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 대한 예화 모음
▣ 훈련된 제자
새해가 되면 교회마다 임명식 또는 언약식을 한다. 이때 교회 임원과 성가대원, 교회학교 교사 등 봉사자들은 새로운 헌신을 다짐한다. 탈무드에 나온 이야기다. 한 율법학교 학생이 스승에게 와서 스스로 랍비가 될 자격을 갖추었다고 자랑했다. 스승은 “그 자격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저는 제 몸을 단련해서 맨 땅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고, 들판의 풀을 먹을 수 있으며, 날마다 채찍으로 세 번씩 제 몸을 때리며 훈련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스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나귀를 보아라. 저 나귀는 맨땅 위에서 자며, 들판의 풀을 먹고, 날마다 세 번 이상 채찍으로 맞는다. 지금까지 너는 나귀가 될 자격을 갖춘 것이지 랍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자격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고 훈련하셨듯 복음으로 무장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신경하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 자랑스러운 제자
어떤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한 어린이가 앞에 나와 무엇인가 열심히 발표하고 있었다. 그 아이 뒤의 칠판에는 ‘뿌리’라는 글씨가 크게 적혀 있었다. “ 우리는 충청북도 청주가 고향이래요. 또 저는 전주 이씨 47대손이구요! 그리고 우리 증조 할아버지는 조선 시대 때 예조 판서를 지내셨던 분이셨대요. 저희 할아버지는 지금도 청주에서 교장 선생님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큰 무역회사 과장님이세요. 나는 훌륭한 우리 집안이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밤 아버지에게 들은 집안에 대해 자랑스럽게 발표를 끝낸 그 어린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어린이들이 차례대로 한 명씩 나와 자기 조상들에 대해, 그리고 자기 가족들에 대해 준비해 온 내용을 열심히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것을 한참 지켜보던 선생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한 어린이가 발표를 막 끝내고 들어가고, 이어 나오는 어린이를 본 순간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조용히 걸어 나오는 그 어린이는 고아원에 사는, 부모가 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선생님은 그 아이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고 말았다는 자책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그 아이는 선생님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단상 앞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아이는 놀랍게도 이렇게 얘기를 시작해 나가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많은 자녀를 가지고 계시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도 아주 많은 형제들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의 주인이세요. 사랑도 아 주 많구요… .” 똑똑하고 자랑스럽게 발표해 나가는 그 아이를 보는 선생님의 두 눈에는 어느새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늑장 부린 제자
왕이 찾아오자 온 마을은 기쁨으로 들떴다. 마을 사람은 모조리 왕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윽고 왕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제자 열 사람을 선발하기 위함이다. 내게 합당한 제자가 되려면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내 너희에게 엄숙히 언약하거니와 나의 제자가 되어 나를 섬기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내 성으로 불러들여 왕처럼 살게 해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너나 없이 열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왕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자원하고 나섰다. 왕은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열 명을 골라내느라 하루를 보냈다. 선발되지 못한 사람들은 슬픔에 젖고 풀이 죽었다. 제자로 선발된 이들은 즉시 왕을 따라 항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들을 왕의 고장으로 데려다줄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선발된 이들 가운데 요밥이라는 사람이 왕에게 다가와 말했다. “전하, 잠시 마을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애인에게 작별 인사하는 것을 깜빡 잊었지 뭡니까? 금방 갔다오겠습니다.” 요밥은 이렇게 말한 다음 왕의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는 마을에 당도하여 연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잠깐 머무르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잽싸게 발걸음을 돌려 항구로 돌아왔다. 하지만 항구에 당도한 요밥은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바다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 / 앤드류 마리아
* 기도 : 주님, 영원한 진리의 보물을 발견하고도 믿음의 길에서 뒤돌아보거나 방황하거나 중도하차 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제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끝까지 견디는 인내와 용기, 그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을 선물로 주소서.
