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해져가는 세태를 치유할 수필문학의 사명
- 윤재천(수필가, 한국수필학회 회장)
Ⅰ. 머리말
한 해 동안의 수필작품을 정리하다 보면, 한 해 농사를 보람스런 마음으로 갈무리하는 농부가 된 기분이다.
이 감정은 평생을 수필과 함께 살아온 사람의 자연스런 감회이기도 하다. 수필과 관련된 일에 애정을 느끼는 것도 이와 같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우리 수필문단은 매우 풍성했다. 이는 작품만 아니라 글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시대적 현실이며, 특히 지방문단이 활성화되면서 작품활동에 소극적이던 작가들이 새롭게 열의를 다지게 되었다.
그 동안 수필문단은 일부 작가의 활동에 의존해 명맥을 유지해 왔고, 지역적으로도 서울을 중심으로 지방 몇 곳에서만 움직임을 보여왔던 것이, 본격적인 지방 자치화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작품의 내용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재도 다양하고, 작품의 문체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다루는 제재와 주제도 다양하다.
Ⅱ. 제재와 주제의 다양화
지금 이 시간에도 이런 영업을 음성적으로 하고 있는 곳이 있다. 이곳 대전도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에는 ‘쉬었다…골목’에 근무 배치를 받았다. 무려 세 시간여 동안 이곳에서 유동 근무를 하면서 호객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들은 경찰이 나타나면 용케도 알아차리고 숨어버리고 잠시 비켜서면 또 나온다. 마치 바닷가의 엽낭게와 같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과거에 나도 이와 비슷한 골목 앞을 지나가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낯선 골목을 지나다가 막무가내로 따라붙는 호객들을 만나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많던 그 시절 도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한번 일을 저질러보고도 싶었던 충동이 강렬히 일었으나 막상 골목 안에 들어서니 음침한 분위기가 무섭고 겁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복 경찰이 경적(警笛) 줄을 뱅뱅 돌려가며 우리들 앞에 다가오지 않는가. 이때 우리들 귀에 들려온 것은 단 한마디 “요오놈들 봐라!”였다.
- 윤승원, 「빨간 띠」(수필문학 3월호) 중에서
글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경찰관임을 알 수 있다. 직업 관계로 누구보다도 사회 구석구석에 대한 사정이나 사건에 대해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다. 수필은 이런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문학 장르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문학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 중에 하나가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삶의 유형에 대한 구체적 탐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회의 그늘진 구석을 고발할 목적으로 나름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마지막을, ‘빨간 띠’를 붙여야 할 곳은 비디오 테이프가 아니라 우리 “어른들 모두의 가슴”이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오늘의 우리는 그것이 연령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는 하나, 어른으로서 떳떳하게 행동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있으면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자성(自省)과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가책을 느끼지 않고 누군가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글은 작가의 의도가 사회적 파문을 일으킬 의사가 없는 관계로 처음부터 조용한 목소리로 일관되지만, 글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힘이 수필이 궁극적으로 창조해야 하는 힘이다. 평범한 것을 가지고 비범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의 운전 솜씨는 일품이다.
내가 자동차 운전에 대하여 뭘 잘 알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운전석 옆에 앉아 있으면 그냥 느낌으로 오는 안정감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술이 많이 취한 상태로 핸들을 잡아서 차가 비틀거릴 지경이라도 곁의 사람이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고 실제로 운전경력이 많고 무사고 운전자라고 모두 인정하는 사람이라도 마음 푸근한 느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초보운전 딱지를 달고 다니는 처지라도 마음 느긋한 믿음을 주는 이가 있는 걸 보면 내가 말하는 운전 솜씨가 기계조작의 능숙, 미숙을 일컫는 무엇이 아니라 그의 인격에서 풍기는 어떤 느낌일 게 분명하다.
- 임명희, ‘존경하는 까닭’(수필문학 5월호) 중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어린 눈빛이 이 글의 주된 정서다. 극도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경멸의 대상이고, 불만을 갖게 하는 것인데, 그것에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축복받은 삶이다. 이 글의 작가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그를 실천해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는 진실을 찾아내는 일이다. 미래를 위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다.
더러운 것이든 버려진 것이든 수면 아래로 잠기면 뭇 소음은 가라앉고, 강은 그들의 우수를 진정시키는 서정의 시를 만든다. 대지에서 버림받은 황토덩어리인들, 시들어 뽑힌 잡초인들, 강둑에 내다버려진 흉물스러운 잡동사니마저 물의 속살 속에서 안식을 취한다. 이토록 강의 심성은 헤프다 하리만큼 깊기만 하다.
짐승이나 초목만이 강이 풀어내는 노래로 갈증을 지우지 않는다. 어쩌면 강이라는 생명수에서 번성한 오만스러운 인간이야말로 한동안 외면했던 적요의 강변에 서고 싶은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상처받은 사랑을, 헛된 땀방울을, 이해받지 못한 눈길을, 격정의 순간이 남긴 아픔을 호소하려는 마음을 품는다. 허락만 된다면 하소연하지도 못하는 사연과 배신당한 눈물마저 강물이 거두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박양근, 「흐르지 않는 강」(한국수필 3,4월) 중에서
이제까지의 관념화되어 있는 수필의 본령은 표현에 있어 우회의 기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타포는 시에 있어서나 적용되는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메타포 문학의 추세는 그런 편견을 무너뜨리고 있다. 위에 인용한 글은 그런 유형의 대표적 작품이다. 그는 눈에 드러나는 현실의 강과 마음에 존재하는 상상의 강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를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오늘의 수필이 고도의 문학성을 향해 힘찬 항해를 하고 있는 증거로 인정해도 좋다.
