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빙점] 3. 검은 눈(雪)
석양이 비껴든 병원의 긴 복도에서 식기를 실은 손수레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게이조 옆을 지나갓다. 흰 가운을 입은 중년의 취사부 두 사람이 그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수고하는군요.”
게이조는 멈춰 섰다. 밥을 절반 이상이나 남긴 그릇과 새가 쪼다만 듯한 생선조림이 담긴 그릇이 보였다.
“이건 어느 병동 거죠?”
내과라면 담당 의사로서 식욕이 없는 환자의 이름을 알아 둬야 했다.
“이빈인후과입니다.”
얼굴이 둥글고 인상이 좋은 취사부가 대답했다.
“수고들 하세요.”
게이조는 원장실로 들어갔다.
다섯 평쯤 되는 방에는 카펫이 깔려 있고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10년 동안 변함없이 타이프라이터, 현미경, 버너, 전화기 등이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게이조는 아사쿠라 리키오의 ‘눈 내리는 이시카리 강’이라는 그림이 좋아서 몇 해째 원장실 벽에 걸어 놓고 있었다.
쓰지구치 병원은 내과, 외과, 이빈인후과, 안과, 결핵 병ㅇ동 그리고 백칠십 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거의 언제나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 대부터 결핵 병동의 50석만이 이 몇 해 동안 절반도 차지 않았다.
게이조는 회전 의자를 돌려 창 너머로 낮아진 눈더미를 바라보았다. 3월말의 눈은 매연으로 시커멓게 더러워져 있었다.
‘구급과라.....’
게이조는 오늘 사무장으로부터 구급과를 특설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교통사고가 많은 시대이다 보니 환자가 줄어든 결핵 병동을 개축하여 구급 병동으로 만드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안과 과장인 무라이 야스오가 들어왔다. 게이조는 언제 보아도 젊어 보이는, 자신보다 두세 살 아래인 무라이의 나이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 이제는 46,7세쯤 될 것이다.
“어서 오시오.”
이 사나이와도 20년 가까이 함께 지내 왔구나 하고 문득 감개 어린 생각에 잠기면서 게이조는 테이블 위의 담배를 권했다.
무라이의 수술 솜씨는 가히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따라서 원장인 게이조가 담당하고 있는 내과 이상으로 무라이의 안과는 늘 환자로 붐볐다.
게이조는 무라이와는 성격이 잘 맞지 않았지만, 무라이가 개업 의사를 밝히지 않을까 하여 가끔 불안할 때가 있었다.
“요코 양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까?”
무라이는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게이조는 화가 치밀었다. 요코의 자살 기도는 무라이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무라이가 나쓰에와 밀회를 즐기고 있는 사이에 루리코가 살해당했다. 그것이 사건의 발단이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라이가 말했다.
“그런데 마쓰자키 유카코가 죽은 지도 벌써 10년이 되는군요.”
뜻밖의 이름에 게이조는 방금 느낀 불쾌감도 잊어버렸다.
마쓰사키 유카코는 쓰지구치 병원의 사무원이었다.
“그래요? 마쓰사키가 실종된 지도 벌써 10년이나 지났나요?”
“살아 있다면 37,8세는 되었겠군요.”
무라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37,8세나 되나요?”
게이조는 병원 복도를 마치 산책하는 듯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어다니던, 머리를 길게 기른 유카코를 떠올렸다.
“원장님, 이상하게도 전 그 여자의 일만은 마음이 개운하지 않아요. 실은 3,4년 전에 마쓰사키의 묘비를 세워 주었어요.”
“뭐요? 묘비를?”
유카코가 실종된 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라이가 술에 취해 쓰지구치 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날 밤 무라이는 유카코가 게이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녀가 자신에게 게이조의 행복을 위해 나쓰에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강요했다는 것, 그런 그녀의 순결을 자신이 짓밟았다는 것, 그 후 그녀를 마음대로 농락해 왔다는 것 등을 고백했다.
게이조는 그 날 밤 처음으로 유카코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원장님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유카코는 전화로 이렇게 호소했었다.
게이조는 처녀로서는 너무나 대답한 그 말이 불쾌하여 전화를 끊어버렸었다. 그 후 유카코는 실종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내 손으로 죽이고 나서 무덤까지 만들어 준 셈이지요.”
무라이는 스스로를 비웃듯이 말했다.