▣ 주를 위해 버리라
성경: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막10:2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재물이 무조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재물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에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 세상에서 누렸던 모든 기득권을 주를 위해 버렸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를 때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즉시 예수님 뒤를 좇았습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물질이 아까워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진짜 귀하고 중요한 것은 생명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보다 더 소중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예수님 다음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중요하지도 않은 것의 노예가 되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데 방해되는 것이 있습니까?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 보고 그것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 기도: 기득권을 버리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 코카콜라와 제자
브라질의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 자신의 제자 사역에 대해서 말한 부분이다. 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인 수는 184명이었다. 교역자들은 그때부터 정신없이 일해야 했다. 2년 동안 극성스러운 조직과 전도 덕분에 교인 수는 6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3배나 교세를 확장시킨 셈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나는 모든 것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나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성령께서 나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가 잡지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술수를 쓰고 있다. 도대체 네가 하는 일들 가운데 나의 손길을 찾아보겠느냐?”라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 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쪄 가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 수를 늘려 가는 것이 제자 사역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행사를 중심으로 제자 수를 늘려 가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는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요, 하나님의 손길로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를 양육함에 있어서 주님의 손길과 뜻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말씀의 징검다리 / 정장복·주승중·김운용 엮음
▣ 제자의 자격
최근 동남아 어느 나라의 장관을 만났다. 그는 우리와 회담을 하다 5시가 되자 갑자기 마무리를 하자고 했다. 한류 드라마를 볼 시간이 됐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쯤 되면 한류 열풍이 얼마나 거세게 불고 있는지 느껴질 것이다. 일본에서는 배용준 최지우 송승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박용하 등 한류 스타들의 열성 펜클럽이 많이 있다. 그런데 펜클럽에 가입하려면 적어도 그 배우들이 출연한 드라마를 50번 이상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시험에서 합격해야만 한다고 한다. 어떤 시험인가? 드라마를 돌리다가 갑자기 멈춘 후 다음 사람의 대사를 연기해야 한다. 피아노 위에 얹혀 있는 소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엄격한 자격을 갖추어야 저들이 좋아하는 배우의 펜클럽에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로서 얼마나 성경 말씀을 암송하고 있는가? 제자의 자격을 갖추어 그 반열에 설 수 있는가?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 7:28) /한태수 목사 (은평성결교회) <국민일보/겨자씨>
▣ 믿음의 중간지대는 없다
예수님의 제자는 중간지대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맨 가장자리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간다(마이클 슬로터)
당신은 주일 성수만을 목표로 한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삶 전체를 성수하고자 하는 제자입니까? 세상과 하나님 사이, 중간지대에 자리를 잡은 채 머뭇거리고 있다면 이것은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안전지대에 거하기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 안에 거하십시오 믿는 자에게 중간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장은 당신의 선택을 두고 많은 이들이 어리석다 할지라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가장 현명한 삶의 방식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벽종소리
▣ 제자의 길과 십자가
고난이야말로 진정한 제자의 길의 상징입니다. 제자는 그의 스승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루터가 진정한 교회의 표적들 중에 고난을 넣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우구스부르크의 신앙고백을 준비하며 작성한 비망록 중의 하나에도 교회를‘복음을 위하여 박해받고 순교당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정의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박탈 당하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가운데 우리의 생명을 포기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교제 가운데 우리의 생명을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제자의 길의 반대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가 가져오는 모든 모욕들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고난 당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받으라는 요구는 기쁨이며 그리스도의 은혜의 증거입니다. 초대 기독교 순교자들의 행동은 그리스도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임재의 확신을 주심으로써 어떻게 그들이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때를 아름답게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완전한 증거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무자비한 고문을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완전한 기쁨과 축복의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고난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승리의 길은 그리스도에게도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분명합니다. /생명의 삶 중에서
