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님들! 홍하사가 베트벳에 올린것(16년 전)을 요약하여 현재 글에 맞게 편집하여 올리니 이해하여 주십시오.
No, 4331
♧ 이름: 홍진흠 (coala48@naver.com)
♧ 홈페이지: http://vietvet.co.kr
♧ 2007/9/6(목)
♧ 조회: 2900
"와이프 이야기"--- (4)
내가 천애고아만 아니면 될것이라는 판단였는데 웬걸 형님댁은 석관동에 위치한 펄펄 날아가는 2층 양옥집에 지하 주차장엔 자동문인가하면, 마당엔 대추나무를 비롯하여 이름 모를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사이사이로(‘77년 당시엔 대단한 집이었음) 정원연못엔 물고기들이 뛰놀고 있었고 오토로 열린 대문앞엔 버선발로 뛰쳐나오신 숙모님이 인자한 얼굴로 맞이하신게 아닌가?
또한 이쁜 언니(?)가 받침대에 받쳐나온 과자류와 간단한 음식등은 전연 손대지 않고 차만 한잔 하고 말으셨다. 아마도 그걸 먹으면 성사가 안된다는 미신(?) 때문인듯하다. 당시 우리형님의 친구 분들중에 장관급에 해당하는 분들이 여 남은정도 있었고 대단한 끗발이 있는 자리에 근무했다. 그리고 청와대도 들락거릴 정도로 파워도 대단했다.
(탁구주장으로 박석수대대장님으로 부터 체육회날 상받는 홍중사)
숙부님께선 일찌기 홍씨집안의 대들보로 자식 공부만은 꼭 시켜야된다며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대학을 보낸것이며 우리집이 큰집이지만 우리나이가 아래였었고 누님들도 방직공방 다닐때 가끔 오빠에게 등록금도 대준적도 있음을 난 기억한다. K대 영어 영문학과를 나온 형님은 같은 해 경북고를 나온 영화배우 신성일씨와도 무척 친하셨고(숙모님께 해마다 세배하러 오곤 하셨다.)
당시 경북고보다 더 알아주는 사대부고에서 축구, 핸드볼 등의 주장을 맡으며 전국을 순회하는가하면 어릴때 형님 방엔 영어단어가 온통 천정에서 벽까지 깨알같이 적혀져 있었으며 콘사이스를 한장 한장 외우며 다 외우면 집어 삼키고 다시 한장 외우면 입에넣고 그런식으로 영어공부를 하신 분이셨다.
(통신병과 60 여명의 하사들을 제치고 병참이 서열1위로 인정받어 진급한 모습, 옆은 2위의 박윤태하사)
또한 경북여고를 나온 부잣집 딸이 사람하나만 믿고 시집 온 형수님은 당시에 성북구 어머니 회장직을 맡으며 국회의원 H 여사와 늘 함께 다닐정도로 왈왈대실정도 였을때이다. 암튼 그날 형님은 기사를 불러 의정부까지 모셔 드리라고 했으나 내가 그냥 차타고 가겠다고 했다. 함께 간 언니는 가장 궁금했던게 그 예쁜언니가 누군가를 물었다.
내가 속으로 한때나마 그런 관계였음이 움찔했으며 여자들은 참 예민한 눈을 가졌구나를 생각했다. 두분 어른들께선 손을 꼬옥
잡고 혼인성사가 꼭 이뤄지도록 하자고 다짐했다. 모든일이 일사천리로 이뤄져 이제 날짜잡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 되는듯했다. 그러나~ (와이프 이야기 中 에서 퍼옴)
(107통신대대에서 홍중사는 말만 '취사반장' 을 겸하였지 너무 바빠서 취사반원들에게 모든걸 맡겼다)
하여간 당시 홍하사는 모든게 즐거운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장래의 살아갈 걱정과 군생활에 점점 회의를 느끼고 싫어져만 갔다.
처음부터 사촌형님의 말씀(장기복무는 4년 6개월 이상만하면 되므로 더하고 말고는 맘 먹기나름이라 했음)대로 야간 대학이라도
가려했지만 좀처럼 현실관 동떨어진 군생활이었다. 한번씩 비상이라도 걸리면 서울에서(당시엔 서울에 형님,누님댁이 곳곳에 있었으므로 동가숙 서가식이란 말대로 혼자인 난 자유롭지만 다만 비상걸리면 연락오는게 그게 귀찮어서 싫었다.
