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쌍둥 형제
나와 형제는 어버이의 같은 피를 받았고 형은 내 보다 먼저 아우는 나보다 후에 받은 차이뿐 뼈와 살은 서로 다르나 본디 하나의 기운으로 난 것이다. 생김도 다르나 피는 같은 피. 나무로 견주면 한 뿌리의 다른 가지다. 물에 견주면 같은 근원에서 난 다른 흐름일 뿐이다. 형제애가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렇듯 어버이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형제간 우애가 적은 사람이 효도하던가? 형제간의 우애도 나의 근본인 어버이에 대한 효의 근원이 있었기에 가능한지도 모겠다. 해남군 계곡면 장산마을에서 사시는 이분들은 쌍둥이 형제로서 올해가 팔순의 해이다. 특히 경사스러운 데에는 어르신들이 건강하게 팔십 세까지 왔다는 것이다. 이곳 장산마을이 고향이시며 1935년 음력 3월 5일에 한 날에 태어나셨다. 일제 강점기에 1학년을 걸쳐 2학년 때 해방이 됐다. 지금은 계곡초등학교이지만 어르신이 다닐 땐 성진공립학교로 불러졌다. 성진공립 25기생으로 서울로 중학교를 입학하려고 했으나 625가 터졌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중학교를 못 가고 농사를 짓다가 나이가 들어 집안 형수님 소개로 옥천면 다산마을에서 사는 윤 씨 가문의 여인과 장가를 들게 됐다. 처음 오막살이에서 두 형제가 장가를 들어 함께 살게 되었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좁은 줄도 몰랐다. 그땐 다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런 줄만 알았다고 하셨다. 5년만에 동생을 분가시켰지만 다소 나아진 것 같았지만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형, 이선동 어르신은 5남매를 두었다. 이들 자녀들은 모두 성공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이들을 키우기 위해 봄이면 가파른 산골짜기를 타면서 고사리를 꺾어 그걸 밤새도록 엮어서 장에 나가 팔아 애들 학비에 보탰단다. 이런 자녀들에 대한 열정 때문에 둘째 아들은 부산대를 졸업 시켰고 셋째 아들이 서울대를 나오게 만들었다. 막 서울대를 입학한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1983년 입학 당시에는 현금으로 입학금을 내게 됐는데 시골 형편으로는 소 판 돈이다. 그 많은 돈을 어머님이 가지고 가기에 위험했는지 쌀 속에 넣어 몸서 서울대까지 가서 등록금을 낸 적이 있으셨단다. 쌍둥이 두 형제분은 나면서부터 함께 한 마을에서 우애 좋게 살고 계신다. 게다가 건강도 좋으신 편이다. 쌍둥이 두 형제가 사이좋게 건강한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두 어르신은 “일단 형제간에 좋은 관계가 건강한 비결이다. 그리고 이웃들과 좋은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라고 하셨다. 형, 이선동 어르신은 낮에는 일을 하신다. 밤에는 글을 쓰신다. 성경 전권과 찬송가를 모두 노트에 옮겨 놓으셨다. 꽃에 대한 시와 어르신이 살아온 전 과정도 상세하게 기록해놓으셨다. 아마 건강을 유지하는 첫 번째 이유일 것 같다. 한때 경운기에 다쳐 한 쪽다리가 불편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어르신은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오신단다. 그 덕에 두 분이 팔순을 동시에 맞이했다고 회고를 토로하셨다. 특히 형, 어르신은 이렇게 회고 하셨다. “옛날, 학교 다닐 때는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벌써 백발이 되었다. 꽃은 십 일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요즘 봄꽃을 두고 하는 말 같다. 하지만 나는 80회 꽃을 피웠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2006년도 다소 늦은 나이에 하나님을 찾아 지금까지 그 은혜로 살고 있다고 어르신은 마음의 평화를 찾으셨단다. 특히 고마운 것은 광주에 있는 딸이 적극 권유로 믿음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하셨다. 두 어르신은 격변하는 시대에 최대의 피해자이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싶어 서울로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전쟁이 나 이 분들의 길이 막혔다. 그러나 환경과 시대에 탓하지 않고 긍정적 삶을 유지 하셨다. 그 대표적은 표상은 자녀들을 열심히 키웠다. 앞으로 이들이 밝은 세상을 열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어르신들의 긍정적 행보는 대 성공적이다. 손자 손녀들도 할아버지의 교육열 때문에 지금 서울대, 성균관대 등을 다니고 있다. 더욱이 중한 것은 어르신 스스로 매일 공부를 하신다. 팔순이신데도 글씨로 무엇인가 표현하시려는 의도가 건강에 이르는 데에 첩경일 듯하다. 쌍둥이 어르신 두 분들께 팔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