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분대장 시절(53년전)과 귀국 후 결혼할 당시(1977년, 46년전)이야기를 섞어가면서 다 털어놓으니 혼동없기 바랍니다.
No, 4340 ♧ 이름: 홍진흠 (coala48@naver.com) ♧ 2007/9/12(수) ♧ 조회: 3820 |
"와이프 이야기"---(5) |
그러던 어느 날 혼전에 얼굴은 한번 봐야하지 않겠느냐해서 자취방에서 정식으로 대면할 기횔 만들었다. 이른바 상견례 자리-
서울에서 대구에서 영천에서 매형, 형님들께서 참석하시고 결혼날짜까지 거의 잡아뒀다. 사실 나로선 아무것도 준비할게 없었다. 내 자취방엔 모든게 준비되어있다. 몸만 오면 된다. 그렇지만 장모님은 하다못해 장롱이나 이불 한채라도 마련해야 된다면서 내년 가을쯤으로 하자 하신다.
양가에 허락이 있었고 날짜까지 잡혔으니 사실상 약혼 한 셈이다. 자연스레 내 자취방에도 드나들고 밤 늦은 시간에도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가니 영천 매형께선 고추장 찍어 발랐을거라며 으례 내 여자가 된것으로 착각하셨는데---사실상 난 생각이 달랐다.내가 다른 사람들과 차잇점이 그것이다.
모두 다 인정한 내여자지만 난 억지로 눕히는 그런 안훼어한 행동은 스스로를 용납치 않는다. 어디가지나 파인플레이다. 뒷 동산의 밤이 익으면 절로 벌어지듯 충분히 이 여자가 나를 알아줄 때 까지를 기다린다. 흔히 억지로라도 살을 섞어 내 것으로 만들면 무슨 말못 할 사정이라도 은근쓸적 넘어가는 그런 더티한 방법은 난 통하지 않는다는 신념이다.
당시 난 제일 좋다는 미도파 백화점에 가서 원피스도 사주고 종로에서 뽀족 구두도 사 주곤했다. 신발은 사주면 도망간다고 꺼린다는 설도 있건만 차라리 인연이 안 되려면 일찌감치 미리 가버리라고 각오하면서 사줬다. “숙” 인 나의 500번째 여자야" 라고 입버릇처럼 말해뒀다. 그 어떤 기대도 갖지 말란 뜻이다. 그렇다고 내가 바람을 피웠다던가 많은 여자와 방탕한 생활을 한건 아님은 안심시켰다.
다만 내 맘속에 단 몇 시간이라도 맘을 설레게 만든 여성이라면 모두 내 리스트에 올라오게 되었고 또한 난 많은 여자와 데이트도 해봤으며 맘속에 잠시라도 들어왔다 사라진 여자는 부지기수라 했고 첫사랑 얘기도 진지하게 고백했는데 그녀는 들으면서 나와 같이 함께 울어주었다.
당시 나의가장 큰 약점인 재판얘기도 해 줬다. 당시 난 전국적으로 있은 업무상 보급품 횡령사건에 휘말리어 재판을 받고 있었고 어쩜 명예스럽지 못한 체 군생활을 끝낼지도 모른다는 그 얘기도 당연히 해줬다.럭키 세븐의 ‘77년은 잃는 게 11년의 軍 이라면 얻은건 婦 이어라.(나중 자세히 글을 올릴것임) 그럴 즈음 계획한대로 청량리로 이사했다. 장모님은 앞날의 계획을 물으신다.
장래 희망이 서점을 경영 하는것인데 그러기위해선 우선은 책점에서 배달부터 하고 싶다고 했다. 장사를 하려면 지게 지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게 아닌가? 청량리의 큰 서점인 “홍진서적”-이름도 나와 비슷한 멋진 이름이 아닌가? 내가 장차 이집을 인수해야지! 그런 꿈을 안고 시작했다. 그 서점의 살림집중 조그마한 골방을 구했다.
장모님께선 그 집 주인 할머니께 약혼한사이니 잘 부탁한다며 일부러 오셔서 처녀아이가 함부로 들락거림을 미리 양해를 구하신 것이다. 처음 서울 왔을때(’66년)에도 당시 이화동(서울대 앞)의 한 책점에서 자전거로 배달을 한바 있었지만 책은 언제나 보기보담 무거웠다.
