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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묵상글 ( 연중 21주간 화요일. - 욕심의 관심과 사랑의 관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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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연중 2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욕심의 관심과 사랑의 관심
“불행하여라. 너희가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가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어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불행에 대해 얘기하면서
불행한 줄 모르는 그들의 불행에 대해서 봤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그들의 불행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불행한 이유로 두 가지 경우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율법에서 더 중요한 계명은 무시하고 덜 중요한 계명을 중시하는
어리석음의 불행과 가치 전도의 불행을 꼬집으십니다.
둘째는 겉은 깨끗이 닦으면서 속마음은 더러운데도 그대로 놔두는
잘못이랄까 위선의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어리석음과 잘못이 무지해서 그러니까 배우지 못해 그런 걸까요,
배울 만큼 배웠고 그래서 알만 한데도 영적으로 부덕하기에 그런 것일까요?
분명하지요.
무지해서 그런 것이라면 주님께서 그렇게 호되게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상하게 가르쳐주셨을 겁니다.
주님께서는 어제부터 이들을 위선자와 눈먼 인도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위선자라고 하면 무엇이 선이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은 또는 그의 속은 그렇지 않기에 겉꾸밈 하는 겁니다.
그리고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욕심에 눈이 먼 것을 말함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모두 욕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인간의 관심은 크게 두 가지이지요.
사랑의 관심과 욕심의 관심인데 이들은 욕심 때문에
흔히 얘기하듯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은 율법에는 관심이 없고,
십일조에 관심이 있어 가치가 전도되고,
욕심 때문에 속은 탐욕과 방종으로 악취가 나는데
겉은 깨끗이 씻고 향수를 발라 더러움과 악취를 감춥니다.
문제는 속의 더러움과 악취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이 없는 것이고,
그렇게 욕심에 눈먼 상태에서 인도자의 위치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것이며,
그래서 자기도 천국에 들지 못하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남 얘기로 흘려들은 것인가? 나의 얘기로 받아들일 것인가?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처럼 지도층은 아닐지라도
가까이는 자녀를 인도하는 부모들이고,
이웃을 신앙에로 인도해야 할 사람들인데
사랑의 관심보다 욕심의 관심이 더 많은 우리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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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연중 2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사실, 여러 가지 부패 중에서도 종교적 부패는 항상 가장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부패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 종교지도자들의 윤리적 부패 못지않게 탐욕에 의한 부패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부패와 분열은 <요한 묵시록>에서는 세상 종말의 징표로 제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선언은 종교지도자들의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네 번째> 불행선언은 그들의 십일조에 대한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었고 철저했고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행하는 일은 실천하지 안했던 것입니다.’(마태 23,23). 그들의 마음을 탐욕으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불행선언은 속은 감추고 은폐하면서 겉은 기만과 허위로 깨끗이 닦는 정결법에 대한 경고입니다. 곧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마태 23,25)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차원을 넘어서, 애초에 그릇 안에 담고 있는 음식을 정당하게 취득하였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방종에 대한 경고입니다.
앞의 첫 번째에서부터 네 번째 불행 선언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하시며,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을 깨우쳐주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동시에, <루카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깨끗해지는 방법, 곧 더러움을 비워내는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결국,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비우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정결법의 정신이 자신을 지키는 데 있기보다,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잔 속을 깨끗하게 하는 일, 그것은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입니다(루카 11,4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주님!
제 마음 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깨끗한 것을 깨끗한 채로, 더러운 것을 더러운 채로 드러내게 하소서!
속은 탐욕과 이기로 채우면서 겉모양만 깨끗이 닦고 치장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채우소서. 제 잔과 접시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로 채우소서!
제가 당신의 것인 까닭이니다.
