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이광수 3-6 1932
3-5부에 이어
[하우 두 유 두 닥터 리이?]
하고 산월은 막 일어나려는 이 박사의 앞에 손을 내어민다. 이 박사는 낯이 빨개지며 하릴없이 산월의 손을 잡는다. 산월은 유창한 영어로,
[아임 베리 소리, 여러 번 편지 주신 걸 답장을 못 드려서 참 미안합니다. 또 세 번이나 찾아오신 것을 하인들이 몰라 뵈서 미안해요. 용서하세요.]
하고는 쩔쩔매는 이 박사를 유쾌한 듯이 정면으로, 웃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양반들은 당신 매씨세요?]
하고 그것도 영어로 시스터스라는 시자에 가장 힘 있는 악센트를 주어 말한 뒤에, 그 두 여자를 향하여,
[용서하세요. 난 백산 월이라는 기생입니다. 노 이박사의 가르침을 받지요.]
하고 악수를 청한다. 두 여자들도 부득이 하는 듯이 손을 내민다.
이 박사는 두 손을 마주 비비고 섰다가 겨우 흩어진 부스러기 용기를 주워 모아서,
[난 댁에 찾아간 일은 없는데, 혹시 하인들이 잘못 본 게지요.]
하고 어색한 변명을 한다.
[하하.]
하고 이번에는 성악으로 닦은 분명하고도 높은 소리로,
[제가 안 할 말씀을 했습니까. 그러면 용서하세요.]
하고 그 담에는 영어로,
[나는 이 부인네들이 매씨들이신 줄만 알았지요, 친구시거나. 이 박사께서는 심순례 씨와 약혼하셨다는 말씀을 들은 지 오래 길래, 호호호.]
하고 웃었다.
[아니지요. 심순례 씨와 일시 교제는 있었으나 약혼했단 말은 허전이구요, 또 산월 씨 댁에 찾아갔다는 것도 아마 댁 하인들이 잘못 본 게지요.]
하고 극히 엄중한 태도로 말을 한다.
[그런지도 모르지요. 제가 창틈으로 내다보니까 이 박사 같으시고, 또 음성이 이 박사 같으시고, 허기는 명함을 줍시사 하니깐 명함은 아니 내시드구면요. 그러니깐 이 박사와 똑같이 생긴 다른 양반이시든 게지. 하하하, 용서하세요.]
하고 산월은 고개를 흔들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에 여자들은 다 달아나고 말고 이박사도 산월에게 잠깐 서양식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나가 버리고 만다.
산월은 이박사가 스러진 뒤를 향하고 또 한 번 웃고 나서는 숭의 곁으로 온다.
[어때요, 내가 언 엑설런트 액트 리스(한 빼난 여배우)지요.]
하고는 위스키를 단숨에 쭉 들이켜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흐흐흐흐, 하하하하.]
하고 우스워서 죽으려고 든다.
숭도 따라서 웃었다. 숭이 웃으면 산월은 더욱 우스워서 어깨와 등을 들먹거린다. 산월은 실컷 웃고 나서,
[약주 잡수세요. 많이 말고, 꼭 석 잔만 잡수세요.]
하고 산월은 잔을 들어 숭을 주며,
[한잔 잡수셔야 제가 할 말을 하지, 그렇게 점잖게 하시면 무서워요. 자, 잡수세요.]
하고 권한다.
[술은 안 먹을 랍니다.]
하고 숭은 술잔을 받아 한편으로 밀어 놓으며,
[나는 살여울 사람들더러 술 먹지 말라고 권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 이야요. 술은 아니 먹더라도 하시는 말씀은 다 듣지요.]
하고 준절한 거절을 눅이기 위하여 빙긋 웃어 보인다.
[한 잔이야 머. 권하던 제가 부끄럽지요.]
하고 산월이가 다시 잔을 잡으려는 것을, 숭은 손을 들어 산월의 팔을 막으며,
[아니오! 권하시지 마세요. 내가 여러 번 호의를 거절하기는 참 거북한 일이니, 내게 호의를 가지시거든 나를 거북하게 마시오.]
하고 술잔을 들어서 산월의 손이 닿지 아니할 곳에 놓는다. 산월은 잠깐 머쓱하였으나 곧 평상의 기분을 회복해 가지고,
[제가 어떻게 이 차를 탔는지 아세요?]
하는 것은 조금도 농담이 아니었다.
[……]
숭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아이구 벌써 수색이지?]
하고 밖을 내다본다. 차는 정거하였다. 과연 ‘스이쇼쿠(수색)’ 하는 역부의 소리가 들렸다.
[수색이면 어떤가, 나는 영감 가시는 정거장까지라도 따라갈걸.]
하고 산월은,
[오늘 저녁에 어떤 손님에게 부름을 받았지요. 그 손님이라는 이는 이름을 말씀하면 아마 아시겠지마는 이름은 말씀할 필요가 없구요― 그 손님이 한 오륙 일 연해서 나를 불러 주셨지요. 그러자니깐 돈도 꽤 많이 쓰고요. 그리고는 자꾸 우리 집에를 온다는 것을 별의별 핑계를 다 해서 모면했답니다. 내가 기생 노릇은 하지마는 내 집에 남자가 와서 자리에 누운 이는 선생님밖에는 없으십니다, 빌리브 미(나를 믿으세요). 내일 일은 모르지요. 그러나 오늘까지는 그렇게 해왔어요. 그런데 말야요, 그 손님이 오늘은 꼭 어디를 가자고 조른단 말씀야요. 배천 온천으로 가자는 둥, 평양을 가자는 둥, 오룡배를 가자는 둥, 내가 하얼빈 구경을 했으면 했더니 그럼 하얼빈을 가자는 둥, 만리장성을 보았으면 했더니 그러면 산해관, 열하로 두루 돌아 구경을 하자는 둥 아주 열심이야요. 나이는 한 오십 된 인데, 나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러는 것을 겨우 달래서 요 다음 기회로 밀고 정거장까지 전송을 나왔지요. 했더니 이거를 주는구려.”
하고 왼손 무명지에 번쩍번쩍하는 금강석 반지를 보이며,
“이것이 인게이지먼트 링(약혼반지)이라고요, 하하하하. 그리고 제가 먼저 가서 좋은 데를 자리를 잡고 오라고 전보를 하거든 곧 양복을 지어 입고 오라고 이거를 또 주겠지요. 참, 난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도 안 보았어.]
하고 핸드백에서 양봉투 하나를 꺼낸다. 그 봉투는 ○○여관의 용지였다. 겉봉에는,
‘白山月 君.’
이라고 썼다. 글씨도 상당하다. 산월은 그 봉투를 떼었다. 거기서는 소절수 한 장이 나왔다.
‘金壹仟圓也.’
라고 액면에 씌어 있다. 그리고 ‘金○○’라고 서명이 있고 네모난 도장이 찍혀 있다. 이름자는 산월이가 얼른 손으로 가리었다.
산월은 그 소절수를 보고 혀끝을 한번 내밀더니 그리 중대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것을 접어 봉투에 넣어서 휴지 모양으로 그냥 테이블 위에 밀어 놓고 다시 웃으며,
[그래 플랫폼에 서서 차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노라니깐 웬 계집애, 선생님 따라오던 계집애가 눈에 뜨인단 말씀이지요. 그래 보니깐 허선생님이란 말씀이야요. 그러니 그 손님을 내버리고 따라갈 수도 없고, 눈으로만 혹시 전송을 나오셨나, 차를 타시나 하고 그것만 바라보았에요. 허더니 차를 타신단 말씀야요. 일등 차에서 선생님 타시던 찻간까지가 한참 아냐요?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어요. 그저 모자 안 쓰신 양반하고 분홍치마 입은 색시하고만 잃어버리지 아니하려고 애를 썼습니다그려. 그랬더니 그 손님이 어디를 그쪽만 보느냐 그러겠지요. 아냐요, 사람 구경해요, 그랬지요. 그래 퍽 섭섭해 하든 걸요. 그러자 선생님이 차를 타시는 것을 보았길래 나도 따라 타리라 하고 결심을 하고서, 그 손님 비위를 좀 맞추어 주고는 차가 떠나기를 기다려서 도비노리(뛰어오름)를 했답니다. 역부가 야단을 하지마는 이래 보여도 나도 테니스도 하고 바스켓볼도 한 솜씨랍니다. 이렇게 제가 영감을― 아니 선생님을 따라왔답니다.]
하고는 추연한 기색을 보이며 휘유 한숨을 내어쉰다.
숭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산월이가 저를 따라서 이 차를 탔다는 것이 참말 같지 아니하였다.
[차표는 어떡허고?]
하고 숭은 의심을 품으면서 물었다.
[안 샀어. 살 새가 있나요?]
하고 산월은 그제야 생각이 나는 듯이 웃었다.
[그럼, 부산서부터 오는 찻세를 물어야겠네. 그까짓 게 대수요?]
하고 산월은 숭이가 아니 먹고 남겨 둔 술잔을 당기어서 마신다.
[그럼, 어디까지 가시려우?]
하고 숭은 좀 걱정이 된다는 듯이 묻는다.
[귀찮아하시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고, 귀애 주시면 선생님 가시는 데까지 따라 가구. 귀찮으시지? 기생년허구 같이 다닌다고 체면 손상되시지? 그럼 어떻게 해요? 불길같이 일어나는 사랑을 죽입니까. 사랑을 죽이거나 몸을 죽이거나, 둘 중에 하나를 죽인다면 나는 몸을 죽일 테야요.]
