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속은 몰라 ( 20 김 유정)
철따라 오색의 빛깔을 자랑하는 금병산은 이 지역을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정겨운 산이다.
산이 험하게 생기지도 않고 원창고개 마루를 봉오리로 해서 서남쪽 아래로 흘러내리는 강줄기처럼 뻗어 내린 산자락은 실레마을에 이르러 꼬리를 내리고 아늑하게 논밭전지를 만들었다.
이 마을 한가운데로는 금병 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이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3.40년 전만해도 마을 아낙네들은 사철 이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벌개 벗고 멱을 감았으며 농사철이면 이 개울물은 논과 밭작물의 수분을 공급해주어 농작물의 수확량을 끌어 올렸다.
이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의 삼남매 중에 막둥이로 태어난 전 점례는 자라면서 동네 어르신들의 총명하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렇지만 몸이 워낙 약하고 겨울만 되면 심하게 기침을 하는 것이 낫지를 않아서 엄마는 아무래도 이 아이가 사람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마침내 점례도 입학할 나이가 되어 금병초등학교에 어렵사리 입학을 하였지만 반 아이들 중에서 제일키가 작아서 조회를 설 때에는 맨 앞줄에 서게 되었다.
엄마는 몸이 약한 딸이 제대로 학교생활을 할지가 걱정이 되어 그 바쁜 중에도 수시로 학교에 가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딸을 데리고 올 때가 많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게도 학교 다니는 것을 힘들어 하던 아이가 차츰 학년이 올라가면서 밥을 잘 먹기 시작을 하더니 학교에 적응을 곧잘 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저학년을 보낸 점례는 차츰 건강해져서 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다른 아이들 과 마찬가지로 중학교 진학을 원활하게 다닐 수가 있었다.
그가 실레마을에서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춘천시내와의 거리가 이십 리가 넘어서 학교를 다니는 것이 여간 힘드는 고역이 아니었다.
지금은 전국 어디를 가나 널따란 대로에 아스팔트포장이 잘 되어서 차량들이 자유롭게 싱싱 달릴 수가 있지만 옛날의 우리나라의 길이라는 길은 좁기도 하거니와 비포장 길이 대부분이라 어디를 다닌다 해도 교통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점례가 시내 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자 집에서 통학하기가 힘이 들었는데 그때 사촌언니가 출가 후에 시내에 살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중에 어린 조카들의 공부를 돌 보아주는 사람을 구하는 중에 점례가 진학을 하자 언니는 그의 집에서 학교를 다니라면서 짬이 나게 되면 조카들을 돌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막상 조카들을 돌보며 학교를 다니자니 처음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자신의 학과 공부는 할 시간이 만만치를 않았다.
게다가 두 조카들이 아직 초등학교의 1.3학년이다 보니 엄마가 챙겨주어야 할 일이 많은데 언니는 모든 것을 동생에게 맡기니 점례는 은근히 속이 상했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언니 덕에 편안하지는 않지만 학교를 다닐 수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데 문제는 중학교 3학년으로 오르면서 친구들이 뻔질나게 남학생들과 같이 데이트를 하자고 조르는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친구들과 동떨어진 행동을 할 수가 없어서 한번을 나가게 되자 남녀 가 한쌍씩 짝을 지우게 되는데 점례와 짝이 된 아이는 키가 크고 하모니카를 잘 부는 염 장섭이라는 아이였다.
이날 이후에 아이들은 수시로 시간이 나게 되면 만나서 영화구경도 하고 강에 나가서 고기를 잡기도 하였지만 점례는 자주 나가지를 못하게 되자 염 장섭은 그 다음부터는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너를 좋아한다는 내용이어서 점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요한 호수물에 돌맹이 하나를 던지게 되면 잔잔하게 물결이 일듯이 장섭의 글은 점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하였고 마침내 점례는 장섭이가 하도 만나자고 하기에 어느 일요일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공원으로 갔던 것이다.