“하지만 정말 죽었을까요?”
“죽은 게 틀림없어요. 입은 옷 그대로 하숙집을 나가 10년 동안 소식이 끊어졌으니까요. 아무튼 그 여자의 죽음에 관한 한, 원장님도 저와 같은 죄를 저지를 거예요.”
‘같은 죄?’
게이조는 또다시 불쾌해졌다.
‘내가 언제 너처럼 그 여자를 농락한 적이 있나?‘
자신은 유카코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무라이를 돌아보았다.
“원장님, 저 같은 인간과 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말이 영 불만이신 모양이군요.”
무라이는 게이조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아니, 그게.......난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소.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죄가 되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을 뿐이오. 설사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어째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라는 건가요, 원장님? 전 이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알게 되었어요. 남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도 역시 끔찍한 죄가 된다는 것 말입니다.”
‘끔찍한 죄?’
게이조는 무슨 당치 않은 소리냐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 무라이를 바라보았다.
“그럴까요?”
“그럼요, 죽도로 쓸쓸해하는 인간이 바로 곁에 있었는데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결국 죽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럼 유카코를 안아 주었어야 옳았단 말인가?’
자신은 무라이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고 했으나 유카코를 범한 무라이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잖소? 처자가 있는 나에게 사랑을 요구한 마쓰사키 쪽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을까요?”
“글쎄요.......그러니까 원장님은 죽도로 쓸쓸해야하는 인간이 곁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도 그쪽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거군요. 실은 말이죠, 원장님......”
무라이는 말하려다 말고 엷은 웃음을 띄우면서 한쪽 발뒤꿈치로 마룻바닥을 툭툭 쳤다.
“뭐죠?”
“남이 들어서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말이죠, 제 아내가 도망쳐 버렸어요.”
“네? 사키코 씨가 도망쳤다고요? 언제요?”
“사흘 전입니다. 감쪽같이 도망쳐 버렸어요.”
“아니, 왜 그런.......”
“사키코는 쪽지에 이렇게 써 놓았더군요. ‘당신은 저와 한 지붕 밑에 살면서 죽도로 쓸쓸해하는 제 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셨어요’라고 말이에요.”
“허, 사키코 씨가.......”
게이조는 언제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던 명랑한 사키코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유카코 얘기를 꺼냈구나.’
무라이는 사키코의 가출이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게이조는 그런 무라이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참으로 교활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카코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과 아내인 사키코의 쓸쓸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무라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런 것쯤 모르는 사나이는 아닐 것이다.
‘어째서 솔직하게 사키코가 집을 나갔으니 잘 수습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는 걸까?’
부탁을 받기는 했으나, 어쨌든 게이조 부부는 무라이의 중매자였다. 게이조는 피로연 석상에서 시큰둥하게 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리면서 축사를 듣고 있던 무라이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무라이는 사키코의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채 먼 친척인 다카기의 권유로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은 무라이다운 결혼관 때문이었다. 얼굴이나 이름을 안다고 해서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교제해 본들 얼마나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요컨대 결혼의 행불행 확률은 50퍼센트라고 무라이는 말했었다.
다카기는 친구의 집에서 무라이의 결혼관을 얘기하고 나서,
“그런 바보 같은 녀석에게 시집올 어리석은 여자는 아무도 없을 거야.”
하고 한탄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여동생인 사키코가 ‘그런 어리석은 여자’가 되겠다고 자청하여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키코는 밝고 명랑한 성격의 여자였다. 딸 둘을 낳은 사키코는 행복한 아내로 보였다. 무라이도 예상 외로 가정에 충실했다. 그것을 보고 게이조는 연애 결혼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며 무라이의 도박 같은 결혼도 잘 꾸려 가기만 하면 행복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참으로 이상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키코가 집을 나갔다는 말을 듣자 게이조는 인간 생활의 싸늘한 단면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은?”
팔짱을 끼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던 무라이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데려갔어요. .....원장님, 그 여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 아이들은 인공 수정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사랑 없이 태어난 아이는 인공 수정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거지요.”
“..........”
“사키코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도 역시 여자였어요. 여자에겐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것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중요한 모양이죠, 원장님?”
사키코는 무라이의 결혼관을 재미있어하면서 결혼했다. 그러나 실제로 결혼해 보니 그것은 결코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라이에게는 아내란 여자면 누구든 무방했다. 그런 무라이에게 사키코는 결국 절망햇던 것이다. 게이조는 무라이의 아이를 인공 수정아라고 했다는 그 한 마디 말에서 사키코의 만마디 원한을 들은 것 같았다.