제 잔은 당신의 피요, 제 접시는 당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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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연중 2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은 신용장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럼에도‘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형식적 의로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영적이고 참된 의로움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자신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 데 인색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혹여 내가 누구를 속였어도 그것은 내가 빠져나간 것처럼 여길 뿐입니다. 사람들 앞에 선 내 모습이 하느님 앞에 선 모습보다 우선일 때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선 내 모습은 사람들의 평판에서 자유롭습니다. 나 자신을 하느님 앞에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러니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4). 삶의 여정 안에서 ‘더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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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연중 2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8월 23일은 31년 전에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날입니다. 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오래 전이지만 기억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입니다. 선배 사제들과 교우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새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성가대는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면서 ‘성인호칭기도’를 불렀습니다. 10분가량의 시간이지만 감사와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을 때입니다. 선배 사제들이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새 사제들의 머리에 안수를 하였습니다. 성인호칭기도 때는 감사와 은총이었다면 선배 사제들의 안수는 공동체와 하나 됨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함께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품식이 끝나고 야외에서 첫 강복을 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보좌 신부님이 먼저 무릎을 꿇고 새 사제의 안수를 청하였습니다. 사제의 직무는 나이와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부모님과 교우 분들에게 안수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새 사제의 첫 번째 사목이 시작되었고, 31년이 흘렀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신학교에서 사제의 직무를 배웠습니다. 첫 번째는 ‘교직’입니다. 복음을 가르치는 직무입니다. 교리를 가르치는 직무입니다. 복음은 강론을 통해서 선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교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예비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견진 성사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숙지해야 합니다. 사순과 대림 특강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하였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제가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을 저는 삶으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고, 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사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성사를 통해서 드러내야 합니다. 첫 번째 미사를 봉헌했던 그 마음으로 정성껏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병자성사와 고백성사를 드려야 합니다. 돌아보면 형식적으로 성사를 드렸던 적이 많습니다. 습관적으로 성사를 드렸던 적도 많았습니다. 세 번째는 ‘예언직’입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잘 알아야 합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고민하고 아파하는 것을 공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해야 합니다.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생각하니 저를 필요로 하는 분들보다는 제가 필요해서 만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지난 31년을 돌아보며 앞으로 남은 사제생활을 위해서 예전에 신학교에서 읽었던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라는 글을 마음에 깊이 새기려고 합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기도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자를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 사제
검소하며, 물질에 신경을 안 쓰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청소년과 친하게 대화하며 교리교육에 힘쓰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제
웃어른에게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예의를 차리는 사제
독선을 피우지 않는 사제
교구장에게 순명하며, 동료사제들과 원만한 사제
강론을 성실히 준비하는 사제
고백성사나 성사집전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후배 사제 양성에 마음 쓰며 생활하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 성직에 충실한 사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가 사제직에 더욱 충실 할 수 있도록, 바른 길을 가도록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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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연중 2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공동체의 축복
-위로, 격려, 치유, 구원-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수도회 명칭이 좋습니다. 수도회 덕분에 한국땅에 살면서도 난생 처음 청주교구연수원에서 피정지도를 갖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일기쓰듯 하는 강론이요, 70대 중반에 들어서니 강론쓰기도 많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제 수도명이 프란치스코입니다. 천주교 입교전 개신교 다닐 때부터 좋아하고 알게 된 성인은 프란치스코가 유일했습니다. 현임 교황도 프란치스코입니다. 성 베네딕도가 산山같은 분이라면 성 프란치스코는 강江같은 분으로 서로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산과 강”은 베네딕도회 영성이요, 저는 자주 다음 짧은 자작시를 읊어보곤 합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은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밖으로는 언제나 거기 그 자리, 한결같은 정주의 산, 안으로는 끊임없이, 한결같이 맑게 흐르는 강, 제 신원에 알맞게도 저는 성 베네딕도회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입니다. 어제처럼 여러 단상들로 시작되는 강론입니다. 잠시 공동체를 떠나니 공동체의 소중함을 알겠습니다.
“공동체는 선교의 뿌리다.”
“관상과 선교는 하나다.”