간혹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면 미스 최가 밥 해놓고 기다리기도 했다. 장모님이 보내주신 밑반찬을 잔뜩 담아 와 가지고 깜깜한 밤에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주전자로 또는 바케츠로 추어탕을 가득 담아 교외선(당시 의정부에서 송추를 거쳐 청량리가 종점)타고 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해는 바뀌어 1978년 9월하고도 30일- 이리하여 Ms. 최는 아무것도 모른체 (라면 하나 끓이지도 못한 체) 내게 모든 걸 의존하면서 시집왔었다. 그녀는 친구중에서 가장 빨리, 난 친구중에서 제일 늦게 결혼을 하게된 셈이었으니 사실 지금에야 얘기지만 어린 신부를 데려온 죄로 늘 양보만하고 살아왔다.
오죽 했으면 어제도 강원도 두류산행을 마치고 귀경길의 버스안에서 진행요원이 자리순으로 노랠 부르게 한바 "어느소녀의 사랑이야기" (민 해경노래)를 신청하길래 난 거길 맞춰 "어느 少女에게 바친사랑" 을 부르려고 제목부터 호흡을 맞춰주는등 매사가 이런 식이다.
사실 우리끼리 얘기지만 반찬솜씨는 커녕 김치한번 담가보지 못한체 매년 어머님댁에서 그리고 각 형님댁에서 얻어만 먹었고 겨우 몇년전쯤인가 부터 담그기 시작했다. 또한 결혼 후에도 큰애가 뱃속에 5개월째 있은 사실조차도 모르고 자꾸 뚱뚱해 진다고 하길래 난 줄넘기를 사줘 매일 마당에서 스키핑을 하게 만들었다.
어느날 큰집갔다가 형수님이 병원을 데려가 알게 된바 의사왈 "왜 열달 되거던 오지 그랬어요?" 하드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둘 다 무지했지만 좌우간 이런 여잘 데리고 사는 나는 오죽 했겠는가?
신혼 초 중곡동의 전셋집 화장실서 귀뚜라미가 자꾸 나와 일을 못 본 W.는 결국엔 변비가 생긴 해프닝은 또 어떻고---
이런 점 등으로 이제까지 삼십년 동안 못마땅의 연속이기도 했지만 어찌됐거나 이제까지 별탈없이 함께, 산 타고 남들 갈때 휴가 같이 갈 정도로 건강하고 애들 잘 키워주니 고맙게 여기지만 엊그제도 장사가 잘 안된다며 내게 돈을 또 융통해간다. 마이너스 통장이 푸~울이지만 W.탓이라기 보담 잘못된 세상 탓으로 돌리고 다독거려주며 걱정없이 그냥 하루하루 웃으며 긍정적으로 살아간다.
사실 처음엔 태국에서 찍은 사진을 그냥 올리기가 뭣하여 몇자 핑계겸 올리려했는데 자꾸 시간이 갈수록 쓸데없는 지겨운 소설이 되는듯해서 마칠까한다. 못다한 이야기는 이 다음 "결혼 이야기" 에 마저 하기로 하고 이만 줄여야겠다.
전우님들! ~(대충) 이러하니 다음 부턴 제발 좀 장가 잘 갔다 소리대신 시집 잘 왔다소릴 해 주시기 바란다.
이상 "와이프 이야기" 끝
사모님이 탁구장을 경영했던 그 부부와 우린 더불 데이트로 즐거운 시간을 꽤나 가졌고 가끔은 복식의 탁구시합으로 저녁내기도 자주 가졌다. 그 아가씨는 미쓰 의정부 선발에도 나온바 있는 용모도 괜찮은 여자였다. 뭐 꼴뚜기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던가? 하루는 동료 K하사로부터 퇴근 후에 오거리의 마차다방에서 좀 만나자고 한다. 군번은 나보다 늦지만 나이는 한살 많고 일찍 결혼해 아이 셋을 이미 둔 학부형이다. 그는 Camp Jackson 의 파견대장(김장유 하사)이기도 했다.
당시 S-4 선임하사관 박조광상사 내외분과 40 여년 후 "의정부 마사회" 에서 재회한 후 사모님과 탁구치는 홍하사.
막내가 보내준 크루즈 여행의 "오키나와 섬"에서 (2014/5/27일)
대대 "체육하사관" 으로 임명받아 수요일(체육의 날)이되면 야구장,배구장, 탁구장,당구장,눈코 뜰새없이 바뻣다.
좌측에서 세번째가 홍중사이며 그 옆 임순섭(본부인사계,이광천 3중대 인사계)님이시고 시합대상은 미군들이다.