“큰일이군요.”
무라이에게라고 하기보다는 사키코에게 말하는 심정이었다. 해가 저무는 병원 뜰에서 서걱서걱하고 눈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다보니 쉰이 넘은 작업부가 혼자서 거무스름한 눈으로 삽으로 퍼내고 있었다.
사키코의 가출은 뜻밖이었기 때문에 몹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놀라움이 사라지자, 게이조는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어디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인륜지대사인 결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인생에도 성실하지 못하다.’
사실 어떤 결혼이든 성공할 확률은 반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얘기이다. 문제는 결혼에 어떻게 임하느냐 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세가 된다. 게이조는 지금 새삼스럽게 무라이라는 인간의 불성실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결혼이 행복할 리가 있나?’
“어쨌든 하루 빨리 데리러 가는 게 어떻겠소?”
“가 봐야 소용없을 거예요.”
무라이는 남의 일처럼 말했다.
아침부터 내리는 이슬비가 거무스름한 눈과 뜰의 나무를 적시고 있었다.
나쓰에는 점심을 차려 놓았으나 요코를 부르러 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요코는 그 이후로도 미열이 계속되어 3학기에는 결석을 많이 한 채로 여고 2년을 마쳤다.
확실히 요코는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전의 그 생기 발랄한 요코는 아니었다. 그녀는 미열과 피로감 때문에 줄곧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좋아하던 공부와 독서도 잊어버린 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요코가 자살을 기도한 당시에는 나쓰에도 죄책감을 느껴 요코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요코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기만 했다. 살인범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좀더 기뻐해도 좋지 않을까. 나쓰에도 차츰 요코의 태도가 원망스러워졌다.
나쓰에는 요코를 자살로까지 몰아넣은 자신에 대해 나름대로 충분히 참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요코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만 잘못한 게 아니야.’
나쓰에는 차려 놓은 식탁을 바라보면서 가슴속으로 중얼거렸다. 게이조와 다카기에게도 책임이 있다. 자신은 요코를 오랜 세월 동안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딸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친절하게 대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며 또다시 지난날을 회상했다.
‘내가 마치 가정부라도 된 것 같아.’
아침저녁으로 요코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에 대해 나쓰에는 마치 부당한 대우라도 받고 있는 듯한 굴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쓰에는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여느 때 같았으면 미닫이를 열고 식사하라고 말했을 테지만, 오늘은 복도의 중간쯤에 멈춰 서서,
“요코, 밥 먹어.”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거실로 돌아왔다.
요코는 아무리 기다려도 거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쓰에는 먼저 식사를 끝냈다.
뒷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보니 다쓰코가 손수건으로 파란 레인 코트를 닦고 있었다.
“눈이 녹아서 길이 진창이 되 버렸어. 저쪽 길모퉁이에서 택시가 진창에 빠져 꼼짝달싹하지 않잖아. 하는 수 없이 봄비니까 괜찮겠지 하며 혼자 걸어왔는데, 코트만 젖고 조금도 신이 나지 않네.”
다쓰코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쓰에도 덩달아 가볍게 웃었으나,
“다쓰코.”
하며 호소하는 듯이 눈물을 글썽였다.
“뭐야? 울상을 하고. 미인은 좋구나. 우는 얼굴도 아름답게 보이니 말이야.”
다쓰코는 다정한 눈길로 나쓰에를 바라보고 곧 젖은 양말을 갈아 신었다.
“어머, 아직 점심 전이야?”
거실에 들어온 다쓰코는 식탁을 보고 벽시켸를 쳐다보며 말햇다.
“난 먹었어. 이건 요코 거야.”
“몸은 좀 어때? 아직도 미열이 있어?”
다쓰코는 요코의 방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몰라.”
나쓰에는 눈을 내리뜬 채 토라진 듯이 식탁 위를 가운뎃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다쓰코는 나쓰에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쓰에, 요코가 살아나지 않은 게 나을 뻔했지?”
나쓰에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머, 그런.......그대로 죽었더라면 나도 살아 있을 수 없었을 거야.”
“그렇지?”
다쓰코는 나쓰에를 보고 짓궂게 웃었다.