하고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조선 사람의 골격과 상모를 가진 양복 입은 사람 셋이 들어와서 산월이 쪽을 바라본다.
[우리 나가요.]
하고 산월이가 먼저 일어선다.
숭도 따라 일어나서 새로 들어온 패들에게 등을 향하고 보이를 불러 셈을 치르고 일 이등 차실이 있는 방향으로 나갔다. 숭이나 산월이나 새로 들어온 사람들과 정면으로 마주 대하기를 원치 아니한 것이었다.
식당 문을 열고나서니 찬바람이 더운 낯에 불었다. 더 가야 이등실이요, 다음 일등이어서 거기 서서 다음 정거장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숭은 차벽에 기대어서 무심히 허공을 바라보고 섰다. 밖에서 여전히 눈이 오는 모양이어서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것이 오직 흰빛뿐이었다.
산월은 비틀비틀 흔들리는 몸으로 억지로 평형을 잡으려다가 불의에 몸이 쏠리는 듯이 숭의 두 어깨에 손을 대고 숭의 가슴에 제 가슴을 꼭 마주 대면서 술 냄새가 나는 입김으로,
[선생님 저를 한번 안아 주세요. 그리고 꼭 한 번만 키스를 해주세요. 부인께 대해서는 죄인 줄 알지마는, 저는 기생생활 몇 달에 아주 열정에 대한 억제를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학생시대부터 잘 알아요. 정선이 집에 놀러 댕길 때부터 잘 알아요. 제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청해서 한 번 키스를 주셨다 하더라도 정선이는― 부인은 용서할 것입니다. 음탕한 기생 년이라고만 생각지 마세요, 네? 네.]
하고 두 팔을 숭의 목으로 끌어올려서 몸을 숭의 목에 단다.
숭은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숭의 지금 생각에는 아내도 없고 여자도 없었다. 영원한 혼잣몸으로 살여울의 농부가 되는 것밖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산월이가 걱정하는 것과 같이 숭은 산월을 음탕한 기생이라고도, 밉다고도 생각지 아니하였다. 도리어 숭은 산월에게서, 정선에게서는 보지 못하던 무슨 깊은 것이 있는 것까지도 생각하였다. 그리고 평생에 어떤 여성에게서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숭으로서는, 평생에 접한 유일한 여성인 아내로부터 학대를 받는 숭으로서는 산월의 이 헌신적이요 열정적인 사랑이 고맙고 기쁘기까지도 하였다. 그러나 숭은 이제 다시 어느 여자에게 장가를 들거나 어느 여자를 사랑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내까지도 떠나고 온 사람입니다. 나는 일생에 다시 혼인도 아니 하고 사랑도 아니 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하고 숭은 고개를 들어서 천장을 향하였다.
[부인과 떠나셔요?]
하고 산월은 놀라는 듯이 숭의 몸에서 떨어졌다.
[네.]
하고 숭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산월은 그러나 다시 숭에게 매어 달렸다.
[한 번만, 한 번만입니다. 네, 꼭 한 번만 저를 안아 주세요. 그리고 꼭 한 번만 키스를 하여 주세요.]
하고 산월은 마치 바스켓볼에서 하는 자세로 숭에게 뛰어올라서 숭의 입을 맞추었다.
이때에 날카로운 고동 소리가 들렸다. 긴 고동 뒤에는 작은 고동이 몇 마디 연해 들리고 차는 급자기 정거하려고 애쓰는 격렬한 진동을 하였다. 산월은 마치 무서운 소리를 들은 어린애 모양으로 숭의 조끼 가슴에 낯을 파묻고 숭에게 매어 달렸다. 차는 정거하였다.
숭은 가까스로 산월을 떼고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온통 눈이다. 바른손 편을 보니 거기는 산 옆을 깎은 비탈이다. 소나무들이 눈을 이고 있다.
승무원들이 등을 들고 기관차 편에서 뛰어온다.
[무슨 사고요?]
하고 숭은 차에 매어달리면서 물었다.
[레키시데스(치여 죽었소).]
한마디를 던지고 승무원은 달아났다.
[레키시?]
하고 숭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산월이도 따라 내렸다. 다른 승객들도 많이 내렸다. 눈은 퍼붓는다.
[도코데스(어디쯤이오)?]
하고 숭은 뛰어가는 어떤 승무원에게 물었다.
[스구 소코데스(바로 저기요). 마다 신데와 이나이요우데스(아직 죽지는 아니한 모양이오).]
하고 그도 뒤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숭은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는 것을 깨달으면서 기관차를 향하고 뛰어갔다. 기관차 앞에서 한 이 미터 되는 눈 위에 가로누운 시체 하나가 있고, 선로 눈 위에는 붉은 피가 점점이, 줄기줄기 무늬를 놓았다. 숭이 기관차 머리를 지나서 시체 곁으로 가려는 것을 뒤로서 어떤 승무원이 붙들면서,
[잇자 이케마센(가지 말아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숭은 멈칫 섰다.
기관차의 이맛불빛에 그 시체는 양복 외투를 입은 여자인 것이 숭에게 보였다. 구두 끝의 까만 에나멜이 불빛에 반짝거렸다.
숭은 까닭 없이 흥분되어 맘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변호사라는 직업의식으로 이 사건의 법률적 의미를 알아보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에그머니!]
하고 산월도 따라와서 숭의 팔을 붙들고 섰다.
열차장인 전무차장이 좀 점잖은 걸음으로 걸어서 시체 곁으로 가서 경찰의 임무를 맡은 사람이라는 태도로 위선 시체의 주위를 둘러보고, 피가 흐르는 시체의 머리를 들어 보고, 또 의사가 하는 모양으로 시체의 가슴을 헤치고 거기 귀를 대어보고, 그리고는 손을 들어서 다른 승무원을 불렀다.
다른 승무원들은 장관의 명을 받은 군졸 모양으로 시체 곁으로 달려가서 열차장의 명대로 그 시체를 안아 들고 숭이가 섰는 앞으로 왔다.
[에!]
하고 숭은 승무원의 팔에 안기어 힘없이 목을 늘이고 있는 시체의 얼굴을 보고 소리를 쳤다.
[정선이야!]
하고 산월이도 소리를 쳤다.
[이 사람 아시오?]
하고 전무차장이 숭의 말을 듣고 숭을 돌아보면서 발을 멈추고 묻는다.
[내 아내요!]
하고 숭은 시체의 뒤를 따라 섰다.
‘내 아내요!’ 하는 말에 전무차장뿐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 숭과 그 곁에 따르는 산월을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다.
정선의 시신을 차장실로 올리려는 것을 숭은 전무차장과 교섭하여 아직 생명이 붙었으니 시신이 아니라는 조건으로 일등 침대 하나를 얻기로 하여 그리로 정선을 옮겨 뉘었다. 개성에서 내린다는 조건이었다. 차는 약 십 분 임시 정거로 그 자리를 떠나서 여전히 달리기 시작했다.
숭은 열차 장에게 응급구호 재료를 얻어 우선 강심제를 주사하고 머리와 다리의 피 흐르는 곳을 가제와 붕대로 싸매고, 그리고 산월을 맡겨 놓고는 차실로 나아가 의사는 없는가 하고 물었다. 이등 이상을 탄 사람들은 다들 침대로 들어가고 남아 있는 사람이 모두 몇이 안 되는 중에 의사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삼등실에서 의사라고 자칭하는 사람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의사가 가지는 제구가 없었다. 숭은 의사라는 사람을 데리고 정선의 침실로 왔다. 그 의사라는 사람은 맥을 만져 보고 귀로 가슴을 들어 보고,
[아직 생명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고 가버렸다.
차가 개성에 닿은 것은 새로 한시쯤, 숭은 정선을 외과 간호부가 수술 받은 환자를 안는 모양으로 안고 내렸다. 뒤에는 산월과 유월이가 따랐다.
정선은 숭의 품에 안겨 남성병원으로 옮기었다. 먼저 전보를 받은 병원에서는 병실, 수술실, 의사, 간호부가 다 준비되어 정선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선이는 우선 수술대 위에 누임이 되어 강심제의 주사와 외과적 치료를 받았다. 가장 중상은 머리와 다리였다. 머리에는 왼편 귀로부터 정수리를 향하여 길이 육 센티미터 깊이 골막에 달하는 상처가 있고, 오른편 무릎은 탈구가 되는 동시에 슬개골이 깨어졌고, 그 밖에도 어깨와 허리에 피하 일혈이 있고 찰과상도 있었다.
정선이가 치료를 받는 동안 숭과 산월과 유월은 수술실 문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도무지 정선은 한마디도 소리를 발하지 아니하였다. 정선이가 병실로 옮아온 뒤에 김의사는 숭의 묻는 말에 대하여,
[오늘 밤을 지내보아야 알겠습니다. 뇌진탕이 되셨으니까.]
하고 의사에게 특유한 무신경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간호부에게 몇 가지 명령을 하고 나갔다.
숭은 따라가서 김 의사를 붙들고 밤 동안을 병원에 있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제가 몸소 환자 곁에서 간호하는 허락도 얻었다. 벌써 새로 세시, 정선은 마치 아무 시름없이 자는 사람 모양으로 꼼짝 아니 하고 잤다. 이따금 전신이 약간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간호부는 한 시간에 한 번씩 들어와 맥을 보고 주사를 놓았다.
