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자가 국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니! "친일악질" 김창룡
일제의 개였다가, 대한민국 육군 중장으로 국립묘지에 묻힌 "김창룡"
그는 일본 제국의 헌병출신으로, 대한민국의 군인이 된 자이다. 현재 “국군 기무사령부”의 전신인 “특무대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관동군 헌병 소속”으로서 항일 투사들을 토벌하다가, 광복 이후에도 출세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그가 경찰이었으니, 분야는 다르다)과 같은 부류로 분리되기도 한다. 김창룡은 후술에거 볼 수 있겠지만, 걸어다니는 쓰레기였다.
그의 학살 대상에는 같은 한국인이 섞여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악질이고 쓰레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빨리 그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1. 김창룡의 굴곡진 일생에 대하여
1) 일본현병이 되어 "일본의 주구"로 산 그의 초년의 삶
김창룡은 1916년 7월 18일,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일산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가난하였다고 한다. 그는 10살이 되던 해 덕성사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에서 누에를 키우고 실을 뽑는 기술을 배우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2년 만에 회사를 나와서, “만주철도 신경역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2년 만에 철도 직원을 그만두고 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만주 주둔 일본 헌병부대 군속으로 일하게 된다. 3년 동안 군속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41년 4월 일본 관동군 소속 헌병 교습소에 입소했고, 교습소를 수료한 후 1941년 10월 헌병 보조원이 됐다.
그의 업무는 소련과 만주국 국경지역에서 항일 인사를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사복을 입고 주요 인물들을 탐색하고 접근하는 것이 주로 그가 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임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예를 들면, 중국 공산당의 거물 왕진리(王近禮)를 체포할 때 그는 중국인 거지로 가장해 “왕진리”의 가게 종업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왕진리의 신임을 사기 위해 경찰서 유치장을 7번이나 드나들었다. 덕분에 왕진리와 주변 중국인들조차 그를 '진짜 중국 사람'으로 인식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그의 활약으로 왕진리를 검거했을 뿐만 아니라, 왕진리와 관련된 9개 항일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50여 명을 검거했다. 이때가 1943년이었다.
김창룡의 활약에 탄복한 일제는, 바로 헌병 오장으로(하사) 특진시켰다. 그 이후에도 그는 1943년 9월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무려 50여 개의 항일 조직을 적발했다. 여기에는 공산당과 연계된 조직이 많았지만, 김창룡이 죽였던 사람들 중에는 공산당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2) 해방정국과 김창룡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고향인 영흥으로 돌아왔다. 영흥에서 소련군에게 친일부역 혐의로 체포당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겨우 탈출하였고, 이후 다른 지역을 전전하다 다시 친일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거듭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2차례나, 친일파로 체포됐기에 그는 한반도 이북지역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고 한다.
급하게 온 서울에서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해 전전하던 중, 마침 만주 일본군에서 안면이 있던 “박기병{”을 만나게 된다. 박기병은 당시 3연대에서 소대장을 맡고 있었다. 박기병은 그를 국방경비대 5연대 일반 사병으로 입대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병 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다시 박기병을 찾아가게 되고, 그는 3연대에서 “정보하사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던 중 만주군 대위 출신인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 경비사관학교” 3기로 입교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소위가 된 후 자신의 ‘전공인 고문등의 특기’ 등을 살려서, 군에서 일제 경찰과 헌병 출신들을 모아 정보소대를 편성하고, 좌익 색출 작업을 담당했다. 이후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면서 그에게도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3)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김창룡의 돌발행동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고, 소련 측 인사를 경호하기 위해 소련군이 주둔하였다. 그때 한 소련 군인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김창룡이 발견하자, 김창룡은 격투 끝에 소련 군인을 제압하고 필름을 압수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련은 상당히 난처해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소련 측에게 '정탐을 하러 왔느냐'고 따졌고, 김창룡의 이 행동은 군 수뇌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48년 1월 중위로 진급하게 된다.
2.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김창룡
1) 여순 반란사건으로 인생의 기회를 잡게 된 김창룡
이후 김창룡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대위로 진급했다. 8월 말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치 되었다. 그러던 중 김창룡에게는 기회가 된,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은 대대적인 숙군을 지시했다.