그런데 저만치 서 있던 장섭이는 점례를 보자 갑자기 달겨들면서 끌어안는 바람에 깜짝 놀라 그를 밀쳤으나 어디서 그렇게 힘이 솟구치는지 꼼짝달삭을 할 수가 없는 가운데 장섭이의 얼굴은 어느 결에 점례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그의 품에서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장섭이의 두 팔은 대청마루의 상량 대들보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꿈쩍도 하지를 않았다.
“ 점례야 .나 너를 사랑한다.히히.”
염 장섭은 점례의 귀에다 대고 한마디를 하더니 다시 끌어안으면서 “ 네가 예뻐서 죽겠어.” 하고 육군 보병의 소대장처럼 큰 소리로 구령을 웨쳤다.
남자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점례지만 염 장섭의 긴급작전에 말려들었는지 그 다음부터는 저도 모르게 밀물이 서서히 모래사장을 잠식하듯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몽은 장섭이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남여의 사랑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런 것을 이름인가.’
이후 장섭이는 사흘도리로 편지를 보냈는데 어느 날 밤늦게 퇴근을 한 언니가 밤중에 방으로 불러서 들어가자 만면에 웃음을 띄면서 한마디를 하였다.
“ 너에게 요새 좋은 소식이 있는 것 같던데 어쩌면 좋아. 호호.”
점례는 언니의 하는 소리를 듣고는 순간 부끄러움이 얼굴 가득히 번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언니 사실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자꾸만 편지를 해서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기는 여자는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 것이여.”
언니는 그 말을 하면서 “너 때가 그래서 좋지 않니” 하더니 봉투를 내밀었다.
“ 남자에게 구애를 하려면 용돈도 필요해. 알았어.”
이날 점례는 언니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였지만 용돈을 주니 미안했다.
그런 일이 있은지 며칠 후의 일이다.
장섭이의 지급 편지가 와서 뜯어보다가 점례는 깜짝 놀란 것이니 아무 날 몇 시에 어머니께인사를 가자는 내용이었다.
“ 이 아가 정신이 나갔나. 뭔 소리를 하는겨.‘
점례는 그 편지를 받고 아무 소리도 하지를 않았는데 다음에 온 편지는 더욱 그를 놀라게 하였다.
“ 점례야. 미안하지만 우리 엄마를 한번만 만나다오.”
점례는 너무도 황당한 말이어서 대꾸도 하지를 않았는데 그 다음에 온 편지는 더욱 그를 놀라게 하였으니 어머니가 당뇨병으로 병원에 계시는데 어머니의 소원이 돌아가시기 전에 며느리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으시다니 네가 우리 어머니 소원 좀 풀어달라는 내용이었다.
점례는 어떻게 하다가 이런 곤궁에 빠지게 되었지 하면서 며칠간을 고민을 하였는데 그후 한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점례는 그때 학기말 시험이 있고 언니가 감기로 병원에 입원까지 하는 바람에 집안일이며 조카들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거의 한달 만에 장섭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전에는 그렇게 활달하게 점례를 보기만 하면 환한 미소로 반기던 그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사를 지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구.”
그 말을 들은 점례는 본의는 아니지만 소원을 들어드릴 것을 잘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장섭의 말을 들으니 그는 3대째 외아들로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어머니가 중간에 급성당뇨를 앓으시고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게 되자 며느리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겠다는 말을 하셔서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고자 나오지 않는 말을 점례에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게 되자 점례는 장섭이의 지극한 효심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서 더욱 치근한 마음이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 장섭아. 미안하다. 어떻거면 좋으냐.“
그러자 장섭이는 아무 말이 없더니 섭섭한 말을 한 가지 더 하였다.
“ 점례야.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가보다. 우리 아버지는 벌써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면 고향인 경상도 함안으로 이사를 가신다고 하였어. 이제 며칠 있으면 이사를 가게 되니 너와는 영영 이별을 해야 할 운명이야. 혹시 인연이 닿으면 이다음에 다시 만날 수가 있을까.”
그 말을 하던 장섭이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는데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너무도 갑작스런 장섭이의 말을 들은 점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자코 서 있기만 하다가그의 손을 잡았다.