더우기 통신부대인 만큼 하사관들에게 까지 군전화를 가설해 준다. 하숙집에까지 연락와서 서울로 전달되는게 싫었다. 그러던
중에 예기치못한 사건이 발발하여 불명예 제대를하게된다. 1종 선임하사로 쌀창고서 부터 취사반장까지 다 혼자 맡아 취급하였는데~ 한마디로 나쁜맘 먹는다면 돈도 벌 수 있는 직책이었지만 아시다시피 홍하사는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돈에 욕심이 전혀없는 사람이다. 그레서 "107통신대대" 에서 부대창설시 부터 제대시(7년동안)까지 어쩜 혼자 계속 맡었는지도 모르겠다.
( 나의 조수격인 창고담당 인천의 이강덕병장과, 앞의 두사람(조은석,이춘배)그들은 누구보다 나의 결백을 알고있다)
좌우간 간단히 요약하면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자매학교"(서울 송곡여고)에서 위문공연을 온다. 우린 부대서 대비사항으로 떡과 과일 등 파티준비 관계로 한마디로 돈이 필요했다. 부대대장님(김녕 소령)지시로 덕정리에서 보급품을 처리 현금으로 갖다 바친다. 이과정에서 김소령님은 돈한푼 안들이고 나를 이용해 먹었다.(지금 생각하니 당한거지만 그땐 나의 상급지휘관이니~)
이를테면 장교들만 이용하는 공짜열차표나 장교들이 입는 우의, 야전점퍼 등으로 나를 입혀주면서 말이다. 약간의 담배값을 전혀 안 받었다면 거짓말일테지? 전국적으로 보급품 횡령사건에 휘말리어 홍중사가 부대를 대표로 혼자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난 김녕소령에게 다짐을 받아뒀다. 내가 어떻게(?)되면 대대장님과 상의를해서 나중 취직자리라도 하나 마련해 준다는~
내가 공부 가르친 질녀(인숙)와 누님 가족(은숙, 원준)이 마포구 성산동에서~
하여간 그레서 삼각지(당시 3CID로 끌려가서 '김선진상사' 로 부터 취조를 단체로 한사람씩 받었다.난 사실대로 불었으며 내가
스스로 부대를위해 혼자했다고 자백하였고 105병원의 박상사는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오리발을 빡빡 내밀었어도 결국 나와
똑같은 재판결과가 나왔으며 다행이 남한산성은 면하였고~ 결국 홍하사는 50일간 감방도 다녀왔고 내가 평소 원했던 구치소
경험도 하였으니 글을쓰는데 도움이 될거라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김선진상사에게 내가 울형님의 얘기를 안한것이 후회된다.
그는 당시 울형님으로 부터도 상당히 도움을 받은것으로 나중 판명되었으니 참으로 인생사 묘한것이리라. 당시 형님은 청와대를 들락거리시며 경부고속도로에서 큰교통사고가 났어도 뉴스에 오르내리지 않을정도로 모든걸 꽉 잡고 계실때였다. 당시 사촌
매형께선 국회의원 또는 장군들이 진급하러 줄을 서 인사하러 올 정도였다. 홍하사가 월남가서 송금한 돈,혹은 혼자 알뜰히 벌어
차곡차곡 저축한 돈, 형님께 몽땅 바친걸 누님께선 극구 말리셨지만 그레도 후회없다. "그럼 너도 못살고 네형도 못살게 된다"고
"꽁가이 이야기"---(9) (홍 진흠)
그날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우린 철조망을 걷고 단독군장으로 도로정찰을 서둘렀다.
전투지역이기에 누가 “방탄복을 입으라." “수류탄은 네발씩 휴대하라”는 등의 기본 소지품은
말할 필요도없이 스스로 자기방어는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간밤에 비가 약간 왔기에 우린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비포장 도로이기때문에 우리가 도로의 평탄작업은 않드라도 대충 차량다님에 지장은 줄수없도록은
해야하는것이다.
전 소대원이 꼬챙이로 찔러보면서 새로 구덩이가 생긴곳은 없는지?
