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알프스 가는 길
강 문 석
흔히들 깔딱고개라 부르는 급경사를 15분 넘게 오르면서 숨을 헐떡여도 지그재그로 연결된 가파른 등산로는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하지만 산의 고도를 높일수록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면서 가슴 벅찬 고산 정취를 안겨주었다.
겉옷에까지 땀이 배기 시작할 무렵 동녘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등산로 바닥도 차츰 드러났다. 산행 출발 때 목에 건 카메라였다. 이제 피사체를 식별할 수 있게 되자 난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지금부턴 정해진 코스만 따를 게 아니라 비경이 숨어있을 만한 샛길도 훑어야하는 것이다.
산악행사에 종종 참가하다보면 동호인들이 처음 산에 올랐을 때를 물어올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난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 산을 올랐노라고 답한다. 제복을 걸친 채로 의정부 미1군단 막사 내 병사들과 주말이면 가까운 북한산과 도봉산을 자주 올랐던 것이다. 현역 병사에게 구닥다리 리코 카메라를 구입토록 만든 것도 그때 마침 군단 내 크래프트숍craft shop에 도착한 최신형 현상인화장비였다.
당시 한국 복무를 마치고 귀국한 미군 병사들 중엔 몇 년 세월이 흐르도록 가끔씩 내가 셔터를 누른 사진으로 60년대 중후반 한국의 자연풍광을 추억하며 감상적인 편지를 보내오는 전우들도 있었다.
우리나라에 컬러사진이 보급되기 전이었던 그때, 한 번씩 코쟁이 병사들은 피엑스에서 컬러필름을 구입해서 나에게 내밀었고 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주었다. 필름을 다시 돌려받은 그들은 현상과 인화를 오키나와에 복무하는 병사들에게 맡기곤 했었다.
일행에서 떨어져 혼자 산을 오르며 난 어쩌면 세계 각지로부터 등산객이 몰리는 거대한 알프스의 등산로가 이토록 깨끗할 수 있는가에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 흔한 담배꽁초나 껌 종이, 사탕봉지 하나를 찾을 수가 없다. 일본의 산들도 오륙십 년 전까진 우리나라처럼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다는데 입장료 한 푼 받지 않고도 이처럼 깨끗한 산으로 가꿀 수 있었다니 우리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리라.
산행 시작 후 처음으로 내리막길을 만났다. 해발 1660미터인 제1벤치였다. 쉼터에다 붙인 ‘벤치’라는 이름이 참으로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주코스 전 구간을 통해 돈을 들이지 않고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미즈바水場라는 팻말이 가리키는 경사가 급한 계곡을 100여 미터 내려섰다. 거대한 빙하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손바닥으로 받아 페트병에 담는데 금세 손가락이 마비될 정도로 얼얼해 왔다.
가파른 등산로를 15분쯤 더 올랐을 즈음, 동녘 산등성이에 찬란한 태양이 솟아올랐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고산에서의 멋진 일출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카메라를 들었지만 아름드리 울창한 삼나무들이 촘촘하게 버티고 서서 셔터를 누를 순 없었다.
갑자기 숲속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옥이 구르는 듯한 청아한 새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에 날아갈까 봐 난 걸음부터 멈췄다. 전신에 아름다운 줄무늬가 박힌 호시가라스일 것 같았다.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 때문인지 호시가라스는 끝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눈부시게 비치는 아침 햇살이 울창한 수목 사이로 피어오르는 새하얀 운무를 만나면서 현란한 풍경을 만들어 가슴 뛰는 흥분을 안겨주었다. 산에서 마주치는 일본인들은 어김없이 얼굴에 웃음을 띠고 시선을 마주하면서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 온다.
처음에는 쑥스럽고 어색했지만 몇 차례 거듭되다 보니 이젠 내가 먼저 말을 건네면서 그들의 표정을 살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들 중엔 가끔씩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하면 놀라는 걸로 봐서 아직은 북알프스를 찾는 한국인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듯했다.
멀리 동남쪽 구름바다 수평선에 야쓰가다케八ケ岳 연봉과 그 오른쪽으로 거리를 두고 후지산과 거의 붙은 남알프스 13개 봉우리와 8개의 중앙알프스 고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행대장이 자주 등산지도를 펴놓고 눈으로 저울질하던 바로 봉우리들이었다.