▣ 이상적인 신입 사원
만약 한 회사가 유능한 신입 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 분석을 했다고 가정합시다. 회사가 이들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해 컴퓨터에 분석을 의뢰했다면 아마 이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사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청탁하려 하였습니다. 도마는 매사에 너무 의심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일을 그르치고 실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드레는 너무나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속도가 늦고 추진력이 떨어집니다. 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서 회사로서는 채용하기에 좀 위험한 존재입니다. 세리 출신인 마태는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제자들 중 가장 이상적인 신입 사원을 뽑는다면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실격자로 판정난 제자들이었습니다. 세상적 판단으로 가장 유능한 가룟 유다는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 말씀의 징검다리 / 정장복·주승중·김운용 엮음
▣ 신자와 제자
값싼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 곧 쉽게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 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리고 제자가 되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는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린다. 값싼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쉽게 용서하고 쉽게 천당에 보내주는 할인 매장의 주인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네 소유를 포기하라"라는 비싼 대가를 요구하셨다. 신자는 열매가 빈약하고, 제자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신자는 자기 혼자의 영혼을 겨우 건지나, 제자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불리기는 쑥스러우나, 제자는 큰소리로 "그는 그리스도 인이다"라고 불릴 수 있다. 신자는 싼 값을 지불하며 살고, 제자는 비싼 값을 치르며 산다. 신자는 빈 어깨로 천국에 가려 하고, 제자는 남의 십자가까지 지고 천국으로 향한다. 신자는 혼자 기뻐하고 혼자 만족한다. 그러나 제자는 눈 물과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존경하라' '나를 예배하 라'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라는 말 대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나도 희생하고 예수 님처럼 나도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 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예수 사랑이다. / 최효섭(명상록)
▣ DTS (제자훈련학교) 필수과목
5년전 VIEW(기독교세계관대학)를 처음 시작할 때의 일이다. 그러잖아도 이런저런 일로 분주한데 어떤 사람이 익명으로 VIEW 홈페이지에 “양승훈은 진짜 교수인가?”라는 글을 올렸다. 별로 인기 있는 홈페이지도 아니었지만 이런 제목의 글이 올라오자 순식간에 조회수가 50회를 넘어섰다. 나는 게시판 관리자에게 연락해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말고 그냥 지우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우자마자 또 비슷한 글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혹시나 싶어서 내용을 저장해두고 지웠다. 그러면서 내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이 있는지를 곰곰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 가족이 밴쿠버에 온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여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VIEW도 개원하기 전이라 딱히 짚이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비난자는 그 후에도 두 달동안 17회의 글을 더 올린 후 그쳤다. 물론 스스로 회개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이상 이런 글을 올리면 형사적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이메일을 보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인해 고난을 당할 때가 있다. 자기 잘못으로 인해 고난당할 때도 있지만 영문도 모르고 고난당할 때도 있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의 오해로 고통을 겪기도 한다. 언젠가 “우주와 지구의 창조연대를 6000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더니만 이를 두고 당장 양 교수는 진화론자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이단 운운하는 사람도 있었다. VIEW 사역을 위해 대학을 사임할 때도 자기 혼자 이민 가고 싶어서 그런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 밥을 굶거나 아내나 자녀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등의 극한의 고난을 당한 적은 없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사람들 앞에서 일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마음고생을 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통해 애매하게 받는 고난이야말로 영적 훈련에 필수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경은 자기 잘못으로 받는 고난은 아무런 유익이 없지만 의를 위해,복음을 위해 애매히 받는 고난은 값진 것이라고 말한다.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이사야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한다면 그 분의 모습을 닮으려는 제자훈련학교(DTS) 교과과정에는 반드시 ‘애매히 고난 받기’가 필수과목으로 삽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 다른 계획은 없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천사장 가브리엘이 예수님을 만나 여쭈어 보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예수께서 하신 일이 너무 제한된 지역에서 되어진 일이라 만백성을 구원하기에는 미흡한 것 같은데,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 정말 다 이루어진 것이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전히 다 이루었다고 대답하셨다. 그래도 가브리엘은 걱정스러워 “천사들을 보내어서 만방에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면 어떨까요 ?”라고 물었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다 부탁해 놓았다고 말씀하셨다. 가브리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통치 않으니 다른 길이 없겠느냐고 다시 재촉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있다. 나는 그들을 믿고 있으니 다른 계획은 없다”고 잘라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