문학의 바람직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편견의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스스로 움츠러 들어서는 그 어떤 기대도 충족시킬 수 없다.
박양근의 가슴에 고여 있는 흐르지 않는 강은 그 침묵을 벗어버리고 흐름을 시작해야만 한다.
18세기 이후 급격히 인구가 증가되었는데 그 이유는 식량생산의 증가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전에는 논에 벼를 직접 뿌리는 직파법에서 18세기에는 모를 심는 영농법이 개발되어 보리를 베어낸 후 모를 심는 이모작으로 식량생산이 증가되고 더구나 감자와 고구마의 수입은 식량 증산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식량 증산에 따른 인구의 증가를 좋은 현상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사람이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다면 땅 위에는 마치 콩나물 시루같이 사람으로 빼곡할 것이다.
만약 썩는 것이 없다면 지구상에는 각종 곤충과 짐승과 사람의 시체들로 발 디딜 곳이 없을 것이다.
- 서정범, 「우주에 떠 있는 하나의 별」(한국수필 7,8월) 중에서
문학은 지구와 우주를 채우고 있는 존재가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고민하는가를 말해주는 전령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이 수많은 선으로 연결되어 그 인연의 끈을 잡고 삶을 살아가듯, 우주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그 연결고리를 통해 실존의 의미를 확인하고 있다. 우리는 한 순간도 그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사실이 우리를 절망시키고, 들뜬 기분을 갖게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문학은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수단이고, 눈에 보여지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황폐해진 우주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이 작품은 그 같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환경에 대한 문제는 어떤 현안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중요한 선결과제다. 그만큼 현재의 처지가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십일월에는 모든 것이 침묵한다. 벌레소리가 침묵하고 나뭇잎들이 침묵하고 사람들이 침묵한다. 비밀스럽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목을 움츠리고 어딘가를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감시자의 눈을 피하듯 굳게 닫힌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내려진다. 동화 속에 나오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처럼 멀지 않아 성큼 겨울이 다가서리라.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여름내 분별없이 늘어놓았던 헛된 약속들은 모두 낙엽과 함께 떨구고, 그리고 조금씩 가벼워져야 한다. 십일월이 오면 질경이며 스크렁이며 강아지풀이며 명아주 같은 것들조차 버릴 줄을 안다. 씨앗을 털고 여름 동안 턱없이 비대해진 줄기 같은 것도 풍장하듯 바람에 맡긴다.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하얀 억새의 저 가벼운 몸짓처럼 구름이 가벼워지고 그 위를 날아가는 철새들의 깃털이 가벼워지고 그리고 우리도 가벼워진다.
- 손광성, 「십일월이 오면」(수필공원 겨울호) 중에서
가득 채워진 것보다 비어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지니고 있는 것이나 지니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지혜나 처세 철학이 한낱 미물들이 소리내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문학은 요란한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된다. 편안한 상태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귀띔이 되어야 한다. 손광성의 글은 그런 내용을 담은 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가슴에 어리는 상념을 기록한 이 글은 우리에게 삶이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하고, 그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일깨우고 있다.
문학의 본질적 관심은 우리의 주변을 떠날 수 없고,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관심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조급하고 사악해진다. 이 글은 그 같은 우리를 나직한 목소리로 타이르고 있는, 자성(自省)을 촉구하는 작품이다.
그 하구를 시원스레 준설하여 물길을 뚫어주거나 중랑천의 혈맥이 보다 깨끗하고 창쾌(暢快)하다면 거기에 서울의 토사나 쓰레기가 찌꺼기나 부스럼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두 줄기 강이 내려와 거기서 합수하지 않았더라면 저 비운의 겨울 섬은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만든 것은 사람일 수도 자연일 수도 있겠다.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면 욕심과 게으름의 탓이요, 물길을 제 마음대로 흐르지 못하게 막은 탓일 것이다. 자연이 만든 일이라면 아무 할 말이 없다. 오직 저 하늘이 만든 일에는 고분고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겨울 한철, 저 중랑천에 돋아난 고구마 섬은 나에게 분명한 하나의 풍경이다. 그것이 비록 합수점에 돋아난 암이요 패잔병들의 수용소일지라도, 그 민둥한 돋대(墩臺)에 하얗게 모여 있는 햇빛과 철새를 지울 수 없다.
- 허세욱, 「겨울에 돋는 섬」(수필공원) 중에서
퇴적된 문명의 잔재로 인해 야기된 진풍경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작품이다. 보이지 않던 섬이 나타나 우리의 시야를 막고 있는 것은 이 ‘고구마 섬’만은 아니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퇴적된 정신적 잔재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조용한 힘을 지닌 작품이다.
현실에서 문학이 담당해야 할 일은 우리의 주변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일에 바쁘다 보니 챙겨야 할 일들을 버려둔 채 살아왔다. 그 중에 하나가 문명과 정신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있던 것이 갑자기 없어지거나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 인연을 끊는 것이 아니듯, 포장된 문명의 한 켠에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는 아픔의 잔재가 존재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다 제풀에 풀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암덩어리처럼 무서운 횡포의 칼날을 들고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낼지도 모른다.
이 글은 우회적으로 우리의 우매함을 꾸짖고 있다.