나무숲속에서 참새들이 잠꼬대를 하는 듯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올라간 후에 점례는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 선생님이 되는 것이어서 졸업 후에는 서울 사범대학의 입학시험을 보기로 하고 열심히 공부를 하여 입시를 치렀지만 아깝게 낙방을 하고 말았다.
점례는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교직과목을 이수하게 되면 교원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 일반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러 겨우 합격을 하였다.
점례는 학교를 다니면서 예능 방면에도 소질이 있어 그 방면을 생각하였지만 그로서는 그 길로 나간다는 것이 부담이 많아서 일찍 포기를 하고 문예반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였다.
점례가 문예반에서 활동을 한 것은 1930년대에 실레마을 출신으로 농우 회와 부인회를 조직하고 이후 금병의숙이란 간이학교를 인가받아 학생들을 가르치신 소설가 김유정선생처럼 소설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입학을 한 점례는 마침 소설가로 활약하시는 교수님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입학식이 끝난 어느 날 교수님께 앞으로의 희망을 말하자 자기의 적성에 대해서 잘 생각을 한 뒤에 과목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 말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하니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글짓기를 잘 하여 대외행사에 뽑혀 다니면서 입상을 한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교내에서 글짓기 대회를 할 때에 자기보다 우수한 아이가 없었는데 예상외의 작품이 입상이 되고 점례는 입상도 하지를 못하게 되자 은근히 반감이 생겨서 그 다음부터는 글짓기 공부를 등한히 하였다.
어찌 보면 자신의 성격이 너무 남에게 지기를 싫어한 것이 자신의 소질까지 못 미더워하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를 하였지만 그런 일로 글짓기를 접은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 말씀을 들은 교수님은 작가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올바른 글을 쓸 수 있다면서 국문과를 선택한 것 자체가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작가에의 꿈을 돌출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니 앞으로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는 작품의 소재를 구상하고 찾기 위하여 어떤 때는 높은 산에도 올라가서 넓은 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저 마을의 집집에서는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을까를 상상해 보니 여러 가지 재미있거나 아니면 비극적인 사건들도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고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접촉해야 풀릴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신 우리 조상님들의 생활상이 어떠했으며 나라를 잃고 조국을 떠나야했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고통스런 삶을 파헤쳐보고도 싶었다.
그 외에도 새벽 일찍 기차를 조정하는 기사님들의 고달픈 삶의 현장을 취재하여 그들이 겪는 애환을 그려보고 싶기도 하는 등 소설쓰기에 재미를 붙이다 보니 어떤 때는 밤을 새워서 작품을 쓸 때가 많아서 학교에 빠지고 지각을 할 때가 풀풀하였다.
한여름이 다 가게 되자 점례는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고 산책도 곁들이면서 작품을 쓰고 몇 번이나 교정을 보고나서 마침내 12월이 되자 소설작품 한편을 모모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를 하였다.
작품을 낸 이후 점례는 기대를 잔뜩 하였지만 발표한 것을 보니 기대와는 달리 낙방을 하게 되어 실망을 하였다.
점례는 신춘문예 응모에 출품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를 않다가 한 반의 정 조준에게만은 하고 싶어서 어느 날 그를 다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자 정 조준은 언제부터 그런 재주를 가졌느냐면서 자주 만나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도 하였다.
점례는 이날 이후 정 조준과 의견을 나누다 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입이 무겁고 예상외로 자상하고 공적인 일에는 정확하게 일 처리를 하는 깔끔한 성격인 것 같았다.
점례야 말로 비록 시골에서 자라 대인관계는 그다지 넓지 못하지만 정 조준을 대하다 보니 그와 가까이 하게 되면 사회생활에 대한 보폭이 넓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저녁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하여 둘만이 만나는 것이 껄끄러워서 친구인 김 애자와 동행을 하였다.
이날은 정 조준이 사주는 저녁을 맛있게 먹었는데 애자는 별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유심이 정 조준의 행동을 주시하였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에는 시골로 놀러갈 만 한 곳이 있으면 함께 가자는 지안을 하였다.