숭은 침대 곁에 앉아서 줄곧 정선의 맥을 짚고 있었다. 가끔 세기도 하였다. 어떤 때에는 맥이 일흔쯤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일백 이삼십까지 다시 올라가기도 하였다. 몸은 약간 더우나 열이 오르는 모양은 없었다. 맥도 점점 제자리를 잡아서 새벽 다섯 시쯤에는 아흔과 백 사이에 있었다. 옆방에 있게 한 산월과 유월도 잠을 못 이루고 한 시간 두세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숭은 붕대로 감긴 정선의 머리를 바라보며 가끔 눈물을 흘렸다. 이따금 정선의 핏기 없는 입술이 말이나 하려는 듯이 전동할 때에는,
[여보, 여보, 내요.]
하고 불러 보기도 하였다. 이따금 정선의 눈이 뜨일 듯 뜨일 듯 할 때에는 숭은,
[정선이, 여보.]
하고 목이 메었다.
그러나 해가 돋도록 정선은 눈을 뜨지 아니하였다.
아침 아홉 시. 눈은 개고 유난히 밝은 아침볕이 병실 창으로 비치어 들어왔다. 정선의 창백하던 얼굴은 점점 올라가는 체온으로, 또 점점 회복되는 피로 볼그레한 빛을 띠게 된다. 강심제 주사는 그치고 링게르 주사를 하였다. 의사는 삼십 팔도쯤 되는 열은 염려 없다고 숭을 위로하였다. 애초에는 웬 모자도 없는 사내가, 차에 치여 죽어 가는 시체를 끌고 웬 기생 같은 여자를 데리고 온 숭은 결코 이 병원에서 환영받을 손님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입원 수속을 할 때에 환자의 이름은 윤정선, 주소는 경성부 정동, 남편은 허숭, 직업은 변호사라고 쓴 데서 비로소 부랑자 아닌 줄을 알았고, 또 숭의 행동거지가 점잖은 것을 보고 비로소 의사 이하로 다소 안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웬일이냐, 정선이가 차에 치인 이유를 묻는 이는 없었다.
조선에 이십 몇 년이나 있었다는 아이비 부인이라는 늙은 간호부가 정선의 병실에 들어와서 비로소 정선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비 부인이 세브란스 병원에 있을 때에, 정선이가 보통과에 다닐 때부터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개성에 온 뒤에도 정선이가 학교에 있는 동안 아이비 부인은 서울에만 가면, 될 수만 있으면 정선을 찾아보았다. 남편도 없고 자식들은 다 조국인 미국으로 유학 보낸 아이비 부인은 이 병원에서 간호원장으로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한 병자로 정선을 보다가, 마침내 그것이 정선인 것을 발견하고,
[정선이―]
하고 놀라며 숭을 돌아보았다.
[이이, 윤정선이 아니오? 내가 잘못 알았습니까.]
하였다.
[네, 윤정선입니다.]
하고 숭은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당신이 윤정선이 남편 되십니까.]
하고 아이비 부인은 정선과 숭을 번갈아 보며 묻는다.
[네, 내가 허숭입니다.]
[허변호사?]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부인, 이거 웬일입니까.]
하고 대단히 놀라고 근심된 모양으로 물었다. 숭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삼각관계라 하는 것이 누구나 이 광경을 본 사람이면 나는 생각이었다. 어젯밤 차에서 그러하였고 병원에서도 그러하였다. 산월이가 들어오는 것을 본 아이비 부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마땅치 못하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산월도 숭이가 불편하게 생각할 것을 짐작하고 곧 병원에서 떠나 버렸다. 떠날 때에도 맘에는 한량없는 생각을 가졌건마는 아무 말도 아니 하고 간다는 인사만 하고 가버렸다.
오정 때나 되어서 정선은 의식을 회복하였다. 정선의 눈이 첫 번으로 뜨일 때에 그 눈에 든 것은 물론 숭이었다. 정선의 눈은 숭을 보고 놀라는 듯하였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오는 동시에 고통도 더하여 정선은 낯을 약간 찡그렸다. 그러다가 지금 본 것이 과연 남편인가 하고 또다시 눈을 떴다.
[내요, 내요.]
하고 숭은 정선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정선은 알아보았다는 듯이 입을 벌렸으나 소리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리고는 또 고통을 못 이기어 양미간을 찡긴다.
[여보, 괜찮다고 의사가 그러니 염려 마오.]
하고 숭은 정선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정선은 숭의 손을 잡고 떨었다.
정선은 용이하게 위험상태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을 일으킨 것과 오른편 무릎의 뼈가 상한 것이 아울러 중증인 모양이었다. 정선의 의식은 가끔 분명하였으나 또 때로는 혼수상태를 계속하였다.
숭의 전보를 받은 윤참판은 병을 무릅쓰고 세브란스의 이 박사를 대동하고 내려왔다가 하룻밤을 자고 올라가 버리고 병원에서는 숭과 유월이가 정선을 간호하고 있었다.
이 박사는 숭을 향하여 뇌진탕은 안정으로 하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마는, 다리 상한 것은 엑스광선 사진을 박아 보아야 뼈 상한 정도를 알겠고, 만일 뼈가 많이 상하여 화농할 염려가 있다고 하면 다리를 무릎마디 위에서 절단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는지도 모른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 병자를 천동할 수는 없으니 이삼 일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숭은 날마다 밤을 새웠다. 정선이가 잠이 든 듯 한 동안에 숭은 교의에 걸터앉은 대로 십 분이나 이십 분씩 졸았다.
밤이면 정선의 고통은 더하는 듯하였다. 두통과 다리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정선은 앓는 소리를 하였다. 이것이 정선의 입에서 나오는 유일한 소리였다. 숭이 무슨 말을 붙이면 정선은 다만 눈을 한번 떠보고 입을 조금 벌릴 뿐이었다. 정선의 유일한 표정은 오직 고통을 못 이기어하는 표정뿐이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서울서 이박사가 내려왔다. 정선의 오른편 다리는 마침내 끊어 버리기로 결정이 된 것이었다.
[나는 죽어요!]
하는 것이 정선의 첫 말이었다. 그가 처음 입을 열 만하게 된 날, 입원한 지 닷새째 되던 날, 정선은 남편을 보고,
[나는 죽어요!]
하였다.
[아니오, 아니 죽소. 의사도 괜찮다는데. 맘을 편안히 먹으시오.]
하고 숭은 정선을 위로하였다.
[나는 죽어요. 내가 왜 안 죽었어? 꼭 죽을 양으로 기관차 앞에 뛰어들었는데, 내가 왜 안 죽었어? 기관차도 나를 더럽게 여겨서 차내 버렸나?]
하고 정선은 울었다.
[당신이 살아야 세상에서 할 일이 많기 때문에 하느님이 당신을 구하신 것이오. 아무것도 아니 하는 생명은 천하지마는 일할 생명은 한 나라보다도 귀하다고 하지 아니했소? 그런 생각 말고 맘을 편안히 가지고 어서 나으시오. 인제는 생명의 위기는 벗어났다고 의사도 그러는데.]
하고 숭은 가제 조각으로 정선의 눈물을 씻어 주었다.
그 후에도 정선은 정신만 들면 비관하는 소리를 하고는 울었다. 그러할 때마다 숭은 친절하게 위로해 주었다.
[내가 살아나면 당신은 나를 용서하시려오?]
이런 말도 하게 되었다.
[벌써 다 용서했소. 인제는 내가 당신에게서 받을 용서가 있을 뿐이오.]
이렇게 숭은 대답하였다. 그럴 때에 숭의 맘에 거리낌이 없음이 아니나, 그 거리낌은 정선에게 대한 긍측한 정에게 눌려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병신이 되고 웃음거리가 되고 살면 무엇 하오? 신문에 났지?]
이런 말도 하였다. 아직 죽고 살 것도 판정되지 아니한 이때에 병신 되는 것, 남이 흉보는 것, 신문에 난 것 등을 생각하는 여자의 심리가 신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여서,
[병신이 되기로 무슨 상관요? 병신도 될 리 없지마는. 또 신문에 나거나 말거나 남이 흉을 보거나 말거나 그게 다 무슨 상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일을 하면 그만 아뇨? 일은 모든 것을 이기오.]