No, 4565
♧ 이름: 홍진흠 (coala48@naver.com)
♧ 2008/2/6(수)
♧ 조회: 4561
♡꽁가이 이야기--- (完)
흔히들 남자에겐 다섯가지의 쌍기역(ㄲ)이 있다한다.
"꿈"(포부)."깡"(배짱),"끼"(적성),"꼴"(용모),그리고 "끈"(인맥) 이다.
난 훑어보니 남들이 평을 한바 거의 다 해당되지만 마지막 "끈"은 좀 아닌것같다.
그 "끈" 이 없는 대신에 난 "꿈"의 영역에선 다른 사람들의 몇배나 꾸어왔다고 자부한다.
단기 4288년-
내가 초등학교 1년때에 맨처음 그 "꿈"을 갖게 되었다.
그 후 "만화"(# 3030 "라이파이 이야기"-'05/12/16)책을 보면서 꿈을 키워갔고
영화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를 접하면서
더욱 결심을 굳혀나갔고(주: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장편소설로 1958년에 노벨상이 주어졌으나
전쟁의 휘말림으로---
1965년 미국의 MGM 영화사에서 Omar Sharif, Julie Christie, 제랄딘 차플린, 알렉 기네스 등이 주연한
197분의 장장 긴 영화로 "Somewhere My Love" (내사랑 어디에)-라라의 테마 곡에다 David Lean 감독이 심혈을 기울인 역작으로
전쟁, 멜로, 애정, 로맨스, 삶과 인생, 사랑과 그리고 죽음등을 그린 장엄하고 웅대한 스케일과 스펙타클의 대 서사시)
그룹 "ABBA"(인생은~#1375 "내겐 꿈이 있어요"-I have a dream.-'03/12/1)의 음악을 들으며 그용기를 점점 북돋워나갔다.
종종 난 내가 쓴 글을 되풀이 읽어본다.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자기자랑만 늘어놨느냐고
생각도 되지만 이젠 전우님들이 6년 이상 내 글을 읽어보고 실제로 홍하사를 겪어봤으니 오해는 풀렸으리라.
"Anh"네 가족과 헤어진후 타고 온 귀국선에선 우린 심한 멀미와 싸워야했다.
온통 일주일동안 거의 한끼만 제대로 먹고 나머진 구토로 날밤을 지새웠다. 좀은 여유있게 파월생활을 한 전우들은
공연히 쥐죽은듯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괜히 지은 죄도 없으면서 식사 줄 설때도 양보만 하고 눈치를 본다.
왜 같이 월남생활을 한대도 기 죽을 필요가 있는가?
직책에 따라 편할수도 있고, 힘들수도 있는건 당연하다.
물론 죽은 V.C 시체도 구경못한 전우가 무공훈장타고 냉장고 장만하고 카메라 어깨에 들러메고
귀국박스 가득 채우고 "PANASONIC" 휴대용 전축이나 "sony" 라디오 꽝꽝 울려대니
빡빡 쟝글기며 1년동안 오로지 살아서만 돌아가자던 소총소대 전우들은 눈이 뒤집힐만도 하다.
난 처음부터 욕심이 없었기에 아무런 동요도 없었지만 어떤 전우들은 박스하나 제대로 못 챙긴 자신들이 억울하단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정녕 가져올게 없다면 선인장이라도(길거리에 온통 주인없는 선인장이 무한정으로 널려있음)
빈박스에 채워올 결심였지만 다행히 C-ration으로 가득채워 친척들에게 "진흠"이가 1년동안 이걸먹고 전투하며 국위를
선양했다며 자랑할 수 있음에 감사히 생각하였다.
사실 그 흔한 탄피를 가득채워도 상당한 목돈이 되었지만 어차피 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처럼 돈벌러 간건 아니니까.
살아 돌아온것만으로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무얼 더 바랄까? 부산땅에 떨어지니 어찌 그리도 우리여자들이 뚱뚱해 보일까?
아마도 두고 온 An과 Anh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않은 때문인가보다. 위대하신 영도자 박대통령께서 심혈을 기울여
닦아놓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안내양(당시만해도 고속버스 안내양은 지금의 스튜어디스보다도 더 훤칠(?)해 보였다.)