시골이라는 말에 점례는 초등학교 다닐 때에 소풍을 가던 금병산이 떠올라서 그 다음 일요일 정 조준과 함께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인 실레마을로 향하였다.
혼잡한 기차 안에서 남자 친구와 함께 하니 자못 흥분이 되고 차창 밖으로 훌쩍훌쩍 지나치는 자연 풍광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신남역까지 내려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가운데 마침내 신남역에 내리니 고향이라는 곳이 포근하게 그를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리니 아버지는 장엘 가시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자 낯이 선 남자친구를 대동한 것이 썩 좋게는 받아드려지지 않는 인상이셨으니 갑작스럽게 남자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그러셨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두 사람은 금병산으로 향하였는데 이날은 휴일이라서 그런지 등산객들도 꽤 많은 편이었다.
정상에 오르는 동안 정 조준은 줄곧 점례의 손을 잡았는데 그의 따뜻한 감촉이 전해오니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어떤 쾌감이 전해지기도 하였다.
문득 오래전에 함안으로 이사를 간다는 염 장섭의 손을 잡고 걷던 생각이 떠올라 씁쓸하였다.
정상에 올라 시내를 바라보니 춘천의 진산이라고 하는 봉의산과 대룡산 화악산 삼악산으로 둘러싸인 춘천은 아늑한 분지로 이루어져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가 유순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정 조준은 자기도 김유정의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면서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김유정선생의 고향에 와서 전 점례라는 아가씨와 친하게 된 것이 자기로서는 무한한 영광이라고 하였다.
산을 내려오면서 정 조준은 지금까지 자기는 학교의 일을 책임을 맡아서 하는 것을 재미로 알았는데 앞으로는 전 점례의 파트너로서 좋은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날 기차에 오르면서 오늘의 산행이 정말 재미있었다면서 다음에는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나서자면서 점례의 손을 힘껏 잡았다.
며칠이 지난 후 그날은 점례가 정 조준에게 저녁을 대접한다고 하자 그는 저녁보다는 맥주한잔이 생각난다고 하였다.
정 조준은 이날 기분이 좋다면서 맥주를 세병이나 거푸 마시더니 나중에는 이말 저말을 하는 가운데 최근에 어떤 여자애하고도 몇 번 맥주를 마셨다는 말을 하였다.
그 소릴 듣게 된 점례는 그 여자애와 어떤 관계냐고 묻자 그는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이 말을 하였다.
“ 그런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소리에 점례는 술을 먹은 사람과의 대화자체가 시간 낭비일 것 같아서 그날은 그냥 헤어졌지만 그가 한 말에 신경이 쓰였다.
시간은 빨리 흘러 어느듯 학기 종강이 있던 날 여럿이 저녁을 먹고 헤어질 때에 점례는 정 조준을 붙잡고 궁금했던 말을 되살렸다.
“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언젠가 말하던 그 여자애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싶어.”
“ 여자하면 하도 많아서 누구에 대한 말을 하는 거여.”
정 조준이 무의식중에 뱉은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 소리를 들은 점례는 어이가 없었다.
" 어떤 여자라니? 그렇다면 지금 사귀는 여자애가 여러 명이나 있다는 말이야. “
“ 넌 뭘 그런 걸 다 묻냐.”
“ 뭐야.”
점례가 도전태세로 달려들자 정 조준은 한발 물러서는 것 같았다.
“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자꾸만 곤란하게 하지?”
“ 아무 잘못도 없다구.”
“ 그래 정말이야.”
“ 가만히 생각을 해보라구. 진실을 말한다면 엊그제 나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거든.”
“ 충격적이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데.”
“ 솔직하게 말을 한다면 여자애에 대해서 깊은 얘기는 할 수가 없다고 했단 말이야.”
“내가 그렇게 대답을 하였다구.”
“ ……………….”