아님 원래 있던곳과 변화된곳은 없는지? 우린 대충 보면안다.
그리고 미심쩍으면 지뢰탐지기로 확인해본다.
그래서 자유게시판 어디에선가 홍하사 소대를 "꼬챙이 소대" 라고 표현한것 같다.
한 3K 쯤을 왔을까 저 앞쪽에서 월남정규군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따이한~ 따이한~”
하면서 급히 부르며 "푸자마을" 끝나는 곳에서 “펑”폭파사고가 일어났다고 우리에게 알리는게 아닌가?
우린 걸음을 좀 더 재촉하면서 현장을 도착했다.
그곳엔 웅성웅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며 씰라우 바퀴와 차량부속들이 산산 조각이 난 시체와 함께 널부러져 있었다.
온통 땅 전체가 피로물들어 있었고,
들개가 시신을 부분 부분을 물어가기도하고 공중분해된 사람의 흔적이 당시 상황을 짐작케한다.
역겨운 냄새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옷조각과 신발등이 함께 나뒹굴었고 참으로 보기가 처참한 현장이었다.
누군가 천으로 덮어두긴 했지만 우린 흔히 있을수 있는일이라 별로 개의치않고 중대로 보고만 해줬다.
그들의 얘기에 의하면 우리가 도로정찰 전에 그들이 미쳐 기다리지 못하고
푸캇으로 일보러가다가 밤사이 설치해둔 적의
부비츄렙에 그냥 당하고 만 것이다.
가끔 몰래 새벽부터 통행을 하지만 처음있는 일이라 우린 상황보고로 끝냈다.
만약 우리가 지나고 나서 이런 일이 터졌드라면 문제가 심각했을것이지만---
죽은사람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책임은 피할수 있었다.
죽은 사람은 씰라우 운전수를 포함해서 성인 세사람이었고 아마 연락이 되어 가족들이 곧 몰려올것이란다.
그동안에 홍하사에게서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면 고국 36X(사단) 109R(연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수(김 상봉 하사)가 사단 G-4(군수처)에서 근무하는중 명단에서 홍하사(내 이름이 좀 특별하니)를
발견하고(연대 S-4(군수과)에서 왔는지(?)기억이 아물하다.) 중대까지 날 찾아와
중대장님께 무슨 빽(?)을 썼는지 내게 하루 외출을 허락받아 둘이서 말로만 듣던 푸캇을 다녀올 기회도
왔었고 그 선배는 말단소총소대 근무하는 촌놈(?)을 위해 꽤 돈을쓰고 갔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빼 놓을수없는 사실은 코메디언 ”배일집” 씨를 비롯해 주월사에서 온 위문공연때
코메디 같은 사건은(물론 그땐 도로경계를 다른 소대에서 서고 우리는 쇼우 구경을 하기에)
분대원 한명이 연병장에서 열심히 손뼉치고 노랠 따라부르고 났더니 총이 없드란것이다.
누가 잽싸게 가져간 것이었다.
하는수없이 이 친구도 무대에 뛰어올라가 열심히 춤추던 다른 병사의 총을 쓸쩍-보충했다는 얘기이다.
우리 고국같은면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전투지역엔 얼마던지 가능하고---
여기 같으면 총번만 알면 곧장 어느부대 누구것인지 당장 알테지만 그곳은 전쟁터인 만큼
잃어버리면 끝이다.
9중대인가(?)는 부대자체가 산꼭대기에 위치하기 때문에 바깥을 나가거나 단 한사람이 어딜 다녀오드라도 헬기가 꼭
떠야만한다.
분대원들을 배치시키고 이제 Anh 과의 관계를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집을 갔으나
평소와 달리 쥐죽은듯 고요하기만 하다.
어쩐 일인가?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한참을 서성이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바쁘게오던 “리유”씨가 날 만나자 울먹울먹하드니 그만 못 참겠는지 울면서 통곡을 한다.
아침에 마누라가 푸자마을에서 V.C들에 의해 폭파당했다고---
아니? 그럼 오늘 아침에 죽은 사람이
"안" 의 엄마란 말인가?
어쩜 그럴수가?
