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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오토 황제(재위: 서기 69년 1월 15일~4월 15일)
최고 권력자의 교체는 그리 많은 피도 흘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도 그 시대의 정보전달 속도가 사태를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킨 요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인츠에서 로마까지 정보가 전달되는 데 열흘이 걸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토가 황제에 즉위한 것을 마인츠에 있는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안 것은 1월 말께였을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가장 막강하고 가장 규모가 큰 군단의 동향을 좌우할 수 있는 중대사인 만큼, 오토도 서둘러 그 정보를 전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르마니아 군단이 비텔리우스를 옹립하기로 결의한 것은 1월 2일이었고, 군단병들에게 이런 결의까지 하게 만든 장본인인 갈바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안 것은 1월 말이었다. 그 사이는 약 한 달. 그 한 달 사이에 그들이 안 것은 게르마니아 군단 전체가 로마로 진군하기 위한 준비 작업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7개 군단의 4만 2천 병력에, 그것과 거의 같은 수의 보조병이 참가하는 대규모 군사행동이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추는 것은 쉽지 않다. 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아직 낯도 익지 않은 병사들에게 황제로 추대되어 기고만장해진 비텔리우스는, 하루라도 빨리 로마로 가서 황제로 군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염두에 없었다. 새 황제 오토는 죽은 갈바가 뿌린 씨를 거두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건 여담이지만, 로마는 공화정시대만이 아니라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전방에 파견한 사령관이나 속주 총독, 원주민을 중심으로 한 지방자치단체(무니키피아)나 퇴역병을 이주시킨 식민도시(콜로니아)에 후세의 제국주의 국가에 비하면 놀랄 만큼 많은 재량권을 부여했다. 마키아벨리는 이 방식이 책임체제 확립에 도움이 된다고 예찬했지만, 이것이 로마의 전통이 된 까닭은 단순히 책임체제 확립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중앙정부에 일일이 훈령을 요청할 필요가 없으니까 전방 사령관들은 상당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돌발사태가 일어나면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도 있고, 각자의 재능도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티베리우스 황제의 집착이 보여주듯, 이런 책임체제가 확립되지 않으면 그 넓은 제국을 통치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로마인이 현지에 그렇게 많은 재량권을 준 것은 그 시대의 기술 수준으로 가능했던 정보전달 속도도 고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유럽 안에서도 열흘, 제국 동방에 자리잡고 있는 중근동과 연락을 주고받으려면 한 달은 족히 걸렸다. 그렇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방식 덕택에 제국 각지의 개별적인 책임체제가 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각 책임자의 행동도 활기차게 전개된 것은 분명하다.
서기 69년 1월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고대 로마의 역사에서 이 한 달은, 정보전달의 지체가 사태의 주요 원인이 된 대표적인 기간이 아닐까 싶다, ‘길이 어긋나다'는 표현을 쓰고 싶어질 정도다. 길이 어긋나서 오해나 충돌이 생기는 것을 막으려면 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로마 제국에서 라인강 방위선 다음으로 중요한 전선은 도나우강 일대와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이었다. 이 ‘동방 전선'의 책임자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유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베스파시아누스였다. 무키아누스는 4개 군단, 베스파시아누스는 3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 두 사령관이 갈바 황제에게 보낸 충성 서약은 아직 지중해를 지나고 있었지만, 이것을 가지고 서쪽으로 항해하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가 그리스의 코린트에 들렀다가, 갈바가 죽고 오토가 즉위하고 비텔리우스가 궐기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티투스는 이 세 가지 정보를 동시에 입수한 모양이다.
당시 30세였던 티투스는 한동안 망설인 것 같다. 이대로 로마까지 가서, 제위에 오른 오토에게 시리아와 유대에 주둔해 있는 7개 군단의 충성 서약을 전달할 것이다. 아니면 충성 서약은 사절을 시켜 오토에게 보내고 자기는 오리엔트로 돌아갈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인 티투스는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오토에게 충성 서약을 전달하는 것은 오토에 대한 ‘동방 군단'의 적극적 지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사절을 시켜 충성 서약만 보내면, 원로원이 승인한 사람이니까 지지한다는 ‘소극적 지지'를 의미하게 된다.
결국 티투스는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것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서 구해내는 결과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결정하는 주도권이 군단으로 넘어간 이상, 각 군단의 배치 상황을 다시 한 번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듯하다. 서기 69년 이전의 추이도 함께 기록했는데, 이 배치표를 보면 제정으로 바뀐 뒤의 ‘전방' 추이도 함께, 로마 제국이 군사력의 활용을 얼마나 중시했고, 기존의 군사력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군사력 증강을 억제하려고 애썼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전이 일어나면 자연히 군사력이 증강되어 국력이 낭비된다는 사실도 분명해질 것이다.
