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君의 상징 鳳凰
글 : 尹烈秀 가회민화박물관장
⊙ 닭·기러기 등 10가지 동물의 덕성을 지닌 새
⊙ 백제의 금동용봉대향로, 고려청자, 민화, 나전칠기 등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 기린, 거북, 용과 함께 四靈의 하나로 신성시
尹烈秀
⊙ 65세. 원광대 영어교육학과 졸업. 동국대 문학박사(미술사학).
⊙ 에밀레박물관 학예관, 삼성출판박물관·가천박물관 부관장,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민학회 회장 역임. 現 가회민화박물관장.
⊙ 저서 : 《민화의 즐거움》 《꿈꾸는 우리민화》 《민화이야기》 《한국 호랑이》 등.
봉황. |
고대(古代) 중국의 전설로부터 유래된 봉황은 신의, 현인, 재주, 부귀, 장수, 풍년, 다산(多産), 고귀, 예견력 등을 상징하는 서조(瑞鳥)로 어질고 현명한 성인(聖人)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는 새라고 한다. ‘새 중의 왕은 봉황새요, 꽃 중의 왕은 모란이요, 백수(百獸)의 왕은 호랑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의 의식구조 속에서도 새 중의 으뜸인 새로 자리 잡고 있다.
본래 암수의 구분은 없었으나 한대(漢代)부터 볏이 있는 수컷을 봉(鳳)이라 하고, 볏이 없는 암컷을 황(凰)이라 하였다.
봉황과 관련하여 ‘닭의 새끼 봉 되랴’, ‘닭이 천이면 봉이 한 마리 있다’라는 속담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닭이 보통 사람을 상징한다면 봉황은 뛰어나게 잘난 사람을 상징하며 고귀하고 품위 있고 빼어난 것의 표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초사(楚辭)》에는 ‘봉은 먹이를 탐내지 않는다(鳳不貪餧)’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훌륭한 사람은 재물을 탐내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다시 말해서 봉황은 모두 훌륭하고 품위 있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닭을 바탕으로 한 상상의 神鳥
고대 중국의 박물지인 《산해경(山海經)》의 <남산경(南山經)>에 나타난 봉황의 모습을 살펴보면, ‘동쪽 5백리 지점에는 단혈산(丹穴山)이 있는데 그 위에는 금옥(金玉)이 많았고…, 새가 있었는데 그 형상은 마치 닭과 같았으며 다섯 가지 빛깔에 무늬가 있고 울음소리는 다섯 가지의 신묘한 소리를 내며, 먹고 마심이 자연의 절도에 맞으며 저절로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봉황이라고 부른다.
봉황이 나타나면 뭇새들이 그 뒤를 따르므로 뭇새의 왕으로서 귀하게 여기는 영조(靈鳥)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헌을 통해 봉황이 오색 무지갯빛을 지닌 새라는 점과 봉을 계(鷄)라고도 하는 것을 보면 닭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봉황은 실재하는 닭에 인간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만든 상서로운 새이다. 실재하는 동물에 바탕을 두고 창조했기 때문에 봉황을 비롯한 상상의 동물들은 그 근거가 되는 동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봉황 머리의 무늬는 덕(德)을 나타내고 날개의 무늬는 의(義)를, 등의 무늬는 예(禮)를, 가슴의 무늬는 인(仁)을, 배의 무늬는 신(信)을 뜻하고 있어 덕·의·예·인·신을 고루 갖추고 있으므로 기린(麒麟), 거북(龜), 용(龍)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신성시했던 상상의 새이다.
《상서(尙書)》 <중후(中侯)>의 ‘제순이 이르길, 짐은 의롭진 못하나 백수 중에 봉이 새벽을 지키듯 하리라(帝舜云 于彼高崗 梧桐生矣 于彼朝陽)’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봉황이 닭과 같이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계명조양(鷄鳴朝陽)’이 ‘봉명조양(鳳鳴朝陽)’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산의 동쪽을 가리키던 ‘조양’이 아침의 해를 일컫는 ‘조욱’과도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봉명조양’은 ‘봉황이 아침 해를 보고 운다’는 뜻으로 전이되었고, 재주를 가진 자가 때를 만난 것을 일컫거나 천하가 태평할 길조를 의미하게 되었다.
봉황의 10가지 덕목
또 다른 기록 《설문(說文)》에 따르면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이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오색(五色)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또한 봉황은 새 중의 으뜸으로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 사해(四海)의 밖을 날아 곤륜산(崑崙山)을 지나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서 깃털을 씻으며, 저녁에는 풍혈(風穴)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이 새가 한번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게 되어 봉황은 천자(天子)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우선 봉황 속의 기러기 모습은 신의를 생명처럼 지킴을 상징한다. 또한 기린으로 인해 슬기와 재주를 갖춘 현인도 의미하며, 제비 모습을 닮은 턱은 비를 오게 하는 재주, 부귀, 장수를 대표한다. 또 닭 부리를 닮은 모습은 여명이 다가오는 것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대표적인 동물로 인식되어 왔고, 뱀의 몸은 풍년과 다산을 의미한다.