의 멋진 설명을 들으니 홍하사도 이 경부고속도로를 닦는데 일조하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면목동의 미미사장에서 ('71/3/10일) 손수건과 반지를 끼고 쟝글복이 아닌 우리의 동정복을 입고서 찍은사진과 간단한 선물
함께 정성을 다한 편지를 월남으로 보냈건만 아직까지도 행방이 수수께끼이다. 결국 "트윈폴리오"(송창식, 윤형주)의
"하얀 손수건" 가사처럼 그게 002*(영영이별)일줄이야.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싸워줬는데도 보람도없이 월남이 적화통일이
되었으니 "2년후에 오마" 고 약속한게 모든게 물거품이었다.
수십년간 서로 다른길로 가면서도 문득문득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름을 남겨둘수밖에--- 38년만에 간 이번에 당시 귀국선물과 편지를 받았는지? 꼭 물어보고 싶었으나 도무지 말이 통해야지! 발버둥쳐도 허사였었다. "호치민" 에서 세계적인 월남국수집에서 전화받은날은 공교롭게도 12월 24일ㅡ아이러니하게도 두 잊을수 없는 여자때문에 혼자서 밤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이국의 낯선교회에서 예배도 보고 밤늦은 시간까지 호텔을 떠나 그 질기다는 고독을 혼자서 씹고 있었다.
누군 내게 그동안 살아온 삶을 회고록 형식으로 정리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난 이미 45년전부터 실행하고 있는중이다.
사실 이제야 말할수 있음은 말만 앞세우면 안되기에 침묵했을 뿐이었다. 그걸 J 전우님은 벌써 눈칠챘는지 (# 4964 에서 후일
이러한 글을 쓸것을 예상이라도 한듯---) 바로 알아맞췄다. 난 내 인생의 전부를 거대한 씨나리오로 엮어가고 있는중이다.
다시말해 거대한꿈을 이뤄나가고 있다는 얘기이다. 씨나리오 작가가 보는것도 알고있다.
"꽁가이 이야기" - 딱 이거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 상담한 적이있다. 솔직히 난 국민학교때부터 수학박사, 만능인, 천재,
꼬마 써커스단원 (기계체조,텀블링 등에 소질이 좀 있었다) 유니버살 맨 ,작은거인, 작은 예수회 형제, 문무를 겸비한 홍장군,
팔방미인, 천하의 홍하사, 걸어다니는 노래방, 거인, 세기의 가교적 인물, 움직이는 앙리 듀냥, 부처님 가운데 토막, 달변가,
철인 등등의 온갖 듣기좋은 칭찬의 수식어를 들었다.
홍하사 본연의 꿈을 가끔은 삶이 힘들어 곧장 잊어먹었다. 듣지도, 보지도 그리고 말도 못하는 그런 역경을 헤쳐나간 아름답고
감동적인 빛의 천사 "헬렌 켈러" 책을 읽고서, 사랑과 봉사의 손길을 편 영국이 낳은 영원불멸의 간호사인 "나이팅 게일" 의
봉사정신을 알고서, 제1회 노벨 평화상수상자인 "장 앙리 뒤낭" 의 전기를 읽고서 그래! 난 일생동안 남을위해 봉사하기로 맹세
하였다. 야학다니며“청소년적십자부장”(Korean Junior Red Cross)하면서 싹뜨기시작했고 최근의 "새마을 봉사활동 30년" 을
하면서 차츰 영역을 넓혀나갔다. 남에게 눈에 띄이지않게 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어떤 전우는 어떻게 알고있었는지?
제대로 본것이다. 그래서 아예 이참에 공공연히 선언을 해 버린거다.
이미 간접으로 표현한적은 있다. "인생은~"(#3641 "Re--두 아들~~!! 화이팅팅")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XX XXXX XX이라고 했다.
우선 "사랑" 얘기만 해도 난 좀 특별한 전력이 있다.
