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알프스 가는 길
강 문 석
흡사 짓궂은 장난이라도 치듯 갑자기 강한 돌개바람이 코앞을 맴돌면서 흙먼지를 날리고선 사라졌다. 산장 출발 반시간 만에 해발 3000미터에 섰다. 몸집이 넉넉해서 고생하는 성공은 어제부터 산소가 희박한 고소증을 고소 먹었다고 했다. 내가 사진촬영에 매달리느라 그와 충분한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엔 예사롭지 않은 문학적 표현도 들어있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출가를 서둔 이유와 20년 넘는 세월을 변함없이 부처께 매달려 구도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겪은 고행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실제로 손목시계에 나타난 10℃ 기온은 몸에 솟는 땀방울을 식히기엔 더없이 알맞은 온도였다. 약간 아래로 내려서는가 하면 다시 오름으로 바뀌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오전 10시 드디어 오르는 코스는 끝이 났다.
나카다케中岳에는 ‘미나미다케南岳 방면 등산로는 작년에 개통된 새로운 코스’라는 안내 팻말이 붙어있었다. 평지를 따라 걷다가 내리막 코스로 접어들어 불과 10분도 안되어 앞선 우리 일행이 손짓하는 너덜지대로 내려섰다.
등산지도에 작게 표시된 샘이 그곳에 숨어 있었고 급경사에 걸쳐 있는 두꺼운 얼음장에서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다른 평지에 남아 있는 만년설도 녹은 물은 이처럼 밑으로 흐르겠지만 땅으로 흡수되는 바람에 받을 수가 없었던 것. 만년설이 녹은 물은 위생이 보증된 것은 아니지만 당장 목이 타는 갈증을 맞닥뜨린 상황에서는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오전 11시, 등산로에서 마주친 젊은 부부에게 “오하요∼고자이마스”란 인사를 건넸더니 바로 “콘니치와!”라는 답이 돌아왔다.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일본 인사말을 난 제대로 몰랐던 거였다.
우린 곧 미나미다케고야南岳小屋에 닿았다. 본체 출입문은 제법 모양을 살려 작은 지붕을 하나 더 달고 있었다. 서너 명 종업원이 침구를 햇볕에 소독해서 거둬들이는 손길이 바빴고 하얀 날개를 단 두 대의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것도 다른 산장에는 없는 풍경이었다.
이곳 부속건물 지붕에는 블록보다 더 큰 돌을 마흔 개쯤 얹고 있어서 그 무게로 건물이 주저앉지 않을까 불안할 정도였다. 지붕에 얹힌 돌만으로도 이곳이 초강풍지대임을 알 수 있었다. 풍력발전 말고도 자연을 이용한 에너지 발생장치는 산장 지붕에 설치한 대형 태양광 집열판 2개가 더 있었다.
산장과 50미터쯤 떨어져 있는 화장실은 깨끗했다. 자연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인분을 말려서 소각시키기 위해 재래식 구조를 갖췄기 때문에 역한 암모니아 냄새가 진동했지만 신기하게도 파리는 한 마리도 끓지 않았다.
우리가 정오에 산장을 출발하여 경사로를 한참 내려서자 바람마지 바위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두 쌍의 중년 부부가 인사를 해오기에 “대∼한민국~” 동작을 보이자 그들도 바로 화답해 왔다. 그때 마침 한일월드컵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산장을 나서서 10분 만에 도달한 곳이 등산지도에 표시된 이번 산행의 가장 위험한 코스의 시작점. 거기서 다시 20분 후에 만난 최악의 코스에는 바람 한 점 없고 햇볕에 달구어진 바위가 뿜어내는 열기가 물씬했다. 새벽에 출발한 후 벌써 서너 통의 물을 들이켰지만 한 번도 소변을 보지 못한 건 전부가 땀으로 다 배출된 때문일 것 같았다.
나흘 동안 계속된 산행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능력과 형편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탔다. 해외원정 산행에서 누가 나서서 통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편하긴 하지만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하기라도 하면 바로 도울 수 없는 문제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지시나 간섭을 받지 않고 본인의 의지대로 산을 오르니 편했다.