홍하사 장모 될 사람이 부비트렙에
산산조각이 나 공중분해 되다니?---
어떻게 해야할지?
어떻게 그들을 위로해야될지 방법을 몰랐다.
오늘 우리의 도로정찰이 조금만 일찍 나갔더라도
이런 변은 당하지 않았을터인데---
모든일이 내가 잘못한것으로 생각되어
얼굴을 들수가 없었고 난 잠시나마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주는것이 오히려 도와주는것이라고
생각돼서 도로경계로 들어갔다.
이제까지 구상하던 A안, B안, C안 등 모든일들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내 눈에도 어느덧 주르륵 눈물이 흐르고있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아오산과 겹치면서 아마득한 어머님 모습이 오버랩 되어왔다.
외삼촌 몇분과 이모님등 오래사신분이 거의없는 모계는 전통적인 선비집안으로 머리는 모두 비상했을
정도로 뛰어났으나 사십전후를 넘기지 못한 단명으로 끝난 약점을 가진 집안이었다.
오라비들 틈에 끼어 어깨너머로 배운 어머닌 어른들이 글을 못 배우게 해 밤에 혼자서 쥐꼬리로
붓글씨를 쓸만큼 향학열이 왕성했단다.
내게 좋은 머리를 가졌다고들 하지만 우리집서 내가 제일 뒤진다.그래도 엄마의 피를 받은것은 다행이리라 여겨진다.
장천국민학교(경북 선산군 장천면-지금은 구미시)1,2 학년과(1,2 학기) 3학년초까지 5회에 걸쳐 연거푸 급장(반장)을 지낸
나는 대구침산으로 3학년에 어머님 손에 이끌려 전학왔을시 함께 교무실을 방문한 친구하나가 그렇게도 부러울수가 없었다.
내게도 저런 젊고 예쁜 엄마가 있었으면---
난 항시 병들어 누워만 계시는 엄마가 불만이었다.
그래도 언제나 항상 엄마께 닳은 숟가락으로 사과를 갈아 몇차례 입에 물려드리곤 놀러나가고 했다.
당시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누님들 얘길들으면 오랜중풍으로 고생을 하셨단다.
오래전 침산산이 무너진 날 뒷집식구 몽땅 압사당한날 바로 앞전날 한많은 세상을 뜨신 날이었다.
아! 그리운 어머니!---
이보다 더 오래전--- 마지막 가는길에 막내의 얼굴이라도 기억하시라고 날, 동네의 어른께서 방으로 들여보내신듯했다.
온통 코와 귀에 입에 잔뜩 솜으로 틀어막힌체 멀겋게 뜬 눈을 허공에 응시한체 내손만 꼬옥잡고 그냥가셨다.
어린 그 나이에도 난 참 아버지가 바보같다고 생각했다.
왜 저런--- 솜으로 틀어막을때 뿌리치질 못할까?” 다섯살의 난 철없이 그냥 살편상을 이리뛰고
저리뛰고 마을사람들이 우리집에 몰려오는게 신기하고 좋기만했다.
마당 한가운덴 천막을치고 잔치준비하는데 온 동네 아줌마들이 몰려와 솥뚜껑 뒤집어놓고 전 부치고
돼지잡고 음식 장만하고---멀고도 가까운 평소 못보던 사람들이 많이오기에 마냥 즐거웠다.---
동네 아낙이 한소리가 귀에 쟁쟁들려온다.
“쯧쯧 저 어린것이 뭐가 저리도 좋을꼬?”