하고 위로하였다. 그렇게 말은 했으나 신문에 난 것은 숭에게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일보의 기사는 분명히 이박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이 ○○지국 통신으로 온 것을 보아서 더욱 그러하였고, 숭과 정선의 사진을 낸 것으로 보아 더욱 그러하였고, 이 사건의 전말이란 것으로 보아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 ○○일보의 기사에 의하건댄 허숭은 겉으로는 지사와 군자의 탈을 썼으나, 기실은 색마여서 윤참판 집에 식객으로 있는 동안에 정선을 후려내었고, 정선과 혼인을 한 뒤에도 매양 남녀관계로 가정풍파가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다방골 모 여의와도 관계가 있고, 마침내 일 년이 못 하여 살여울에 농촌사업을 한다고 일컫고 간 것도 그 동네에 있는 유순(가명, 18)이라는 남의 집 처녀와 추한 관계를 맺은 때문이오, 유순의 부모가 죽은 것을 이용하여 공공연히 유순을 제 집에 데려다두고 머리 땋아 늘인 채로 첩을 삼았으며, 또 소송 일로 잠시 서울에 올라온 때에도 기생 산월과 정을 통하여 아내 정선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정선은 그 반감으로 재동 모 남작의 아들이요 제대 법과 출신으로 역시 색마 이름이 높은 김모와 정을 통하였다. 이 모양으로 지사 허숭의 가정은 불의의 연애의 이중주로 추악한 형태를 이루었다. 정선이가 철도 자살을 하던 날도 허숭은 기생 산월을 데리고 같은 침대차를 타고 떠났으므로, 정선은 질투와 가정에 대한 비관으로 마침내 정부를 데리고 불의 향락의 길을 떠난 남편이 탄 차에 차라리 몸을 던져 죽을 양으로 ○○자동차부의 경(京)○○○○호 자동차를 타고 수색까지 따라가 몸을 기관차 앞에 던졌으나, 마침 궤도에 눈이 쌓이었으므로 수십 간을 밀려 나가고도 생명은 부지한 것이라고 하고, 또 목격자의 담이라 하여 허숭이가 정선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것을 보고 기생 산월은 분개하여 개성 역두에서 일장의 희비 활극을 연출하였다고까지 하였다. 이 기사에 흥미와 의분을 느낀 편집자는 ‘志士假面 쓴 色魔’니, ‘不義戀愛四重奏’니 하는 표제를 붙였다.
숭은 이 신문을 정선에게 보이지는 아니하였으나 신문에 났느냐고 정선이가 물을 때에 그렇다고 대답은 하였다. 아무려나 이 신문이 온 뒤로는 다소간 회복되었던 병원 내의 허숭 부처에게 대한 존경도 다 스러지고 사람들의 눈에서 마다 조롱과 천대의 눈살이 흐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허숭에게는 이것이 별로 큰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만일 이번 불행이 새 기원이 되어서 정선이가 다리 하나를 끊더라도, 머리에 흠이 나더라도 좋은 아내가 되어 주기만 하면 도리어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다. 오직 미안한 것은 유순이었다. 가명이라고 하면서 기실 본명을 쓴 것이 미웠다. 이것이 얼마나 유순의 일생에 큰 타격을 줄 것인가. 숭은 유순을 집에 데려다둔 것을 후회하였다. 살여울 동네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할는지 모른다. 숭은 맹한갑이가 다행히 무죄가 되어 출옥을 하면 그와 유순과를 혼인시키려고 맘을 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번 상고가 기각될 줄을 잘 아는 숭은 유순을 어찌할까가 문제가 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선이가 병이 나아서 숭과 같이 살여울로 가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염려 마오. 우리 둘이 일생에 서로 잘 사랑하고 좋은 가정을 이뤄 가면 지금 무슨 말을 듣기로 어떠오. 이것이 다 우리 행복의 거름으로만 압시다.”
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 위로가 정선을 안심시키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다리를 자른단 말은 차마 숭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머리에 흠이 생기는 것만도 병신이 되는 것으로 아는 정선이다. 그만한 병신으로도 살기가 싫다는 정선이다. 만일 다리를 잘라 버린다면 어떻게나 놀랄까, 슬퍼할까 하면 차라리 알리지 말고 수술을 받게 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의사도 만일 정선을 좀 더 존경하는 맘이 있다고 하면, 직접적으로 한번 의논을 하였을 법도 하지마는 아주 고약한 것들로 값을 쳐놓은 터이므로 다시 물어 보려고도 아니 하였다.
수술실의 준비는 다 되었다. 신문 기사를 보고 화를 낸 윤 참판은 수술한다는 숭의 편지를 받고도 답장도 하지 아니하고 죽어도 모른다고 집안사람들을 보고 화를 내었다. 이리하여 한 사람의 천하에 오직 한 사람 뿐의 동정을 받으면서 정선은 수레에 실려 수술실로 옮기어졌다.
정선은 다친 무릎을 약간 째는 것으로만 알고 수술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수술대에 처음 오르는 정선에게는 여러 가지 무서움이 있었다. 간호부가 하얀 헝겊으로 눈을 싸매어 수술실의 흰 천장과 곁에 선 사람들이 안 보이게 될 때에 정선은 죽음의 그림자가 곁에 선 듯 함을 깨달아 몸에 소름이 끼쳤다.
간호부들이 정선의 옷을 벗길 때에 정선은 본능적으로 다리를 굽히려 하였으나 물론 다리가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정선의 몸은 아주 알몸이 되었다. 정선은 흰 옷을 입고 방수포 앞치마를 두른 의사들이 솔을 가지고 손을 씻고 있던 것을 기억하고 수치를 깨달았다. 그러나 어떤 손이 두 발목을 무엇으로 비끄러맬 때에는 그러한 수치의 정도 스러지고, 오직 절망의 둔한 슬픔이 판로폰 주사에 마취하고 남은 의식을 내리누를 뿐이었다.
전신에 무슨 선뜩선뜩하고 미끈미끈한 액체를 바르고 무엇으로 문지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냉혈동물의 몸이 살에 닿는 듯이 불쾌하였다.
‘하느님!’
하고 정선은 속으로 불렀다. 한없이 넓고 차고 어두운 허공에 저 한 몸이 벌거숭이로 둥실둥실 떠서 지향 없이 가는 듯 한 저를 의식할 때에 정선의 정신은 ‘하느님!’ 하고 부르는 것밖에 다른 힘이 없었다. 딸그락딸그락, 사르릉사르릉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유리판 한 탁자 위에 수술에 쓰는 메스들을 늘어놓는 소리일 것이다. 그 백통빛 날들! 정선은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이 사람들이 나를 어찌할 작정인가.’
하고 정선에게는 의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 몸을 어찌하든지 정선은 반항할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머리맡에 사람이 가까이 오는 모양이더니 코 위에 무엇이 덮이고 온도 낮은 액체인지 기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무엇이 입과 코와 목과 폐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듯 한 감각이 생겼다. 그것은 일종의 향기를 가진 냄새였다.
‘클로로포름? 에테르?’
하고 정선은 몽혼 약의 이름을 생각하였다. 몽혼은 심히 무섭고 불쾌한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반항할 수는 없었다. 되는 대로 되어라 하고 정선은 맘 놓고 숨을 들이쉬었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다행이다― 이렇게도 생각하였다.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세어 보시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김 의사의 소리였다. 조금도 동정을 가지지 아니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정선은 하라는 대로,
[하나, 둘, 셋, 넷…….]
하고 세었다. 정선은 맘이 괴롭고 슬펐다. 이런 때에 남편의 소리가 들리고 손이 만져졌으면 어떻게나 좋을까 하였으나 제 두 손을 잡은 이는 남편은 아니었다. 맥을 보는 의사의 손이었다.
[하나, 둘, 셋, 넷.]
하는 정선의 소리가 숭의 가슴을 찔렀다. 그 떨리는 소리, 울음 섞인 소리는 숭으로 하여금 곧 수술실에 뛰어 들어가서 정선을 안아 내오고 싶은 맘을 내게 하였다.
‘사랑의 무한, 아니 왜 내가 그 같지 못하였던고?’
하고 숭은 후회하였다. 정선의 다리를 끊는 것이 저라고 숭은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렇게 병신이 되기를 싫어하는 정선의 다리를 끊어. 끊인 줄을 아는 때의 정선의 슬픔. 끊인 다리로 남의 앞에 나설 때의 정선의 괴로움. 그것을 생각할 때에 숭은 뼈가 저렸다.
‘극진히 사랑해 주자. 이제부터야말로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해 주자.’
이렇게 숭은 다시금 맹세하였다.
[하나, 둘, 셋, 넷…….]
하는 소리도 인제는 아니 들렸다. 다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버스럭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정선의 하얀 다리 바로 무릎 위에는 이박사의 손에 들린 백통빛 나는 칼이 한번 득 건너갔다. 빨간 피가 주르르 흘러나와서 하얀 살 위로 흐르려는 것을 간호부의 손에 들린 가제가 쉴 새 없이 빨아들인다.
칼로 베어진 살을 역시 백통빛 나는 집게로 집어 좌우로 벌려 놓고 혈관을 골라 졸라매고 그리고는 골막을 긁어 제치고, 또 그리고는 톱을 들어 다리뼈를 자른다. 스르륵스르륵하는 톱질 소리가 고요한 수술실 안에 꽉 찬다. 톱이 왔다갔다 스르륵 소리를 낼 때마다 정선의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는 모양으로 떨린다. 그리고 정선은 아프다는 뜻인지 싫다는 뜻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댄다.
이따금 소리를 버럭 지를 때도 있으나 특별히 아픈 줄을 아는 때문인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맥을 보는 의사는 입술을 떨면서 맥을 세었다. 간호부들은 의사의 이마엣 땀을 씻을라 가제를 주워섬길라 바빴다. 그러나 소리는 없었다.
의사들은 마치 눈과 손만 가진 사람인 듯 하였고 간호부들은 마치 귀와 눈만 가진 사람인 듯하였다. 의사의 눈치와 외마디 소리에 기름 잘 바른 기계 모양으로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였다.
[실수 없이 빨리빨리.]