이런, 서로 엇갈린 생각을 하며 고향을 다닌 지 십여 년 되는 어느 추석 때였다. 그 해도 어김없이 고속도로로 출발하였으나 정체현상 때문에 국도로 접어들었다. 작은 언덕 위 버드나무 아래 까만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과 황소가 큰 눈을 껌벅이며 지나가는 차들을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도로를 끼고 있는 작은 집은 하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있고, 마당 왼쪽에는 허름한 외양간처럼 보이는, 반쯤 허물어진 초가집이 있었다. 초가집 지붕에는 박넝쿨이 얹혀 있고, 키 큰 해바라기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해바라기 옆에는 닭벼슬 같은 빨간 맨드라미가 해바라기에 질세라 꽃잎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었다. 보아오던 이맘때쯤의 모습인데 그 해에는 유난히 정겨워 보였고 평온해 보였다. 지는 해를 받아 황금빛 물결이 반짝이는 강가에 차를 세우는 남편에게 물었다. 고속도로와 국도의 장단점을, 남편의 대답은 국도는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며 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고, 반대로 고속도로는 빠르기는 하지만 쉬지 않고 기본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 가야 하기에 재미가 없다는 것, 그리고 앞만 보고 달려야 하기에 너무 피곤하다는 것이다.
- 반숙자, 「국도와 고속도로」( 창작수필 여름호) 중에서
문학이 담당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잊혀지거나 사라져가는 것을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하여 남기는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반숙자의 시도는 의미 있는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첫발을 딛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적 고향의 정경을 색채를 섞어 그리고 있는점, 계절의 풍경을 그림을 그리듯 펼치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사람은 앞을 향해 질주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때로는 그 반대의 모습을 연출하면서 애정어린 모습을 통해 진실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권태롭게 느껴질 때 원시의 공간을 찾아가 그 무한한 자유에 흠뻑 젖어보고 싶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작품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전달해 준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나는 지금도 일곱 살이 된다.
왼종일 함박눈이 내렸다.
날이 저물어서야 눈은 멎었다.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때문에 저물어도 깜깜하지 아니했다.
다른 날 같으면 벌써 잠자리에 들 시간이건만 아버지도 나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먼산 위로 달빛이 산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아래 가까운 숲엔 눈송이를 뒤집어 쓴 나무들이 반짝였다. 그 앞의 낮은 울타리가 우리 집까지 길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때 조용함을 깨는 기차 소리가 눈 덮인 우리 마을을 울렁울렁 흔들며 다가왔다. 그러자 개 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왔다.
- 유경환, 「일곱 살」( 창작수필 여름호) 중에서
문학이 다른 분야에 비해 독특한 면이 있다면, 상상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음껏 그 나래를 펴볼 수 있는 점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과거에 거처했던 곳을 찾아가 그 안에 마음껏 안겨보는 일이다. 유경환의 이 글은 그런 면에서 문학의 순기능 중 어느 한 일면을 제시하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상상을 통해서 그 시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현대인이 짙은 고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 같은 서정을 잃고 살기 때문이다. 한치의 여유도 없이 일에 쫓기고, 그를 피해 살면서 우리는 그 함정 속으로 몰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이 해야 할 일은 잃어버린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게 하는 일이다.
금은 약제로도 쓴다. 동의보감에 풍이나 간질, 정신질환에 신경안정제로 특효가 있다고 쓰여 있다. 우황청심원과 은단 코팅에 금이 함유되어 있으며, 노화방지 화장품에도 사용한다. 요즘은 첨단산업인 컴퓨터칩에도 필요하다. 이렇게 금의 용도가 다양하고 귀금속으로도 손색이 없어 누구나 탐내지만, ‘황금을 돌같이 보라’는 격언처럼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다.
조선조 말엽 판서를 지낸 김학성(金鶴聲)은 어린 시절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비 오는 날 밤, 처마 밑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이상하게 들려 김학성의 어머니가 그 밑을 파보니 커다란 금덩어리가 묻혀 있었다. 그녀는 금덩이를 그 자리에 다시 묻고 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했다. 금덩이로 집안이 넉넉해지면 아들이 딴전을 부리고 공부를 게을리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김학성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옛집에서 금덩이를 찾아 어려운 이를 도왔다는 일화가 있다.
- 최경희, 「노다지」(현대수필 겨울호) 중에서
사람은 사람을 통해 자신을 완성한다. 문학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인격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본질적 탐구를 목표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어려움은 마땅히 들어서야 할 길로 접어들지 않고, 길이 아닌 곳을 길인 줄 알고 선택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길다운 길을 안내하는 일종의 이정표다. 가진 것보다는 갖지 않은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지름길을 찾느라 동분서주하는 것보다는 시간이 걸리지만 여유 있게 돌아갈 줄 아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고 역할이다. 최경희의 글은 이러한 면에서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학처럼 백합처럼 하얀 드레스 속의 천사 같은 신부 모습이 카메라 앵글에 투사되어 아름답다. 곁에는 흡족한 표정으로 포즈를 함께 잡아 서는 신랑의 동작이 부지런하다.
우리 나라의 신혼부부가 결혼식 전에 경치 좋은 고궁이나 공원을 찾아 기념촬영하는 것을 외국 여인의 시각으로 본 텔레비전 리포트 장면이다. 예식복장을 갖춘 이들을 보고 리포터는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느냐”고 묻는다. 물론 아니라는 대답이다. “그러면 결혼식은 언제 어디서 하느냐”고 다시 묻는 외국 여인은 호기심 많은 어린이 같다. 혼례식은 내일 예식장에서 별도로 행해질 모양이다.
- 정영휘, 「박제된 영상물」(현대수필 겨울호) 중에서
우리는 특정 제복이나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에 대해서 관대할 만큼 모든 것을 허용하는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이 작품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외국인의 눈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결혼을 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일생일대의 대행사이고, 영원히 추억거리가 될 아름다운 일이지만, 남의 눈에는 의례적인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감내하면서 당사자의 기분을 맞춰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지탄받아야 할 횡포다. 그러한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요즘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글의 기능은 쾌락적인 면과 공리적인 면에서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면에서, 이 글은 후자에 속한다. 그것은 계도적 역할을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문학이 한 시대의 잘못된 처사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고, 개선을 강변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입증하는 예이며, 긍정적으로 인식해야 할 특성이다.
