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대세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tvN <꽃보다 할배>를 빼놓을 수 없다. 평균 연령 76세, 안방극장 ‘할아버지’ 대표배우 4인방 일명 H4(여기서 H는 ‘할배’_ 맏형 이순재(80), 둘째 신구(78), 셋째 박근형(74), 일흔 살 막내 백일섭)와 마흔 셋 짐꾼 이서진의 열흘간 고군분투 유럽배낭 여행기를 담았다. 나영석 PD가 KBS <1박 2일>을 떠나 CJ E&M으로 이적한 후, 항간에 말들 참 많았는데 6개월만에 제대로 이름값을 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5일(금) 오후 8시 40분부터 전파를 탔는데 지난주 시청률 5%를 넘는 등 연일 화제만발이다. VOD(콘텐츠 다시보기 서비스) 가격이 1,200원으로 몹시 비싼 편인데도, 2회까지 VOD 매출로 2억 1천만 원의 수익을 냈다. 인기에 힘입어 <꽃보다 할배>는 대만에서 시즌 2를 촬영 중이다.
아무튼 <꽃보다 할배>를 1화부터 4화까지 홀린 듯 이어 보면서 예상치 못한 중독성에 깜짝 놀랐다. 이거, ‘야동순재’ 나오던 그 시트콤처럼 ‘웃음포텐’이 팡팡 터지는데? 그 흔한 아이돌도 톱스타도 등장하지 않는 이 프로그램, 왜 이렇게 난리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꽃보다 할배>는 사소한 반전들이 낳은 대역전극이다.
1. 만년 조연들, 이번엔 주연이다
![]() ‘할배’ 네 명이 주인공? 아, <이산> <계백>의 이서진도 나온다고? 그렇게 끝? 처음부터 보고 싶은 마음이 불타오르는 캐스팅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구성이다. 50여 년간 연기해 온 노장 배우들이 유럽으로, 난생 처음 열흘간 ‘배낭여행’이란 걸 떠났다. “60대는 어린애, 칠순은 넘어야 어른”이라는 이들의 유머가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메운다. 막역한 50년 지기인 이들은 함께 술을 마시거나 골프를 치는 것 말고, 뭔가 함께 사건을 벌이는 걸 늘 고대해 왔단다. 그래서 덥석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잡은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아버지, 할아버지로만 등장하는 조연이었지만 <꽃보다 할배>에선 주연이다. 왕으로, 변호사로, 회사 대표로 근엄한 아우라를 뽐냈던 이들이 알록달록한 캐주얼 의상을 입고, 얼큰하게 취한 채로 “30분 더 걸을 것이냐 그냥 숙소로 갈 것이냐”를 두고 진한 말다툼을 벌인다. 맏형 이순재는 고스톱을 좋아해 스탭들과의 저녁내기 한 판에서 엄청난 승부욕을 선보인다. 신구가 싸간 소주 10팩을 빈 물병에 따라서 가지고 다니면서 백일섭도 마시고, 박근형도 마신다. 담배도 피운다. 기존 예능이었다면 모자이크 처리라도 했겠지만, 이 프로그램에선 상표까지 쿨하게 보여준다.
왜? 시청자들이 괜찮으니까! 꼭 우리 아버지, 옆집 할아버지 같으니까! 이들이 체력이 달리는 걸 무릅쓰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모험을 벌이는 데, 방송윤리라는 허울 좋은 잣대는 불필요하다. 여행 내내 다리가 아파 늘 툴툴거렸던 백일섭, tvN <택시>에 출연해 “그렇게 좋은 세상이 있는데 왜 별로 좋지도 않은 술과 골프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인생 헛살았다”고 털어놨다. 이제라도 ‘꽃할배’들이 그 재미를 알게 됐으니, 손주 뻘 시청자 입장에서 왠지 마음이 마음이 놓이면서도 짠하다. ‘빨리 돈 모아서 부모님 효도관광 시켜드려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착한 다짐도 하게 된다.