황새의 이마는 고귀와 고결, 그리고 원앙의 뺨은 원만한 가정과 사회 및 국가, 용의 비늘은 제후·재상 등 뛰어난 인물의 상징이며, 마지막으로 거북의 등을 닮았다고 하여 장수와 예견력을 지닌 동물로도 인식되고 있다.
이렇듯 봉황에는 열 가지 동물의 모습이 혼합되어 있는데, 이 열 가지 동물이 가지는 상징성은 또한 제왕이 갖추어야 할 열 가지 덕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 기러기의 앞모습: 신의를 생명처럼 지킴
2. 기린의 뒷모습: 슬기와 재주를 갖춘 현인
3. 제비의 턱: 비를 오게 하는 재주와 부귀 및 장수
4. 닭의 부리: 여명이 다가오는 것을 가장 먼저 감지
5. 뱀의 몸: 풍년과 다산
6. 물고기의 꼬리: 군 통수권자
7. 황새의 이마: 고귀, 고결, 장수
8. 원앙의 뺨: 원만한 가정, 사회, 국가
9. 용의 몸비늘: 제후, 재상 등 뛰어난 인물의 상징
10. 거북의 등: 장수와 예견력
* 깃털 빛은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검정 등 오색(五色)이며, 봉황의 우는 소리는 오음(五音: 궁·상·각·치·우)으로서, 하늘의 이상을 실현하는 성천자(聖天子)를 상징함.
이러한 특성과 아울러 임금의 정사가 공평하고 어질며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순자(荀子)》 <애공편(哀公篇)>에 ‘옛날 왕의 정치가 삶을 사랑하고 죽임을 미워하면 봉이 나무에 줄지어 나타난다’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논어(論語)》의 <미자편(微子篇)>에도 ‘봉황은 세상에 도(道)가 행해지면 나오고 행해지지 않으면 숨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봉황은 성군(聖君)이 나타나서 선정을 베풀어 천하가 평안한 태평성대를 누리는 시대에만 원림(苑林)에 모여 들어 오동나무에 깃들이고 예천(醴泉) 물을 마시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한다.
또한 《백호통(白虎通)》에는 ‘황제시절에 봉황이 동원에 머물러 해를 가렸으며 항상 죽실(竹實)을 먹고 오동에 깃들인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중국 고대에는 성군의 덕치를 증명하는 징조로 봉황이 등장하고 그 궁궐을 봉궐(鳳闕)이라 하였으며, 천자가 타는 수레를 봉련(鳳輦), 봉여(鳳輿), 봉거(鳳車)라고 불렀다.
金銅龍鳳大香爐
백제 금동용봉대향로. |
봉황은 사신도(四神圖)의 남주작(南朱雀)보다 더 오래된 동양의 용봉(龍鳳)사상의 상징이다. 상상의 동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봉황과 용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용은 황제를, 봉황은 황비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문양으로 폭넓게 사용하여 왔다.
청동기시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농경무늬 청동기의 새 문양은 부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최초로 새가 조형으로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늘의 사자(使者)를 의미하는 이 새는 농경생활이 정착된 청동기시대에 농경신으로 숭배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치적 지배자와 새를 동일하게 여기면서 농경무늬 청동기에 나타나 있는 이 새의 이미지는 새들의 우두머리인 봉황과 의미상 유사하기 때문에 봉황 문양이 유물에 보이는 시초로 보기도 한다.
1996년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 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국보 제287호 금동용봉대향로(金銅龍鳳大香爐)는 백제시대 봉황문의 대표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인 이것은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개의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향로의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네다섯 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비파, 북 등을 연주하는 다섯 명의 악사(樂士)와 각종 무인상, 수렵상 등 16인의 인문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 별도로 부착된 봉황은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 있게 서 있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상 앞뒤에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가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이 향로는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 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 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닭머리에 원앙 날개
고려시대가 되면 전 시대에 나타났던 주작 형태의 봉황 문양은 거의 사라진다. 또한 수호신적인 의미보다는 문양으로서 한층 더 장식화되기 시작하며 대부분의 봉황 문양은 꼬리가 길고 날개를 대조(大鳥)처럼 표현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청자 문양에서도 구름과 함께 시문된 봉황문이 자주 등장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 청자상감봉황문대접(靑磁象嵌鳳凰文大楪)을 보면 내면에 봉황과 구름무늬가 정교하게 백상감되어 있다. 네 마리의 봉황은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신비로운 구름 속에서 고고한 자태로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도 백자에 청화(靑華)나 진사(辰砂)로 그렸으나 고려 때보다 간략한 형식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봉황은 그 시기별로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체로 닭 머리와 원앙 날개, 그리고 길고 탐스러운 꼬리를 갖추고 있다. 청화백자봉황문호(靑華白磁鳳凰文壺)에서는 청화안료를 써서 대범하고 시원하게 봉황의 특징을 살려 그려 넣었다. 이 작품에서는 온화한 모습의 봉황 한 마리가 구름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날개와 꼬리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외에도 신라 서봉총 출토 금판의 새 무늬 장식, 고려 봉황문 동경과 석관 상부에 표현된 봉황, 조선 궁궐의 정전 천장 장식으로 봉황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봉황은 점차 광명, 행운, 행복의 신으로 미화되어 민화, 제기, 가구, 의장구, 복식, 벽화 등 생활용품, 의례용품 곳곳에서 봉황 문양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民畵 속 봉황