정 조준은 점례가 끈질기게 다그치자 그는 붕어가 물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모양을 하더니 잠시 후에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말을 하는데 술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 이제 생각이 어렴풋이 나긴 하는데 사실을 말한다면 그 여자애와는 천상의 견우와 직녀 같은 사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그런 사이가 되고 말았어야.”
그 소리에 점례는 직감적으로 그 애와 깊은 관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언제부터 가까웠는데.”
“그러니까 점례를 알고 나서 얼마 안 된 어느 날 저녁에 슈퍼엘 갔다가 우연히 그 녀를 만나 저녁을 먹은 것이 계기가 되고 그 후에 자주 만났어. “
“그날 걔의 어디가 좋아서 반한거야. 솔직히 말해봐.”
“ 반하다니. 여자라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야.”
“ 그래도 한군데라도 반한 곳이 있을게 아니냐구, 얼굴에 반했다던가 아니면 다른 데라도…”
“ 고만둬 더 이상 묻지 마.”
“ 아니 난 더 묻고 싶은데.”
“ 고만해 두라니까. 그러네.”
“남자라는 사람들은 여자를 보고 어디 한군데라도 매력이 있게 되면 그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한다면서.”
“그렇게 얄궂게 나오니 정말 있는 대로 다 말을 할까.”
“ 그래 말 잘했다. 어디 말해 보라구.”
“이를테면 소나무 늘어진 숲속의 샘터가 너무 아름다워서 반했다고 할까.”
“ 뭐야. 참 기가 다 막히네. ”
“ 왜 그러는데. 그러니까 더 이상 유치하게 따지지 말라니까.”
‘그럼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모두 유치하다는 말이야.’
그 한마디에 점례의 감정은 있는 대로 폭발하였다. 더구나 그의 말을 종합해 볼 때에 그 녀는 김 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애자와 어느 날 다방에 들려서 차 한 잔을 나눌 때에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상한 질문을 하였기 때문이다.
“ 점례야. 벌써부터 너를 만나게 되면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었는데 마침 오늘 잘 만났다. 너 내가 묻는 말에 대답 좀 해 줄 수 있니.”
“ 네가 말을 하는데 대답을 하지 못할 게 뭐냐 .”
“아무 말이라도 괜찮다는 말이지 그래. 그러고 보니 역시 너는 내 편이야.” “ 사실은 말이야. 나 지금 어떤 남자를 무척 좋아하고 있거든. 솔직히 말하면 결혼까지 끌고 갈 참인데 글쎄 요즘 와서 보니 이 남자에게 또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하단 말이야. 난 지금 그를 내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렇게 된 사연을 말한다면 지난 여름방학이었지. 어느 날 그가 갑자기 날씨도 무더우니 시원한 바다로 해수욕을 가자는 거였어. 바닷가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는 그 말에 혹하여 따라나섰지 뭐냐. 그런데 대관령엘 올라서서 저 멀리 바다를 내려다보게 되니 와! 소리가 저절로 나고 가슴이 확 트이는가 하면 그동안에 너무 좁은 세계 속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그런 기분이었으니 그날 나를 데리고 간 그 남자가 너무도 듬직해 보이고 그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나 귀를 기울이게 되더라구. 일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강릉의 경포대라는 곳을 갔을 때는 또 어떻고. 작은 야산 위에 고풍스럽게 지어놓은 정자가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라 하였는데 강릉엘 오게 되면 누구나 한번쯤은 경포대의 아름다운 장관 속에 푹 파묻히게 된다는 거였어. 그날 경포대 난간에 앉아서 아늑하게 펼쳐진 경포호를 내다보면서 왜 진작 한번 와 보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더라니까. 더구나 맥주를 몇 잔 먹어서 그런지 기분은 하늘로 올라간 것 같기도 하여 그를 콱 끌어안았지 뭐냐.”
‘ 얘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여?’