2. ‘엄친아’ 벗고 ‘국민 짐꾼’으로? 이서진의 재발견
![]() 사실 <꽃보다 할배> 최고의 수혜자는 이서진일지 모른다. 이서진이 땀 흘리고 고생할수록 그의 이미지는 180도 전환되고 있으니까. 그는 미대출신의 훈남, 대표 ‘엄친아’ 배우로 드라마에선 정조 이산(<이산>), 계백 장군(<계백>), 범죄자 프로파일러(<혼>) 같은 멋진 역할을 주로 했다. 대략 그의 이미지는 ‘재벌집 깍쟁이 아들’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 더하자면 이러저러한 여자 연예인과 사겼다는 것과 언론에 공개된 그의 정치성향 정도.
그런데 이 반듯한 이미지의 청년이 마흔 셋에 ‘짐꾼’ 역할로 단숨에 예능 프로그램에 쑥 안착했다. 고생 한번 안 해봤을 것 같은 그가, 평생 요리 한번 안 해 봤고, 어느덧 불혹을 넘긴 그가 여행 내내 짐꾼과 통역관, 여행가이드가 돼 어르신들 모시느라 쩔쩔맨다. 그에겐 여행이 아니라 흡사 사회봉사 수준이다. 차분한 이서진에겐 늘 예의바름과 어른공경이 자동 탑재돼 있지만 낯선 유럽에서 그도 자주 ‘기계 작동 오류’를 일으킨다. 명색이 배낭여행인 만큼 H4를 인솔해 지하철을 갈아타거나, 차를 렌트하고 숙소 예약도 하는데 초행길이니 당연히 우왕좌왕하며 엄청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는 거다. 아, 그럴 때 이서진에게서 처음으로 인간미를 느낀 시청자, 아마 많았을걸? 애주가 백일섭이나 신구가 늦게까지 스탭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 홀로 숙소 컴퓨터 앞에서 내일의 여행 일정을 짜고, 한정된 여행 경비 때문에 계산기를 두들기느라 고뇌하는 그의 불쌍한 등짝에 어찌 호감이 가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 이서진이지만 참 살가운 면은 없어 ‘하늘 같은 선생님들’에게 과하게 깍듯한 것도 같다. 아마 이서진의 사전에 ‘어리광’이나 ‘실없는 농담’ 따위는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꽃보다 할배>의 하이라이트다. ‘어른공경’이라는 우리가 어디에다 엿 바꿔 먹은 보편의 주제를, 마흔의 어른이 칠순의 어른을, 칠순의 어른이 여든의 어른을 공경하는 일종의 위트로 보여주는 것이다. 남녀노소가 자연스레 공감하고 감동하고 자신을 반추할 수 있도록. 그 중심에 이서진이 있고, 주인공들을 지휘하는 건 나영석 PD다.
3. 럭셔리 뺀 ‘여행’의 참맛
![]() 나영석 PD(위 사진 맨 왼쪽)가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건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그가 <1박 2일>에서 그랬듯이, 첫째 <꽃보다 할배> 역시 출연자들에게 예상 밖의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고, 둘째 기존 여행 프로그램의 진부한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 젊고 멋진 연예인들이 케이블TV 카메라를 대동하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들은 지나치게 화사하거나, 화려하고 럭셔리하다. 화면으로 간접 체험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평범한 시청자들의 현실과 TV 속 환상의 괴리가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면도 있다.
<꽃보다 할배>의 영리한 부분은 마치 우리가 이십대에 떠났던 배낭여행처럼, 금액도 동선도 한정했다는 것에 있다. 처음부터 이서진 손에 빠듯한 금액을 쥐어주고 여행의 동선 결정도 그에게 맡겨버렸다. 따라서 이서진은 레스토랑이나 숙소를 정할 때 “싸니까”를 연발하게 됐다. 여행 장소는 실버 관광객이 쉽게 소화할 수 있는 대중적인 곳 다시 말해 흔한 곳이다. 4화까지는 파리의 한인민박집,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개선문, 스트라스부르의 노트르담 성당과 쁘띠프랑스 등으로 이어지며 프랑스를 여행했다. 철저히 ‘할배’ 여행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보여지는 여행지 화면들은 특별히 아름답게 포장되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건 다섯이 호흡을 맞춰 사소한 일로 삐치고 화해하며 여행하는 과정이니까. 그래, 해외여행의 목적이 한국엔 없는 명품백을 세일 가격에 건지고, 랍스타를 먹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의 함박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힐링이 된다. <꽃보다 할배>는 그런 여행의 참맛을 넌지시 알려준다.
l 글_ 유지영 (교보문고 북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