대숲에서 스며나온 늦가을 바람이 마당을 한 바퀴 휘익 둘러보더니, 외양간을 기웃거리고는 그냥 나가기가 서운한지 가죽나무 끝에서 잎새 몇 장을 떨어뜨린다. 속이 휑한 나무지만 밑동에서는 아직도 가지 두엇이 돋아나 앙상한 팔로 하늘을 더듬고 있다. 지게질로 뼈마디만 키워온 외숙의 팔다리 같다.
애초에 대숲에다 터를 잡았는지는 모르지만, 외갓집 대숲부터 떠오른다.
“야, 이놈아, 가만히 좀 둬. 소도 먹어야 심(힘)을 쓰지.”
여물을 먹는 쇠눈깔을 대나뭇가지로 찌르려는 장난을 말리는 외숙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감긴다.
- 유영국, 「외갓집 풍경」(수필과 비평 3, 4월) 중에서
이 작품은 우리들의 ‘외갓집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 글이 그리고 있는 정경은 숙명처럼 짓누르고 있는 가난 속에서도 불만 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주인들의 이야기를 제재로 하고 있다. 수필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는 시간이 경과하면 영원히 우리의 곁을 떠나는 모습을 사진 찍듯 생생하게 기록하여 보존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뿌리를 그리고, 그 동안 살아온 흔적을 기리고 기념하여 정체성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온기어린 것으로 만들어 갈 때, 그 체온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는 작품이다.
몇 해 뒤 아버지는 다른 여성과 새살림을 꾸리고 배다른 동생도 생겼다. 여러 차례 일본으로 밀항을 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번번이 붙잡힌 까닭이다.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지원 입대하여 군복을 입는다. 김수병은 이따금 내 하숙방에 와서 신세를 한탄하며 훌쩍이곤 했다. 무엇을 믿는지, 해군에 있는 동안 일본으로 꼭 가겠다는 속심을 내비쳐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새어머니의 여동생, 이를테면 이모뻘 되는 이가 있었다. 휴일에 이모를 만나면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듣는다 했다.
- 정원모, 「가을에 쓰는 편지」(수필과 비평 11,12월) 중에서
세상을 사는 동안 겪게 되는 만남과 헤어짐은 형벌이 아니라, 자연스런 인간사이다. 사람은 저마다 소설 같은 이야기를 가슴에 안고 살기에 정원모의 서사는 그만의 이야기지만, 그가 알고 있는 어느 지인의 일화이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사람의 편린일 수도 있다.
사람은 언제나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갖고 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혜를 자신의 삶에 필요한 에너지로 삼고 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일들을 반추시켜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때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늪으로 내몰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슬픔은 감정을 정화시키는 힘을 보유한 추상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증세는 조금씩 심해졌다. 더듬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면 더욱 더듬게 되는 묘한 심리에 끌려다녔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나의 상태는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말더듬이를 고칠 수 있다는 광고가 잡지에 보였다. 책을 읽고 고칠 수도 있고 교정소에 다니면 더욱 확실하다고 장담하였다. 교정소에 다니거나 책을 살 형편은 못 되었으나, 나는 그 광고를 읽고 또 읽었다. 광고에 따르면 말더듬이의 원인은 열등감에 있었다. ‘대인공포’의 심리가 그 원인이라 표현한 광고문도 보였다.
- 김태길, ‘열등감’(계간수필 봄호) 중에서
이 글의 마무리를 작가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각 제 모습을 따라서 살면 그만이다. 따지고 보면 자랑할 일도 없고 기죽을 일도 없다”고 하였다. 이어 ‘그러나’라는 접사를 붙인 후 몇 마디를 첨부하고 있으니 이것이 온당한 작가의 순수 의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부분이라 인용하였다. 글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야 한다. 어느 경우나 상대의 마음에 드는 말만을 골라서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인생의 경륜이 높은 분이나 고매한 인격을 갖춘 종교인의 말을 듣게 되면 신뢰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에 의해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회와 독자를 위해 문학이 해야 할 역할이다.
사회 현실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것만으로도 귀한 일이 될 수 있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아 남의 마음에 공연히 그늘을 지게 하는 일보다는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것은 문학의 공리적 기능으로 보아도 좋다.
새벽에 달리기를 시작한 지 꽤 되었다. 한때는 지리산도 거뜬히 넘을 정도로 체력이 단단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조금만 걸어도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몸의 기능이 현저히 저하된 걸 보고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운동을 권유했다. 아니 그건 권유가 아니라 당장 시작하라는 명령이었다. 워낙 산을 좋아해 집을 구할 때도 학군보다 주위에 산이 있나 먼저 살폈던 나였는데, 이젠 누가 등산을 하자고 하면 빠질 궁리부터 하게 되었으니….
아직 어린 내 딸의 친정어머니 노릇을 재대로 해주려면 팔팔하게 살아야지. 일찍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아버지 없이 결혼한 나는 서러움을 톡톡히 겪었다.
- 정선모, 「새벽 운동장」 (계간수필 겨울호) 중에서
건강의 중요성을 새롭게 하는 작품이다. 누구나 건강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면서도 일에 쫓기다 보면, 생각만으로 그치는 것이 보통이다.
