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처님과 예수님
※ 부처님도 죽이고 하나님도 죽여라!
예수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은 기독교의 불행이며, 나아가 인류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전혀 없었을 교리적 문제들이 매우 불합리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문제는 결국 세 가지로 좁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원죄原罪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2:16]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3:1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길을 열어 주셔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심판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함입니다.[「요한복음」3:15~17]
위의「창세기」내용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그 행복한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절대 따먹지 말라고 당부하신 그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불순종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의
후손들까지 인간은 죄의 대가를 받아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원죄가 있는 인간들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믿기만 하면 예외 없이 누구나 죄 사함을 받고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선善과 악惡 그리고 죄罪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과 악은 무엇이며, 죄는 무엇입니까? 이미 앞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만 다음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죄와 참회의 본질을 잘 드러낸 게송이므로 인용합니다.
죄는 자성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난 것
마음 만약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죄도 없고 죄라는 마음[생각]도 없어 두 가지 모두 공하여야
이것을 이름하여 진참회라 하는도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그렇습니다. “죄는 자성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난 것, 마음 만약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죄라는 언어 개념과 죄라는 생각[마음]의 그 두 가지가 함께 없어지면
참된 참회가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참회의 성취는 곧 번뇌의 소멸을 의미하며, 나아가
무아無我의 성취이고, 예수께서 강조하는 거듭남이요, 불교에서의 성불을 의미합니다.
만일 ‘죄’라는 언어 개념도 없고, ‘죄’라는 생각[마음]도 없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 선과 악
그리고 그 원죄는 어디에 성립할 수 있을까요?
예컨대 동물들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사랑을 하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리고 다른 짐승들을 잡아먹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 동물들에게
선과 악 그리고 죄를 말하고, 도덕을 말하고, 불순종을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그들에겐 아무 문제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삶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동물에겐 ‘나’라는
생각이 적고 따라서 ‘아상’이 적지만, 인간에겐 ‘나’라는 생각이 많고, 따라서 ‘아상’이
많습니다. 동물에겐 ‘죄’라는 생각이 없고 따라서 ‘죄’도 없지만, 인간에겐 ‘죄’라는
생각이 있고 따라서 ‘죄’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아담과 하와가 선善과 악惡을 알게 하는 지혜의 과일을 따 먹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는 그 원죄론原罪論은 인간의 진화의 선상에서 ‘나’라는
자의식의 발생과 동시에 언어 또한 발생될 수밖에 없는 개념들 즉 너와 나,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선과 악, 죄와 벌 등등의 무수한 이분법 중 한 가지 개념일 뿐입니다.
언어의 발생은 인류에게 있어서 수성獸性에서 문화성文化性으로의 혁명적 진화이며,
나아가 인간이 동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축복받아야 할 사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한 가지 언어 개념으로써의 선善과 악惡이 왜 원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선악이나 죄라는 개념이 없는 동물로 다시 되돌아가면 오히려 하나님의 낙원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일까요? 원죄론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보니 죄인이 되어 있어야 하는 불합리한 교리적 모순이며, 따라서
매우 억지스럽고 무리한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1:14]
처음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과 이후 「요한복음」등 신약을 저작한 사람들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선과 악 그리고 원죄라는 굴레를 씌워 죄를 지은
인간과 벌을 주는 신으로 나누고, 나아가 흑과 백, 죄와 구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 사고의 틀을 이분법의 프레임[frame] 속에 가둠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언어[‘나’라는 아상我相]로부터 해방[깨달음, 거듭남]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속시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며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즉시 신[神, 말씀 언어, 구약과 신약]과 인간의 계약 관계가 성립되고, 나아가 오히려
구원이 아닌 구속의 그 모순 속에 갇히게 되며, 종교적 권력이 작동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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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福찾기 99 - 第8講 佛敎와 基督敎 (4. 부처님과 예수님 <부처님도 죽이고 하나님도 죽여라!>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