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돈키호테 - 민진홍 재원산업개발(주) 회장
민진홍 재원산업개발(주) 회장
김포는 총선 전 서울편입 문제가 이슈가 돼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전에는 조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 보는 접경지로만 알려진 도농복합도시이다. 남쪽은 드넓은 김포평야, 북쪽은 조강을 중심으로 물류 하역하는 부유한 농촌이었으나 6.25이후 남북이 갈라진 후로는 뱃길도 끊기고 사방은 철조망이 쳐진 가난하고 외딴 산골로 전락했다.
훗날 ‘종로의 돈키호테’라는 별명이 붙은 민진홍 회장은 6. 25 다음 해에 태어났다. 부모님은 약간의 농토를 가지고 농사를 지으면서 국수를 만들고 참기름을 짜는 방앗간을 하다가 나이가 드시자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셨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시도 때도 없이 북쪽에서는 대남확성기로 남쪽을 비난했는데 ‘박정희 괴뢰도당을 쳐부수자!’ 라고 선동하는 인민군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삐라가 살포되어 산과 들에 떨어졌고 학교에도 날아왔지만, 내용은 보지도 않고 선생님에게 드려야 했다. 밤이 되면 집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간첩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무섭기도 했고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늘 공포 속에 살아야 했지만 즐거운 추억도 있었다. 눈이 오면 무릎까지 쌓였는데 봄이 오면 지붕 위의 눈이 녹아 고드름을 만들었다. 한강의 꽁꽁 얼었던 얼음이 녹으면서 흘러내리는 모습(유빙)도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날씨가 풀리면 중고생과 청년들이 가마니와 마대를 들고 신리(마근포리)로 갔는데 그를 비롯한 초등생들은 뒤를 졸졸 따랐다. 당시 주둔 군인과 주민 사이는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조강으로 가는 책문을 살짝 열어주었다. 바로 앞에 뻘이 있는데 가마니를 깔고 들어가서 웅덩이 안의 숭어 새끼를 마대로 잡는 것이었다. 잡은 고기의 절반은 군인들에게 주고 동네로 돌아와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놓고 소금을 뿌려가며 구워먹었다. 때로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챔피언전을 보기 위해 하성 만화방으로 떼지어 가기도 했다.
숨겨진 사업 재능을 발휘하다
이렇게 초등학교를 마치자 그는 곧장 서울로 올라갔다. 고향에 남아서는 성공할 기회가 없기에 모험을 하기로 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도전정신과 임기응변에 능했고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자기편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 자신감으로 김포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형처럼 기회의 땅 서울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형의 집에서 학교 다니면서 잘 살아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며 서울 생활에 적응했다.
고교를 졸업한 다음 김포의 8전 9기 별명을 가진 모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선거를 도왔으나 결과는 다섯 번째 낙선이었다. 열정을 다해 도운 후보자가 국회 입성에 실패한 뒤 낙심했지만, 기운을 차려 형이 운영하는 종로 3가의 카센터에서 일했다. 여기서부터 그는 숨겨진 사업 재능을 발휘했다.
70년대 초는 출고되는 화물차에 히터와 라디오가 장착되지 않았다. 히터와 라디오를 만드는 회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나이의 민진홍씨는 화물차에 히터와 라디오를 장착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근처 세운상가에서 수소문 끝에 일본제 중고 부품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는 차에 히터, 에어컨과 라디오가 장착되어 있었는데 폐차장에서 이것을 떼어 밀수해 오는 상인이 있었다. 이 루트를 알아내어 중고품을 대량으로 사들여 라디오는 분해해서 휘발유로 닦아내고 도금하고 라디에이터 히터도 깨끗이 손질한 뒤에 도금했다. 이렇게 새것처럼 재생한 뒤에 기아자동차 화물차 영업소에 찾아가 부탁했다.
그러자 아침이면 영업소에서 출고된 수십 대의 차량이 라디오 등을 장착하기 위해 카센터 앞에 줄을 섰다. 그 뒤 ‘세풍전자’에서 라디오를 제조해 차에 붙어 나왔지만, 히터와 에어컨은 그 후로도 장착해 큰 돈을 벌었다.
27세에는 형의 집을 나와 화곡동 주공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독립했다. 형이 그를 서울로 불러올렸듯이 그도 중학교에 다니는 막내동생을 서울로 전학시켰다. 이렇게 형제들은 자리를 잡으면 동생을 데려와 학업을 잇게 했다.