새삼스럽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공동체 중심에 살아 계신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릴수록 왕성한 생명력에 활발한 선교활동입니다. 공동체에 뿌리내리지 못할 때 개인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공동체의 축복입니다. 공동체에서 상처도 받지만 위로와 격려, 치유와 구원의 축복이 백배는 많습니다.
제가 운전을 못하지만, 공동체 형제의 도움으로 피정지도차 어제 먼길의 여기에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어제 여기 수도 형제들의 저녁 성무일도 노래 소리가 아름다워 공동체 원장과 주고 받은 메시지에 웃었습니다.
“잠시 방문했던 두 형제님 키 큰 분과 키 작은 분, 이름이 무엇인지요? 모습이 너무 순수하고 착해 보여서요.”
“신동준 사도 요한, 제임스입니다. 둘 다 사제 형제입니다.”
“수도공동체 형제들의 저녁 성무일도 노래 소리가 참 젊고 힘차고 아름답네요! 평균 연봉이 얼마나 됩니까?”
독수리 타법을 못 벗어나다 보니 ‘연령’을 ‘연봉’으로 쓰여 있음을 후에야 발견하고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연봉이요?”
“평균 나이요? 연령을 연봉이라 잘못썼네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네요.”
“아, 네. 40대 중후반 될 듯합니다.”
영육靈肉으로 젊고 힘차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형제들의 공동체임을 깨달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공동체의 손발이 되어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는 원장 형제님에게도 신선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관상과 선교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존재이유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믿는 수도형제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안으로는 제자요 밖으로는 사도이고, 안으로는 수도자요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관상적 삶자체가 활동의 선교가 됩니다. 여기 성당 앞, 오른편 벽에 배치된 글자의 조화가 기막히게 아름다워 사진에 담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상징하는 듯, 흐르는 강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위 이사야서 성서 말씀이 어제처럼 아름답게 느껴지기는 처음입니다. 바로 관상과 선교가 하나된 아름다운 삶을 상징합니다. 공동체의 토양에 뿌리 내린 선교입니다. 공동체는 선교의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이래서 찬미와 감사의 공동 시편전례기도가 미사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도 깊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한몸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감사는 그대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감사로 직결됩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 오랫동안 써붙인 고백글이 생각납니다.
“여기 내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는 저에겐 최고의 스승입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형제들에게 배울 것은 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섬김의 사랑을 배우게 되니 저절로 겸손한 삶이 됩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삶을 보면서 이뤄지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이런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뿌리내릴수록 주님을 닮은 아름다운 관상가와 선교사로서의 삶이겠습니다.
오늘 말씀중 벼락같은 깨달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주님의 호된 질책을 받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런 보고 배울 좋은 공동체가 없었습니다. 권위주의의 교만에 젖다 보니 완전히 공동체와 유리된, 공동체에 뿌리내리지 못한, 물에 둥둥 떠다니는 기름처럼 부평초浮萍草같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지에 눈이 멀어 본말전도本末顚倒, 분별력 상실의 위선과 허영의 괴물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눈먼 인도자들아!”
그러다 보니 세칙에는 충실하였으나 본질적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에는 소홀하여 흡사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우스꽝스런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속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지니 걱정안해도 됩니다. 저절로 안과 밖이 같은 진실하고 겸손한 삶자체가 선교가 됩니다. 참으로 속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지고,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살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깨끗한 마음으로 책임을 다하며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살 때,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누가 주님의 날이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써도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이제 굳건히 서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참으로 공동체의 중심에 살아 계신 주님께 깊이 뿌리내릴수록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않고 한곁같은 내적 평화와 안정의 삶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많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실패했습니다. 이들이 우리에게는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2022년 미사중심의 교구 공동체의 해”라는 청주교구의 올해 모토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좋은 공동체의 형성은 물로 공동체 중심에 계신 주님께 깊이 뿌리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름다운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되기를 빕니다.