1. "첫사랑" - 59년째 ~당시에(1964/12/24) 난 이걸 소재로 멋진 작품을 만들어 보리라. 멋있는 작품이 되기위해선 내가 사랑을
포기해야만 한다. 결국 손만 잡으면될것을 스스로 그녀를 뿌리쳤었다. 오로지 작품에만 초점을 맞췄다. 때문에 부끄러운 잘못은 추호도 못한다. 그대로 양심에 거슬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2."Anh과의 관계도 좀 살을 붙여 그럴듯하게 꾸며 볼수도 있겠으나 난 100 % 진실만을 썼을뿐이다. 한편의 영화소재로도
충분하지만 난 절대 억지부리지 않았다. 또 있다. Anh의 어머니가 공중폭파됐다면 또 다른 한명의
3.장모될뻔한 사람 (8편에서 K.S.C이름을 기억해 두시라고 한) (지금 얘기지만 '66년 당시 North West 항공사 한국지사장
사모님이 사위 삼자는 얘길했다 - 김선초)은 토막살해 당했다는 점이다. 기구한 운명인진 모르나 정신적인 첫사랑이 O.S.H
(오상희) 이름을 갖인 소녀였다면 또 다른
4. 첫사랑의 소녀 이름은 Y. K. H(윤경희) 이다. 여기또한 노트를 한권쓰고도 남음이 있고 아직 밝힐수없는 얘기+ #3059
"새마을 봉사 이야기"('05/12/29)도 사연을 기술하라면 아마도 A-4용지 몇수십장은 될것이다. 남을 위해 평생봉사하기로
맘 먹으며 하물며 "무료"로 봉사하고 모든 수익금은 사회에 고스란히 환원시키겠다는데 누가 이유를 달 것인가?
오래전 본 영화 ㅡ"My way"(후랑크 시나트라 주연)-가 있었다. "내가 난 그걸 내 방식대로 해 왔다는거야 "-Frank Sinatra-의
고집이라면 홍하사의 마이 웨이는 뜻하는바가있어 "더 이상의 학교를 나오지않은 상태에서 성공하리라" 는 아집이 있었다.
홍하사의 가방끈은 생각보담 짧다. 주위에 뒤늦게 학업을 마치니 세상이 더 넓게 보인다며 만학의 그들이 내게 권고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내가 그런 결심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졸업장을 따겠다" 던가 독학의 신념으로 “방송통신대”등에 신경를 썼을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씨나리오 작가가(생략) ~ 그러나 영화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단다. 나도 짐작한다. 그러나 일회성으로 끝날일이 아니기에 -적어도 내 꿈은 세계적인 단 한편 멋진작품을 완성하고픔이다. 수십억,수백억쯤은 안중에도 없다. 최하로 수천억 아니 그 이상이다.
그런 꿈을 오래전부터 꾸고있었고 그꿈은 출발시부터 점진적으로 실현 돼가고 있다. 시시한 이름없는 영화사가 나를 소재로 영화찍자고 제시를 해 와도 난 거절하는 꿈을 꾼다. 그런 제시론 움직일수 없다는 말이다.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감독, 이를테면 윌리엄 와일러나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 정도면 모를까? 언젠간 내가 취프(Philip C.Yi)에게 찜질방에서 조언의 부탁을 한적이 있다.
나의 소재는 충분한데 전문성이 없으니(시간과 실력이 못미친다는 나름대로 결론)그는 세계를 상대로 뛰니 - 예를 들면 "Team Building" 이니 "벤취 마케팅" 이니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을 남겨주고 불우이웃돕기 (김밥장사)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 #1886 "Open House~(2004/11/14) 와 #1939 "Re-홍 진흠이가 사는 법" (2004/12/5)에서 새로운 많은 이벤트를 만들기에 어떻게하면 좋을까고 자문을 구하곤했는데 전문가에게 넘기라는것이다.
그러나 난 서투르드라도 홍하사 본인이 솔직담백하게 사실대로 그려내는게 더 효과적이란걸 은퇴후 내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일본 (오끼나와)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틈만나면 한국으로 발령받기를 원하고 있으며 나완 계속 교분을 쌓고있다. 러시아 작가는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소설로 노벨상을 취했지만 난 내가 실지로 겪어온 “자서전” 인것이다.
6.25동란, 4.19 학생혁명, 5.16군사혁명, 그리고 월남전등 사실의 체험으로 그려낸 자화상이다. 설사 아무것도 이루지못하고
꿈만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런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홍하사의 오랜 꿈은 그게 아닌것이다. 성공이란 별게 있는가?
나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조그마한것이라도 이룬다면 그게 바로 성공이 아니겠는가? 마치 식물인간이 그 의지
하나로 한평생 자기힘으로 남의 도움없이 화장실 한번 가는 꿈을 스스로 이뤘다면 그게 바로 성공이 아닌가? 난 자신있게
무엇하나 숨기지않고 공개했다.