청년 민진홍은 자립심이 강하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사업을 포착하는 능력으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으니 자동차에 오디오 시스템을 장착하는 튜닝사업이었다. 카트리지를 장착해 음악을 듣게 하는 것인데 그 안에 들어가는 음악 테이프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이번에는 녹음사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에서 음향기기 풀세트를 사들여 녹음실을 만들었다. 당시는 기존 음악을 테이프에 녹음해서 판매하는 것이 불법이 아니었기에 공테이프에 녹음해 판매했다. 차 안에서 노래를 듣는 붐이 일어 택시 기사들에게 판매해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둑이 들어와 기기를 몽땅 훔쳐가는 바람에 사업을 접었고 김포로 내려와 다시 국회의원 선거를 도왔지만, 낙선하고 말았다. 불운의 연속이었지만 낙천적인 성격의 민진홍씨는 마음을 다잡고 자동차 시트에 커버를 씌우는 것이 유행임을 간파하고 종로 3가에 공장을 차렸다.
차종별로 시트 커버를 제작해 전국 카센터에 납품했다. 쌍용자동차나 현대자동차에서 출고된 차에 내부 시트를 인조가죽으로 만들어 소파처럼 꾸미는 아이디어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돈키호테 정신을 발휘하다
1997년 IMF를 맞아 거래처가 문을 닫자 대금을 받지 못하고 어음도 부도나자 할 수 없이 공장문을 닫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이 다른 사업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동네에 모 가수의 의상실이 화재로 건물을 새로 짓게 되었다. 허가를 받지 않고 짓는 바람에 불법건물이 되자 종로구청을 오가며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또 고향 집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건축의 경험을 얻게 되자 본격적으로 건축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민회장의 돈키호테 정신은 우연히 뛰어든 건축업에서 크게 빛을 발했다. 서울의 상징인 종로 중심가 일대 낡은 건물을 모두 신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대인관계에서 우호협력을, 거래관계에서 성실과 신용을 원칙으로 삼아 인연을 맺었던 종로구청을 드나들며 일거리를 찾았다. 짓게 된 건축물은 꼼꼼하고 튼튼하게 마무리해서 고객의 신용을 쌓아갔다.
사업을 확장하면서 관공서의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찾아가 협조를 부탁하는 노력으로 남보다 앞서 정보를 얻어 일거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종로에 그가 만든 소형 건물의 숫자가 점점 늘어날 때 한 가지 사건이 그를 ‘종로의 돈키호테’로 만들었다. 즉 종로는 땅을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지역으로 파다가 중단되기 일쑤였다. 이렇게 문화재가 나오면 공사를 중단하고 문화재청에서 나와 출토물을 수거하고 사진촬영으로 기록하고 나서야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건축법상으로 궁의 담장 100미터 안이라도 5층까지 지을 수 있지만 문화재법에 걸려 3층밖에 짓지 못하자 그는 문화재청, 종로구청, 종로구 의회 등을 찾아가서 항의했다. 건축업자의 이익뿐 아니라 소유주인 종로구민이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불합리한 법이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그 일을 하니 맨땅에 헤딩이요, 돈키호테 같은 일이었다.
결국, 소송까지 갔는데 서울시와 종로구청 건축과 직원, 문화재청 심의위원과 직원, 판사와 서기 등을 한데 모아 경희대학교 동문회관 옥상에 올라가 궁을 제외한 일반 건물은 문화재로서 보호가치가 없음을 확인해 주어 승소했다.
그 뒤로 민진홍 이름 석 자가 지역사회와 관청에 널리 알려졌다. 불합리한 법으로부터 구민의 재산권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 일을 계기로 사업은 불 일어나듯이 번창했다. 근린생활시설(상가건물), 신축 고시텔, 빌라건축, 낙원동 파고다극장을 상가 건물로 만들었다. 민회장 사무실 주변의 건물 80%를 신축하니 종로에서만 100여개가 넘는 상가를 신축했고 빌라건축 사업에도 뛰어들어 분양사업도 했다.
그는 서울에 살고 주로 종로 지역 건축사업에 지금도 활발히 벌이고 있으면서 재경 김포 인사들과도 교류하며 고향을 잊지 않았다. 김포시민회 사무총장과 김포시 초등학교 총동문연합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친구, 지인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이제는 의욕을 잃을 나이임에도 민진홍 회장은 여전히 활기로 가득 찬 발걸음으로 종로를 누비며 재개발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고향 김포에서 의미 있는 건축사업을 하고 싶다는 평소의 희망을 현재 아들과 함께 실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