인간 오토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Marcus Salvius Otho)는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 출신인 갈바와 달리 신흥 원로원 계급에 속해 있었다. 할아버지 때까지는 로마 사회에서 계급에 버금가는 제2계급인 ‘기사계급'에 속해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에게 등용되어 원로원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 아들, 즉 오토의 아버지는 이른바'티베리우스 문하생'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비롯하여 많은 요직을 거친 인물이다. 물론 원로원 의원이었다. 티베리우스의 실력제일주의를 계승한 클라우디우스황제 덕분에 귀족(파트리키)의 반열에 오르는 영예도 누렸다.
이리하여 수도 로마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오토는 소년 시절부터 장난이 심한 개구쟁이여서 부모나 선생이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다섯 살 아래인 네로와는 죽이 맞았을 것이다. 황제가 된 네로가 밤마다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몰려나가 젊음을 발산할 때 늘 함께 어울린 친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네로가 이 친구의 아내인 포파이아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네로는, 아우구스투스가 24세 때 유부녀인 리비아를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남편과 직접 담판하여 양보 받은 것을 흉내 내어, 오토에게 포파이아를 양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리비아의 남편이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지만, 오토는 네로 황제의 부탁을 거절했다. 당시 22세였던 네로는 그 정도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오토를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하여 로마에서 쫓아내기로 했다. 27세인 오토는 아직 원로원 의원도 아니다. 루시타니아는 원로원이 관할하는 속주니까, 집정관이나 법무관을 지낸 원로원 의원 밖에는 총독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포파이아에 대한 연정에 불탄 네로는 오토에게 ‘전직 법무관' 자격을 주라고 원로원에 부탁하여, 그를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가 제국전역에 미친 덕택에, 최전방이 아닌 루시타니아 같은 속주에 부임하는 총독은 처자식을 데려가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포파이아 사비나는 수도 로마에 남았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변방으로 파견되는 것은, 오토의 나이를 생각하면 유배형에 처해진 거나 마찬가지다. 오토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총독의 임무도 내팽개치고 대서양이나 바라보며 방탕하고 타락한 생활을 했다 해도 비난보다는 오히려 동정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토는 과거의 그를 아는 사람들이 경탄할 만큼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수도 로마의 이름난 플레이보이가 활력에 넘치는 공정한 행정관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의 관저는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오늘날의 메리다)에 있다. 퇴역병을 이주시켜 속주 통치의 ‘핵'으로 삼는 것이 제국의 일관된 방침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요지를 점하고 있는 ‘핵'을 북쪽에서부터 차례로 열거하면, 카이사르 아우구스타(오늘날의 사라고사), 타라코(타라고나), 톨레툼(톨레도), 코르두바(코르도바), 카르타고 노바(카르타헤나), 히스팔리스(세비야), 말라카(말라가) 등인데, 메리다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베리아 반도를 망라하는 로마 도로망의 ‘요충'이 되어 있었다. 서쪽으로 뻗어 있는 로마 가도를 따라가면 올리시포(오늘날의 리스본)에 이른다.
황제 속주와 달리 원로원 속주에는 ‘전방'이 아니라는 이유로 군단을 주둔시키지 않는다.
변경인 루시타니아의 경우, 총독 휘하의 군사력은 기껏해야 1개 중대 정도였을 것이다. 로마군에서는 8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는 ‘백인대'(켄투리아)가 중대에 해당하는데, 지휘는 백인대장이 맡는다. 갈리아의 주요 속주인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에도 1개 대대, 1천 명의 병사 밖에 주둔시키지 않는다. ‘전방'에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제국전체의 방위전략에서는 로마화가 진행되어 평온한 숙주에까지 군사력을 배치할 여유가 없었다. 루시타니아속주에 근무하는 군단병들도 본국 이탈리아 출신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로마 시민권은 세습권이다. 군단에서 만기 제대한 뒤 퇴직금으로 땅을 받아 이주한 퇴역병들은 현지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나 손자나 증손자도 어엿한 로마 시민이다. 로마 시민권을 가져야만 군단병이 될 수 있다. 오토 휘하에서 루시타니아 속주의 질서를 지키는 것도 에스파냐 태생의 로마인들이었다. 100명도 채 안되는 군단병을 거의 같은 수의 보조병이 지원하는 체제는 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군단과 마찬가지였다. 보조병은 퇴역한 뒤에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지만, 현역으로 있는 동안은 로마 시민이 아니다. 속주민들 사이에 반로마 움직임이 일어나는 경우, 공격의 표적이 될 게 뻔한 총독을 지켜주는 것은 군단병이지만, 이들은 현지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어서 현지인 쪽에 붙을 가능성도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낙하산을 타고 적진 한복판에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속주 총독들이 선정을 베풀려고 애쓰는 것은,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뒤에 속주민에게 고발당하여 법정에 서기가 싫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임기 중에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라도 속주민의 불만을 사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이다.