산을 2.5킬로미터 오른 해발 2천 미터에 위치한 제3벤치에서 다시 2백 미터를 더 올랐다. 일본인들이 그토록 숭앙한다는 후지산을 탁 트인 시야로 조망할 수 있는 후지미富士見벤치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산장에서 사용하는 물품만을 수송하는 화물전용 케이블카 선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사람은 걸어서 오르내리는데 물품은 동력장치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케이블카 선로를 접하자 오래 전 중국 황산을 오르면서 목격한 중국인 인부들이 떠올랐다. 그때 인부들은 팬티만 걸친 알몸이었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 돼지토막을 어깨에 메고 급경사 계단을 올랐고 건축공사용 철근까지도 인력으로 출렁거리며 좁은 계단을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있었다. 산중 승강기를 통해 일본의 산악설비가 세계적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발 2310미터 높이의 갓센고야合戰小屋에서는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잘 익은 수박을 잘게 쪼개어 한 쪽에 800엔씩에 팔고 있었다. 중국인들만큼이나 일본인들의 빼어난 상술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쪽에 우리 돈으로 만 원이란 부담 때문에 쉽게 손대지 못하는 걸 일본 젊은이들은 예사로 사먹고 있었다. 온라인 공간에서도 지구촌 등산객들에게 ‘소금 찍어 먹는 수박’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수박이었다.
이제 산을 힘겹게 오르는 코스는 끝났다. 주능선이 시작되는 해발 2595미터 높이의 쓰바쿠로 산장에 닿은 것이다. 화강암 봉우리로 이루어진 쓰바쿠로다케2763m는 북알프스의 여왕으로도 불리는데 풍화작용이 조각품으로 만들어 돌고래바위와 안경바위란 이름까지 붙었다.
새벽부터 산을 오르며 카메라에 담을 풍광을 찾아 등산로를 자주 벗어나는 바람에 난 산행 첫날부터 체력은 많이 소진되었고 마실 물마저 떨어져 목이 탔다. 하지만 앞선 일행이 기다릴 터이니 등산로를 벗어날 순 없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쉼터마다 몇 차례 마주친 생기발랄한 일본인 커플은 내가 요청한 쓰바쿠로다케燕岳를 배경으로 친절하게 사진을 찍어주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무슨 신호라도 보냈는지 셔터를 누르기 전 여자는 재빠르게 내 옆으로 붙어서며 미소를 짓는 바람에 북알프스에서 뜻하지 않은 일본 아가씨와의 커플 사진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산을 올랐다면 이제 왼쪽으로 90도 꺾어 남쪽을 향하여 능선을 타야만 한다. 이곳에서는 북알프스 제2봉이면서도 실질적인 맹주 노릇을 하고 있는 3180미터 높이의 야리가다케槍ケ岳가 한눈에 들어왔다. 좀 멀긴 했지만 창끝처럼 뾰족하게 생긴 특이한 형상에 끌려 이동하면서도 자주 눈길이 그쪽으로 갔다.
해발 3천 미터. 식물들이 생명을 부지하기엔 너무나 척박한 사력砂礫으로만 이루어진 능선엔 바람이 얼마나 강했으면 군락을 이룬 오엽송이 모두 뒤로 드러누워 자라고 있었다. 더러는 여기저기 허연 뿌리를 드러낸 채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들도 보였다.
속세를 떠나 있는 여승들은 식물을 보는 눈도 남달랐다. 새벽 산장 출발 후 능선코스에서 잠시 맞닥뜨린 그들은 최악의 조건 속에서 용케도 꽃을 피워 지나는 나그네를 반겨주는 고산식물을 향해 흡사 귀여운 아기나 애완동물을 대하듯 “얘는 너무나 멋지게 자랐고, 쟤는 기개까지 넘치네!”라며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주능선을 오르내리면서 자세히 살피니 웬만한 봉우리 정상에는 초라할 정도로 작은 나무 팻말을 돌무덤에 박아서 언제라도 원상복구가 가능토록 했다. 일본은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해서 돌 하나도 함부로 옮기지 않는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경사가 심한 구간에도 우리처럼 계단을 만들지 않고 사다리와 쇠사슬, 밧줄 정도만 설치하고 끝낸다. - 다음에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