“나쓰에, 요코의 마음이 풀리지 않아 안절부절못하는 거지? ‘난 이렇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저 애는 조금도 알아주지 않아.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내가 언제까지 저 애의 비위를 맞춰줘야 하지. 이젠 싫어. 못하겠어’하고 투덜거리고 있었던 거 아니야?”
“어머, 다쓰코......”
나쓰에는 할 수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다 알아. 여학교 때부터 친구인걸. 네 심정은 이 다쓰코가 제일 잘 알고 있어.”
다쓰코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무용 선생다운 아름다운 손놀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 요코가 저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지 않아?”
“글쎄..........”
다쓰코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쓰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쓰코, 요코는 아침에 일어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 한 마디만 할 뿐이야.”
“일어나서 그렇게 말했으면 됐지. 요즘 아이들은 아침 인사도 변변히 하지 않아.”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걸. 속상해 죽겠어.”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아?”
“그야 말을 걸면 대꾸는 해.”
“그럼 됐잖아. 괜히 여러 말 할 것 없어.”
다쓰코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내리는 것 같지도 않은 비가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바보구나, 나쓰에는. 나이 마흔을 넘으면 내 입장이 돼 보라는 그런 어린애 같은 소리는 하는 게 아냐.”
다쓰코는 테이블 위에 턱을 괴었다.
“어린애 같다구, 내가? 하지만 다쓰코, 남편도 도오루는 요코만 불쌍하게 생각해. 아무도 나 같은 건........”
“가엾어하지 않는다는 거야?”
나쓰에는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나 요코의 식사를 커다란 쟁반 위에 얹어서 부엌으로 갔다. 그때 미닫이가 열리더니 도오루가 들어왔다. 흰 스웨터에 엷은 밤색 싱글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다.
“오셨어요, 아주머니?”
도오루는 인사를 하고 옆의 소파에 앉았다.
“도오루, 이젠 어른이 다 됐구나.”
“아니, 아직 어린애예요. 부모님한테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할 줄 알면 훌륭한 어른이야.”
나쓰에가 사과와 생과자를 담은 쟁반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다녀왔니, 도오루?”
“예.”
도오루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어머니를 흘끔 쳐다보았다. 도오루는 요코의 자살 미수 사건 후로 언제나 어머니를 질책하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사태를 일으킨 어머니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나쓰에는 자리에 앉아 소파에 걸터앉은 도오루를 바라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쓰코, 사과 먹어.”
하고 권했다. 다쓰코는 두 사람의 표정을 알아차렸으나,
“도오루도 먹어.”
하고 포크로 사과를 찍어 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전 방금 친구들하고 밖에서 먹고 왔어요......”
다쓰코에게서 사과를 받아든 도오루는,
“어머니, 요코는 점심은 잘 먹었어요?”
하고 나쓰에에게 물었다.
“요코는 아직 안 먹었다.”
“뭐라고요? 여태 안 먹었어요? 벌써 1시 30분이잖아요?”
하고 도오루는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불러도 오지 않는 걸 난들 어떡하니?”
나쓰에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요코 간호하느라 엄마도 피곤하실 거야.”
다쓰코가 중재하듯이 말했다.
“아주머니, 그건 자업자득이에요.”
다쓰코는 무심코 도오루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무시하고 나쓰에에게 말했다.
“이렇게 넓은 집이니 혼자서는 너무 힘들겠어. 가정부라도 두는 게 어때?”
나쓰에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다쓰코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나쓰에에게 가정부를 두라고 권했으나 그때마다 나쓰에는,
“혼자 일하는 게 마음 편해서 좋아.”
하고 말할 뿐이었다.
쓰지구치 집에는 방이 여덟 갠가 아홉 개나 되었다. 청소만도 큰일일 텐, 나쓰에는 환자인 요코를 돌보면서 부지런히 해내고 있었다.
“아주머니, 어머니는 집에 다른 사람이 오는 걸 싫어해요. 요코의 일이나 그 밖에 무슨 일이든 남이 아는 게 싫은 거죠.”
도오루는 다시 나쓰에를 흘끔 바라보았다.
“도오루도 변했구나. 무척 가시 돋친 말툰데, 그러면 요코가 더 힘들어져.”
다쓰코가 냉엄한 어조로 말하자, 도오루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당할 수 없군요, 아주머니에겐.”
