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5-9
당신이 지쳐 있을 때 / 김영주 목사
1. 졸음의 영
졸음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만나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 어느 때, 너무 힘들고 감당키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잠이나 자자!’ 이랬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까 나중에는 조금만 힘들어지면 그냥 포기하고 자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면서 나중에는 시도 때도 없이 자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조금만 원치 않는 어떤 일이 있으면 바로 잠들어 버립니다.
예)설교만 시작되면 잡니다. 공부만 하려면 잡니다. 게임, 컴퓨터, TV볼 때는 안 잡니다. 그러나 힘든 일, 어려운 일,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바로 잠들어 버립니다. 몸이 그렇게 길들여진 것입니다. 이 정도되면 조절이 안됩니다. 결국 잠이 그 인생을 좀 먹어서 자느라, 조느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2. 엘리야의 태도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서 보게되는 엘리야의 태도가 그랬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될 대로 되라!”
5절)“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이세벨의 협박이 정말 두렵고 무서웠다면 잠이 안 왔을 것입니다. 아무리 국경을 넘어 도망했다 해도 불안하면 잠이 안 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나무 아래서 누워 자고 있습니다. 자포자기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종종 나타납니다.
1) 열심히 했는데 열매 없을 때
2) 열등감이 심할 때
3) 큰 성공이나 승리 후 교만 했을 때
4) 더 이상 대책, 방법이 없을 때
5) 자기 한계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일시적으로 우리가 그럴 수 있지만, 계속 이런 태도라면 ‘엘리야’도 졸음의 영‘에 잡혔을 것입니다. 대개 졸음의 영, 게으름의 영은 같이 갑니다. 둘이 친한 친구입니다. 졸다보면 게을러지고, 게으르면 만사 귀찮고, 눕고 싶고, 미루게 되고, 지각하게 되고 포기하게 됩니다.
졸음의 영도 게으름의 영도 그들 스스로 힘이 강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 악한 영들에게 계속 먹이를 줘서 키워준 것입니다. 힘들면 자버리고, 포기해 버리고, 에라 모르겠다고 던져버리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도전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이런 영들에게 잡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엘리야의 상태는 사명, 부르심, 믿음, 기도 다 잊어 버렸습니다. 몸도 맘도 감정도, 영혼도 다 지쳤습니다. 다 내려놓고 포기한 상태입니다.
3.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이런 엘리야를 두고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하나씩 하나씩 구체적으로 보기 원합니다.
1) 5절)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
하나님은 엘리야가 어디 있는지 무슨 상태인지 아시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할 때나 바닥일 때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늘 함께 계십니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잘 아십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 홀로 누워있을 때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시139:1~4)“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마28: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왜 이렇게 함께하시는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써 먹고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써주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2) 천사가 그를 어루만졌습니다.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랑의 touch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홀로 고독, 외로움에 처해 있습니다. 옆에 누구도 없습니다. 뼈 속까지 외로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말도 중요하지만 ‘사랑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천사를 통해서 그를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문둥병자, 이 사람은 지금 사람의 손길이 그립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법에 보면 문둥병자를 만지면 만진 사람까지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람의 손길이 그립겠습니까? 이 필요를 아시고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만져 주셨습니다.
예) (마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문둥병자)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3) 일어나서 먹으라
대개 이런 경우 우리의 예상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책망, 호통 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No! 하나님은 지쳐서 쓰러진 사람들에게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위로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정죄의식, 패배의식, 무능력함은 사단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어쩌다 책망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엘리야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음식을 준비해놓으시고 일어나 먹으라 하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차려주신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천국 보양식입니다. 6절을 보시면,
6절)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어쩌다 한번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요21장에도 갈리리 바닷가에서 낙심한 제자들에게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을 먹여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4)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7절)“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엘리야는 먹고 누워버렸습니다. 또 잡니다. 절망이 너무 깊기에 한 두 번으로 회복하기 힘든 것입니다. 이때 또 천사가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고 합니다. 왜냐면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안 먹으면 힘없어 갈 길을 다 가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의 일 하다가 기력 없거나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아주 자상하게 채워주십니다. 이렇게 먹고 힘 얻어 40일을 밤낮없이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필요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외로울 때, 배고플 때, 지쳐 있을 때, 자포자기 상태일 때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도와주십니다.
예) 초등 때, 어느 날 늦어서 아침도 못 먹고 학교 갔는데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누가 찾아 왔다고 해서 보니까 어머니가 찐빵을 몇 개 사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다 둘러서서 쳐다보니까 창피해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부모님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도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이보다 더 세심하시게 돌보시지 않으실까요?
예)마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분,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친히 돌보지 않겠습니까? 그런 걱정 하지 말고 주님의 일만 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5) 대화하시는 하나님
(9절)“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사역에 대한 부담, 패배감,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굴에 들어가 혼자 머물렀습니다. 소위 ‘잠수 탔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하나님이 찾아와 대화를 시도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이때부터 하나님과 엘리야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이런 세밀한 대화 후 엘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드디어 굴에서 나와 입구에 서게 됩니다.
힘들고, 지칠 때 회복하는 법 중의 한 가지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는 능력, 기적, 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대화가 필요합니다.
예)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대한민국이 4강에 올랐습니다. 그 원인 분석을 해보니, 히딩크의 리더십이었습니다. 히딩크가 강조한 것 중 하나가 ‘경기 중 대화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국제 경기에 나가면 긴장해서 아무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 어떻게 공 찼는지도 몰랐습니다. 서로 협력이 안 되었습니다. 히딩크가 바꾼 것이 이것입니다. ‘대화하라. 서로지지, 격려하라. 상의하면서 적극적으로 차라. 이것 위해 형, 선배, 이런 호칭 다 없애고 이름 부르라. 경기할 때는 이름 부르라.’이런 주문을 했다고 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런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굴에서 나오게 한 비결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신 그것입니다. 그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사랑의 속삭임을 주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고백은 작은 소리로 합니다.
예) 찬양 중,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 볼지라,,,
이 찬양 가사 중에,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 지쳤을 때는 깊은 기도, 조리 있는 기도,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런 때 우리가 신음으로만 해도 하나님은 아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예) You raise me up 가사 중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 while with me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the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이 찬양의 중간부분 가사가 맘에 와 닿습니다. 침묵가운데 기다릴 때, 주님이 다가오셔서 나 옆에 앉아주십니다. 라는 구절입니다. 그렇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는 그냥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나와 함께 앉아 주시고 같이 시간을 보내십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작은 대화입니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기도 해야지, 말씀 봐야지, 물어 봐야지...’ 하면서 미루기만 하고 못했던 것, 이제는 다 내려놓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은 다가와 사랑의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나를 살리고, 회복하고 치유하십니다. 영적인 침체에 안 빠지기 위해서 아무리 바쁘고 쫓겨도 15~30분정도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이 시간이 우리를 살리고 힘을 줍니다.
4.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1) 시간을 확보하십시오!
필요하면 삶, 활동을 재조정하고, 필요하면 밥도 줄이십시오.
2) 성경을 펴서 읽으십시오.
체크하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교훈은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보십시오. 그 속에는 회개의 거리, 순종할 말씀,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3) 기도하십시오.
묵상한 말씀대로 살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4) 하루를 살면서 그대로 순종해 보십시오.
5) 자기 전에 확인하십시오.
그대로 살았는지 아닌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