동기가 무엇이든, 젊은 총독 오토는 속주 통치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게다가 속주민의 뜻에 영합하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고, 속주를 구석구석 시찰하면서 필요한 지시를 내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로마식 통치법을 관철했기 때문에 수도 로마에서도 평판이 났다. 플레이보이의 표변이라고, 여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였다.
그 10년 동안, 오토는 아내 포파이아가 네로 황제의 공공연한 애인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정식으로 결혼한 것을 알았다. 오토는 계속 독신으로 남아 있었다. 홀아비로 6년을 살았을 즈음에 포파이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네로는 오토를 로마로 불러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 뒤 갈리아 속주 총독 빈덱스가 네로 타도의 기치를 들었고, 타라코 속주 총독 갈바가 대한 지지를 표명한 사관이 10년째 루시타니아 속주를 통치하고 있던 오토였다. 속주 총독이 세 명이나 반기를 들고, 원로원도 등을 돌리고, 근위병들한테도 버림을 받은 네로가 자살한 것은 서기 68년 6월이다. 그로부터 7개월 뒤에 오토는 갈바를 죽이고 제위에 앉아 있었다.
난세의 황제가 아니라 평온한 시대의 황제였다면 오토는 꽤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평하는 역사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오토의 불행은 제대로 정치를 시작하기도 전에 남쪽으로 달려 내려오기 시작한 ‘게르마니아 군단'에 대한 대책에 전념해야 했다는 점이다.
사실 오토에게는 휘하 병력이 전혀 없었다. 10년 동안이나 로마를 떠나 있었으니까 근위병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근위병들을 돈으로 매수하지도 않고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오토에게 진심으로 심취하지 않았다면, 오토의 명령에 따라 현역황제를 암살하는 따위의 중죄를 지을 턱이 없다. 중죄를 짓고 흥분한 병사들이 갈바파 원로원 의원들도 모조리 죽이자고 주장했지만 오토는 허락하지 않았다. 갈바의 시신을 가족에게 넘겨주고, 화장한 유골을 매장하는 데에도 지장을 받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황제라고는 하지만 갈바의 유골은 네로와 마찬가지로 황제묘(마우솔레움)에 들어가는 영예를 누리지 못하고, 로마 교외에 있는 갈바의 별장 정원에 매장 되었다.
오토는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솜씨가 좋긴 했지만, 남하해오는 게르마니아 군단은 총병력이 10만 명에 가까웠다. 오토는 먼저 남하 자체를 저지하는 방책을 쓴다. 비텔리우스에게 공동 황제에 추대된데다, 최강인 ‘게르마니아 군단'의 지지를 얻어 그 힘으로 로마에게 황제에 오르는 것 밖에는 염두에 없는 비텔리우스는 그 제의를 일축한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로마인끼리 정면으로 부딪치는 내전이 불가피했다.
오토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절이 한겨울이라는 점이다. 2월부터 3월까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한니발은 그렇게 어려운 일을 시도하여 성공했기 때문에 동시대인을 경악시켰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300년 전의 예기다. 지금은 알프스 이북에 있는 갈리아와 연락로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에, 알프스를 넘는 산길도 그때보다는 훨씬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길이 전부 포장된 것은 물론, 8킬로미터 내지 24킬로미터, 평균 16킬로미터마다 알프스를 넘는 데 필요한 물자를 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개인적으로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엄동설한에도 열흘이면 알프스를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둘로 나뉘어 남하해 오는 ‘게르마니아 군단'은 양쪽 다 수 만 명에 이르는 규모다. 봄까지 기다리는 게 상식이지만, 비텔리우스는 길을 서둘렀다. 장병들도 하루 빨리 로마에 가고 싶은 일념에 불타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쏟아지는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쪽으로 행군을 개시했다.
오토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느낌이지만, 구원은 아직 남아 있었다. 도나우강 방위를 맡고 있는 7개 군단이 오토에 대한 지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것도 ‘동방 군단' 같은 소극적인 지지가 아니라, 오토의 지위를 확실히 굳히기 위해서라면 ‘라인 군단'과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적극적인 지지였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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