마가복음3장 14~15절을 보면,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신 후 바로 그들을 훈련시키셨는데 그것은 ‘자기와 함께 있는’ 훈련이었다. 최대의 훈련은 삶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제자 훈련을 하셨다. 참된 제자 훈련은 자기 생활을 공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이원론적 신앙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거룩하고 의롭게 살고, 세상에 나가서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다 공개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말과 행동의 일치를 보았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순종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보았다. 왜냐하면 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도록 파송하셨다.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은 여기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냄을 받기 위해서다. 그것은 목사나 선교사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문제다. 내가 좋은 위치, 좋은 자리에서 행복하고 안일하게 살고 있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가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이 교회를 다 떠나야 한다. 세상으로 가기 위해 여기에 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이는 곳인 동시에 흩어지는 곳이다. 제자와 교회의 최대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다. 제자의 요건은 지식이나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영적 권위와 영적 능력이다. - 「열두 제자를 택하신 예수님」/ 하용조
▣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성프란시스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생애에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선생님을 보면 성자 같은 인격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시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간단한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를 내려다보시고 사람을 찾고 계셨어. 가장 추한 사람이 누군지, 가장 불결한 사람이 누군지, 고통 가운데 고민하는 사람이 누군지, 가장 병든 인생이 누군지 찾고 계셨어. 그 하나님의 눈길이 나에게 머물렀어. 그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난 후에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을 붙들어 내가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 줘야겠어’라고 생각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거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이 땅에서 뛰어나고 아름답고 잘못이 없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렁이 같은 야곱을 찾으십니다. - 「벌판에서 부르는 하늘 노래」/ 김태범
▣ 제자는 만들어진다
지난 6일 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장 이·취임식장에서 국회조찬기도회장 유재건 장로의 간증이 있었다. “제 부친은 어머니와 결혼한지 9일만에 세상을 뜨셨고 저를 임신하신 어머니는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저를 낳아 기르셨습니다. 모친은 얼마 전에 92세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임종 직전 제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8절 말슴을 읽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잘 들으시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읽었습니다. 어머니는 ‘이것은 하나님이 네게 주신 말씀이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유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신하셨습니다. 유언을 정리하면 ‘장로인 너는 목사님께 절대 순종하고 모든 사람을 선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 장로는 세상 끝날까지 목사님께 순종하며 모든 사람을 선대하며 살겠다고 간증했다. 주님의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주의 제자는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는 것이다.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 훌륭한 제자
한 랍비가 제자를 초대해서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았다. 랍비가 제자에게 말했다. "우선 기도문부터 외워라." 그러나 제자는 몇 줄 밖에 외우지 못했다. 다른 기도문은 물론이고 이제까지 가르친 내용들마저도 거의 외우지를 못했다. 랍비는 화가 나서 제자를 꾸짖었다. 식사가 끝나자 제자는 풀이 죽어 돌아갔다. 며칠 뒤 랍비는 그 제자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그가 환자를 돌보아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순간 랍비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제자들이 모이자 이렇게 말했다. "마음속 생각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네, 하지만 몇 만 권의 책을 읽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해도 마음을 경작하지 않는다면 단지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네." /탈무드
▣ 추사와 제자 이상적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서 8년, 함경도 북청에서 1년, 모두 9년의 유배생활을 마친 후, 과천에 초당을 짓고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희를 앞둔 어느 겨울날 그에게 소포가 하나 배달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약간의 먹을 것과 한시 두어 편, 그리고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습니다. 제자 '우선 이상적'이 보낸 물품이었습니다. 오랜 유배생활에 늙고 병들어 거동마저 불편한 추사에게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아직도 늙은 스승을 기억해 주는 제자가 있다니..." 그전에도 우선 이상적은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 중국 땅에서 구해 온 희귀도서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추사는 답서에서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에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에서 멀어지면 모두가 외면하는데 우선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하면서 제자의 인품을 칭송했다고 합니다. '우선 이상적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늙어가는 인생길에도 외롭지 않을 듯합니다. 류중현 / 사랑의 편지 발행인
▣ 좇아다닌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날 저명한 두 교수가 심오한 사상과 삶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교수가 다른 교수에게 물었다. “헨리라는 학생이 그러는데 자기가 자네의 제자라더군. 그 말이 사실인가?” 이에 대한 동료 교수의 대답은 이랬다. “글쎄, 그 학생이 내가 하는 모든 강의를 좇아다니며 듣고 있긴 하지. 그러나 나의 제자가 아닐세.” 멋모르고 좇아다니는 사람은 많아도 참된 제자가 없는 것처럼 슬픈 일이 있을까?