이 밖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떡.]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정선의 다리가 뚝 떨어졌다. 아직도 따뜻하고 아직도 말락말락한 다리다. 간호부는 무슨 나뭇조각이나 드는 것같이 그 떨어진 다리를 들어서 금속으로 된 커단 접시 같은 것 위에 올려놓았다. 끊어진 다리에 붙은 발가락들이 가끔 살고 싶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다시 살아나지는 못하게 된 것이다.
의사는 집게로 집어서 걷어 올렸던 살과 가죽으로 끊어진 뼈를 싸고, 초생달 모양으로 생긴 바늘에 흰 명주실을 꿴 것으로 숭숭 꿰매었다. 그리고는 약을 바르고 가제로 싸고 솜으로 싸고 붕대로 감고 이에 수술은 끝났다.
[이것 보아!]
하고 이 박사는 정선의 다리(인제 끊겨 떨어진 죽은 다리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다가) 무릎께서 칼로 푹 찔러 째어서 피고름이 쏟아지는 것을 보이면서 말하였다. 다른 의사들도 끊어진 다리를 이리 뒤적 저리 뒤적 만져 보았다. 마치 무슨 장난감이나 되는 듯이.
정선의 몸은 깨끗이 씻기우고 옷을 입히었다. 코에 대었던 마스크도 떼어졌다. 간호부는 정선의 이마에 돋은 땀방울을 씻어 내고 정선을 수레에 옮겨 싣고 홑이불과 담요를 덮었다.
삐걱 하고 수술실의 문이 열릴 때에 정선의 붕대로 동인 검은 머리가 수레 위에 누운 대로 쑥 나오는 것을 볼 때에 숭은 길을 비키면서 가슴이 몹시 울렁거림을 깨달았다. 그것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숭은 정선이가 탄 수레를 제 손으로 끌었다. 그리고 눈이 아뜩아뜩하도록 흥분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병실에 들어가서 간호부가 정선을 안아 내릴 때에 한쪽 다리가 무릎으로부터 없는 것을 보고 숭은 놀랐다. 그럴 줄을 생각 못 하였던 것같이 놀랐다.
‘정선은 한 다리를 잃었고나!’
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병실에 돌아온 지 얼마 아니하여 정선은 눈을 떴다.
[수술 다 했수?]
하고 정선은 곁에 앉은 남편을 보고 물었다.
[응.]
하고 숭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쨌나?]
하고 정선은 다시 궁금한 듯이 물었다.
[응.]
하고 숭은 길게 설명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아프지 않어.]
하고 정선은 빙그레 웃었다.
[아프지 말라고 수술했지.]
하고 숭도 웃어 보였다.
[그렇게 여러 날 못 주무셔서 어떡허우? 유월이더러 보라고, 당신은 좀 주무시구려.]
하고 정선은 숭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걱정하였다.
[염려 마오.]
하고 숭은 네모나뎃병을 들어 정선의 입에 넣어 주었다. 정선은 가장 맛나는 듯이 그것을 두어 모금 마셨다.
정선은 그날 하루를 제 다리가 끊긴 줄을 모르고 지냈다. 그 이튿날도 그러하였다. 끊긴 쪽 무릎이 가렵다는 둥, 그쪽 발이 가렵다는 둥, 긁어 달라는 둥, 그쪽 다리가 아직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리가 병신은 안 되우?]
하고 근심되는 듯이 남편에게 묻기까지 하였다. 그럴 때에는 숭은 긁는 모양도 해주고 만지는 모양도 해주었다. 그러면 정말 긁히운 듯이, 만지운 듯이 정선은 만족하게 가만히 있었다.
다리를 자른 뒤에는 열도 오르지 아니하고 고통도 덜려서 정선은 하루의 대부분을 눈을 뜨고 지내고 남편과 이야기도 하였다. 정선은 매우 명랑하게 지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의사가 다리 끊은 자리의 붕대 교환을 하게 될 때에 숭은 병실에서 나오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으므로 정선은 비로소 제 다리가 끊겨진 것을 보았다.
붕대 교환이 끝나고 숭이 혹시 정선이가 다리 끊긴 것을 알지나 아니하였나 하는 근심을 가지고 병실에 들어갔을 때에는 정선은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숭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두 손으로 낯을 가리었다. 숭은 다 알았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 울지 마우. 인제는 살아났으니 울지 마우.]
하고 숭은 낯을 가리운 정선의 팔목을 붙들어서 낯에서 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선은 떼쓰는 어린애 모양으로 더욱 꼭 누르고 손을 떼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달랠수록 더욱 머리를 흔들고 울었다.
[여보.]
하고 숭은 정선을 한 팔로 안으면서,
[내가 끊으라고 해서 끊었는데 어떠오? 당신이 다리 하나가 없더라도 내가 일생에 전보다 더 잘 사랑해 줄 텐데 무슨 걱정요?]
하고 위로하였다.
[왜, 나헌테 말도 아니 하고 다리를 자르게 했소?]
하고 정선은 낯을 가리었던 손을 떼며 성을 내었다.
[그냥 두면 다리가 점점 썩어 들어가서 더 많이 자르게 될는지도 모르고, 또 더 심하면 생명에 관계될는지도 모른다고 하니, 당신이 고통을 받는 것도 차마 볼 수 없고, 또 죽기도 원치 아니하고 보면 자를 수밖에 없지 않소?]
하고 숭은 알아듣도록 설명을 하였다.
[싫어요, 싫어요, 죽는 게 낫지, 다리병신이 되어 가지고 살면 무얼 해요?]
하고 정선은 더욱 흥분하였다.
[이렇게 정신을 격동하든지 몸이 움직이면 출혈이 될 염려가 있다고 합디다. 출혈이 되면 큰일 나오.]
하고 숭은 정선의 손을 만지며 애원하였다.
다리를 자른 데 대한 정선의 원망은 여간해서 가라앉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가끔 숭을 볶아 대었다. 그럴 때마다 숭은 침묵을 지키거나 위로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일주일 지나 이 주일 지나 병이 차차 나아가는 동안에 정선은 숭의 침식을 잊고 저를 위하여 애쓰는 정성에 감동이 되었다. 더구나 친정에서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세상이 다 저를 버려서 죽든지 살든지 상관을 아니 하는 이때에, 제일 저를 미워해야 옳을 남편이 이처럼 전심력을 다하여 저를 간호한다는 것을 뼈가 저리도록 고맙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용서하세요.]
하고 정선은 가끔 자다가 깨어서는 저를 지키고 앉아있는 남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며칠 안이면 퇴원할 테니, 퇴원하거든 서울로 가서 의족을 만들어 가지고 살여울로 갑시다.]
하는 것이 숭의 대답이었다.
[싫어요, 난 서울은 안 가요! 이 꼴을 하고 서울을 가?]
하고 정선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끝에는 얼굴이 검은빛으로 흐렸다.
[그럼 의족은 어떻게 하오?]
[여기 불러오지는 못하오?]
[불러오면 돈이 많이 들지. 인제는 당신이나 내나 다 몸뚱이 하나뿐이오. 인제부터는 우리 둘이 벌어먹어야 하오.]
이 말은 정선에게는 무서운 말이었다. 참 그렇다. 돈이 없다. 십여만 원 가치 어치 재산은 숭이가 다 친정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 꼴이 된 정선을 아버지가 다시 돌아볼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뿐더러 벌어먹는다는 것, 제 손으로 제 옷과 밥을 번다는 것은 정선으로는 일찍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제 손으로 벌어먹는다는 것은 천한 사람이나 하는 일 같았다. 재산 없는 몸, 그것은 마치 젖 떨어진 젖먹이와 같이 헬프리스(무력)한 일이었다. 앞이 막막하였다. 그래서 정선은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어떻게 벌어먹소?]
하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한마디를 하였다.
[왜 못 벌어먹어?]
하고 숭은 자신 있게 말하였다.
[그야, 당신이 변호사 노릇을 하면야 벌어도 먹지마는 살여울 가서야 어떻게 벌어먹소?]
하고 기막히는 듯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땅 사놓은 것이 있어. 우리 두 식구 먹을 것은 나오우, 내가 혼자 농사를 지어두. 당신은 옷만 꿰매시구려.]
하고 숭은 웃었다.
정선은 아직 제 치맛주름 한번 잡아 본 일도 없었다. 집에는 으레 침모가 있는 법으로 생각하였다. 정동 집에는 침모도 찻집도 다 있지 아니하냐. 그러나 이 꼴 하고, 신문에 나고, 다리 하나 끊어지고 서울로 갈 면목은 없었다. 살여울 갈 면목도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래도 이 세상에서 저를 돌아보아 주는 사람은 남편밖에 없지 아니하냐. 이 병신 된 몸이 의지할 곳은 남편밖에 없지 아니하냐. 이렇게 생각하면 눈물이 솟았다.
[내 낫거든 살여울로 가께. 옷도 꿰매고 반찬도 만드께.]
하고 정선은 낯 근육을 씰룩거리며 울었다.
하루는 서울서 숭에게 전화가 왔다. 숭은 그것이 혹시 장인에게서 온 것이나 아닌가 하였다. 장인이나 처남에게서는 지금까지 엽서 한 장도 없었다.
전화에 나타난 것은 여자의 소리였다. 그가 누구라고 말하기 전에 그 소리의 주인은 산월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 목소리는 알토인 듯 한 가라앉고도 다정스러운 목소리다.