문자도 병풍 중 ‘염’에 그려진 봉황의 모습. |
현재 전해지고 있는 봉황 그림은 대개 민화로 분류되어 있다. 봉황을 소재로 하는 그림에는 대부분 오동나무가 함께 등장하는데, 때로는 오동나무 대신 대나무가 등장하기도 한다. 오색 구름 위로 솟아오른 오동나무 또는 대나무 아래에 한 쌍의 봉황이 그려지는데, 닭인지 봉황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는 봉황을 누가 실제로 본 적이 없고 기록이나 많은 사람을 통해 들은 것을 토대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봉황은 점차 추상적으로, 상상의 동물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또한 ‘봉명조양’의 고사에 근거하여 붉은 태양이 함께 그려지는 것이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봉황 그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민화 가운데 문자도(文字圖)에도 봉황을 흔히 사용한다. ‘봉황은 천리를 날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좁쌀은 쪼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봉황이 대나무 열매만 먹으며 오동나무에만 앉는 청렴하고 고귀한 군자, 또는 어진 성군을 상징하는 새임을 암시한다. 즉 훌륭한 사람은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그의 본성을 유지해 나간다는 뜻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문자도 여덟 글자 중 ‘염(廉)’자에 봉황이 그려진다.
문자도뿐만 아니라 화조도에도 반드시 봉황을 소재로 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봉황 두 마리가 그려지면 쌍봉도(雙鳳圖)라 부른다. 쌍봉도에는 한 그루의 오동나무가 배경이 되어 암수 한 쌍의 봉황이 다정하게 함께하며, 표현된 다른 소재들과 함께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화조도10폭병풍 중 봉황 부분(가회민화박물관소장). |
이와 함께 봉황이 아홉 마리의 새끼를 거느리고 있는 그림은 구추도(九雛圖)라 한다. 이러한 까닭은 9라는 숫자가 예로부터 양을 의미하여 길상의 의미를 지닌 고귀한 숫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자수나 나전과 같은 공예에서 아홉 마리의 새끼봉황이 함께 문양으로 표현된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아홉 마리의 봉황이 표현되는 것은 일반적인 군봉의 상징으로 알려진 다산과 부부화합의 의미에 더해 태평성대의 염원도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군봉도(群鳳圖)에는 아홉 마리의 새끼 봉황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은 예가 많다. 새끼 봉황이 표현된 경우 암수 한 쌍에 적게는 둘에서 많게는 열한 마리의 봉추가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생활용품에서도 나타나는데, 그 예로 신혼부부의 베개인 구봉침의 베갯모 장식에 암수 한 쌍, 새끼 일곱 마리의 봉황을 수놓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봉황은 그림 이외에도 예복, 장신구 또는 가구, 공예품 등의 문양으로도 확산되어 자주 사용되어 갔다. 이렇게 봉황 문양은 사용이 확산되면서 상징적 의미가 득남(得男), 번영(繁榮), 안락(安樂)을 바라는 세속적 의미로 변화한다. 이는 봉황의 형태가 매의 머리 모양에 긴 꼬리를 결합한 비현실적인 묘사에서 점차 닭과 학의 형상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과도 연관이 깊다. 이는 아마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를 봉황에 비유하면서 개개인의 소망을 현실적으로 담아 두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청와대 상징마크가 봉황인 까닭은?
1967년 대통령 표장에 관한 공고 제정 이후 사용하고 있는 청와대 정문의 봉황 문장. |
고귀함과 빼어남을 상징하는 봉황의 문양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대통령 문장(紋章)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1967년 대통령 표장에 관한 공고가 제정된 이후 대통령 표장 및 대통령기에 봉황 문양을 사용해 왔다. 이 밖에도 상패, 상장을 비롯하여 결혼식장 마크에까지 봉황문이 새겨진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봉황은 용과 함께 대표적인 상상의 동물로 태양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봉황의 등장은 천자를 상징하여 천하가 태평해짐을 타나낸다. 이로 인해 봉황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서조(瑞鳥)로, 다양한 장식 문양이나 그림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여러 가지 유물들을 통해 봉황은 오래 전부터 상징적인 소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민화와 같은 미술품에까지 봉황 문양이 확산되었으며 그림뿐만 아니라 자수, 나전과 같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에까지 봉황이 길상적인 의미로, 우리나라의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날 대통령 문장과 국새 손잡이에 쓰이는 봉황도 바로 그 맥을 이은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 민중문화나 문화재 속에 등장한 봉황은 모든 백성이 어진 성군이 나타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청와대 정문을 지키는 지금의 봉황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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