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울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기찬 대표적 공업도시이다. 때문에 우리나라 광역도시 중 일인당 평균소득이 가장 높다. 그만큼 화려하고 역동적인 도시가 바로 울산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를 끼고 있어 동쪽으로 동해를, 북쪽으로는 신라천년의 고도 경주와 접하고, 서쪽은 경북청도와 경남밀양, 남쪽은 부산 기장군과 접하고 있다. 울산은 예부터 경주와 인접해 있던 관계로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신라왕실의 놀이터였으며, 인접한 경주와 더불어 불교문화가 번성했던 곳이다. 또한 신라의 무역항 구실을 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일찍 접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울산은 이미 이 땅에 인간이 살기 이전 공룡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의 흔적이 남아있다. 바로 공룡발자국으로 지구의 역사를 되새겨볼 수 있는 흥분으로 몰아가게 한다. 또한 그와 개울 하나를 두고 이웃한 천전리에는 선사시대에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이 조각해 놓은 암각화가 있다. 더불어 삼국시대 신라의 왕과 화랑의 기록이 함께 나타나는 귀한 보배 같은 존재가 우리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게 하니, 긴 역사가 한 곳에 모여 그 때의 세상은 이러이러 했다며 말없이 전해주고 있는 곳이다.
기록에 울산에는 경주황룡사, 양산통도사와 비견될 만큼 번성했던 태화사터가 남아있다. 임진년 왜란 이전에 허물어 진 것을 임진왜란 때 완전히 사라져버린 곳이다. 그리고 처용가와 처용무로 유명한 처용암과 동해의 용을 달래기 위해 지었다는 망해사가 있으며, 통일신라 번성기 때 세운 간월사터 삼층석탑이 단정한 모습으로 반기며 스러져간 절터에서 안간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 우리를 뒤돌아보게 한다. 그 외 청송사터의 당당한 삼층석탑과 부도, 인접해 있는 언양에 청도 운문사 대전 동학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 비구니 사찰인 석남사가 답사의 풍요로움을 더해주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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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암각화와 공룡발자국
천전리와 대곡리를 흐르는 물길은 꼬불꼬불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며 길게 이어지다 사연댐에 잠시 몸을 의탁하곤 바다로 이어진다. 천전리 암각화가 있는 이곳은 바로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기 이전 공룡이 살았던 곳이었다.
공룡들의 발자국이 이리저리 어지러이 나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는 1억 년, 수 천만년 전에 살았던 육식공룡과 몸집이 큰 대형 초식공룡의 발자국들이 함께 나있다. 즉 울트라사우르스, 고성고사우르스, 메갈로사우르스의 발자국을 함께 밟고서면 잠시 세상을 잊으며 먼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맛이 있다. 공룡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당시 무슨 사연이 있어 이렇게 한 곳에 발자국을 남겼을까? 그들은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고 부산스러운 자국을 남겼던 것일까? 그것도 육식공룡과 초식공룡의 발자국이 혼재되어 함께 만든 흔적을 보면 자연재해에 처절했던 생존의 행동이었을까? 여전히 의문이지만 상상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어쩌면 지구상에 공룡이 멸종할 때 생겼던 마지막의 흔적은 아닐까? 천재지변, 즉 자연재해에 무방비상태로 맞아야 했던 공룡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살 곳을 위해 육중한 몸을 우왕좌왕 움직이는 공룡들을 그려보게 된다. 또 다른 상상력을 펼쳐보면 초식공룡을 뒤 쫒는 육식공룡과의 생존을 위한 사투를 상상할 수도 있고, 이러한 생각이 다소 성급하다면 최적의 서식지에서 공룡들의 각축장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리는 당시의 지형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보이는 것만으로 해석하려는 무지가 있다. 그러나 이곳이 계곡이 아니라 평지였고, 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나무와 숲으로 이루어 졌다면 그러다 아주 작은 일부분만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우리의 한계는 자명하다. 