“그러자 그는 한술 더 떠서 나를 끌어안고는 소나기처럼 키스를 퍼붓더란 말이지. 내 생전 처음으로 첫 키스를 당하는 순간 그를 밀치려고 하였는데 저 쪽에서 ”무슨 짓이야. “ 하는 큰 소리에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경포대를 내려 뛰었어. 그런데 그날 밤에 그는 나를 화분처럼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지 뭐냐. 생전 처음으로 남여의 신비 속으로 빠져들은 채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어. 이튿날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깬 상태에서 지난밤의 일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가볍게 몸을 내주었다는 자괴감에 빠지게 되자 그의 낯짝이 보기 싫더라니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순정의 몸을 원상태로 복구할 수도 없다는 생각에서 그를 미워하지 말자고 마음을 달래고 말았지. 바다에서 돌아온 후 나는 마음을 추수려 그를 아주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도장까지 찍으려 하였는데 내 참 ! 글쎄 근래에 와서 이 사람이 나 모르는 사이에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다는 말이 들리는 것이여. 그래서 면상을 손가락으로 북 긋고 싶었지만 확실한 근거도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여. 그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너에게 물어보면 혹시 짐작이리도 할 것 같아서 만나려던 참이었지.”
“ 왜 내가 그 사이에 끼어야 되는데.”
“ 아니 그게 아니라 너는 그 과의 모범생인데가 인기가 많으니까 그런데 대해서는 나보다 한수 위 일 것 같아서 지.”
‘ 얘가 왜 이리 품위 손상시키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거여.’
“ 내 얘기를 더 들어봐. 그의 말을 들어보면 술을 먹고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남자란 여자 하나 가지고는 만족을 할 수가 없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정말 남자란 그런 것인지 마음이 몹시 상하는 거여. 이제 말이지만 남자라는 사람 정말 믿지 못할 존재인 것 같은데 네가 내 입장이 된다면 어떻겠니.”
점례는 애자의 너무도 황당한 것 같은 말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놀랐는데 그 동안에 애자는 지금까지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기야 여자라는 게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더구나 남자를 사귀는 문제만 해도 같은 친구라도 좀처럼 얘기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은 자칫 발설을 했다가 그것이 다른 친구들에게 이상한 소문으로 번질 우려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점례가 생각해 보니 그가 말하는 내용의 골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것처럼 낯간지러운 말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어 정말 듣기가 거북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남자가 누구란 말인가. 경기도 그것도 가평의 북면 시골구석에서 자란 애자가 처음 대학에 합격 여부를 보기위해 왔을 때만 해도 점례 보다도 더 시골티가 풀풀 나고 있어 몇 번 그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도시의 이모저모를 알게 하였다.
그런 후에도 별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연애하는 말까지 스스럼없이 할 정도가 되었으니 사람이란 그렇게 변화를 빠르게 받아드린다는 말인가.
“ 애자야 너 그러고 보니 많이 달라졌구나. 이참에 그 남자가 누구라는 것을 말해줄 수 없니.”
“ 점례야. 이제 말이지만 너를 알게 된 후에 나는 하루빨리 시골티를 벗어야한다는 각오를 하고 매일 밤 명동 거리를 쏘다니면서 도회지 여인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세련미에 대해서 연구를 하였지 뭐냐. 그러는 과정에서 한 남자를 친하게 되었는데 그가 우리와 가까이 있다면 네가 놀랄 것 같아서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겠다.”
애자의 말을 들은 점례는 그의 달변에 놀라기도 하였지만 그 남자가 우리 주변 가까이 있다는 말에 더욱 의심이 갔다.
‘그렇다면 그 남자가 누구란 말인가. 혹시 정 조준이 아닐까.’
점례는 몇 명의 남학생의 이름을 열거해 보았는데 그 중에서 여자애들에게 가장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을 대라고 한다면 매사에 꼼꼼하고 과의 화목에 대해서 조정을 잘하는 정 조준을 들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솔직한 말로 점례는 이 정 조준을 일찌감치 자기와 가장 가까운 친구로 아니 자기의 신랑감으로 점치고 있는 중이다.