모든 문학이 그렇지만, 수필만큼 사람에 대해 절실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예는 흔하지 않다. 그것은 수필이 우리의 삶 자체를 제재로 한 문학이며, 자기 속내를 드러내기에 적절한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라는 제언처럼 이 글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이처럼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답다는 것도 기준이 맞아야만 한다. 품위 없고 천박성을 띤 미인이라든가, 우정을 가장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이란든가, 미사여구로 수식어만 늘어놓은 지나친 화려체 미문은 품위가 떨어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에서 제외된다. 정말로 아름다운 여인이란 품위 있고 따뜻하며 인정이 많은데다 우아한 기품을 지닌 지성적인 여인을 말한다. 또 아름다운 문장도 간결한 함축 속에 사회와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과 인생의 깊고 오묘한 여러 문제들을 감동적으로 다룬 글을 말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과 아름다운 글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순화시킨다.
- 김정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기쁨’(월간문학 2월호) 중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기에 대한 절제와 남에 대한 헌신적 태도를 동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람과 꽃을 비롯한 자연의 경우도 예외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요즘 새로운 풍조 중에 하나는 자기 자신을 과신하고, 남을 경멸하며 우습게 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여인들은 지나치리만큼 밖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에 신경을 쓰고, 남자들도 여자를 능가할 정도니, 어느 상황에까지 이를까. 여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자중하고 자기발전에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처지는 어떻게 될까.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이 아니라면 그것은 한낱 자기의 열등한 부분을 가리기 위한 값싼 치장에 불과하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참다운 의미의 미학자가 될 때, 우리의 사회는 살고 싶어 사는 곳이 될 수 있다.
낮은 층계를 내려와 강가를 걸었다. 강물은 오후의 햇볕을 받아 반짝였고 잔물결이 일고 있는 물 위에서 천둥오리들이 놀고 있었다. 아직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안 되었는가 보다. 층계에 앉아 그들의 한가로운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마리씩 교대로 머리를 숙이고 물 속으로 첨벙 들어갔다 나왔다 헤엄치며 노는 그들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생각이 켜켜로 쌓여 가슴 밑바닥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람선이 지나가면서 만든 파도로 그들의 유희도 끝이 났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들을 바라보며 일어섰다. 고수부지에 있는 텃밭의 한 켠에서 여인들이 앉아 무엇인가 캐고 있었다. 밭으로 들어가서 무엇이 있는지 나도 찾아보았다. 푸릇푸릇한 풀 사이에 냉이와 작은 봄나물들의 새싹이 섞여 있었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며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데 한 일은 없고 조바심이 났다.
- 박명순, 「불꽃」(월간문학 12월호) 중에서
사람은 때로 자연을 통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안을 받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정반대의 경우에 놓이기도 한다. 계절의 변화와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막연히 빠른 것이라고만 생각한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삶이 남기는 흔적을 통해 한없는 만족감에 젖어보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일상의 기대와는 달리 언제나 절망을 체험할 때가 많다. 그 무엇을 남기기에는 시간이 빠른 이유 때문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욕심이 많기 때문이다. 자기 감정에서 헤어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부터 위로하는 글일 때, 그 글은 사람의 가슴에 한 송이 꽃으로 남게 된다.
Ⅲ. 지역별 작가의 활약상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중앙문단이니 지방문단이니 하는 구분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마는 통상적으로 그 말이 버릇처럼 쓰이는 실정이니, 이 글에서는 그런 구분을 없애기로 한다. 지방문단은 그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고, 향토인의 우정이 돈독하여, 그 자체만으로도 부러울 때가 있다. 바다와 산을 끼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세계가 펼쳐지니, 그것은 하늘이 내린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지방 자치제가 정착되면서 발표지면에도 많은 변화가 일고 있어, 지난해에는 괄목할 결실이 있었다.
지역별로 작가의 활약상을 기려보기로 한다.
우린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서둘러 돌아올 채비를 했다. 새벽 어둠이 벗겨지자 안개가 가득했다. 안개 사이로 햇살이 비추어 들면서 장관을 만들었다. 그렇게 추도는 신비스러워졌다.
인사를 하고 나서는 우리에게 서둘지 말라고 하며 안개가 끼면 배가 뜨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를 걸어 내려왔을까! 안개가 거짓말처럼 걷혔다. 돌아보니 그녀의 꽃밭만이 보였다. 그리고 유난히 짙은 치자꽃 향내가 우리를 따라 내려왔다. 이장 집에 들러 우리는 추도를 빠져 나오는 배를 탔다. 멀어지는 섬을 좇으며 다시 와서 오두막 한 채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이 섬에 다시 오기까지 오 년이 걸렸노라고 했다. 집에 와서 하루가 지나고 해월 씨에게 전화를 했다.
- 박문자, 「우리의 삶은 이어도를 꿈꾼다」(부산수필문학 제8호) 중에서
작가가 오랫동안 동경하던 ‘추자도’에 다녀와 그 감회를 기록하였다. 이 글은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한없는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따사로운 인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을 갖게 한다.
자연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고향이고 어머니이다. 산과 바다가 현대인에게 각광을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문명이 인간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해도 인간은 자연의 품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동양에서는 인간 자신이 자연의 일부로 보기 때문이다.
부산이라는 풍토적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수덕여관!
우리 일행은 일부러 이곳을 찾았다. 초가집에, 냄새가 코를 찌르는 화장실, 구멍이 숭숭 뚫린 창문, 어느 것 하나 여관다운 느낌이 들지 않는 곳이었지만, 굳이 고집하여 찾아든 것은 전국 유일한 초가집 여관이라는 매력보다는 더한 호기심이 우리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만리포 해수욕장의 낙조에 취하다 허위허위 달려와 찾은 시각은, 저녁밥이 한참이나 식어버린 밤 10시, 그래도 불평 없이 맞아주는 여관주인의 환대에 우린 주린 배를 채우고 여관 앞 평상에 앉았다. 비가 내린 뒤라 모기도 별로 없고 수덕사 뒷산에서 발원함직한 개울물 흐르는 소리만 졸졸 여수를 돋운다. 칡술에 별미인 더덕구이를 안주삼아 몇 잔 기울인 후 일행들을 뒤로 한 채, 넓은 바위로 향했다.
