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월(素月)이다
나는 노래했다. 봄에는 고향 평북 정주의 야산에 흐드러진 '진달래꽃'을,
낙엽 떨어지는 겨울 밤엔 어머니와의 대화를 '부모'로 읊었다. 내 시(詩) 주머니는 말 그대로 '화수분'이었다.
조국은 아름다웠지만 시대는 엄혹(嚴酷)했다.
내 나이 두살 때 나귀에 먹을 것 실어오던 아버지는 일본인 철도노동자에게 맞아 정신을 놓고 말았다.
여덟살 때 겪은 국망(國亡)은 내 육신(肉身)이 스러질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곽산 남산보통학교 나와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교장으로 계신 오산중에 입학해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한동안 일경(日警)을 피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어느 불행한 시인이 말했던가,
우울(憂鬱)은 시를 꽃피우는 자양분이라고.
오산중 교사였던 스승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나는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첫 시를 냈다.
그 후 5년간 154편을 썼다. 내 생애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1922년이었을 것이다.
그 한 해에만 '먼 후일' 등 30편을 썼던 것이다.생(生)의 화려한 날은 짧다.
1927년 동아일보 평북 구성(龜城)지국 경영에 실패한 뒤 난 술독에 빠져 지냈다.
1934년 12월 27일 이승과 하직했을 때 조선일보는 '청년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라는 기사로 내 죽음을 알렸다.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해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이던, 재질이 비상튼 청년시인
김정식씨가 침묵으로 일관하던바 뇌일혈로 급작스레 별세해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나는 세상에 아들 넷과 딸 둘을 남겼다. 그들의 소식이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에 연재된
탐방기(探訪記)-'소월의 고향을 찾아서'에 전해진 바 있다.
2004년 '문학사상'에 소개된 글은 1966년 5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 쓴 것이다.
탐방기에 따르면 장남 준호(俊鎬)는 고향 정주 곽산에서 목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아들 은호(殷鎬)는 평북 경공업총국의 상급지도원이라고 한다.
유복자였던 넷째아들 낙호(洛鎬)는 평양의 설계연구기관의 연구사라고 한다.
딸 구원(龜元)을 비롯해 영실, 정옥, 영철 등 손자들은 고향 인근 문장리에 산다고 했다.
이 글엔 내 호 '소월'이 고향 마을, 일명 진달래봉으로 불리는 소산(素山) 위에 걸린 달에서
유래했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나오고 있다.
북한에서 난 처음엔 민족주의·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됐다.
그러더니 1967년에는 돌연 봉건·유교 사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시대별로 변한 북한의 나에 대한 평가를 남에 있는 평론가 권영민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풍부한 시흥(詩興)과 고운 리듬과 절제있는 표현으로
사실주의적으로 노래했지만 그의 문학활동은 민족해방투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변천에 따라오지 못했다." (조선문학사·1956년)
"소월의 시가에 떠도는 애수(哀愁)는 잃어진 것에 대한 비애로서 극히 낭만적인 색조를
띠게 된 것이 사실이다. 사실주의적 시인인 김소월은 제한된 한계에서나마 당시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전 조선문학·1958년)
"소월의 세계관은 협애해 현실에 혁명적으로 침투하지 못했고 그의 시 문학이 구현하는
애국주의, 인민성, 생활전망성도 그만큼 제한적이어서 비판적 사실주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조선문학사·1964년·주체사상이 등장한 뒤)
"깊은 비애의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1920년대 시단에서 민요풍의 시를 개척하고
발전시켰지만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념과 인민적 입장에서 출발하지 못해 1920년대의
시대적 높이에 이르지 못했다." (조선문학사·2000년 발간본)
나는 시인의 아들이다.
소월의 삼남(三男) 정호는 소월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32년 태어났다.
두 형과 두 누나가 있었고 나중에 유복자(遺腹子) 남동생이 있었다. 18세 때 6·25가 터졌다.
그에게 어머니(홍단실·洪丹實)가 이리 권유했다.
"너만이라도 남으로 가라…." 전쟁 때 그 길은 인민군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전쟁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인의 아들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형무소, 부산과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그는 반공(反共)포로로 풀려났다.
그는 그 후 국군에 자진 입대해 1955년 제대했다. 군 복무를 마쳤지만 갈 곳은 없었다.
철도청에 근무하던 친척의 주선으로 교통부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다. 월급이 쌀 한 가마니였지만
그때 그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시인의 아들은 반년이 채 안 돼 결혼반지까지 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곤궁한 처지에 빠진 그는 1958년 동아일보의 기자에게 자신이 '소월의 친자(親子)'임을 알렸다.
그래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홍익회에서 4년을 일한 뒤 나와 레코드 외판원을 할 때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봤다.
미당은 그리 사는 소월의 아들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미당은 정호의 딱한 사정을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에게 전했다.
