 얼음이 사철 덮혀 있는 곳이 있다더군. 자네가 이야기하는 세상인 중원은 아마 세상의 수십분지 일에 지나지 않을걸!”
“와! 세상이 그렇게 넓나요?”
“서역도 있지! 얼굴이 까만 사람, 얼굴이 희고 눈이 푸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있다고 하던데?”
“우리 늙으면, 세상끝까지 한번 가볼까?”
“그래요, 언니!”
해질녘이 되어서야 요동성에 도착했다.
요동성문 앞에 들어서자, 왠 약관이 안된 앳띤 청년이 마차를 가로 막았다.
“뉘신데, 길을 막는거요?”
감성이 왠지 낮익은 청년을 귀여운듯이 가만히 바라본다.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말씀해 보시지요.”
“당신들! 무공을 할 줄 아시오?”
“몸을 지킬 만큼은 합니다만?”
“그럼, 나하고 한판 뜹시다.”
“뜸금없이 무슨 연유로 비무를 하자고 하는게요?”
“그럼, 연유를 말하면, 들어주실 거요?”
이번에는 사마선녀가 나섰다.
“소협! 재미있네.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러는가?”
“누님이 정말 말이 통하네.”
“사연이나 말해보시게!”
“예전에는 내가 이래뵈도, 이 요동에서는 제일 셌는데, 몇 년 전에 객지에 나갔다온 마을 형님이 와서는 나의 체면을 완전히 깨진 쪽박으로 만들어 버렸다오. 그 뒤로 수시로 도전을 해 보았지만, 늘 그 밥에 그 나물이라, 할 수 없이 이렇게 무공구걸을 하게 되었지요.”
“그 형님이 누구냐?”
“무영귀오 장학님이시라고, 아마 중원에서도 이름이 나 있을게요. 그 형님보다도 못하면, 붙을 필요도 없고, 어떻소?”
“그럼, 경공이나, 내력대결은 어떠냐?”
“그건 비슷한데, 권장술이나, 병기술은 아직도 익히질 못했소이다.”
“왜? 많은 사람과 대결을 벌였을 건데?”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 것을 찾지 못했소이다.”
감성이 길에 있는 돌을 격공섭물로 날려서, 커다란 노송을 치자 노송에서 마른 솔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소협! 들고 있는 목검으로 떨어지는 솔잎들을 모두 쳐서 한군데 모아 보시게.”
“그러면, 검법을 얻을 수 있소이까?”
“그럼, 나중에는 눈을 가리고 솔잎을 세토막씩 내어서, 땅에 떨어지는 것이 없게 만들면, 아마 장학에게 이길 수 있을 것이네.”
“에이, 차라리 소나기를 검으로 막아라고 하시오! 어? 학이형님하고 같은 말이네?”
“민이는 잘 있었느냐?”
“누, 누구신데? 우아악, 형님!”
요동성의 고민이였다.
갑자기 번개같이 날아서 감성에게 안겨 오는 통에 말이 놀라서, 앞발을 들고 요란하게 발버둥을 친다.
“이, 이놈! 아직도 일곱살인 줄 아나보네?”
고민은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감성의 무릅에 걸터 앉아서 귀를 잡고 흔든다.
“우와! 사숙이 꼼짝 못하는 강적이 있네! 소협! 반갑소이다.”
사마선녀가 보다 못해 민이를 획 낚아채어 마차 지붕 위에 앉힌다.
“와! 누님들, 이쁘다. 우리 설이 누님이 주눅이 들겠네!”
“갑시다, 형님!”
민이는 다시 마부석으로 돌아와서 말꼬삐를 낚아채어 마차를 몬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체로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데, 마차는 성문안으로 질주해 가고 있었다.
감성이 대금을 꺼내어 힘껏 불자, 소리도 나지 않는 대금에서 아지랑이 같은 것이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 있어요?”
“아니, 학이를 불렀다.”
“아니? 어디있는 줄 알고요?”
“추실이가 이 소리를 듣고 달려 오면, 학이도 올게 아니냐!”
“그런 수가 있군요.”
어느새 마차가 요동표국의 전각으로 들어 갔다.
“성이 형님 오셨어요!”
민이가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일하는 아주머니가 땅바닥에 철버덕 주저 앉는다.
“아이고머니나!”
저녁나절 마당 한가운데 있는 노송에 깃든 새들이 놀라 날아 오르고, 사방에서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나온다.
“드디어 왔구만그래!”
“사백님! 별고 없셨는지요?”
“오라버닛!”
여기저기서 두서없이 날아오는 인사에 정신이 없다.
“예, 모두들 염려해 주신 덕에 무사히 돌아 왔습니다.”
“자, 들어 가시게, 민이가 용케도 마중을 나갔구만그래.”
“저가 누굽니까?”
모두들 우르르 대청으로 들어 가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장주 고노인의 금지옥엽인 설희는 표두와 결혼을 해서, 남편은 표행을 떠났다고 하고, 건이도 성혼 후에 벌써 아들이 하나 있다고 했다.
잠시 후에 장학이 추실을 타고 달려 왔다.
추실은 대문앞에서 장학을 등에서 떨구어 버리고, 자신의 키보다 낮은 대문을 기듯이 들어 와서는 대청문 앞에서 푸르르거려서 모두들 웃음꽃을 피웠다.
“학이가 편지를 자주 보내 주는 통에 우리도 중원을 쏘다닌 기분이 들었다네. 고생이 많았으이.”
고노인이 장학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다시 감성을 바라본다.