- 김동원, 「문자 추상에 담긴 사연」(부산수필문학 제8호) 중에서
만리포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이응로 화백의 조강지처가 어렵게 꾸려가는 ‘수덕여관’과, 이 여관의 주인이 화백과의 눈물겨운 사랑의 일화를 소개하는 글이다.
누구나 자신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빌며 운명의 문을 열고, 굴곡 없이 평탄하게 전개되기를 소망하지만, 모든 것이 한낱 기대에 그치고 말 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원망과 저주보다는 한때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헌신적 사랑으로 아픔을 감싸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 사랑은 아름다운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문학은 감동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필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윤리와 도덕이 아닌 적나라한 진실을 통해 발아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덕여관의 주인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길을 가다가 말고,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쇠똥구리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도대체 이 구린내 나는 오물을 말아다가 무엇에 쓰려는 것일꼬. 이놈은 톱니 모양의 다리를 잽싸게 놀려가면서, 제 몸뚱아리보다도 더 큰 쇠똥 덩어리를 아주 능숙한 솜씨로 굴려가고 있었다. 흙바닥에는 드문드문 쇠똥이 흩어져 있었다. 여러 마리의 쇠똥구리가 여기저기 오물 속에 파묻혀 쇠똥을 만다. 뒷다리를 땅에 붙이고 앞다리를 쇠똥 덩어리에 걸쳐, 초등학교 운동회 때 종이공을 굴리던 아이들처럼 쇠똥을 굴린다. 어떤 놈은 아예 쇠똥 덩어리를 타고 올라가 곤두박이를 치는가 하면, 어떤 놈은 여기에 거꾸로 매달려 가재처럼 뒷걸음질을 치기도 한다.
- 이주희, 「쇠똥구리는 쇠똥구리로 살고」(영남수필 제30호) 중에서
쇠똥구리와 나비의 살아가는 모습을 서로 견주며 인간의 선입견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가를 지적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모든 사물의 실체와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다. 이것은 어느 누가 보아도 오류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작품이 수필다운 수필의 본령에 근접하는 글이다. 삶의 허황된 일면을 밝히기 위해서 성현(聖賢)을 들먹거리거나, 유명인사의 조언도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그들도 인간의 이기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 스승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쇠똥구리인지도 모른다.
문득 백화점 옆 골목, 꽃을 팔고 있는 여자들 곁에서 “익은 열매 사시오”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시 한복판, 붐비는 인파 사이에서 조심성 없이 외치고 있는 여인의 소리는 산골의 물소리처럼 생경하게 들렸다. 그 여인은 온몸에 농사꾼 티를 풍기며 화려한 꽃 덤불 옆, 곁자리에서 시골의 토담처럼, 그러나 당당하게 버티고 앉아 가을 열매를 팔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었다. 나의 시선을 의식한 여인이 치마를 끌었다. 그의 투박한 손끝에서 나의 옷은 구겨지고 그 구겨진 치마의 원색무늬가 문득 쓸쓸한 바람을 가슴속에 일으킨다.
나를 붙잡은 그는
“이것은 산수유. 이것은 오미자. 이것은 산머루” 하며 열매의 이름을 순서대로 불러대었다.
- 정혜옥, 「익은 열매」(영남수필 제30호) 중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고 보람을 느끼는 것을 실감케 하는 작품이다. 인간의 행복은 거창한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소박한 것으로부터 발아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물질과 명예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탐욕 때문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글은 여러 면으로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소박한 것에서 참다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마음에 여유의 뜰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덕규의 눈물은 봄바람에 이는 먼지 때문에 흐르는 바다물이라니요. 눈이 아픈 때문이더군요. 아하,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흘린 내 눈물과 텔레비전 속에서 첫사랑에 목이 메던 최수종이와 이승연이의 눈물도 먼지 때문인 것을, 그리하여 한국 텔레비전은 먼지 상자인 줄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요. 나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지요. 좋은 사람을 좋아하면 믿음이 커진다는 신조어도 실은 내가 처음 창조한, 그에 대한 헌사인 셈이지요.
어느 날 텔레비전 앞에 나란히 앉아 ‘이별의 간이역’을 지켜보는 저녁시간이었는데 화면 속의 여인이 식탁도 없이 달그락거리는 ‘설거지 모습이 아름답다’하였더니 그냥 슬그머니 일어나 화면 속의 주방으로 들어가 버리더라구요. 홀로 남은 나는 얼마나 쓸쓸했던지. 아마 지금쯤 화사하게 행복한 설거지와 푸른 하늘에 매달리는 흰 빨래를, 세탁기도 아닌 손빨래로 빡빡 빨면서 행복하다고 꼭꼭 눌러 쓴 편지가 광고 화면 밖으로 튕겼겠지요.
- 박영학, 「한계령연가 별곡」(전북수필 제47호) 중에서
사람은 저마다 아픔을 안고 산다. 그것은 상자 안에 담긴 물건과 같기에 사람의 눈에 드러나지 않을 뿐, 누구나 그 같은 부피와 무게의 아픔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쉽게 속내를 내보이지 않지만, 그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글이 글로서의 기능을 위해서는 미적 장치가 준비되어, 이를 통해 정서가 환기되어야 한다. 이 글이 대중연예인의 이름을 등장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짜로 반가이 오가는 분주하고도 설레는 수많은 인사말의 홍수 속에서 나는 웬만큼 들떠지는 스스로를 어렵지 않게 확인합니다. 게다가 오직 당신을 만날 수 있으리란 그 하나의 기대로 여기에 왔노라는 어느 여인의 고백(?)은 또 얼마나 달콤한 행복감을 전류처럼 흐르게 하던지요.