1946년 국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실 대한민국의 국군은, 영어 한 마디만 할 줄 알면 장교가 될 수 있었고, 추천서 한 장이면 요직에도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당장 군대를 육성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출신들도 쉽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좌익 계열도 어렵지 않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14연대가 통째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승만은 군법무관 김완용에게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때 김창룡이 실무자로 있던 육군 정보국 3과인 방첩과가 나섰다.
1948년 11월 11일 김창룡과 정보 요원들은, 박정희 당시 소령을 체포하고 심문했다. 박정희가 체포됨으로써 군대 내 세력을 확장하던, “남조선로동당 조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까지 방첩과는 불과 4개월 동안 1500명에 달하는 이를 숙청했다. 당시 군 병력의 3%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실적 쌓기식 숙청이 됐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증거보다 자백을 받아내는 식으로 심문을 했고, 김창룡의 고문은 너무도 혹독하게 가해졌다.
비록 본인이 자백을 하였다 하여도, 또 연루된 좌익 인물을 대라고 고문은 이어졌다.
이 같은 방식으로 애매하게 숙청되는 인물이 정말로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최남근 중령은 남한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최남근은 처형당할 때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자신이 억울하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항변한 것이다.
당시 숙군 작업으로 처형된 사람 가운데서는 이처럼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거나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간 사람도 있었다. 이후에도 숙군은 이어져 1949년 7월까지 4749명이 처벌받았다. 숙군 과정에서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김창룡은 1949년 초 소령으로 승진하고, 6월 육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고, 7월 중령으로 승진했다. 불과 2년 3개월 만에 소위에서 중령까지 올라간 것이다.
2) 그는 사적인 원한을 품은 자에 대해서도, 복수를 하였다.
김창룡은 빨갱이만 때려잡은 것이 아니었다. 1946년 김창룡이 3연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소대장이었던 김도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창룡이 야간 순찰 후 보고하라는 명령을 위반하자, 김도영 소대장은 김창룡을 때리고 꾸짖었다. 이에 김창룡은 김도영에 대한 원한을 품었고, 3년 뒤인 1949년 김창룡은 김도영이 적과 내통하고 제주도 좌익세력과 내통한다고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김도영은 무려 6개월 간 구금당한 뒤 수사를 받다 간신히 풀려나왔다.
3) 김구 암살의 진정한 배후, ‘김창룡“
또한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 안두희는 김구를 살해한 직후 경교장 주위에 있던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체포된 안두희가 끌려간 곳이 김창룡 앞이었다. 이때 김창룡은 안두희에게 "안 의사, 수고하셨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후 안두희를 끊임없이 챙겼다. 안두희가 감옥에 있을 때는 좋은 음식을 대접했고, 책 쓰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또한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창룡은 안두희를 형무소에서 빼내 주었다.
안두희가 소위로 다시 임관할 때부터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김창룡은 안두희를 정말로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당연히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해 그에 책임론이 제가되지 않을수 없는 대목이다.
4) 더 문제는 김창룡 그가, 양민학살 및 간첩을 조작했다는 것 이다.
1950년 9월 28일, 이승만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김창룡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합동수사본부는 북한군이 수도권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찾아내고 처벌하는 무시무시한 권한을 가졌다.
그뿐이 아니라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즉, 정치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1950년 10월 초 부터 1951년 5월까지 김창룡은 여순 반란사건 때, 숙군과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부역자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 자료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 검거된 인원만 15만 3825명, 자수한 인원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 915명이 부역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서울에서만 1298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북한에 협조한 사람들은 북한군과 함께 북으로 올라가고 없었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실적만을 중요시한, 김창룡의 부역자 처벌은 여론과 정치권의 거센 비판을 받아애 했다. 특히 이승만과 김창룡에 의해서 만들어진, “합동수사본부”는 사실 당시 어느 법에도 설치 근거가 없었다. 결국 합동수사본부는 그러한 이율 1951년 5월 23일 해체됐지만, 김창룡은 이 시기 이승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게 되었다.