▣ 예수님의 열두 제자 능력분석
만약 한 회사가 유능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분석을 했다고 가정하자. 회사가 이들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해 컴퓨터에 분석을 의뢰했다면 아마 이런 결과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야고보와 요한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다. 도마는 매사에 의심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안드레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매사에 추진력이 떨어진다. 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 위험한 존재다. 세리 출신 마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제자들 중 적격자는 가룟 유다뿐이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실격자로 판정난 제자들이었다. 세상적 판단으로 가장 유능한 가룟 유다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택하지 않는다. 우리의 겸손과 부족함을 들어 사용하신다.
▣ 나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를 믿고 따르며, 그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는 우리가 과거 이기적인 죄의 삶에 대하여는 “아니요”라고 하며, 예수님에게는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적인 신앙은 외적인 순종을 동반해야 한다. 순종이 없다면 진정한 믿음도 제자도도 없다. 순종을 원하시는 부름에 “예, 그렇지만…”이라며 망설인다면 우리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빛이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이 핑계를 내세우며 되도록 편한 쪽으로 제자도를 타협하려고 한다. 마지막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예수님의 부름에 언제 “예”라 하고, “아니요”라고 할지 결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인 셈이다. 진리는 냉혹하리만큼 명백하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주님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어떠한 의미에서도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에 있어서 절반이라는 개념은 없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기대하신다. 그가 먼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놓으셨고, 성령을 우리 마음에 두어 주님의 음성을 듣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 「제자도」/ 데이빗 왓슨
▣ 성도는 제자를 남긴다
몇 년 전에 텔레비전 드라마 <상도>를 인상 깊게 시청한 적이 있다. 그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이 상도다.” 그 순간 ‘상도가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면, 성도는 무엇을 남기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도는 제자를 남기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우리 교회는 평일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성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순예배나 일대일제자양육을 하면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도록 한다.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을 찾고 보람을 찾는 성도들을 길러 내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욱 시간을 쪼개서 쓰고 있다. 자투리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규모 있게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교회에서 많은 일꾼이 발굴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불평하지 않으며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성숙한 성도들이 세워지고 있다. 교회는 적어도 30년을 바라보며 사람을 키워야 한다. 내가 가르친 세대가 30년 후에 지금 나의 자리에서 하고 있는 일을 더욱 훌륭하게 해낼 수 있도록 제자를 키우는 성도야말로 성공한 ‘성도’가 아니겠는가? 지금 세대의 부흥에 만족하지 말고 그 부흥이 다음 세대에도 전달되도록 끊임없이 애쓰는 교회, 따라서 30년 후에 우리 교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 「우리 교회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 권 준
▣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은
유학 시절에 한 교수님이 보여 준 인상적인 ‘원맨쇼’를 기억합니다. 그 교수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강단 위에 누워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이야기하다가 하나님을 위한 일을 말할 때가 되면 벌떡 일어났습니다. 또 그러다 죄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다시 누웠습니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면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 받고 죽임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 된 성도들은 죄에 대해 그분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께 대해 살아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과 하나 된 성도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대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이 말은 직장에서 일할 때 죄악과 관련된 일이 발생하면 죽은 사람처럼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확신이 생기면 살아서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크리스천 직업인들의 행동 지침입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시다. 「5분의 축복」/ 방선기