그만큼 떳떳하다고도 할수있으니까. 제주의 어느전우가 내게 막 공개하고도 무사한것을 보니 사모님이 너무 너그러우신가 보다고 한다. 또 누군 왕비님 몰래 38년간을 간직할수 있는 비법이 무엇이냐고도 했다. 난 그런 와이프라면 처음부터 아예 얻질 않았을것이다. 때문에 혼전에 모든걸 사실대로 고백했고 (#4754 "와이프 이야기"---(5)'07/9/12) Anh 에게도 확실히 말할수있다.
이심전심으로 통한것도 같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한 그녀라면 (난 아직그녀의 아무것도 모르지만) 함께간 유전우처럼 그녀의
남편이 작고했을지도 모르겠고, 설사 멀쩡히 살아있다고해도 이런 사랑을 이해못할 그런 남자를 선택했으리라곤 믿지않는다.
이불속에서 함께 나누는 사랑이었다면 이제까지 이처럼 긴세월을 못잊진 않았을것이다. 아름답고 순수함-설사 아무리 늙고 추한 모습이라도 우린 기꺼이 만날것이고 다른이들처럼 실망하거나 후회스런 만남은 결코 아닐것이다. 의외인것이 그때 두시간 정도 함께 있었으나 전혀 영어를 못한 셋째 뉘약이 마지막 차에 올랐을때 딱 한마디 "See you Later~ "
함께간 일곱명중 다섯명은 모두가 놀랬다. (대절 운전기사와 안내해준 친구 Tan 은 월남인)-똑똑히 들을수 있는 단 한마디---
아직 영어를 기억하는구나. 월남 글자는 영어와 흡사하다. 그렇지만 6성조(?)로 이뤄져 참으로 읽기가 난해하다. 때문에
"텔레파시이" 가 통한다면 그동안 편지 한통보내지 못했지만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줄 알고있다. 38년간 잊지않고 "I love You."
한마디만 알고있어도 우린 다른사람들의 사랑관 차원이 다르다라고 자신있게 말할수있다.
난 약속을 꼭 지킬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문자인 "See You Again. 을 실천하기로 말이다.
그 옛날의 약속처럼 결혼해서 같이 오는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서울로 한번 데려오리란 약속은 계획하고있다.
물론 와이프와 주위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말이다. 이도저도 안돼면 내가 3파 해서라도 반드시 재회할것이다. 그 꿈을 안고 고이 실행에 옮긴다는것도 또다른 하나의 꿈이다.
비록 지금의 통장 잔고는 마이너스라 할지라도--- 그리운 님이여! 반드시 꼭 찾아 가리라.
그리고 만나리라. 멀지않아 ---안녕~
"꽁가이 이야기" --- “끝”
이 글을 함께 파월해서 월남전선에서 산화한 전우님들과 귀국후 먼저 타계하신 전우님들께 바칩니다.
"5차년도 30제대,
주월맹호
3309부대(천하 제1연대)
제2중대 1소대 3분대장
하사 홍진흠
(2023/3/5일 현재)
미군무원 시절(아마 1987년 정도 인듯하다) 홍하사가 C.R.C 뒷산의 '통신기지소'(일명 "알바니" 로 일컬으며 美샌프란시스코와
직접 연결되는 통신 중계소가 있는데 그곳에 차량을 끌고 올라간적이 있었다. 현역중에 날마다 1종과 부식등을 추진하면서 올라간적이 많았으므로 자신있어 "차"(캐빈 車)를 끌고 올라간적이 있었는데~
데후있는 차량을 너무 자신하며 가다가 앞데후를 미리 넣지않고 도중에 넣을려다 실수로 큰 사고가 냈다. 오르막길을 오르다
갑자기 시동이 꺼지면서 후진하면서(물론 엔진이 꺼지면 브레이크가 듣질않음)탄력을 받으며 약 100m 가량 후진하는데 탑승자 6명 전원이 죽는줄 알었답니다. 그 옆은 수십길되는 낭떨어지로(사고방지를 위해 콜탈을 칠한 전봇대를 여기저기 심어놨음)~
홍하사 이제까지 운전하면서 (햇수로 55년째 무사고)처음 큰 사고를 내면서 영화 "태양의 후예" 의 절벽에서 사고난 장면을 보셨을겁니다. (차가 반은 허공에, 반은 육지에 메달린 상태지만 홍하사 경우엔 2/3가 허공에 1/3이 절벽에 메달린 상태였지만 무사했던것은 캐빈차의 앞부분이 엔진이었으므로 무거웠고 사람이 앞두줄로 앉았기에 뒷 트렁크엔 다행이 무게가 실리지않았음)
간신히 6명 전원, 카펜터 샾(목수)2명, 로드 그라운드 샾(도공부) 2명, 쉬트 메탈 샾(함석부)2명, 전원 옆문으로 빠져나오긴 했으나 모두가 얼굴이 노랗드라구요. 그대로 맨 땅에 전원이 쓸어져버렸어요. 홍하사만 간신히 기어서 통신중계소에 도착하여, 수송부에사고보고를 하고 렉카차를 기다리니~ 구난차 기사님(등반대 선배 겸)이 이런 사고는 태어나서 처음 목격했다며~ 놀라시드군요.