정 조준 다음에 씩씩한 남자를 든다면 농구를 잘 한다는 꺽다리 윤 정호로 걔는 키는 크지만 친구들의 심부름을 맡아서 할 정도로 자상하다. 팔다리가 길어서 친구들의 무거운 짐 운반은 자기에게 맡겨달라지만 여자애들의 관심은 끌지 못했다.
세 번째로 여자들이 핸섬하다고 하는 당진에서 올라온 고 균등은 약골이면서도 야외활동을
할 때에 자진해서 주방의 설거지를 맡아서 하지만 여자애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네 번째의 고 단구는 키는 몽탁하고 못난이이긴 하지만 노래를 잘 불러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각종 콩쿠르에서 입상을 한 바도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단점이 한 가지 있으니 잠을 잘 때에 코를 곤다는 소문으로 그의 인기는 바닥이다.
그러고 보면 여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은 바로 정 조준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는 점례 외에는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을 귀가 따갑게 하였다.
점례는 정 조준 말고 다른 애들에 대해서 애자와의 관계를 아무리 좋게 엮어보려 해도 걔들은 하나같이 애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애자는 처음에 남자들과 같이 행동할 때에 보면 공연히 내외를 하는 척 하면서도 그들이 다가서려 하면 응치를 빼면서 나는 남자들이 무서워서 싫다면서 도망을 하였다.
그런 애자를 사랑할 만 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하루는 점례가 정 조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던 것이다.
“ 애자라는 애를 잘 알고 있지. 그렇지.”
아닌 밤중에 홍두께 격으로 일격을 가하자 정 조준은 점례의 눈치를 잠시 살피더니 마지못해서 한마디를 하는데 딱 한번 하도 바다 구경을 시켜달라고 졸라서 같이 갔다가 당일로 돌아온 적은 있다고 하였다.
정 조준의 말을 들은 점례는 속으로 정 조준이 애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 맞는다고 느껴졌지만 증거가 없으니 의심을 할 수는 없었다.
점례는 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우선은 직장을 구하고자 교수님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막상 현실에 부딪쳐 보니 가는 곳마다 문턱이 높아서 직장을 구한다는 일은 쉽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에 친척 아저씨네 가 남대문에서 여자들의 속옷 장사를 하시는데 와서 일을 해보라고 하여 거기를 다니기로 하였다.
출근시간은 대개 아침 10시경이라서 그는 늦은 조반을 먹고는 출근을 하였는데 옷을 파는 일이 하루 종일 앉아 있거나 서서 손님을 맞는다는 것이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흥정을 하다가는 뒤돌아 가는가 하면 금방 물건을 살 것처럼 하다가도 옷에 대해서 타박을 하고는 값을 깎아달라고 하여 흥정이 되지 않을 때는 속이 상하기도 하였다. 그렇긴 하지만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그분들의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오시는 분이 다는 아니지만 개중에는 자리에 앉으시면 아주머니와 대담을 하시는데 옷을 사시러 왔는지 신세타령을 하시러 왔는지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말이 길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점례는 그러한 말씀들을 곁들여 듣다가 나중에는 흥미를 갖게 되었으니 오시는 분 대부분이 어렵게 사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것이 작가에게는 하나의 소재걸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다음부터는 물건을 파는데 정신을 쏟기 보다는 그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더 재미가 있었다,
그런 날이면 점례는 다른 날보다도 일찍 가게 문을 닫았으면 하였지만 아주머니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정시에 퇴근을 시키셨으니 그 시간이 거의 11시가 될 무렵이었다.
그러다가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으니 한 달에 2편 정도의 단편을 쓰기로 하고 한 소재를 얻게 되면 시간이 날 때마다 구상한 것을 메모하였다가 작품을 쓰게 되니 나중에는 요령까지 생겨서 작품을 쓰는 것이 점차 재미가 나기 시작을 하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나 하다가 보면 항상 좋은 일만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열심히 아주머니를 도와서 가게를 보던 중에 뜻밖에도 남대문 시장에 밤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상가를 모두 태우는 바람에 점례는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직장이라고 다니던 곳을 고만두자 다시 몇 군데를 알아보던 중에 어떤 잡지사엘 들리게 되자 1년이 지난 후에 자리가 하나 날것이니 그 때에 연락을 주면 좋겠다는 답을 주는 것이어서 일단은 그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였다.