5일로 예정된 북알프스 종주코스는 능선에 올라선 이후부턴 별로 힘들지 않았다. 탁 트인 조망은 그때그때 호연지기를 안겨주었고 화산으로 형성된 일본열도의 정취도 느낄 수 있었다. 산은 오르내림만 반복되었고 하늘은 비를 한 번도 뿌리지 않았다. 능선구간도 길어 크게 힘들진 않았다. 이제 우리는 하산 하루를 앞두고 마지막 산장을 향하고 있었다.
산행 둘째 날부터 자연스레 일행 여섯은 각자의 체력과 취향에 따라 선두와 중간 그리고 후미로 나눠져 편하게 이동했다. 이처럼 흩어져 산을 오르내리다보니 가끔은 혼자서 오전 내내 걷는 경우도 생겼다.
난 일행보다 신경도 예민한 편이었다. 이곳 산장들은 대부분 지리산 장터목처럼 다락방으로 되어 성별과 국적 나이를 불문하고 무조건 들어오는 순서대로 사오십 명씩 몰아넣어 자리에 누우면 서로 어깨가 닿을 정도로 붙어서 칼잠을 자야만 했다. 지구촌 곳곳에서 몰려든 등산객들의 소란스러움에 밤마다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젊은이들이 많아 코골고 이갈고 잠꼬대하는 소리도 그만큼 볼륨이 높았다. 그렇게 누적된 수면부족도 나에게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산행 첫날부터 나는 일행보다 뒤처졌다. 혼자서 뒤에 뚝 떨어져 일행이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지만 혹시라도 단체에 문제를 일으킬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제 내일이면 종주가 끝나지만 난 일행보다 많이 지쳐있었다.
그때 난 매주 3일 대학 강의 빼곤 늘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인터넷 카페에 글을 쓰고 손수 찍은 사진을 편집해서 8백 명 회원들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예순 문턱이니 꾸준히 체력관리에도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등한시했던 것이다.
등산로는 마지막 산장을 코앞에 둔 지점에서 등산객을 성벽처럼 가로막는 암벽으로 바뀌었다. 종주 코스의 마지막 산장까진 이제 1킬로미터 정도를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100여 미터 암반 등산로는 70도 정도로 가팔랐고 끝부분만 경사가 약간 누그러져 있었다. 해는 이미 서녘으로 많이 기울었고 낮 동안 쏟아진 태양열에 암반은 겨울철 아랫목 구들장만큼 뜨끈뜨끈하게 달구어져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어제까지 꼬박 나흘을 함께 산행하면서 중간 산장을 이용했고 산소가 희박한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고봉도 몇 개나 넘었다. 내가 뒤처져 경사진 암반 등산로 앞에 당도했을 때 앞서간 일행은 이미 봉우리를 넘었는지 안 보였고 저만치 허우적거리며 바위를 타고 오르는 산행대장만 다른 등산객들 옆으로 보였다. 나는 악전고투로 힘들게 오르는 산행대장을 바라보자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수통에 물이 떨어진지도 두 시간이 넘어 약간의 탈수현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과로에 탈수현상까지 겹쳐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은 이제 그로기 상태였다. 종주코스 마지막 산장이 저 봉우리 너머에 바로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다리가 뻣뻣하게 굳으면서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으니 도저히 봉우리를 넘을 자신이 없었다.
그때였다. 가까운 뒤에서 일행 중 막내에 속하는 성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나처럼 기진맥진해서 헉헉거리는 숨소리였다. 성공의 키는 보통 사람에 못 미치지만 과체중이라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따르느라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성공은 내가 이미 탈진상태로 흐느적거리는 걸 목격했으므로 자신을 부축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을 터이다.
성공을 부축해서 앞세우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힘겹게 오른 20여 미터 암반 밑으로 비교적 평탄한 흙길 등산로가 눈에 들어왔다. 작년 여름 북알프스 최고봉 오쿠호다카다케奧橞高岳를 오르느라 산장으로 향하면서 일행이 지난 바로 그 길이었다. - 다음에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