[저 선희입니다. 백산 월이라야 아시겠죠?]
하는 것이 허두다. 그 음성에서는 기생다운 것이 떨어지고 없다.
[네.]
하고 숭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바를 찾지 못하였다.
[부인 어떠셔요? 일어나셨어요?]
[아직 누워 있습니다.]
[괜찮으시지요?]
[인제 죽기는 면한 모양입니다.]
[다리는?]
[다리는 잘라 버렸지요.]
[네?]
하고 산월은 놀라는 모양이었다.
[잘랐어요. 그렇지만 살아났으니 고맙지요.]
하고 숭은 하염없이 웃었다.
[저런, 그럼요. 살아나신 것만 다행하지요.]
하고 산월은 한참 잠잠하다가,
[저, 병원으로 좀 찾아가도 좋아요?]
하고 묻는다.
[어떻게 여기를.]
하고 숭은 좋다는 뜻도 좋지 않다는 뜻도 표하지 아니하였다. 산월이가 찾아오는 것이 아내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불편하시겠지마는 낮차로 찾아가겠습니다. 꼭 좀 의논할 말씀도 있구요― 선생께 걱정을 끼칠 말씀은 아닙니다. 그럼, 이따 가께요. 정선이 보시고 제가 온다더라고 그리셔요.]
하고 이편의 대답은 듣기도 전에 산월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숭은 방에 들어왔다.
[집에서 왔에요?]
하고 정선은 조급하게 물었다.
[아니, 백선희 씨헌테서 왔어. 낮차에 오마구.]
하고 숭은 대수롭지 아니한 것같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렇게 편할 수는 없었다.
이날 서울서 의족 만드는 사람이 왔다. 일전에는 그 사람이 석고를 가지고 와서 정선의 성한 쪽 다리를 본떠 갔더니, 이번에 그 본에 비치어서 다리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비단 양말을 신기고 구두를 신기고 보면 성한 다리와 다름이 없었다.
정선은 숭에게 겨드랑을 붙들려서 침대 위에 일어나 앉기까지는 하였지마는 고무다리 만드는 사람 있는 곳에서는 그것을 대어 보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그래서 숭은 그 사람을 내어보내고 맞춰 보았다.
아직 끊은 자리가 굳지를 아니하여 좀 아팠다. 그런 아픈 것 때문은 아니요, 고무다리를 대지 아니하면 안 되게 된 것 때문에 정선은 숭의 가슴에 매달려서 울었다.
[이게 다 무어야. 내다버려요!]
하고 정선은 그 고무다리가 보기 싫다고 이불을 쓰고 울었다. 숭은 고무다리를 잘 싸서 정선이가 보지 않는 곳에 가져다가 두었다.
[나는 고무다리 안 댈 테야.]
하고 정선은 떼를 썼다.
[대고 싶을 때에만 대시구려.]
하고 숭은 정선을 무마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정선은 하루에 한 번씩 고무다리를 대어 보았다. 그리고 한두 걸음씩 걸어도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또 울었다. 마치 히스테리가 된 것 같았다.
자나 깨나 정선의 머릿속에서는 고무다리가 떠나지 아니하였다. 눈을 감으나 뜨나 고무다리는 눈에 어른거렸다. 그러할 때마다 슬펐다.
산월이가 올 시간이 되었다. 숭은 산월이가 오기 전에 정선에게 산월과 저와의 관계를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델리킷(미묘)한 문제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하고 맘을 썼다.
[선희 씨가 당신이 병원에 입원하던 날 여기까지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우.]
하는 것으로 길을 열었다.
[선희가 여기?]
하고 정선은 놀랐다.
[응, 내가 경성 역에 차를 타고 자리를 찾으러 다니다가 그 사람을 만났어. 그래 여기까지 같이 와서 하루 묵어 갔지요.]
정선은 아내다운 의아의 눈을 가지고 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선은 선희가 학생시대에 집에 다닐 적에 숭을 알던 것과 또 숭이란 사람이 기생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다시 안심하는 것 같았다.
[내가 선희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잔 일이 있지 않소? 강변호사헌테 붙들려서 술을 잔뜩 먹고는 인사정신 못 차리고 있었는데, 자다가 깨어 보니까 웬 모르는 집인데 곁에서 자는 사람이 산월이란 말야. 산월은 강변호사가 부른 기생이거든. 그래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지 아니하였소?]
하는 숭의 말은 좀 어색하였다. 그렇지마는 해야 할 말을 해버린 것은 기뻤다.
정선은 그 말을 듣고는 오장이 뒤집히는 듯 함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숭을 존경하던 생각이 다 스러지고 격렬한 질투를 깨달았다. 그러나 정선은 제가 숭을 나무랄 사람이 못 됨을 생각하고 다만 눈을 감고 사내발이 날 뿐이었다. 마치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듯하고 숨이 막히고 이가 떡떡 치우쳤다.
[저리 가요.]
하고 한참이나 있다가 정선은 남편을 노려보고 소리를 질렀다. 숭은 아무 말도 아니 하고 곁방으로 가서 유월이를 정선의 병실로 들여보냈다.
[이년! 무엇 하러 왔어? 저리 가!]
하고 정선이가 외치는 소리가 곁방에 있는 숭의 귀에 들렸다.
유월이는 정선에게 쫓겨나서 숭에게로 왔다. 정선은 혼자서 울고 있었다.
[나는 고무다리, 선희는 성한 몸.]
하고 정선은 선희가 제게 무서운 원수나 되는 것같이 생각히었다. 선희가 곁에 있으면 칼로 찔러 죽이고 싶었다.
이때에 선희는 간호부를 따라 정선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정선은 그것이 선희인 것을 직각적으로 알고 눈물을 씻고 눈을 감고 자는 모양을 하였다. 선희는 잠든 병인을 깨울까 저어하는 모양으로 발끝으로 걸어서 정선의 침대 곁으로 와서 우두커니 섰다.
이렇게 침묵이 계속하기 이삼 분. 선희는 초췌한 벗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한숨을 짓고 서 있었다. 선희는 오늘은 산월이 아니었다. 머리도 학생 머리로 틀고 옷도 수수한 검은 세루 치마에 흰 삼팔저고리, 학교에 다닐 때에 입던 외투와 핸드백을 손에 들고 모습을 감추기 위함인지 알에 검은빛 나는 인조 대모테 안경을 썼다. 산월을 본 병원 사람들도 그가 산월인 줄을 안 사람이 없었다.
선희는 언제까지든지 정선이가 잠을 깨기를 기다리는 듯하였다.
숭은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 모양으로 우두커니 옆엣방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선희가 온 때에 일어날 불쾌한 한 장면을 그려 보았다. 그러나 당할 일은 당할 일이었다. 비가 되거나 우박이 되거나 겪을 일은 겪을 일이었다. 다만 정선의 병에 해롭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정선은 자는 체를 하고 있으면서 선희에게 대하여 할 행동을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분하기만 하였으나 선희가 언제까지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분한 마음이 좀 풀리고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오는 길로 남편을 찾지 아니하고 저를 찾아서 언제까지든지(정선의 생각에는 반시간이나 된 것 같았다) 제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섰는 것이 선희가 제게 대한 성의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정선은 아무쪼록 선희에게 대하여 호감을 가져 볼 양으로 학생 적에 저와 선희와 의좋게 지내던 것을 생각하였다. 이 모양으로 맘을 준비해 가지고 정선은 자다가 깨는 모양으로 가볍게 기지개를 켜면서 눈을 떴다.
[정선이!]
하고 선희는 눈을 뜨는 정선의 가슴 위에 엎더지는 듯이 몸을 던지며 제 뺨을 정선의 뺨에 비비고 최후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동성연애 비슷한 것을 하면서 하던 버릇이었다. 그리고 선희는 코끝과 코끝이 서로 마주 닿을 만 한 거리에서 정선의 눈을 들여다보며,
[네가 살아났구나. 네가 살아났어!]
하고 또 한 번 뺨을 비비고 입을 맞추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하는 모양으로.
[그래, 죽지 못하고 살아났단다.]
하는 정선도 선희의 열정적인 포옹에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하니?]
하고 선희는 그제야 정선에게서 물러나서 곁에 있는 교의에 앉으며,
[죽기는 왜 죽어? 살아야지. 나는 우연히 미스터 허와 한 차를 탔다가 글쎄, 수색 정거장을 조금 지나서 차가 급작스러이 정거를 하지 않겠니? 그때에 미스터 허는 아마 맘에 무엇이 알렸나 봐. 벌써 무슨 일이 난 것을 다 아는 듯이 차에서 뛰어내린단 말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그러자 사람들이 뛰어오면서 레키시라고, 웬 젊은 여자가 레키시를 하였다고 그리겠지, 그래 웬 여자라는 말을 들으니깐 나도 가슴이 설렌단 말야. 남자라고 하는 것보다 다르더라, 역시 여자에게는 여자가 가까운가 봐…….]
[서로 미워하기도 여자끼리가 제일이고.]
하고 정선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래 가보니깐― 너 그때 이야기 미스터 허헌테 다 들었니?]
하고 선희는 말을 끊고 묻는다.
[그 뚱딴지가 무슨 말을 하니? 또 내가 무어라고 그걸 물어 보아?]
하고 정선은 선희의 보고에 참으로 흥미를 느꼈다.
[아, 그래.]