“그야 당연하지. 도오루의 탯줄 자르는 것까지 보았으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어도 전 아무렇ㅈ지 않지만 말이에요. 아주머니는 뭔가 당할 수 없는 걸 갖고 있어요. 훌륭해요, 아주머닌.”
“고마워. 그럼 훌륭한 아줌마가 한 마디 하겠는데, 도오루가 어머니와 사이 좋게 지내지 앟으면 요코는 진정한 의미에서 건강해질 수 없어.”
“그건 알겠는데요, 아주머니. 어머니는 좀 멋대로예요. 요코가 울적해 있는 게 어떻다는 둥, 말을 걸어 오지 않아 못마땅하다는 둥 하니 말이에요. 만일 제가 요코라면 저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도오루에게는 도오루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겠지. 그래, 뭔지 말해봐.”
“제가 하고 싶은 말은......아무튼 제가 요코라면 지금의 요코처럼 얌전히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히 주무세요’하고 깍듯이 인사하지는 않을 거예요. 입을 꽉 다물고 있을 거예요. 자신을 자살로까지 몰아넣은 사람에게 저라면 그렇게 관대할 수 없을 거예요.”
“어머, 도오루......”
나쓰에는 굳은 얼굴을 쳐들었다.
“어머니, 전 말이에요, 어머니가 이걸 분명히 알아두셨으면 해요. 요코가 만일 살아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죽고 말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요코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구요.”
“어머, 죽이다니.......”
“그럼 아닌가요? 어머니는 그렇게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분이에요. 다행히 요코가 살아났으니까 말하자면 살인 미수인 셈이죠.”
‘살인 미수?’
나쓰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 자신이 자살로까지 몰아넣은 상대에게 비위를 맞춰 달라고 응석을 부려서는 안 돼요. 어머니는 그것만 알고 계시면 되요.”
“혹독하군, 도오루도. 그건 그렇고, 요코의 얼굴이나 좀 보고 올까.”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다쓰코가 일어나며 말했다. 기모노 차림을 한 다쓰코의 모습은 춤을 추는 듯 아름다웠다. 도오루도 따라서 일어났다.
“저도 가 볼까요?”
한시름 놓이는 듯이 나쓰에가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나쓰에를 향해 다쓰코는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언제 와도 이 집 복도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군. 엄마가 워낙 부지런하니까.”
검게 윤기가 나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다쓰코도 도오루를 돌아보았다. 도오루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도오루의 귀에 입을 대고 다쓰코는 소곤거렸다.
“도오루 넌 바보야. 좀더 어른이 되야 해.....안 그러면 좋은 색시는 얻지 못해.”
도오루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쓰코가 무슨 말을 하면 이상하게 다소곳해진다. 도오루는 문득 요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다쓰코가 눈치채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척 밝네, 이 방은.”
요코의 방 미닫이를 열며 다쓰코가 말했다. 남향의 커다란 창으로 줄기가 불그스름한 소나무 숲이 마치 액자의 그림처럼 보였다.
검은 머리칼을 베개 위헤 늘어뜨리고 긴 속눈썹을 내리 감고 있던 요코가 반짝 눈을 떴다.
“어머, 자고 있었니?”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보랏빛 꽃무늬가 있는 파자마가 요코를 더욱 가냘프게 보이게 했다. 석유 스토브의 눈금을 조정한 뒤 도오루는 다쓰코의 뒤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아주머니.”
“점심도 먹지 않고 자고 있어? 이리 갖다 줄까?”
요코는 놀란 얼굴로 머리맡에 있는 탁상시계를 보앗다.
“어머, 벌써 2시네요. 엄마에겐 죄송하지만 점심은 안 먹을래요.”
“그럼 그렇게 말하고 올게. 하지만 요코, 우유라도 마실래?”
요코는 가볍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쓸쓸한 얼굴이 되어 버렸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쓰코는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오루가 밖으로 나갔다.
요코는 옆에 놓아둔 검정색 카디건을 걸쳤다.
“미열이 떨어지지 않아 큰일이구나.”
“걱정을 끼쳐 드려서......”
“그런 생각은 그만두고 빨리 나아서 아줌마 집에도 놀러 와.”
요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오루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다쓰코는 4월에 무용 발표회가 있다는 것과 올해 안에 나쓰에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요코는 다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일 뿐이었다.
“요코, 혹시 오타루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아?”