설희는 추향과 사마선녀의 사연을 듣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요동성주는 뭐하는게야! 황실의 부마께서 납셨는데, 코빼기도 안 보인단 말이야?”
시끌시끌한 저녁과 술자리가 이어졌다.
다음 날, 감성은 마차와 싣고 온 물건들을 모두 고노인의 장원에 주고, 천선곡 식구들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연황후가 천선에게 예물로 보낸 좋은 술과 차, 그리고, 두 여자의 결혼 예물만 챙겨서 요동성을 떠났다.
천선봉 정상에 두 사람의 보따리를 안은 여인과 한 명의 사내가 자신의 덩치보다 큰 자루를 등에 지고, 불안한 표정으로 서서 천선곡을 내려다 보고 있다.
“오라버니! 아무도 안 계시는 것 같은데요?”
“아닐걸? 모두들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사숙! 기감이 전혀 없는데요?”
“그것도 숨길 만큼 무시무시한 사람들이니까.”
감성은 채념한듯이 긴 휘파람을 불면서, 두 여인의 손을 잡고, 농선의 집 큰 마당으로 내려간다.
“사부님께 먼저 들리지 않구요?”
“사부님께서도 저기 계시니까!”
세 사람이 마당에 내려서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귀신처럼 나타난다.
그 곳에는 천선곡의 새 식구인 어린 아이도 있고, 통천과 천황, 조양도 어떻게 알았는지, 모습을 나타내었다.
모두들 굳은 얼굴에 조용한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위기감마저 돌았다.
그 때, 방문이 열리면서, 천선과 귀선, 선동이 차래대로 마루로 나와서 마루끝에 걸터 앉았다.
“사부님, 제자 중원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무사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무사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래, 좀 과하게 무사한 것 같구나.”
“소생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른다. 여기 불여시와 해결하려무나!”
“우리 물귀신 내자께서는 만강하시온지요?”
“만강은 못하고 있소이다. 불쌍한 처자를 둘이나 버려놓고서는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찾아 왔는감?”
“소생이 겁이 많아서, 혹시나 도움이 될까해서 모시고 왔소이다.”
감성은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천황과 통천, 조양에게 인사를 드리고, 천선곡형제들에게도 목례를 올린다.
추향과 사마선녀도 같이 천선을 위시한 천선곡 식구들에게 땅바닥에서 대례를 올렸다.
두 여자의 인사를 받은 조양은 손을 잡고 일으킨 다음 전음으로 무언가를 두 여자에게 이르자, 두 여자는 안고 있던 보따리를 들고, 귀선앞으로 가서 풀어 보인다.
귀선이 피식 웃으면서, 두 여자의 팔을 끌어서 양쪽에 앉혔다.
그 때, 농선이 나서서, 감성곁으로 온다.
“불여시, 아니 큰 형수! 너무 하지 않소? 그리고, 사돈께서도 그렇지, 겨우 귀호사형이 자기편이라고 데리고 온 사람을 덜렁 딸로 포섭을 해 버리면, 우리 귀호사형만 개밥에 도토리격이 아니오!”
그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면서, 웃음보가 터지기 시작한다.
“맞아요! 우리 귀호사형이 없는 천선곡이 불여시 소굴로 다시 변한다면, 우리가 먼저 떠날 것이오!”
식선이 나서자,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친다.
“옳소! 불여시는 각성하시오!”
감성이 돌아서서, 두 손을 들고 성원에 답례를 하면서 자제를 시키며, 등에 진 덩치가 큰 자루를 내려서 천선곡 식구들의 선물 보따리를 풀고, 연황후가 준 금낭의 서찰을 귀선에게 건낸다.
천선곡의 식구들은 천선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자신이 받은 선물에만 관심이 있고, 감성의 집안일에는 아예 시선도 주지 않는 묘한 광경이 벌어졌다.
금낭을 받아서, 서찰을 펼쳐 본 귀선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추향이 귀선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인다.
“뭐? 뭐라고? 내가 공주마마가 되었단 말이지?”
“그럼요, 우리 세 형제가 모두 공주랍니다.”
“힉! 모두들 들어라. 오늘 이 순간부터 나는 불여시를 접고, 명나라의 공주가 되었으니, 연회를 베풀리라. 그리고, 저 바람둥이 부마는 적당히 모시도록하고!”
“하하하하하! 반갑수! 귀호사형!”
그나마, 농선만 아는 척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귀선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미소를 짓는다.
“또! 여기 두 공주마마께서 회임을 하신 것 같으니, 각별히 신경을 써주도록 하고!”
“와!”
그제서야 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음식상이 차려진다.
천선, 천황, 통천은 감성을 데리고, 천선동으로 날아 오른다.
좌정을 하고, 통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슨 문제가 있었더냐?”
“예, 잘못된 것도 없고,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다만, 용린사질이 터를 가꾸어 세상을 초대하고자 했으나, 세상이 이에 응하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스스로 이로움을 모른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더냐?”
“용사질도 세상의 일부요, 용사질을 외면한 것도 세상이며, 용사질이 이룬 것도 실체요, 이를 부순 것도 실체인 반면에, 이를 기대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허상이 아니겠습니까?”
천선이 고개를 끄덕인다.
“안타까움도 허상을 붙든 욕심이라? 우리 성이가 고생이 많았구나. 아직도 천선곡을 열 때가 아닌 모양이로구나!”
세명의 사부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혼자 남은 감성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진다.
‘천선곡은 열리지 않아도, 용소도는 이미 열렸소이다, 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