▣ 스승과 제자
나는 지방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신대원에 합격했으나 당시 월 5000원의 사례비를 받던 전도사 시절이라 등록금이 부족했다. 우연히 신학교 스승을 만났는데 등록금 준비는 됐느냐고 물었다. 조금 부족하다고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사모님이 등록금을 융통해주셨다. 후일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했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 그 스승 목사님은 미국으로 이민 가시고 나는 목사가 되었다. 30년이 지난 어느 날, 한국을 방문한 스승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나 우리 교회에 모시고 옛이야기를 하며 그때 빚을 100배로 갚고 용서를 빌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런데 스승 목사님과 사모님은 30여년 전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다.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제자에게 사랑을 준 것도 잊어버리고 살아오신 것이다. 스승 목사님은 “자네가 이렇게 성장해 있는 모습 그것이 제자로서 스승에 대한 보답이네. 우리가 자네의 목회 모습 보는 것만으로 우리 노년은 행복하네.” 아,그 많은 사랑과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 그 스승의 그 제자
조만식 장로가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주기철 목사를 가르쳤다. 그런데 조 장로는 제자인 주 목사가 전도사로 시무하던 교회의 시무장로로 있었다. 어느 주일 조 장로는 예배시간이 되었는데도 밖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예배가 시작된 뒤에 교회에 들어왔다. 주 전도사는 설교를 하다 말고 “조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고 호령했다. 이럴 때 보통사람 같았으면 나가버리든가 의자에 앉아서도 아마 험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 장로는 그대로 서서 예배를 드렸다. 나중에 주 전도사가 설교를 마치고 “서 계시는 조 장로님, 기도해 주십시오” 하니 조 장로는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하게 여겼던 죄를 용서하옵소서” 하고 기도했다. 그날 온 교우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스승의 그 제자다. /임화식 목사<순천중앙교회> <국민일보/겨자씨>
▣ 주님의 군사
나는 과연 주의 군사인가. 전쟁이 없을 때도 칼을 갈고, 나를 훈련시키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군사라면 날마다 나를 쳐 복종시켜야 할 것인데,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 살아야 할 것인데…. 겉으로 드러나는 거창한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이요셉의 ‘요셉일기’ 중에서-
주님의 군사는 말씀과 기도를 방패삼아 매일을 승리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삶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그것은 순간을 승리하는 것입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 이 순간, 그리고 오늘 군대의 지휘자 되신 주님을 의지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용사
‘용맹함’(heroism)은 오늘날 기독교가 상실한 음(音), 잃어버린 화음이다! 용맹함이 없는 군사는 실전에 참가하지 않는 군인, 곧 초콜릿 군병이다! 초콜릿 군병은 초콜릿처럼 물에 닿으면 풀어지고 작은 불기운에도 녹아 버리고 만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막대 사탕과 사탕 과자 같다. 초콜릿 군병은 전쟁 생각만으로도 갑작스런 오한이 들고, 전투 소집 명령에 온몸이 마비된다. 그러나 진정한 군사는 모두가 용사다! 그는 평안을 약속하는 부드러운 유혹의 손길도 거부할 수 있다. 고난과 질병, 죽음을 회피하라고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목소리도 거절할 줄 안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보좌에 동석하는 전투병이 되려는가, 아니면 토해 내쳐지는 초콜릿 그리스도인이 되려는가? 그대는 인색한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요청된 영예를 보류하려는가? 아니면 다음의 글에 나타난 영광스런 업적을 두 배로 성취하려는가? “전쟁에 나온 이들은 모두 예수님이 온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심을 전하려는 온전한 마음으로 나아왔다. 이들은 모두 용기 있는 강한 자들이었다. 적어도 일당백, 일당천은 감당할 만했다. 이들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이들의 얼굴은 사자의 얼굴 같고, 높은 곳을 뛰어다니는 사슴처럼 발 빠른 자들이었다”(대상 12:8, 33, 38). 그대는 지난 시간 동안 예수님을 좇아 그분을 그대 삶의 왕으로 모셔 왔다. 그렇다면 이제도 그리 하라! 자, 이제 기독교의 ‘잃어버린 화음’인 용맹함을 회복해 온 세상을 그리스도께, 면류관을 그리스도께 드리자.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대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꾀병을 부릴 것인가, 전투병이 될 것인가?” - 「초콜릿 군병」/ C. T. 스터드
▣ 돌격 앞으로!