다쓰코는 내친김에 요코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오루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요코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도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요코는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요코는 그때 이후로 여러 가지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얼마 동안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지금은 차츰 요코의 마음을 열게 할 때라고 생각했다.
요코는 맑은 눈동자로 다쓰코를 빤히 바라보다가 머리를 옆으로 저었다.
“염려할 것 없어. 도오루하고 아줌마만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 둘 테니까.”
“.........염려하는 게 아녜요.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래? 아줌마는 요코가 친엄마를 만나고 싶어도 여러 모로 눈치가 보여 고민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어.”
도오루는 다쓰코와 요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줌마....제 엄마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길러 주신 쓰지구치의 어머니뿐이에요.”
솔직한 목소리였다. 다쓰코는 너무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지. 하지만 요코는 저쪽 사람들에게 물어 보고 싶은 말도 있을 테고 요코 쪽에서 하고 싶은 말도 많이 있을 거 아니니?”
다쓰코는 지금 나쓰에의 친구로서라기보다 어렸을 때부터 요코가 따랐고, 또 요코를 아끼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었다. 요코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리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 되었다. 석유 스토브 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요코, 뭣하면 내가 찾아봐도 괜찮은데.”
말없이 창 밖을 내다보던 요코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아줌마......만일 아줌마가 남자라면.......”
“남자라면?”
“자신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에 아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몰래 아기를 낳았다면......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요코는 다쓰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요코가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데는 단지 쓰지구치 집에 대한 염려만이 아니라 더욱 준엄한 거절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다쓰코와 도오루는 알아차리게 되었다.
“글쎄, 아마도 용서할 수 없겠지.”
요코 앞에서는 허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용서할 수 없겠죠. 아줌마?”
요코는 아이를 낳기만 하고 유아원에 맡겨 버린 어머니를 어머니로 생각할 수 없었다. 어머니란 낳기보다는 길러 주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요코는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은 것이다.
지금 요코가 나쓰에를 유일한 어머니라고 한 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물론 나쓰에로부터 살인법의 딸이라고 매도당한 데 대한 깊은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자살을 기도했을 때, 이미 요코는 나쓰에를 미워하고 있지 않았다.
친어머니에 대한 요코의 감정에 다쓰코는 일단 공감을 하고 말았다.
“하긴 그렇구나. 하지만 인간이란 약한 존재야. 그쪽 어머니도 무턱대고 나무랄 수많은 없어.”
‘그럴까?’
하고 요코는 이불깃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요코는 자신이 부정하게 태어난 것이 괴로웠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괴롭고 난처하기만 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아무도 몰래 없애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뱃속에 있는 동안에 어머니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요코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코는 부모에게도 달갑지 않게 태어난 아이가 자신이며,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은 것이 자신이라고 거듭 생각해 왔다.
‘차라리 살인법인 사이시의 자식으로 태어난 편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했다. 사이시 부부가 기쁨으로 맞이한 생명 쪽이 한결 나을 것이다. 적어도 배신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행복할 것 같았다.
며칠 전에 요코는 어떤 책에서 탁태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최근 몇 해 동안에 일본에서 낙태 건수는 연평균 약 2백 50만 건에 이른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올해까지 실로 2천 수백만이라는 엄청난 생명이 태내에서 죽어 갔다고 적혀 잇었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2천 수백만의 생명에게도 다 부모가 있었을 것이다.
요코는 그 부모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도 쉽게 뱃속의 생명을 지워 버리는 여자에 대한 글도 읽었다. 자기 자식의 생명을 그렇게 간단히 없애 버리는 부모는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요코는 인간이 가진 에고의 두려움을 그 기사를 통해 확실히 실감한 느낌이었다.
‘비록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기는 했지만, 낳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요코, 그만 눕는 게 좋겠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요코에게 도오루가 부드럽게 말했다. 요코는 그의 말대로 자리에 누웠다.
“그럼 요코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거야?”
다쓰코가 이불을 덮어 주며 말했다. 요코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저.....아줌마, 사이시라는 사람의 딸은 살아 있을까요?”
“사이시의 딸?.......글쎄.”
“요코가 만나고 싶다면 내가 다카기 아저씨에게 물어 볼게.”
도오루가 성급하게 말했다.
“아니,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을 뿐이야.”
어떤 집에서 어떤 부모에게 길러져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요코에게는 사이시의 딸이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요코의 마음속에서 날로 커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