---계속---
최진사: 수수께끼...저 손수건을 지금의 왕비님 몰래 38년간 간직할 수 있었던 비법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여자福이 많아서 일까? ㅎㅎ -[01/29-14:23]-
김명식: 연재하신 글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홍” “안”이라고 수놓은 손수건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01/29-18:59]-
홍 진흠: 사진설명: 2.월남의 절(卍)앞에서 분대원들과:홍하사,심영교병장(홍하사가 추천해서 중대 보급계로 감),최영일 병장 3. 50M 무반동총 앞에서:김교순병장-전북 부안군 동진면 제내리 ('71/1/10) 4. Anh(둘째), Nhanh(막내) 그리고 An(첫째)("70/12/2) -[01/29-23:06]-
홍 진흠: 5. 단 한장밖에없는 부모님사진(홍하사가 태어나기 전- 갖난 아이가 둘째누님-지금 69세임, 큰 누님-72세) 6. 7일간 타고온 귀국선 7. "앙"과 "안"의 자매가 "2년후 베트남 다시 오라고 홍하사에게 수놓아 준 "하얀손수건"--- 그리스의 국민가수인-Nana Mouskouri 가 부른 노래 (with my) "White Handkerchief"(하얀 손수건)입니다. 8. 미국군인들이 부러워한 "레콘도" 마크입니다. -[01/29-23:24]-
윤 광대: 홍 전우님! 정말 너무 흥미진진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그리고 많이도 오래 간직하고 계십니다.그리고 64년도
제가 대구 대봉동에서 장천 고아원 원장댁 가정교사를 할때 장천 고아원엘 간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이 나네요.항상 건강하세요. -[01/30-09:25]-
장영호: 필림처럼 지나가는 옛 젊은시절의 추억을 연제하는 홍하사님의 기억력 대단 합니다 추억은 늘 즐겁고 생각할수록 행복함을 함께할수 있는 참전용사만의 자랑입니다 -[01/30-10:05]-
김선주: 홍전우님 올만입니다.건강하시죠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옛추억을 회상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되돌아보는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그시절 남들보다 많은 경험을 하신듯 보입니다. 얘기 보따리를 클러주심에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01/30-14:37]-
류지현: 전쟁터에선 아무리 날이 쎄고 날래도 한방이면 안녕이고, 걸레가 됀 VC들을 볼때마다 저렇게 안된다는 장담을 하지 못해 머리카락,손톱,발톱깎아 봉투에 모아놓고 작전나가기 전날은 새로운 유서를 쓰지 않았습니까. 장모님 될번한 시체를 보신 셈이군요. 매복 다녀오면서 보았는데 어제저녘에 도로을 딱는 길옆에 모래를 군데군데 트럭으로 실어 놓았는데 모래속에 부비트랩이 장치된줄 모르고 삽질 하다가 전사하신 공병 전우들을 목격했는데 속이 끓어 오르더군요. 자기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는 님들에게.... 구정이 까워 옵니다만 68년 정전 약속해놓고 공세를 하여 날밤세우며 전투한 생각이나며 공산주의자들은 믿을놈들이 못 된다는것을 다시한번 말하고 싶네요. 글 잘 읽고 있고요 '레콘도' 마크보니 장거리 정찰대 생각이 납니다. -[01/31-00:31]-
홍 진흠: 긴 글 달아주신 류 지현님-오리지널 마크(국방색)를 올리려다 상태가 깨끗하지못해 이것을 올린겁니다. 매번 고맙구요. 김 선주 전우님 "보따리"하니 생각나는데요 노래 보따리 언제 다시한번 풀어야할것 같습니다. 장 영호님은 기억력이라 하셨나요? 잊어먹을까 부지런히 적어두곤하지만 어디에다 적은지 어딜둔지 그것조차 이젠 까먹는답니다. 윤 광대님(아르헨티나의). 장천과 대구 두지역- 생각만해도 제겐 그리운 이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01/31-03:34]-
홍 진흠: 김명식 후배님! 아 글쎄 "부하반 7기"에서(후송갔다가 와서) 9기인줄 알았는데 앨범을 보니 "부대보급 하사관반 10기" 이드라구요. 아마도 "기술행정 제9기"(제2군하사관학교)를 혼돈한 모양입니다. 오랫만에 들리셨지만 잊지않고 꼬리글- 고맙구요. 최진사님! 수수께끼의 해답은 #4754
"와이프 이야기"---(5)편에 ('07/9/12)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福이 많다고 하셨나요? 글쎄요!? 사실, 저는 꽁가이 사진(특히 제일 궁금해 하실 Anh )을
올리지않고 그냥 전우님들이 맘속에 상상만 하시라고 사진올리지 않으려다 올린겁니다. 이렇다저렇다 아무런 얘기가 없으니 저으기 실망했답니다.