김창룡은 1950년 10월 말에 대령으로 다시 승진했으며, 1951년 5월 15일 “육군 특무부대 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3. 김창룡의 무리한 간첩만들기 행보
이로 인해서, 그는 일제부역자임에도, 엄청난 출세와 함께, 이승만의 신임을 받았지만 당연히 문제가 발생하였다. 숙군과 학살, 부역자 처벌로 대부분의 좌익들이 소탕했을 뿐 아니라, 남아있던 좌익들도 북한으로 넘어가버려 이제 남한 내 좌익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당연히 김창룡의 권력수단인,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을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그는 이 상황에서 기발한 돌파구를 마련한다. 이를 테면 '빨갱이가 없으면, 빨갱이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1951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상복을 입은 채 관을 메고 지리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특무부 대장 김창룡은 이들이 관 속에 총기를 숨겨 놓고 지리산 빨치산에게 가는 것을 붙잡았다고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기분이 좋아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여러분들, 김창룡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세요"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런 뒤 이승만은 국무회의장으로 김창룡을 불러들인 뒤 노획한 총기를 전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김창룡이 벌인 숱한 조작 사건 중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최초의 '빨갱이 만들기 작전'은 1950년 10월 그가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 일어났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있던 주민들에게 쥐여주고 이들을 공산분자로 몰았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죽인 사건이다. 이것이 소위 '삼각산 사건'이라 한다.
1952년 5월 24일 무장 북한군으로 보이는 일당이 임시수도 부산 금정산에 나타나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군과 미군 병력이 밀집해 있는 임시수도 부산에 북한군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안 되었는데, 사실 이 또한 김창룡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에 있는 무기수, 중형수들을 상대로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라고 제안했다. 김창룡은 이 제안에 따른 형무소 재소자 7명을 북한군으로 꾸민 다음 부산 금정산에서 총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들 7명은 순식간에 사살당했다.
하지만 이러한 “김창룡의 공작” 후 이승만은, 다음날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런데 김창룡은 자신이 이 사건을 직접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김창룡의 직속상관 김종평(육군 정보국장)이 그가 부산으로 오는 것을 방해했다. 결국 이 정치공작의 공이 “원용덕 헌병사령관” 등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자, 김창룡은 김종평에 원한을 품게 되었고, 이는 또 다른 조작사건이 만들어 지는 계기가 된다.
4. 말도안되는 모함으로, 준장으로 진급하는 김창룡
1953년 김창룡은 '동해안 반란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동해안 속초에 있는 1군단에 이승만이 방문하면, 이승만을 저격하고, 김창룡이 원한을 가진 “김종평 육군 정보국장”이 군 병력 1000명을 동원해 부산을 장악해 정부 요인을 처단한 다음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나중에 군법회의에서 여러 증인들이 김창룡의 조작임을 증언하면서, 사건은 커지지 않았지만, 김종평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5월 김창룡은 육군 준장이 됐고, 이 시기가 되면 김창룡은 간첩조작과 함께 권력투쟁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5. 정치에도 개입하게 하여,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김창룡”
당시 '정국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에 가장 영향력이 강하던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의 편집국장을 동시에 겸임하고 있었다. 정국은 이범석, 원용덕 등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외곽세력인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 출신이었다. 김창룡은 이 족청과 이승만의 총애를 놓고 대립관계에 있었고, 이에 김창룡은 족청을 권력에서 제거하기 위하여, 1953년 8월 31일 족청의 “정국은”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정국은이 체포된 지 10일 만에 내각에서 족청 계열 장관 3명이 동시에 파면되고, 곧 자유당에서 족청 계열 거물인사 8명이 제명됐다. 김창룡의 견제세력이었던, 족청은 순식간에 권력에서 이탈했다.
박정희 역시 견제의 대상이었다. 1953년 박정희가 미국 유학을 떠나려 할 때 김창룡이 막았다. 당시 박정희가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면, 박정희의 이력이 쌓여 군대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있을 때 그를 잡아내고 심문한 사람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그런 이유로, 김창룡으로서는 박정희의 출세를 막아야만 했다. 이렇듯 김창룡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일권”과 상관인 “강문봉 중장”조차 김창룡을 제어하지 못했다.
1954년 김창룡은 또한, 김도영이 야당 국회의원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논산 훈련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한다는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물론 죄가 없던 김도영은 4개월 뒤 풀려났지만, 김창룡 때문에 번번이 승진의 기회에서 누락됐고, 변변찮은 보직도 맡지 못했다.
1955년 1월 드디어, 일본 헌병 하사였던, 김창룡은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세상은 이 당시 김창룡을 '이승만의 오른팔' 혹은 '이승만의 양자'라고 불렸다.