그들은 "소월의 하나뿐인 아들이 남에서 외판일 하는 걸 북이 알면 얼마나 악선전하겠느냐"며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李孝祥)에게 추천서를 써줬다. 그 덕에 정호는 국회에 취직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8년간 열심히 일했지만 이번엔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된 것이다.
치료비 마련을 위해 남편이 택할 길은 몇푼 안 되는 퇴직금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시인의 아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고민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것을 비롯해 소월 시비(詩碑)가 전국에만 13개나 되고 남산에 '소월로'라는 길이 만들어졌으며
1986년엔 문학상도 제정됐지만 정작 아버지의 문학을 기릴 조촐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을 아들은 안타까워했다.
한때 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지낸 이가 10억원을 모으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이가 지병으로 쓰러지자 기탁금이 전부 반환된 것이다.
8년 전 소월 탄생 100주년 되던 해 각 예술단체가 떠들썩한 심포지엄을 열고 시 낭송회를 가졌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었다. 누구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의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인의 아들은 4년 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못다 이룬 이승의 꿈은 다시 이승에 남은 아들과 딸에게로 이어졌다.
나는 시인의 손녀다.
2002년과 2007년, 소월은 한국 현대시 100년 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전문지 '시인세계'가 창간호를 냈을 때와 한국시인협회 조사 결과였다.
당시 두 단체의 설문에 국내의 내로라하는 시인과 평론가들이 대부분 참가했다.
2008년엔 KBS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시민 1만8298명이 답했는데 거기서도 '진달래꽃'이 애송시(愛誦詩) 1위였다.
그 뒤가 윤동주(尹東柱)의 '서시'(序詩)와 '별 헤는 밤', 김춘수(金春洙)의 '꽃', 천상병(千祥炳)의 '귀천'이었다.
김정호씨 사후, 소월의 혈육은 딸 김은숙(50)과 아들 김영돈(48)뿐이다.
아들은 인천시 부평에 사나 언론 접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충남 아산에 사는 김은숙은 시인에 대한 국민의 사랑을 말하자 "소용없는 얘기"라고 했다.
―서울에서 어떻게 충청도로 왔습니까.
"흘러흘러 왔어요. 남편이 무역회사, 운수업을 했었습니다. 사정이 어려워졌을 때 아는 분이 이곳에 땅이 있다길래…."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그리 어려웠나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대요.
생활은 늘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힘든 삶이었어요.
나중에 봉천동에서 독채 전세를 얻긴 했지만요."
"그건 이미 시효가 다 지나 소용없는 거고. 할아버지 때문에 돈 받아본 적은 딱 한 번 있어요.
'미스터 피자'라는 회사에서 영화배우 문근영이 출연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뭐 이런 광고를 했을 땝니다."
―가리비를 팍팍?
"그 회사 사장님이 할아버지 시를 좋아하신대요. 그래서 단어 사용료조로…."
―숙모라는 분이 소월의 모든 인세를 챙겨갔기 때문에 정작 소월의 가족들이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그 부분은….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작고한 김정호 선생은 할아버지(소월)에 대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평생 소원이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거였어요.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요.
북에 있는 형제들도 만나고 싶어했어요. 소문으론 꽤 괜찮게 산다고 하는데 웬일인지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냈는데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니 쉽게 만날 수도 있다는데, 반공포로여서 불허(不許)한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아버지에겐 그게 한(恨)이 됐을 겁니다. 전 아니지만 아버진 예술 방면에 재주가 특별했어요."
―무슨….
"아코디언 연주, 그림, 서예, 글쓰기 등 못하는 게 없었어요. 언젠가 할아버지 육필(肉筆) 원고가 나왔다고 해서 봤는데
아버지 필체와 너무 닮아 깜짝 놀란 기억이 납니다."
―김 선생 묘소는 근처인가요.
"아버진 연세 드셔서 성당에 나갔어요. 지금 모신 곳은 경기도 김포의 납골당이고,
어머니 묘소는 아산시 송악면에 있어요. 그 옆에 아버지 묏자리도 마련해 놨었는데….
앞으로 합장해드려야죠.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상해요."
―소월의 가족이란 사실이 부담이 됩니까.
"학교 다닐 때는 스트레스였지요. 소월의 손녀라는 이야기가 도니 글을 쓸 때마다 무척 신경이 쓰였어요.
아마 그런 게 없었다면 꽤 잘 썼다는 이야길 들었을 텐데 할아버지를 연상하고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게 보였겠지요."
못잊어
- 김 소월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오.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료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오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님과 벗
-김소월
벗은 설움에 반갑고
님은 사랑해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향기로운 때를
고초(苦草)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엄마야 누나야
-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김소월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나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怜悧)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스랴.
제석산(帝釋山)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부모
김소월 시/서영은 작곡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을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리라
--------퍼온 글
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