"태양의 후예"
기갑 1: .설에는 고향에 가시는지요? 전 한평생 명절날 고향을 떠나 본적이 없어 그것도 행복이라면 행복입니다..자식놈과 며느리 귀성한다고 고생하는것 보니 막내딸 시집 보내고나면 명절때 서울로가서 명절지내야 될런가 모르겟네요..설 잘지내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담에 뵐께요..잘 읽엇습니다. -[02/06-18:12]-
영원해병: 옛날에 60년대 초에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시외버스 주차장에 가면, 전방으로 가는 버스가 그곳에서 다 떠났는데, 부대 마크만 보면 어디에 있는 부대라는 것을 알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호랑이 마크는 홍천(수도사단)" 일곱개의 별이 있는 마크는 화천(7사단). 이기자 부대는 사창리___등등. 홍진흠님 부대 마크를 보니 호랑이 마크 수도사단은 베트남에 파병됨으로 인해서___한국의 수도사단은 부재중이 되었었습니다. 베트남에도 교회가 있긴 있군요. 베트남은 본래 소승불교 국가인데___프랑스의 베트남 침략으로 카톨릭이 들어서기 시작 했습니다. 암튼 꽁까이 연재 얘기__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02/06-18:22]-
황영남: 인생의 아름답고 슬픈 드라마가 끝이 났군요 3파 하셔서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도록 빌겠습니다 , 감명깊게 잘 보았습니다 , 명절 설 잘 보내시고 건강 하십시요, -[02/06-18:43]-
백동기: 그동안 올려주신 글 감명깊게 잘 보았습니다.젊은시절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아름다운 정분이 있어 영원히 지니고 살아가는 홍 전우님의 즐거움 부럽습니다. -[02/06-19:04]-
민광철: 지나간 꿈을 부러지지않게 간직하며 한세상 살아가는 인생도 즐겁지 않겠습니까 ? 홍전우님 ! 부디 고운꿈이루시기를 빌겠습니다. 고맙게 잘 읽고 갑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요. 백마 -[02/06-23:19]-
홍 진흠: 윤태규의 "My Way"- 어떻습니까! 전우님들, 가사가 좋지않습니까? 요즘 노래방가서 "마이 웨이"를 넣어달라면 당연히 이 노래가 나옵니다. 우리생각엔 "후랑크 시나트라" 의 "마이 웨이"를 연상할 테지만---사진 설명: 1.1966년에 찍은 홍하사의 (성북구 동소문동의 사진관에서-이 즈음 돈암동까지 전차가 다니고 있었으며 WBC세계J,미들급 이태리의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6/25일 김 기수선수가 최초로 챔피언이 됨)서울생활 처음시절 2.귀국해서 9편의 "앙"과"안" 의 수놓은 손수건과 반지를 끼고 찍은사진(물론 월남에도 보낸바 있음) 3.'07/12/24일 '호치민'의 한 교회에서(묵고있던 Modern Saigon Hotel 에서 나와 시내를 홀로 몇시간 배회를 하며 교회를 몇곳에 들림-예상보다 교회가 많았음) 4.'07/12/23일 7인승 렌트카 기사와 함께(25세의 땀이란 이름을 갖인 그에게 Tip을 못준게 맘에 걸린다. 그이튿날도 그친구가 렌트올줄 알았으나 다른사람으로 대치됨)1번도로로 푸캇비행장을 바로 나오면서 아침식사로 국수를 먹는중임- 진행방향으로 가면 2대대로 감 -[02/06-23:54]-
홍 진흠: 5. 붕타우 산꼭대기에 설치된 "포"입니다.('07/12/25) 6. 폐허가 된 맹호 2중대입니다. 안내원 Tan과 함께(55세) 7. 4편에서 있은 미토지역에서 가진 월남과일 시식과 "민속공연" 가수들과 함께---8. 붕타우에서 Jesus상 앞에서 9. 맹호마크(39년째 보관하고 있는 지난 호주에서 "곽명근전우님" 이 되돌려 주신 마크. #4507 호주 "ANZAC DAY" 행사를 다녀와서---(2) -[02/07-00:18]-
홍 진흠: 처음부터 관심있게 봐 주시고 격려와 채찍질 주신 기갑1님, 영원해병님,황영남님,백동기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민광철님은 처음뵌분 같습니다만 관심에 감사드리며 새로운 한 해 잘 시작하시길 전우님들! 홍하사가 빌겠습니다. -[02/07-00:30]-
김성찬: 그동안 글 자~알 읽었습니다. 나는 그런 추억이 없어서 한마디로 부~럽~습~니~다.