1955년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역시 김창룡의 작품이었다. 김창룡은 1955년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 김재호, 김익중, 이범륜, 유성연, 김동혁, 김동훈에게 '이종태'라는 청년을 접근시켰다. 그는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나재하 등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그들은 이종태에게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수류탄을 터뜨려 이승만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으며 수류탄 등을 지원했다. 당연히 이 음모는 거사 직전 특무대에 발각됐다.
그리고 이 사건을 황당하게도, 납북되었던 조소앙이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식으로 엮어서 한때, 조소앙이 소속되어 있었던, 김구(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던 정치인들 마저도 제거하려 했다. 이외에도 김수임 간첩사건 등 숱한 사건이 그의 손에 의해 조작돼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6. 김창룡의 횡포에 대한 정일권의 견제
1955년 10월 김창룡의 횡포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일권과 강문봉은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직접 찾아갔다. 그들은 "김창룡을 다른 부대로 보내거나 차라리 미국 유학을 보내 달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창룡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김창룡은 때마침 터진 “원면 비리”를 활용하려 했다. 당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면을 받은 장성들이 이를 시장에 되팔아, 1억 원 이상의 부당이익을 취해 자유당 고위층에 상납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를 가지고 자신을 탄핵한 정일권, 강문봉 등 군 장성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당히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조차 김창룡에게 '그만 들춰라'고 경고했지만 김창룡은 멈추지 않았다. 1955년 11월, 김창룡과 마찬가지로(김창룡은 헌병), 일제 경찰 출신으로, 고문의 달인이라 불리우던 “노덕술 헌병사령부 범죄수사단장”(중령)이 파면됐다.
노덕술 또한 김창룡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군수물자를 빼돌린 정황이 포착됐고, 이 사건이 언론에 크게 실리면서 파면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도, 김창룡이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노덕술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설도 있다.
7. 세상의 원한을 받은 “김창룡”이 암살 당하다.
결국 1956년 1월 30일 김창룡은 특무대 출신 4명(허태영 대령, 신초식, 송용고, 이유회)에게 암살된다. 특히 이 가운데 주범인 허태영은 1950년 한국전쟁 때 김창룡이 방첩대(CIC) 대장을 맡고 있는 동안 “특무대 마산파견대”를 이끌던 인물이었다.
이후 특무대 대전파견대장을 지냈을 정도로 사실 “김창룡”과는 상당히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허태영은 법정 진술에서 김창룡을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창룡은 평소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였으니 공산당 1명에 무고한 양민 10명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이 그의 손에 희생되었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들도 전부가 협박 공갈로 자백을 받은 것으로 대부분 허위 날조됐거나
침소봉대된 것들이었다.
한편 뒤켠에서는 살인, 약탈, 협박 등으로 군수품을 빼돌리고 밀수를 하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김창룡이 그간 모은 재산만 2억 원이다.“
허태영은 이유회와 함께 1957년 9월 24일 대구 육군정보학교 야외훈련장에서 총살됐다. 총을 맞고 쓰러질 때까지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8. 오욕의 인생 김창룡, 중장으로 추서되어, "최초의 국군장"으로 장례되다
(오욕의 역사)
사건 발생 4일 후인 1956년 2월 3일 국군 최초로 국군장이 열렸다(최초의 국군장이 김창룡이 라니 오욕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날 하루 육해공군 전 군부대는 조기를 게양했고 장병들의 음주와 가무도 금지됐다. 김구가 죽었을 때 한 번도 조문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김창룡 영전에 3번이나 조문하면서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이승만은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죽고 나서, 1998년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처사이다. 그런데 김창룡에 대한 “대전현충원” 안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김창룡이 '반공투사'였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그를 극찬하고 칭송하고 있다.
“김창룡”의 유족들도 한결같이 “김창룡”이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제일 공헌을 많이 했다. 민간인을 많이 죽였단 것은 헛소문이고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제일 공헌한 분'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전혀 반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첫댓글 백범 암살주범이 국립묘지라니 참 기가막히네요.
김창룡.......
간첩1명에 양민10명비율의 학살~~ 그리고 비리..
으아~
나도 쳐 죽이고 싶어진다.
이런 인간들 지금도 많지요.
근성이 닮았으면 어디서건 그런거 같아요~
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