그러나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식과 육식공룡 발자국이 함께 나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그 비참한 결말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연유로 지구상에 공룡이 멸종됐을까? 기후변화, 혜성충돌설 등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교훈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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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발자국을 마주하며 작은 실개천을 건너면 우리가 원시인이라 부르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 즉 선사시대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바위에 그려놓은 그림이 그것인데 이것이 유명한 천전리 암각화이다. 암각화는 주로 한반도 남쪽에 몰려있다. 이곳 외에 물길 따라 내려가면 반구대암각화가 있으며, 고령의 알터암각화, 영주와 안동, 포항칠포 등 주로 경상도 지방에 몰려있다. 다만 전라도에는 남원과 여수 두 곳 뿐이다. 그 이유로 의견이 분분하지만 암각화 전통을 지닌 몽골이나 시베리아 계통 이주민의 한반도 유입경로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암각화는 일부를 제외하곤 하천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생활 장소와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으나 동일한 공간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신성한 장소, 즉 풍요와 다산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의와 관련된 곳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옛날에도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모양이다. 따뜻한 기후에 흐르는 물이 있고 풍경이 남달랐던 이곳은 한적하면서도 따스함이 있는 곳이다. 수 년 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주위의 새단장이 한창이었다. 홀로 물을 건너고 겨우 찾아간 그때가 추운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기운이 막 태동할 무렵이었다. 사진에 담고 그림 하나하나 모자이크하며 찾아보고 있을 때 심심한 해설사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굵은 선명한 음각 부분만 눈에 잘 띄지만 다른 선각 일부는 추증하기 어려웠다. 그분의 말씀은 예전에 행려병자나 떠돌다 이 마을로 흘러들어온 사람이 연고지 없이 죽으면 바로 이곳에서 화장을 했다. 그 이전에는 훨씬 선명하게 그림들을 구분할 수 있었지만 이 암벽이 바로 불이 가장 취약한 것으로 때문에 훼손이 많이 된 것이다. 한줌의 재로 변한사람의 안타까움과 선사시대 신성시 했던 이곳이 겹쳐지며 나 또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다.
암각화는 예술작품이 아니다. 바로 생존과 관련된 절박한 의식의 발로였다. 특히 이곳 천전리 암각화는 그 모든 것이 종합된 선사시대이후 신라 때 까지 통합되어 있으며, 도상적 그림이 새겨진 표상암각화와, 사실적 동물형상, 수렵과 농경 등이 그려진 형상암각화, 그리고 역사적 사실이 기록된 사상암각화 이 셋 모두가 이곳에 담겨있으니 참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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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신석기 시대에 제작되어 청동기를 거쳐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집단에 의해 제작된 이 암각을 선조들은 어떤 의미로 이렇게 그려 놓았을까? 분명한 것은 초기 농경사회가 정착되던 그 당시의 풍요를 기원하며, 풍어를 기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었을 것일 수도 있다. 둥근 원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과 태양을 상징하며 하늘에 모든 것을 의지한 체 순한 삶을 엮어 갔을 것이다. 그러면서 긴박했던 생존의지와 야생의 맹수들과 바다의 풍요로운 자원 등 사냥감에 대한 관찰력이나 사냥의 방식, 농경에 대한 바람 등과 더불어 더 멀리는 삶과 죽음, 영원으로의 회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기울어지는 한 없이 작은 심성.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며 현재의 삶에 용기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선사시대의 성지가 바로 여기이다.
오랜 세월을 거슬러 타임머신을 타고 상상하는 맛. 또한 당시의 내가 되어 영상이 잡히는 것은 너무 심한 병적 집착이라 두려우나 나름대로 분석하고 결론지어가는 것도 재미를 잊을 수 없다. 이토록 자유로운 상상이 나는 늘 즐겁게 한다.
