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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는 가난하다
아무리 잘생긴 당나귀라도
가난하다
색실로 끈을 엮어
목에 종을 매달고도
당나귀는 대책 없이 남루하다
해발 5천 미터
레에서 카르둥라 고개를 넘어
누브라 벨리까지
몇 날 며칠
당나귀를 타고 간 적 있다
세상의 탈 것들 다 타 보았지만
내가 나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내가 나를 지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나귀 등에 한 생애를 얹고
흔들리며 벼랑길 오르는 동안
청춘을 소진하며
어찔한 화엄의 경계
지나오는 동안
한 소식
한 당나귀에게서 배웠다
희망에 전부를 걸지도 않고
절망에 전부를
내주지도 않는 법을
그저 위태위태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당나귀여,
너는 고난이 멈추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나도 너처럼 몇 생을
후미진 길로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곳이
폐허는 아니었다
자학이 아니라 자족이었다
바람이 불었으나
너무 오래 걸어 무릎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이었다
나의 화엄은
당나귀와 함께 벼랑이었다.
2
인사동 귀천에서 만난
한 시인은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절망의 힘으로도
끌고 가기 힘들다고
밖으로 나오니
새 한 마리
가볍게 생을 끌고
피안으로 날아간다
일생의 힘으로 시를 끌고 간
천상병 시인이
눈 내리는 귀천을 끌고
턱없이 웃으며
하늘 모퉁이로 가고 있다
시보다도
한 생을 끌고 가는 것보다도
나는 나를 끌고 가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인사동 벗어나기 전
뒤돌아보니
눈보라 속 당나귀들이
저마다 자신을 지고
서역의 고개를 넘고 있었다.
ㅡ 천상병 시인,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거기서도 시를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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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당나귀/ 류시화
시너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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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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