하고 선희는 말할 이유를 찾은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말을 계속한다.
[아, 그래 가까이 가 보니까― 아주 가까이 가게는 아니 하지, 길을 막아요― 아 그래, 가만히 바라보니깐 기관차 이맛불빛에 웬 젊은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눈이 쌓인 철롯길에 가로누워 있단 말이야, 칠피 구두가 불빛에 반짝반짝하고. 그것을 보니까 나도 저렇게 죽을 몸이 아닌가 하고 맘이 슬퍼지더고나. 그러기로 그것이 정선일 줄이야 꿈엔들 생각하였을 리가 있나. 그런데 말야, 그 시체― 우리야 시첸 줄만 알았지. 살았으리라고야 생각할 수가 있나. 그래, 그 시체를 맞들고 차에 실으려고 앞으로 지나가는데 미스터 허가 깜짝 놀라서, ‘아이구 정선이!’ 하고 시체를― 그러니깐 너지, 정선이지― 붙든단 말야. 그래서 보니깐 정선이 아니야. 얼굴이 반이나 피에 젖고, 치마가 모두― 아이구, 그 말을 어떻게 다 하니?]
하고 선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선희가 우는 것을 보고 정선도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두 사람의 맘에 걸렸던 모든 깨끗지 못한 관념과 감정을 녹여 버렸다.
[그래서.]
하고 선희는 눈물을 흘린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같이 일부러 소리를 내어 웃으며 손수건을 두 손가락 끝에 감아 가지고 안경 밑으로 눈물을 씻는다.
[그래서, 미스터 허가 차장과 교섭을 해서 너를 일등 침대에다 태우고 다른 찻간으로 돌아다니면서 의사 하나를 불러왔지요. 모르지 정말인지 아닌지, 제가 의사라니깐 아니? 그래서 네가 여기를 오게 되고 나도 여기까지 따라와서 하루를 묵어서 갔단다. 그런 겐데 말야, 세상에서들은 무어라고 하는고 하니…….]
하고 선희가 새로운 화제를 꺼내려 할 적에 숭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셨어요?]
하는 것이 숭의 인사.
[부인 병구완하시기에 얼마나 곤하셔요? 그래도 이렇게 나았으니깐 다행하시지.]
하고 선희는 숭과 정선을 번갈아서 본다.
[낫기는 무어가 나았어? 다리 하나가 없어졌는데 나았어?]
하는 정선에게 불쾌한 빛이 없음을 보고 숭은 맘을 놓았다. 숭은 기생 모양을 버리고 보통 여학생 모양을 차린 선희의 모양을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양에서 기생의 흔적이 어디 남았는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맛전과 눈썹까지도 예사로웠다. 숭은 이것이 산월인가를 의심할 만하였다. 그렇다고 예전 정선의 집에 놀러 다닐 때 선희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디 기생 냄새가 나는가 하고 그러세요?]
하고 선희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수삽한 빛을 보인다. 도무지 기생의 흔적이 없었다.
[정선이는 내가 기생으로 차린 것을 본 일이 없지? 기생 스타일에도 일종의 미가 있다. 그것이 아마 조선의 가진 아름다운 것 중 하나일는지 몰라. 그 몸가짐, 걸음걸이 그것도 다 공부가 있어야 되어요. 아이, 내가 무어라고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하고 선희는 정선의 이불과 베개를 바로잡아 주고 나서,
[아이 참, 여기 앉으셔요.]
하고 선희는 섰는 숭에게 교의를 권한다. 이 방에 교의는 하나밖에 없었다.
[앉으시오, 나도 여기 앉지요.]
하고 숭은 아내의 침대 발치에 걸터앉는다.
[글쎄, 어째 기생이 됐어?]
하고 정선은 억지로 불쾌한 생각을 누르면서 물었다. 그것은 남편이 기생 산월의 집에서 잤다는 것이었다.
[기생 됐던 말은 해서 무얼 해?]
하고 선희는 다시 교의에 앉으며 숭을 향하여,
[저 기생 그만두었답니다. 여기서 올라간 날로 폐업하였어요. 그래 지금은 기생 아닙니다.]
하고는 다음에는 정선을 향하여,
[나 기생 그만두었다. 인제부터는 어느 시골 유치원 보모 노릇이나 하고 싶어. 그리고 야학 같은 거 가르쳐도 좋고.]
하고는 또 숭을 향하여,
[정말입니다. 저 어디 갈 데 하나 구해 주세요. 살여울은 유치원 없습니까. 정선이 살여울 안 가?]
[글쎄.]
하고 정선은 맘에 없는 대답을 하였다.
[정선아, 난 너 가는 데로 갈 테야. 너 따라 댕겨도 괜찮지.]
선희는 퍽 흥분하여 허둥허둥하는 빛이 보인다.
정선은 선희의 속맘을 꿰뚫어보려는 눈으로 싸늘한 독이 품긴 눈살을 선희의 일동일정에 던졌다. 그리고 선희가 숭에게 맘을 두어 숭을 빼앗아가려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맘에 자못 불쾌하였다.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까닭에 갑자기 기생을 그만두고 정선을 따라오려는 것일까.
[무얼 날 따라오는 게야?]
하고 정선은 빈정댔다. 그러나
‘네가 내 남편을 따라오려는 것 아니냐?’
이런 말은 정선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선희는 잠깐 정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선의 얼굴에서 유쾌한 웃음을 찾아보고는 안심하고,
[저는 어려서부터 말 안 듣는 계집애로 유명했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살아 계실 때에도 영 이르는 말씀은 안 들었지요. 때리면 얻어맞고 울고 밥을 굶을지언정 영 말은 안 들었답니다. 왜 그랬는지 내 모르지요. 학교에 가기 시작한 뒤에도 말을 잘 안 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어른들이 시키시는 말씀이 다 옳지 않아 보인단 말야요. 어른의 권력으로, 선생의 권위로 내리누르시지마는 옳지 않은 것이 옳게는 안 보이거든요. 옳게 안 보이는 것을 복종하기는 싫거든요. 안 그러냐 얘, 너도 내가 선생님헌테 벌 받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 왜?]
하고 선희는 정선의 동의를 구할 겸 눈치를 떠본다.
[그럼, 고년 작두로 찍어도 안 찍힐 년이라구, 불에 태워두 안 타질 년이라구, 하하하하. 그 돌배라는 선생이 안 그랬니, 왜? 선희 널 보구.]
하고 정선은 유쾌하게 깔깔대고 웃는다.
숭은 정선이가 유쾌하게 생각하는 것이 기뻤다. 선희도 그러하였다. 정선은 선희의 태도와 말이 그가 단순히 사내를 따르려는 계집이 아니요, 사내와 계집을 초월한 사람의 위신을 가졌음을 느끼고 안심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저는 누구 말 안 듣는 계집애로 자라났단 말씀야요. 그러다가 아버지, 어머니 다 돌아가셔서, 삼촌 집에 가서도 말 안 듣는 버릇은 놓지 못했답니다. 더군다나 삼촌이라는 이가 내게 호의를 가진 사람이 아닌 줄을 안담에야 내가 왜 그 말을 들어요? 심사로라도 안 듣지. 삼촌은 웬일인지 저를 미워하셨답니다. 작은어머니라는 이는 더하고요. 제게 제일 가까운 사람이 외조모와 이모들이지마는, 삼촌이 제가 외가에 가는 것은 대기거든요. 또 외가가 서울을 떠난 것도 한 이유는 되지만두. 삼촌의 목표는 제게 있은 것은 아니지요. 조카딸년이야 어찌 되었든지 아버지 두고 가신 재산만 가지면 그만이란 말씀야요. 제가 고등과를 졸업한 때에― 열여덟 살 적이지? 삼촌은 저를 어느 부랑자의 후실로 가라고 야단을 하셨지요. 저는 전문과에 간다고 떼를 쓰고. 전문과에 가? 전문과엔 무엇 하러? 전문과에 가면 학비를 안 줄걸. 이러시고 삼촌은 야단이시지요. 삼촌도 나만 못지않게 뉘 말 안 듣는 양반이시거든요. 그래 숙질간에 대충돌이 안 났습니까. 죽일 년 살릴 년이지요. 그러니 삼촌허구 열여덟 살 된 계집애허구 싸우자니 적수가 되어요. 그래 최후에 제가, 그럼 그까짓 재산 다 삼촌 가지우, 난 전문과만 졸업하도록 학비만 주시구― 이런 조건으로 타협이 되었지요. 재산요? 재산이래야 몇 푼어치 되나요. 양주 논, 고양 논, 시흥 논과 산과 다 해야 한 육칠만 원 어치 될까. 그저 한 오백 석 하지요. 뒤에 생각하니깐 아깝기도 하지마는 한번 한 말을 어찌할 수도 없고, 그래 해달라는 대로 다 도장을 찍어 주었지요. 엇소, 엇소 다 가져가우 하구.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됩니까. 전문과를 졸업하고 나는 날 저는 쇠천 한 푼 남은 것 없지요. 그렇다고 구질구질하게 삼촌더러 더 먹여 달랄 수도 없구요, 그래서 졸업식한 이튿날 저는 삼촌의 집에서 뛰어나왔지요.]
하고는 선희는,
[제가 이런 말은 왜 합니까. 뉘 말 안 듣는다는 말 하다가 어느 새에 신세타령이 나왔네, 아이 부끄러워.]