그랬습니다. 그날 나는 많은 문우들을 만난 게 아니라 실은 다른 사람들 속에 들어가 있는, 휠씬 괜찮아져 있는 또 다른 나를 우연히도 만나서 무가내로 감격스러웠습니다. 그것이 봄밤의 정취를 부추기는 실비 속으로 명멸하는 차량의 불빛들을 뒤따르며, 흘러넘치는 감미로움의 선율을 가슴 그득히 보듬어 켜게 했지요. 우리는 결국에 마주하여 한 잔 마실 자리를 찾아 전주에서 태인까지의 드라이브를 감행하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어느새 분위기에 약한 소녀처럼 우리 시대의 비열하고 악랄하고 아픈 부위까지를 잘도 들추어 내서 그나마 샐샐거리며 신명 섞어 재재거리는 거였습니다. 아주아주 뒤늦어서야 그야말로 늙은 것의 망령(?)된 재롱이구나 하는 반성도 없지 않았지만 애늙이 같은 젊은이들이 작당을 해서 그런 면모가 당신다운 매력의 포인트라고 추켜주는 바람에 못 이긴 체 오르기 시작한 마음의 연을 기세 좋게 띄웠다나요.
- 공숙자, 「나 웃음바라기라면」(전북수필 제47호) 중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는 때로 남과의 관계는 잘 유지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공연히 쑥스러워하고 낯설어할 때가 있다.
완전한 만남이란 그 어떤 형태의 만남인가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짐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에게 있어서의 ‘나’는 한 개인-자연인으로서의 ‘나’는 아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과의 공허로운 만남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곤 한다. 잃어버렸던 것과의 우연한 조우를 경험하기도 하고, 버려야 할 것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무서운 용기를 갖게 되기도 한다.
공숙자의 글은 밖에 드러나지 않는 또 하나의 자신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 결혼식은 지금처럼 삭막한 결혼식이 아니었다.
신랑이 말을 타고 신부집에 도착하여 혼례를 올렸다. 신랑이 신부 마을에 도착하면 곧바로 신부댁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옆집에 우선 머물게 하고 이른바 중방쟁이라는 사람을 먼저 신부댁에 보내게 된다.
중방쟁이는 얼굴에 숯검정을 바르고 허름한 차림으로 신랑이 지날 길의 액운을 쫓는 이른바 길맥임 같은 의식인데 어린 시절의 우리들은 이 중방쟁이를 실컷 욕보이기 일쑤였고 그건 일종의 묵인된 폭력 비슷한 풍습이었다.
구술나무 구술 열매를 호주머니 가득 중방쟁이가 지나갈 담장 위에서 목마르게 기다릴 때의 그 긴장감은 얼마나 벅찬 기다림이 아니었던가.
- 김수기, 「주례사」(전남수필 제24호)중에서
결혼식 풍경에 대한 비판과, 예전의 풍속도를 소개하고 있다. 요즘은 너무 하다고 할 만큼 의례적이다. 엄숙함과 진지함도 찾아볼 수 없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세무서에 공과금 내러 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거창하게 치러질 필요까지는 없다 해도 어느 정도의 절차는 필요한데 그를 업으로 하는 예식장측의 요구에 따르다 보니 그 같은 결과가 된다. 이러한 것을 작가는 고발하고 있다. 그가 주례를 부탁받는 일을 극구 꺼리는 것은 이러한 세태에 부화뇌동하기가 싫어서이다.
새벽녘 용산에 하차했을 때 비로소 서울의 거리를 볼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지방에는 차량이 뜸했다. 서울의 일각이지만 꼬리를 이어 달리는 차량의 행렬이 신기하기만 했다.
또 지방의 가옥들은 대체로 시멘트와 콘크리트 색 그대로였는데 서울의 집들이 비둘기 집처럼 곱게 채색된 것을 보니 이 또한 이색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용산역의 군부대에서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국그릇에 콩나물을 붓고 거기에 밥 몇 숟가락을 말아놓은 한심스런 아침 식사였다. 다들 그랬지만 나도 단숨에 마셔버렸다. 급양 엉터리 시대가 이때였던 것이다.
용산에서 춘천의 삼보충대로 팔려갔다.
춘천의 5월 초 날씨는 겨울 날씨 그대로였다. 차디찬 강물에서 세수도 하고 발도 씻고, 물은 차지만 오랜만에 맑은 물 흘러가는 강물에서 세수를 하려니 기분 만점이었다.
- 김학래, 「소총병의 추억」(전남수필 제24호) 중에서
젊은 한때를 반추하고 있다. 사람은 가장 어려웠던 시간을 되새기며 그를 통해 잃었던 원기를 회복하기도 하고, 잊었던 얼굴을 주마등처럼 떠올리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남자에게 있어 많이 회고되는 대상이 군시절이다. 비록 어렵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 시간을 반추하는 이유는 젊음에 대한 갈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통증을 잊은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집을 떠난 지 세 시간 만에 연꽃마을에 도착해 보니 스님은 계시지 않고 살림살이를 맡아 하는 분들만 계셨다. 전보다 훨씬 안정된 분위기에 실내외가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마당 옆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리어카에 거름을 실어다 밭에 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상주 남산중학교 학생들이라 했다. 나는 한 일도 없이 저녁 공양을 들고 저녁 예불에 참석했다. 밤에는 봉사활동을 온 학생들과 이곳 식구들과의 친목을 도모하는 오락시간이 있었다.