아무도 궁금 해 하지도 않은데 괜히 홍하사만 열심히 그려대니 말입니다. 예를들어 생각보다 "나이가 어리다" 거나 "동생보다 언니가 낫다" 던가 ~하다못해 "뭐가 이쁘냐" 고 시비를 건다든가?--- 이러하니 (10편)글을 쓸 맘이 싹 가십니다. 이상 새벽까지 미친짓을 준비(10편-글을 쓰려던) 하려던 (사실은 어제도 산악회시산제 준비임원모임이었고 그저껜 회사의 "회식", 오늘은 "새마을월례회모임" 등으로 글 쓸 시간이 없는데---) 홍하사의 심경이었습니다. -[01/31-04:17]-
심대흥: 연재되는 러브스토리를 읽으면서 홍전우님의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준비성에 새삼 놀라운 마음입니다. 어떻게 수십년전 받았던 손수건을
여태껏 고스란히 보관했습니까? 저는 귀국시 부대원들이 만들어준 기념패하나도 제대로 보관못하고 밑판은 훼손되고 겨우 부대마크와 명찰 동판만 남아있는데...ㅎㅎ Anh의 사진을 보고도 아무말들이 없으니까 저으기 서운하셨습니까? 모든 전우님들이 이런 생각을 했을겝니다. 그녀가 예쁘고 안
예쁘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수십년전의 아련한 기억속에 남아있는 먼 이국의 아오자이 휘날리며 걸어가던 꽁까이들의 추억속에 빠져 드느라 다른 생각을 할 정황이 없었다구요.그녀는 홍전우님의 연인이기도 하지만 파월용사 우리 모두의 애인이기도 하니까요. 나도 오늘 저녁 퇴근해서는
다시한번 월남앨범을 뒤적여 봐야겠네요. 혹시 압니까? 내 앨범속에도 저런 예쁜 미소를 짓는 꽁까이 사진하나 찾아낼찌... -[01/31-10:22]-
최진사: 38년후에 찾아간 베트남땅...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가까스로 통화는 했는데, I love you...I love you...연속적으로 보내온 문자 메시지가
아직도 그사랑이 연속되고 있슴을 느낍니다. 이미 파뿌리가 되었겠지만 유효기한 내에 있습니다. 언제 베트남에 또 갈겁니까? ^^* -[01/31-10:29]-
야은손: 서운 하다기에...참 아릅 답습니다.아오자이만 입었다면 금상첨화 일텐데.궁금해 집니다.Anh과 앙의 현재의 모습이.나트랑 해변 물속에서
꽁가이와 찍은 사진이 있는데 올리지 못함이 안타갑습니다. -[01/31-11:43]-
장민지: "홍"과"앙" 이 마주 새겨진 손주건을보니 그녀의 느낌이 전해져 오는듯 가슴이 저리네요...가슴 아프고 아리지만 소중한 추억 입니다.----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 졌으면 좋겠습니다----"인도 차이나" 처럼... -[08/18-04:26]-
홍 진흠: 장민지 전우님은 뉘신지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만 어쨌던 관심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 -[08/18-23:44]-
홍 진흠: 저 윗글의 부대자체가 산꼭대기에 위치해 한사람이 움직여도 헬기가 뜨는 부대는 쌈지(정병옥)님이 근무하신 9중대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04/10-19:41]-
홍 진흠: 멀리 아르헨티나의 윤광대 전우님! 지난번엔 정말 서운했습니다. 이번엔 한국오시면 꼭 연락주십시오. 살아생전 전우님들과 "번개팅" 이라도 한번 갖어야죠. -[10/16-20:05]
당시 홍하사가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독일가수 "Baccara"(바카라)의 "Sorry, I'm A Lady" & "Yes Sir,I can Boogie"
19세기에 만들어진 '찬송가'(The Golden Rule)를 가수 '은희' 가 "등대지기" 로 번역하여 힛트했던 곡이지요.
첫댓글 결국 홍하사는 "선교유예" 라는 희귀한 판정을 받으며 11년의 군생활(월남 1년을 3년으로 계산)을
13년으로 퇴직금을 받으며 제대를 한바 당시엔 얼마나 군생활을 하기가 싫던지? 어차피 제대상신하여 3군
에서 곧 내려올것이나 하루빨리 사회로 나가려고~ 모든건 "하늘의 섭리" 라고 여기며 청량리서 서적배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