여러분은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막강한 군사력과 전략으로 많은 땅을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한번은 아주 적은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한 도시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곳의 왕을 직접 만나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그 도시의 왕은 제아무리 알렉산더지만 그 적은 군대로 무슨 싸움을 할 수 있겠냐며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자신과 그 군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겠노라고 공언했습니다. 알렉산더는 군대를 일렬로 세워 낭떠러지를 향해 행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알렉산더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한 사람씩 낭떠러지로 행군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 도시의 왕은 저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도자의 명령에 따르는 군사들에게는 제아무리 강한 요새도, 큰 군대도 견디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한낱 인간을 따르는 군대에게도 목숨을 건 담대한 순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령관으로 모신 우리가 순종의 결단과 의지를 지니지 못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적극적으로 거역하는 것은 물론, 능력이 모자라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것 역시 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에, 능력이 모자라 순종하지 못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고 순종하고자 몸부림치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청종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은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이 아니라 죄입니다. 그 죄에서 떠나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 또 하나의 고향
중국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의 항우가 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유방이 항우의 10만 군사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유방은 가을 달밤에 자기 군사들로 하여금 퉁소로 구슬픈 초나라의 가락을 불게 하였습니다.그러자 초나라 군사들은 고향의 구슬픈 가락을 듣고 향수병에 걸려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퉁소 가락으로 유방은 대승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고향이란 인간에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전통 명절인 추석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아갑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깊은 향수를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아늑한 품과 같고 동경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동심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막상 고향을 찾으면 허무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고향을 가보아도 내 마음의 빈 공간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또 다른 고향, 영원한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이 우리의 본향이요, 돌아갈 나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신령한 싸움을 하도록 부름받은 영적인 군사들입니다. 군사는 이 세상과 자기 생활에 얽매어서는 안됩니다.(딤후2:3-8)
▣ 여름철 군인들
1776년 겨울. 미국 조지 워싱턴 장군의 군대가 펜실베이니아주 포지 계곡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식량은 떨어지고 옷은 찢어졌으며 전염병이 창궐했다.군인들은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워싱턴은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여름철의 군인과 햇빛 날 때의 애국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고통과 역경의 밤을 극복한 사람들만이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 희생의 피를 흘린 사람만이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수 있다. 오늘 여러분의 땀과 눈물이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고난이 없는 평안한 상태의 군인, 태평성대에 나라 사랑을 부르짖는 애국자는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다. 땀과 희생과 피를 쏟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편안한 곳에서 싹튼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고난에서 시작됐다. 예수가 쏟은 붉은 피는 인류의 죄를 씻어냈다. /장학일 목사(예수마을교회)
▣ 제자, 군사에 관한 성경 말씀
0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7) 0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 26, 27) 0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 33) 0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
▣ 제자, 군사에 관한 금언
0 그리스도인의 삶은 '밖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라, 삶을 '뚫고' 지나는 길이다.-빌리 그레이엄 0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분을 알고,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믿는 것이다.-존 스토트 한태완 목사 300 주제별 예화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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