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윤(金相潤)[1897~1927]은 아버지 김태영(金泰永)과 어머니 밀양박씨 박인영(朴仁永)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 9월 12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김옥(金玉, 金鈺)·김억(金億)·김옥산·김진정
호
초산(楚山)
본관
광주 김씨[1]
출생
1897년 9월 12일
경상남도 밀양군 상남면 기산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
본적
경상남도 밀양군 하남면 대사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대사리)[2]
사망
1927년 10월 19일[3] (향년 30세)
중화민국 푸젠성 취안저우시 설봉사[4]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108실-183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만주 지린 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조직했다. 1920년 2월 상하이에서 폭탄을 구입하여 국내로 반입한 뒤 밀양경찰서 투탄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도피했다.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활동하던 중 1922년 3월 이종암 등과 다나카[田中] 대장의 처단을 결행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10월 19일 상하이에서 사인불명으로 사망했다. 중국 푸젠 성[福建省]에 그의 묘비가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2005년 6월 11일, 출생지인 상남면 기산리 마을 입구에 '독립투사 초산 김상윤 선생 의열투쟁기념비'를 세우고 1995년 당시 설봉사에서 가져온 흙을 기념비 밑에 묻었다. 그리고 2015년 3월 28일 설봉사를 다시 찾아 후손들이 '초산 김상윤 선생 기적비'를 건립하였다.
♤2020년 6월 17일에는 당초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에 안장되어 있던 부인 여주 이씨 이동연(李東連, 1892. 8. 20 ~ 1949. 7. 5)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 108실 183호에 이장되었고, 이때 김상윤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었다
사찰의 모든 기록과 기물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당시 주지스님의 증언이 있어 결국 설봉사의 흙 한 줌만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2005년 6월 11일, 출생지인 상남면 기산리 마을 입구에 '독립투사 초산 김상윤 선생 의열투쟁기념비'를 세우고 1995년 당시 설봉사에서 가져온 흙을 기념비 밑에 묻었다. 그리고 2015년 3월 28일 설봉사를 다시 찾아 후손들이 '초산 김상윤 선생 기적비'를 건립하였다.
2020년 6월 17일에는 당초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에 안장되어 있던 부인 여주 이씨 이동연(李東連, 1892. 8. 20 ~ 1949. 7. 5)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 108실 183호에 이장되었고, 이때 김상윤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었다
[밀양=뉴시스] 상남면 주민자치회가 상남면 기산리 의열투쟁기념비에서 맥문동 심기를 하고 있다.
김호창 회장은 "김상윤 선생 기념비가 있는 기산 숲을 가꿔 주민의 쉼터를 조성하고 김상윤 선생의 활동 사항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명기 면장은 "적극적인 참여로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주민자치회에 감사드린다"며 "많은 독립운동가 중 알려지지 않은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사업을 발굴한 주민자치회의 활동에 협력하고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