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
[1부] 만화와,
"어머니, 핸드폰 좀 잠시 빌려주세요."
"내 전화기를? 왜?"
뭔가를 찾아보던 큰아이가 동생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방으로 달려갔다. 둘이 한참 법석을 떨더니, 이번엔 같이 나에게로 달려와 핸드폰을 내민다.
<나의 웹툰 리포트>
올해 내가 열람한 웹툰 총 회차수는? 7,962화.
네이버웹툰 독자 중 상위 0.35%
그리고 그 아래에 친절한 설명.
‘네이버웹툰 독자들은 평균 914개 회차를 봤어요!’
“어머니! 어떻게 이러실 수가!”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만화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부터 쭈욱 좋아한다. 손바닥만 한 만화를 보려고 풍선껌을 사고, 일일 학습지는 안 풀어도 뒷면에 실린 만화는 읽고, 한 달에 한 번 아빠가 가져오는 어린이 새농민을 기다렸다. TV 만화영화는 소중한 문화생활이요, 보물섬이 나왔을 때는 온갖 책이 있는 외갓집에 가서 외사촌 언니, 오빠의 기분을 맞춰주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그렇게 받아오면 언니와 나, 남동생 사이에 다시 기다림의 위계가 만들어졌다.
연예인보다도 만화가 우선이라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사랑은 빨강머리 앤의 길버트이고, 군대 간 남동생에게 위문편지라면서 슬램덩크 주인공을 그려 보내곤 했다. 90년대 초 각 방송국에서 경쟁하듯 상영하던 수입 애니메이션 (마법 소녀 리나, 보노보노, 빨간 망토 차차, 세일러 문……)을 보기 위해 대학생이던 나는 신촌에서 역삼동까지 지하철에서 동동거리며 삼촌 댁으로 달려가 텔레비전을 틀었다. 초등학생인 사촌 동생도 안보는 만화영화를 혼자서 다 보고 나서야 저녁 준비하시는 숙모를 도와드렸다.
학교 축제 기간 대강당 앞 광장에서 상영되는 토토로를 본 날엔 새로운 사랑에 빠져 지브리의 모든 작품과 공각기동대, 에반게리온 녹화 테이프를 구하려고 천리안(PC통신)을 뒤지며 다녔고 지금은 자료가 없는데 수유너머에서 쓴, 원령공주를 철학적으로 해석한 리포트도 얻어서 읽었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도서 대여점으로 유행이 넘어간 시기에는 다시 만화책으로 돌아와 동네 도서 대여점에 출퇴근 도장을 찍고 (꽃보다 남자 이전 해적판으로 나왔던 오렌지 보이, 아기와 나, 그 남자! 그 여자!) 돈을 벌면서는 만화책을 사 모으는 데 재미를 붙여 (아르미안의 네 딸들, 천재 유 교수의 생활, 노다메 칸타빌레, 별빛 속에……등등) 수백 권을 소장했다. 이후 아이들과 만화카페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웹툰을 보다가 결국에는 모바일 웹툰까지 손대기 시작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네이버웹툰 상위 0.35% 독자’
[2부] 나.
내가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예쁘고 재미있고 기분이 좋아지니까. ‘게으른’ 나와 달리 능력 있는 주인공들은 매사 열심히 산다. 불가능에 가깝게 열심히 살고,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를 이루어낸다. 성적이든, 사회적 성공이든, 사랑이든 말이다. 대리만족으로 얻는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어려서는 이런 단순한 이유가 전부였지만 지금 만화를 ‘보는 이유’는 살짝 더 복잡하다.
나는 게으르고 끈기 없는 내 성격을 30년 이상 괴로워하는 중인데 이 ‘괴로움’이 만화를 찾는 주된 이유다.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생각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영상도 귀찮고 글자는 버거운 순간, 몰아붙이듯 만화를 보고 나면 내가 완전히 소진되는 기분이 든다. 거기까지, ‘한심해 죽겠네.’ 지경까지 가면 어찌 되었든 다시 움직일 힘이 생긴다.
이런 자아 소진용 콘텐츠를 쓰지 않고 게으름을 고치면 모든 게 쉽겠지만, 끈기도 없다 보니 내가 선택한 방법은 후회하기, 자책하기, 현실 도피하기가 된다. 나이가 들면서 경쟁하거나 평가받을 일이 적어져 빈도는 줄어도 여전히 자아 소진의 욕구는 나를 찾아온다. 며칠 전 어떤 책에서 내 마음 비슷한 문장도 찾았다. ‘나의 밑바닥. 나는 어떤 존재하지 않은 이상적인 나를 두고 나와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교와 욕심. 나태하나 욕망은 크나 큰, 엉망진창 성격인 자가 이상적이고 고고한 것을 추구하니 한 번씩 큰 균열이 생기고, 노력으로 메꾸기는 어려우니 그 마음을 꺼트리는 과정이 필요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래도 현실도피는 나름대로 역사가 있는 방법이다. 예전 어느 산수화 전시장에서 조선시대에 무릉도원 주제, 즉 안빈낙도와 안분지족의 삶을 그린 그림이 많은 이유는 벼슬을 얻지 못한 선비들이 자연에서 책을 벗 삼아 사는 삶이 좋은 인생이라 여겼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봤다. ‘벼슬하고 싶어! 한양 가고 싶어!’하는 속마음을 자연 속에서의 평화로운 삶으로 표현해야 했던 선비들 마음. (하지만 글공부는 싫었을 그 마음 저도 압니다.)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무릉도원 산수화를 꽤나 모았을 텐데,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나는 오늘도 만화를 모은다.
<끝>
첫댓글 왘ㅋㅋ 7,900화라고해서 그렇구나 했는데 바로 이어서 평균 값 보고 푸학하고 오늘 처음 소리내서 웃었습니다. ㅋㅋㅋ 작년 한 해 내내 상영한 극장판 슬램덩크는 어떻게 보셨을지, n차 관람하셨는지도 궁금해지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좀 심했죠. 저도 무덤덤하게 7900? 하다가 평균값 보고는 깜짝 놀랐답니다. ^^
글 보고 검색해봤는데 전 상위 32%네요 ㅎㅎ 본 회차도 917화로 거의 평균.. 돌멩이 보는 웹툰이 뭔지 궁금하네요~!
무서운 내용, 잔인한 내용 빼고는 가리지 않고 본답니다. 코믹학원물과 순정만화를 제일 좋아하고요. ^^
1등으로 글 올린 돌멩이는 ‘만화방’과 왠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글 이었답니다.^^
‘후회하기, 자책하기, 현실 도피하기’ 너어무 공감해요 ㅜㅜ 저인 줄 알았어요… 저도 한때 저의 길티플레져가 만화/애니 였답니다 ㅎㅎ 지금은 좀 소원해졌지만! ‘그남자 그여자’ 너무 좋아해요!
우와 저도 익숙한 만화제목이 보여 반갑네요~ 상위 0.35%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