”(2테살2,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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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연중 21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전주시 노송동 주민 센터 부근에는 성탄절 전후로 천사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천사는 주민 센터에 전화를 걸어 현금과 돼지 저금통이 든 종이 상자를 놓아둔 위치를 알려주지요. 그 일을 벌써 22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0년 4월, 초등학생이 58만 4천 원이 든 돼지 저금통을 주민 센터 민원실에 맡긴 것을 시작으로, 작년 12월까지 그 금액은 자그마치 8억 872만 원에 이릅니다. 전화 거는 사람이 다양한 것을 보면 온 가족이 함께하는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물론 언론에서도 이들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한사코 몸을 숨겼고, 주민 센터 측도 그 의사를 존중해서 신원확인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신원 공개를 거부하고 큰돈을 기부했던 이 가정의 모습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기부금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기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세상에 드러내면서 다른 사람의 기부를 더 많이 이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면적 합리성보다 그저 실천하는 사랑 자체에만 집중하고 계셨습니다. 기왕이면 보이기 위한 사랑을 하는 우리 현대인의 마음을 흔드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한 ‘불행 선언’입니다. 특별히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십일조는 본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레위족과 불쌍한 과부, 고아, 외국에서 귀화한 이민족들을 돕기 위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과 같은 하찮은 푸성귀를 바치면서 십일조를 바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작 십일조의 근본정신인 사랑은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작은 율법 조항을 지킨다고 자찬하면서도 중대한 하느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기에 불행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겉치레에만 신경 쓰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 모습은 아닐까요?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시고도 ‘불행 선언’을 선포하시지는 않을까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그마한 실천만으로 모든 사랑을 실천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시작은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 자체만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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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비결은 좋아하는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제임스 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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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연중 21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기쁨♣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마태 23,2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먼저 십일조에 관한 그들의 행태를 지적하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느님의 절대적 점유권을 상징하는 뜻에서 소출의 십분의 일을 사제들의 생활에 보태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모든 소출에 십일조를 확대시켜 적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23,23). 곧 십일조라는 최소한의 규범을 지키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각 사람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권리와 인격을 보호하고 이롭게 하며, 성경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활고와 실업 등으로 십일조마저 낼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을 품지 못하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을 고의적으로 외면하거나 사소한 일에 집착한 나머지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깨우쳐주십니다(23,24). 어떤 상황에서든 본말이 뒤바뀐 생각과 행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복음 가치의 상대화, 대인관계의 갈등, 인간 소외와 불의를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가톨릭 교회법전은 “교회법적 공평을 지키며 영혼들의 구원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서 항상 최상의 법이어야 한다.”(1752조)고 규정합니다. 이는 모든 교회규범을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정신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이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문자에 얽매여 신속한 문제해결만 서두르는지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이가 인간답게 사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겉은 깨끗하나 속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찬 잔과 접시로 상징되는 인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 겉과 속이 같아야 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외모가 빼어난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이시고 선이시며 정의이신 하느님을 반사하는 사람이 진정 멋진 사람이겠지요.
살다보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또는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기 위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결국 자기중심적이며,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교만한 태도라 할 것입니다. 영적 성숙, 거룩함은 달리 말하면 하느님 앞에서의 정직함이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이와는 달리 실천 없이 말로만 가르치며 위선에 빠졌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대로 영혼 구원을 위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라는 근본정신을 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머리나 입으로만 살려 하지 말고, 온 마음과 온 정신과 혼을 쏟아 그 근본정신을 실행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설령 영적인 것이라 하여도 이것저것 다 탐내고, 좋은 강의는 다 듣고 싶고, 많은 것을 가르친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이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며,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마음이 없다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이겠지요. 죄로 기우는 경향을 지니고 세상의 유혹에 맞서 싸우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 자체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를 지고 그래도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그분의 뜻대로 행동하는 아름다운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거룩함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발자취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여 행동함으로써,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그릇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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