독경 소리에 잠이 깨었다. 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고 쉬지 않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눈을 쓸고 있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이윤희, 「희망의 종소리」(수필예술 제19호) 중에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불우한 이웃을 성의껏 돕고 있는 ‘연꽃마을’을 소개하고 있다. 요즘의 세태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그 한켠에는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 때문에 이 사회가 이만큼 움직여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그런 면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다른 사찰의 탑 지붕(屋蓋石)은 사각이나 육각이었는데, 이곳은 다르다. 사각으로 된 탑도 몇 군데 있었지만 원형으로 된 자연스런 형태의 탑들이 있어, 더욱 마음을 끌었다.
다른 사찰에 있는 탑과 불상이 품위 있는 양반의 모습이라면, 운주사의 탑과 불상은 소박한 서민의 모습이었다. 심오한 불법과 계율은 잘 몰라도 쉽게 불상과 탑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숨바꼭질하듯 푸른 산언덕에 숨었다가 소나무 가지 사이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탑, 머리에 하얀 모자를 쓰고 미소로 다가오는 불상에서, 친근한 우리네 이웃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불 천탑의 중심인 석조감실에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불상도 그러했다.
산의 서쪽 능선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 본다. 그곳에 있는 불상(臥佛)은 아예 누워 있었다. 비바람을 막아줄 전각이나 울타리 하나 없이, 천연 암반 위에 두껍게 돋을새김을 한 채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최중호, 「백성이 춤추는 땅」(수필예술 제19호) 중에서
정암 조광조 선생의 귀양지였던 ‘적려지’와 고찰 운주사를 찾았던 일을 소개하는 기행수필이다. 수필은 남이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가보지 않았던 곳을 찾아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작품화하여 전하는 글이다. 남보다 많이 알고 먼저 가보는 일이 결코 쉬운 일도 아니지만, 이를 찾아가 경험하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이 글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 개혁가의 높은 뜻을 기리고, 그의 흔적을 통해 진정한 충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부채는 이제 우리 주위에서는 사라져버린 옛 물건이 되고 말았다. 가끔 무대 위에서나 볼 수 있고 또는 장식품으로 눈에 띈다. 그리고 무당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렸다.
선물받은 합죽선을 펴본다.
대나무 겉대를 얇게 깎아서 살을 만들어 한지를 발랐고 마디가 총총한 대나무로 양쪽에 맞대어 펴고 접는데 기둥처럼 세워놓았다. 손잡이 끝은 흰 뿔이 붙어 있다. 반달처럼 펼쳐진 선면(扇面)에는 거문고 줄같은 선이 소리를 내고 중앙에는 우물정(井) 자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우물 안에 둥근 달이 빠져 있는 그림이다. 그리고 반달처럼 휘어진 곡선을 따라 오언절구 시가 쓰여져 있다. 이 시는 우물 속에 빠져 있는 달을 노래한 것이다.
- 이승철, 「퇴직 선물로 받은 합죽선」(경남수필 제25호) 중에서
퇴직 기념으로 받은 부채를 통해 그 용도와, 그것을 손에 지녔을 때의 기품을 소개하고 있다. 수필의 임무-기능 중에 하나는 지금은 사라졌거나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는 일이다.
우리의 전통어린 물품은 하나같이 자연을 소재로 한 멋스런 풍류를 담고 있다. 이는 삶 자체를 자연의 일부로 본 까닭이다.
소가 한가로이 누워 조용히 쉬고 있는 산, 그래서 이름을 와우산(臥牛山)이라 부른다 했다. 소라는 짐승은 항시 여유롭고 넉넉함이 있어 바둥대거나 함부로 서둘지 않으면서 묵묵히 제 할 일만을 열심히 해내는 우리 사람들과 가장 절친한 짐승이라고 내게 일러주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찍이 선친께서는 뜻이 있어 선영 조금 아래에 가묘를 만들어 놓으셨다. 그런데 유독 나와 즐겨 동행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꼭 꼬집어 말한다면 먼 훗날 내게 그곳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린 날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소리들로 저무는 골목이 언제나 시끄러웠다. 먹을 게 없어 궁핍한 형편이었기에 아궁이에서 피어나는 생솔가지의 매캐한 내음만큼이나 신랄했던 현실이었다. 우리 집 역시 유독 형제가 많았고 열도 더 되는 식솔이 한 집에 기거하던 때이므로 두레상에서의 다툼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싹트는 형제애였기에 각별한 정으로 지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 신일수, 「인연의 길」(경남수필 제25호) 중에서
선친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며 가난했지만,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되새기고 있다. 한 가정의 역사도 흐르는 물과 같아서 어느 한 곳에 멈춰지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수많은 애환과 즐거움이 내재할 수밖에 없다. 요즘의 세태는 그런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기보다 지나간 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폄하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이며 민족의 바탕인 뿌리가 없이는 생존할 생명체가 있을 수 없고, 바탕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살핀 작품을 통해 얻어 낼 수 있는 결론은 글의 제재와 주제면에서 다양함이 예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기(多岐)하였다. 전통적인 우리의 것을 찾아 그 진가를 발견하려는 노력도 그 열기를 더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세기뿐 아니라 천년의 틀을 마감하고 새로운 시간 위에 발을 딛게 된다. 우리 나라 수필도 새로운 천년, 새로운 백년에 어울리게 내실을 다져야 한다.
수필문학의 발전을 이루어 삭막해져가는 세태를 치유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筆者 : 윤재천 (수필가, 한국수필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