점례는 당분간은 그동안에 제대로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서 연락을 하다 보니 여러 친구들이 쌍수를 들어서 환영하였다.
전 점례는 친구가 많은 중에서도 늘 가까이 지나는 친구는 김 애자였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입학시험 날 우연히 번호가 앞뒤라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인연이 되고 막상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은 김 애자를 만나 함께 갔는데 둘이 다 합격을 하는 바람에 기쁜 나머지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해서 찾아간 곳은 중국집이었다.
그날이 모처럼 근방의 학교들이 다 같이 입시 발표를 하는 날이라서 그런지 식당마다 만원이었다.
둘은 홀의 한쪽에 들어가서 앉게 되었는데 그 한쪽에는 남학생 두 명이 이미 짜장면을 시켜서 먹고 있다가 혹시 합격자 발표를 보러 왔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대뜸 무슨 과냐고 하여 국문과라고 하자 그들도 같은 과라면서 어차피 한 과의 학생이 되었으니 점심 후에 어디 가서 이야기나 나누자고 하였다.
이날 네 사람은 남산타워로 올라가서 차 한 잔을 나누었는데 키가 크고 미남형의 남학생의 이름은 정 조준이고 또 한 학생은 키가 작은데 이름은 고 단구라고 하였다.
이날 이후 점례와 애자는 자취방을 각각 따로 얻어서 생활하면서도 번갈아 집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게 되니 둘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지는 사이가 되긴 하였지만 둘 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보태야 하였기 때문에 자유로운 시간을 갖기가 쉽지를 않았다.
그런데 2학년에 오르게 되자 애자는 국문과에서 영문과로 전과를 하는 바람에 그 다음부터의 두 사람의 생활은 소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를 지나다가 보니 그렇게 말도 많고 살갑게 대하던 애자의 행동이 이상하리만큼고민에 쌓여 있는 것 같아서 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별것이 아니라면서 점례가 궁금해 하는데 대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때 점례는 정 조준과 몇 번 데이트를 한 바가 있었지만 그 말을 애자에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저냥 지나고 있었다.
정 조준과는 그 후에도 몇 번 만나서 학과 공부에 대한 토론도 하고 어떤 때는 저녁도 먹으면서 인생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점례의 성격은 좀은 꼼꼼하고 까다롭다고 할까 아무튼 사람을 함부로 사귀는 성격은 아니었다.
문득 점례가 중학교 다닐 때에 언니네 옆집의 살고 있던 아줌마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 아줌마의 집에서는 사흘도리로 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늘상 들리는 소리는 화가 잔뜩 난 아줌마가 남편에게 하던 푸념이었다.
“ 남자가 그만큼 바람을 피웠으면 되었지 여기서 무얼 더 원하는 거예요. 아이들은 저렇게 자라는데 아빠의 체면도 살리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술통에 빠져 있으니 누가 그런 사람과 살림을 살아준대요. 나는 조금도 미련이 없으니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남자가 되어서 여자 한 둘쯤 사귀는 것을 가지고 웬 말이 많으냐구요. 나 더 이상 그런 꼴을 보고 싶지도 않고 그런 당신과 대면하고 싶지도 않으니 집을 나갈 테면 얼마든지 나가라구요.”
그 후에 이야기를 들으니 그 아저씨는 홀연히 집을 나가서 다시는 연락이 없다고 하였다.
점례는 자기와 정 조준이 만약 결혼을 하게 되면 어찌 될까를 생각하다가 그 아줌마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남자가 여자 한둘쯤 사귀는 것이 보통이라는 사고(思考)가 남자들에게 팽배해 있다면 정 조준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어 있지 않을까.’
참으로 오래간만에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오다 보니 산마다 붉게 물드는 가을단풍이 유리알 같은 강물 속에 어리어 더욱 아름다웠다.
金 斗 洙 19. 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