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을 정지시킨 급진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우기 위해, 입법 의회를 해산킨 다음 ‘국민 공회’라는 의회를 만들었다. 보통 선거로 뽑힌 7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국민 공회는 9월20일에 소집되어, 다음 날 왕정 폐지를 결의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오랜 왕정의 역사는 일단 막을 내리고, 프랑스는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혁명의 기운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급진파는 “국왕을 재판에 넘겨라.” 하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때마침, 국왕이 돈을 주고 미라보를 매수한 일과, 다른 나라와 손을 잡고 혁명 세력을 쳐부수려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가 튈르리 궁전의 어느 장롱 속에서 나와, 국민 공회는 국왕을 재판에 넘기게 되었다. 재판은 12월11일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3년 1월15일, 투표로 왕에 대한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그 결과, 한 표의 차이로 국왕의 사형이 결정되었다. 사형 집행은 21일 콩코르드 광장에서 치러졌다. 왕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단두대에 올라가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단두대의 칼 밑에 목을 내밀었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의 여러 왕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영국을 비롯하여 네덜란드에스파냐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들이 새로이 적으로 돌아섰고, 나라 안에서는 방데 지방에서 왕장파(국왕을 지지하는 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안팎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롱드 당을 쓰러트리고, 자코뱅 당만의 독재 정권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로베스피에르는 사람들을 선동했다. “부패한 의원들을 내쫓기 위해 국민 공회로 돌진하자.” 그리하여 1793년 6월2일, 의회는 급진파의 국민병들에게 포위 당한 채, 지롱드 당의 중심 의원 29명의 자택 연금을 의결했다. 지롱드 당은 파리를 탈출하여 지방에서 반정부 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이 항쟁 속에서, 로베스피에르 당통에 견줄 만한 급진파의 지도자 마라가 암살되었다. 범인은 지롱드 당을 지지하던 25살의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여자였다. 로비에스 피에르는 ‘공화파의 장군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하여 나라 밖의 적을 불리치고, 국내의 이단자와 음모자를 처형시켜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능한 직업 군인인 카르노와 브뤌에게 군대를 맡기고, 혁명 재판소를 보강하여 국내의 적을 뿌리뽑고자 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적 제1호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 마리앙투아네트의 재판은 10월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열렸다. 죄명은 반란죄였다. 국왕 때와는 달리 증거는 없었지만, 검사는 다음과 같은 죄명을 들어서 사형을 선고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다른 여러 나라들이 프랑스 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도왔고, 국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음모에 협력했다.” 재판관은 마리앙투아네트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다음 날인 16일, 마리앙투아네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빠른 걸음으로 단두대에 올라선 마리앙투아네트는 단 한 마디를 남긴 채 처형되었다. “빨리 해 주시오” 단두대의 칼이 내려지고, 사형 집행인이 마리앙투아네트의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높이 치켜들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공화정 만세.” 그때 마리앙투아네트는 38살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웠던 모습은 혁명의 폭풍에 시달려 육순의 노파처럼 변해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을 이른바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그 후 2주일 뒤에는 22명의 지롱드 당원들이 처형되었다. 그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단두대로 올라갔다. 지롱드 당의 지도자였던 롤랑 부인은 “자유여, 그대의 이름 아래 어찌 이다지도 많은 죄가 절질러 지는가?” 하고 외치며 단두대의 희생물이 되었다. 한편, 이 해 가을부터 대반격에 나선 프랑스 군은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12월에는 적을 라이 강 저 편으로 몰아붙였다. 나라 밖의 위협이 줄어들자, 이번에는 급진파 안에서 싸움이 결렬해졌다. 그래서 먼저 극좌파(철저하고 완전한 개혁을 주장하는 파)의 에베르가 1794년 3월에 처형되었다. 다음으로, 부르주아와 손을 잡은 우파(온건하게 개혁을 진행시키고자 하는 파)의 당통은 데물랭이 단두대에 올랐다. 그 때 당통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죽어 갔다. “머리를 자르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머리를 잘리는 편이 낫다.” 이렇게 하며 혁명을 추진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처형을 당하자, 국민 공회 의원들은 비밀리에 손을 잡고 7월27일 로베스피에르를 권력의 자리에서 내쫓아 단두대로 보냈다. 지도자를 잃어버린 급진파는 힘을 잃은 채 왕당파와 자롱드 당이 권력을 잡았고, 프랑스 정치는 노를 잃은 배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이러한 무질서 상태에서 국내의 힘을 바탕으로 등장한 사람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출처: 인물중심세계사, 네이버
콩시에르즈리감옥 : 중세 왕궁의 일부로, 프랑스
혁명떄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다른 죄수들과 함께 이 곳에
갇혀 있었다.
당통 : 자코뱅당의 의장이었으나, 로베스피에르 : 자코뱅 당 독재정권의
로베스피에르 파와 대립하다가 지도자로, 지나친 공포 정치를 실시하여
처형되었다. 후에 처형되었다.
루이16세의 처형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