하고 손으로 눈을 가린다.
[응, 그래서 네 재산을 모두 네 삼촌헌테 빼앗기고 말았구나?]
하고 정선은 동정하는 듯이,
[난 또 그런 줄까지는 몰랐어. 너 어디 나보고 그런 말 했니?]
[그런 말을 왜 하니? 넌 부잣집 작은아씨 아니야. 내가 알거지가 되었다면 너헌테 천대받게.]
[그러기로, 설마 내가 너를.]
하고 정선이가 소리를 내어 웃는다.
[암, 그렇지. 내가 기생이 되었다고 정선이가 나 찾아오는 것을 지긋지긋해하지 않어?]
하고 선희가 턱으로 정선을 가리킨다. 정선의 낯빛이 문득 변한다.
[그런 말씀을 길게 할 것은 없구요, 어쨌으나 저는 인제는 기생은 그만두었습니다. 여기서 올라간 이튿날부터요. 신문에 무엇이라고 쓰인 것이 맘에 걸린 것도 아니구요. 왜 그런지 기생 노릇은 아니 하기로 결심을 했단 말씀야요. 세상에서들은 그 신문을 보고 마치 무슨 큰 변이나 생긴 것처럼 야단들이래요. 도무지 집에 앉었을 수가 있나. 굉장히 부르러 오고 찾아오지요. 권번에는 폐업한다고 다 말을 했건 만도, 아니라고 아마 신문에 난 것 때문에 그런가 보다고, 내야 어떻겠느냐고, 위로해 줄 테니 오라고 이런 사람들도 있겠지요. 기가 막혀.]
하고는 무슨 크게 재미있는 것이 생각이 난 듯이,
[그런데 말야요, 요전 허 선생 허구 차에서 이 박사 안 만나셨어요?]
하고 숭에게로 몸을 돌린다.
[네, 만났지요.]
하고 숭은 그때 광경을 그려 본다.
[그때에 제가 이 박사를 놀려먹었지요? 들으셨어요? 여러 번 주신 편지는 답장을 못 드려서 미안하다고, 또 세 번이나 찾아오신 것을 대문 밖에서 돌아가시게 해서 미안하다고, 글쎄 이랬답니다. 그랬더니 그 담에 알고 보니깐, 그 자리 있던 두 여자 속에 하나가 이박사와 약혼 말이 있던 여자랍니다 그려. 일본 어느 고등사범인가 졸업한 여자라는데, 그만 그 이튿날로 이 박사를 탁 차버렸대요. 그리고는 이박사가 또다시 심순례를 꼬여 내려 든대, 얘.]
하고 정선을 바라본다.
[미스 정은 어떻게 되었누?]
하고 정선이가 묻는다. 미스 정이라는 것은 정서분을 가리킴이다.
[정서분 씨?]
하고 선희는,
[어림이나 있나, 이박사가 정서분 씨 생각이나 할 줄 아니? 인제 만일 순례헌테 퇴짜를 맞으면 하루 이틀 심심 파적으로 미스 정 집에 갈는지도 모르지. 그러면 미스 정은 그만 고마워서 허겁지겁 으로 이 박사를 맞아들인단 말이다. 미스 정은 이 박사 같은 사람에게는 알맞은 빅팀(희생물)이란 말이다. 우리 같은 것은 너무 닳아먹어서 잘 넘어가지를 않고, 순례는 또 너무 애숭이구. 아무려나 이박사도 인제는 볼일은 거의 다 보았어. 이번에 순례허구 틀어지면 이젠 마지막일걸. 응, 닥터 현헌테도 다니는 모양이지마는 현이 누구라구. 인제는 이박사도 청산할 때가 되었겠지.]
숭은 선희가 점점 흥분하여 말이 많아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듣고 있었다. 산월이라는 기생은 결코 수다스러운 기생은 아니었다. 도리어 산월이라는 기생의 특색은 그의 숙녀다운 얌전이었다. 그는 별로 말이 없고 말 한마디를 하려면 앞뒤를 재는 것 같았다. 이것이 사람들의 맘을 더욱 끈 것이었다. 이 점잖음이, 얌전함이.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선희는 마치 무슨 흥분제를 먹어서 발양 상태에나 있는 것같이 말이 많았다. 그 알토 가락을 띤 어성은 대단히 아름답고 유쾌하였다.
[순례는 너무 말을 잘 들어서 걱정이요, 나는 너무 말을 안 들어서 걱정이라고 이박사가 그리겠지.]
하고 선희는 말을 잇는다.
[말 안 듣는 데 미가 있다나. 들을 듯 들을 듯 안 듣는 데는 사내들이 죽는다고. 이건 사실인가 봐. 기생들도 이 수단을 쓴대요. 나는 그래서 남의 말 안 듣는 것은 아니지, 하하하하. 내야 나를 해치려는 사람들 틈에서만 살았으니깐 자연 남의 말을 안 듣게 된 게지. 남의 말을 들으면 제게 해로울 것만 같으니깐. 그렇지만 순례 모양으로 부모의 사랑 속에 자라난 사람이야 남의 말을 안 듣는 연습이 없단 말야. 안 그렇습니까. 남의 말 안 듣는 것이 자위책이거든요.]
하고 숭을 바라본다.
숭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남의 말 안 듣고 안 믿는 공부는 그 동안 기생 노릇에, 이를테면 대학을 마친 심이야.]
하고 선희는 말을 잇는다.
[기생으로 나서면 손님이란 손님이 다 내게 호의를 가지는 사람이구, 다 나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은 사람들이거든. 말을 들으면 말야. 그러니 그 말을 다 믿고 다 듣다가야 큰 코가 백이 있기로 배겨나겠어요. 그러니깐 오냐 나는 네 말을 안 믿는다, 네 말을 안 듣는다 하고 속으로 선언을 해놓지요. 그리고는 네, 네 그렇습니다, 아이구 고마우셔라, 그럼요, 이런 대답을 하거든. 그것이 영업이란 말야. 안 그러냐.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 호호호호.]
[허지만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야요. 아무의 말도 믿지 아니하고 아무의 말도 듣지 아니하고, 그저 의심만 하고 뿌리치기만 하는 생활은 참 못 해먹을 것입니다. 참 그렇다, 정선아. 고양이라도 괜찮고 강아지라도 괜찮으니 누구 하나 안심하고 믿을 사람이 있고 싶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치 광야에 혼자 사는 것 같거든. 곁에 사람이 백만 명이 있기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면 없으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믿지 못하는 사람이면 원수니깐 도리어 적국에 잡혀간 포로나 마찬가지지요. 안 그렇습니까. 남의 말 안 듣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것도 잠시 잠깐입니다. 참 못살겠어요. 그래서 기생을 그만두는 동시에 남의 말을 듣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웃지 말어라, 정선아. 너같이 팔자 좋은 아이야 나 같은 계집애 심리를 알겠니?]
[말을 듣기로 했다니, 뉘 말을 듣기로 했니?]
하고 정선이가 묻는다.
[글쎄, 허 선생 말씀을 듣기로 작정을 했다. 허 선생 말씀이면 듣기도 하고 믿기도 하기로. 그렇지마는 허 선생은 정선이 남편이시니깐 네가 동의를 해야겠지. 너 반대 안 하지?]
하고 선희는 정선을 바라본다.
[내가 왜 반대를 해? 다 자유지.]
하고 정선은 승낙하는 듯 하면서도 말에도 바늘을 품겼다.
[제가 지금 시골을 가면 농촌에서 무엇이든지 할 일이 있겠습니까. 유치원 보모든지, 소학교 교사든지, 기타 무엇이든지 말씀이야요. 저는 기생 노릇 해서 번 돈이 한 오천 원 됩니다. 그러니깐 월급은 안 받아도 괜찮아요. 다만 인제는 소원이 ‘쓸데 있는 일’을 해보는 것입니다. 노리개생활은 인제는 싫어요. 쓸데 있는 사람이 되어서 쓸데 있는 일을 좀 해보고 싶어요.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 줄은 모르고, 방직공장 여직공도 좋지마는 역시 아직도 야심이 남았어요. 제 주제에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이 염치없는 일이지만두, 가갸거겨 하나 둘 셋이나 가르치는 것이야 어떨 라고요. 만일 그것을 할 수가 없다고 하시면 방직 직공으로 가지요. 그것도 쓸데 있는 일인 것은 마찬가지니깐요. 네 선생님, 제가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극단의 무용한 사람으로서 속속들이 유용한 사람이 한번 되어 보고 싶어요. 그렇게 되도록 저를 좀 도와주세요. 성경 엣말씀 마찬가지로 잃어버렸던 양이 목자에게 돌아온 것으로 보아 주세요.]
하는 선희의 음성은 흥분상태로부터 벗어나서 침울에 가까운 상태로 들어갔다.
선희는 제가 하려고 별렀던 말을 대강 다 한 것을 발견하고는 어째 텅텅 빈 것 같음을 깨달았다. 또 제 약점을, 제 부끄러움을 사람들의 웃음거리의 재료로 제공하지나 아니하였나 하는 싱거움까지도 깨달았다. 도무지 진정을 토설하지 않기로 작정한 생활을 해오던 선희가 벼르고 별러서 한바탕 진정을 토설하고 나니, 마치 아이를 낳고 난 부인과 같이 허전하였다.
4-1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