그렇다면 하나 씩 분석해 보자. 암각화는 쪼아 새기기, 갈아 새기기, 그어 새기기로 제작된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 쪼아 새기기인데 구체적 형상을 나타낼 때 쓰는 방식이다. 그 위에 끝이 둥근 도구를 이용하여 문질러 갈아 새기기가 완성되며, 상징적인 기호나 둥근 문양을 나타낼 때 주로 쓰이는 방법이다. 바로 이 세 가지 방법이 이곳 국보 147호 천전리암각화에 모두 다 있으니 귀한 곳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장방형의 대형 암벽이 앞으로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약간의 보호가 되었음직 하다. 마침 내가 답사했던 그 시각이 오전 10시를 훌쩍 지나서였으니 햇살에 형상이 그림자와 함께 잘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 암면에는 사슴이나 개와 같은 뭍짐승과 사람의 얼굴, 뱀, 무리지어 가는 짐승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기하학 무늬, 즉 둥근 원과 마름모꼴의 그립이 겹쳐있으며 여러 곳에 나타내고 있다. 또한 왼편 위에 짐승 한 쌍과 물고기 두 마리, 팔을 활짝 펼치고 있는 사람, 사람의 머리를 지니고 있는 짐승이 있는데 어느 종교에서는 이 형상을 두고 적그리스도라 하기도 한다. 또한 청동기 시대 이곳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후세에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 그려놓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며, 예수가 양을 안고 있는 모습을 찾아 그려내기도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심하게 자유롭다는 생각이다.
가운데 윗부분에 표현된 겹마름모의 기하학 형상은 아무리 추측을 해 봐도 얕은 지식으로는 알 수 가 없으나 겹으로 된 둥근 모양은 다분히 내식으로 해석하자면 태양, 즉 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신을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농경사회의 풍농을 기원하는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원이란 재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계절의 순환과 삶과 죽음, 즉 영원회귀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마름모 형상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순전히 무지한 해석을 하자면 둥근 태양을 양이라 한다면 네모난 땅, 즉 음의 기운, 대지의 기운으로 표현해 놓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지만 여전한 의문에 고개만 흔드니 모가지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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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오른편에 신라시대의 명문들과 선긋기로 표현된 사선들, 그리고 짐승들과 기마행렬, 배 그림이 표현되어 있다. 법흥왕, 진흥왕 대 신라왕실의 주요 인물들이 이곳을 두 차례 찾아왔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법흥왕의 동생(갈문왕, 진흥왕의 아버지)가 누이동생과 함께 와 놀다가 갔다. 그 후에 갈문왕이 자신의 여섯 살 난 아들(후에 진흥왕)을 데리고 다시 찾아와 죽은 누이동생을 그리워하며 다녀갔다는 내용이다. 또한 그 옆에 다른 명문들도 흐릿하게 남아 있으나 풍화가 심해 잘 알아보기 어렵다. 내용에 죽은 누이동생을 그리워했다는 기록에 가슴이 뭉클 적셔왔다.
여러 집단에 의해 조성된 암화에는 뭍짐승과 사람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주류를 이루는 신석기시대, 혹은 청동기시대의 형상암각화에 이어 기하학적 도형위주의 암각화를 제작하는 또 다른 집단이 등장한다. 후에 등장하는 집단에 의해 이전의 그림에 훼손이 이루어진다. 바로 표상암각화 제작 집단과 형상암각화 제작 집단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듯하다. 선사시대 암각화에 새겨진 사냥장면은 실제의 사냥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감응주술행위로 해석된다. 사실성에 대한 이유는 그들이 염원했던 사냥감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그 대상을 포획하기 이전에 이미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종교적인 확신이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 경남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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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길게.아직 건강하다는 반증일세. 자주 오시게나.
얼마전 비학산 갔다가 봤는데...
이런것도 발자욱일까요?
저 바위가 한겹 벗겨져 나가면 어찌되는 걸까?
천천리각석은 선명하게 잘 보이는데 반구대 암각화는 자꾸 훼손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ㅠㅠ
얼마전 반구대 다녀왔습니다. 이 글을 읽고 깊이있는 공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