3파의 꿈이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오늘이 구정명절이군요, 떡국 맛나게 드시고 금년 한해도 소원성취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sai gon 에서.
-[02/07-01:26]-
안영일: 좋으신 글 잘읽었읍니다,니다, ** 부서진 장미송이 - 파뿌리 머리되어 - 꽃잎을 담어본다 -. 언제인가 적어보았던 제 습작입니다 제목은 짝사람입니다. 건강 하십시요. -[02/07-03:26]-
최현득: 작은거인이라 표현한 어느전우님의 생각이 날 만큼 많은 분량의 기록과 섬세한 마음이 알알이 담긴글에 감동을 받습니다 지역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대구출신임에 같은 긍지를 가집니다 설날 잘보내시고 좋은날 되십시요 -[02/07-06:27]-
최덕종: 그동안 올려주신 글들 다 읽어 보았습니다. 기억력도 대단하지만 자세하고 실감나게 공감 할 수 있는 내용들이였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뵈옵길 바랍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 하시길 기원 합니다. -[02/07-10:31]-
김명식: 가슴에 훈장을 달고 찍으신 선배전우님 사진 늠름하고 보기가 참 좋습니다.
저는 갓 스물에 동창생과 함께 입대하여 인생의 황금기인 이십대를 군에서 다 보내고 몸과 마음이 엉망이 된 채로 면역을 하고보니 성격도 변하여 사회적응이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군생활에대한 좋은 기억은 별로 없으나 부사관(하사관)학교 동기생들과 파월시절 분대 원들과의 만남을 낙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퇴직한지가 삼 년째로 항상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연재하신 글 매번 잘 읽었사오며, 선배전우님 가정이 늘 편안하시고 건필하시기를 바랍니다. -[02/07-16:25]-
bat29: 아름다운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02/07-18:51]-
홍 진흠: 우선 베트남의 김성찬,한호성 전우님과 미국의 안 영일 전우님께 오늘 설날을 맞이하여 고국의 떡국 한그릇씩 대접못함을 죄송스레 생각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저는 오늘새벽 일찌감치 출발하여 용인의 큰집서 차례 예배드리고(아침) 오후엔 서울 방학동큰집서 윷놀이등을 마친후(점심) 이곳 의정부서 장모님댁에서 저녁을---아침 예배도중에 큰넘으로부터 국제전화 2통이 왔지만 무시하고 (그는 오늘 일본에서 시험을 치루고 내일은 면접을 본다고 오후의 통화로 앎) 행사를 치룸. 그나저나 월남의 두전우님들! 언제 몰래 카메라를 작동하시어 홍하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날 촬영하셨나요? (자유게시판2 #15310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2008/1/22) 최 현득장로님은, 엊그제 장모님모시고 입춘기도 드리려 성불사를 다녀왔다고 서운하지는 않으셨겠지요? 최덕종님껜 한땐 "메모리 홍"(홍하사의 닉네임) 이 이젠 '기억력이 영 아니올시다' 로 답변을 드려얄것같습니다. 2/11일날 투이호아로 "30포 차리 15명의 전우님들이 전적지 탐방 가시면 혹시 우리 "앙"(투이호아로 숙청? 되었다니)을 만날수 없을까 기대해 봅니다. -[02/08-00:29]-
홍 진흠: 김명식 후배님! 하숙집 (Y.K.H 첫사랑 이름)얘기하려니 그시절 오줌싸던 선임하사관과 함께 하숙하던때가 그리울테지요. 또한 감사드리고요 bat29님껜 다시한번 "168유람선" 에서 사주신 "까무"(다금바리회) 맛을 고맙게 여깁니다. ~"쩝쩝" (입맛 다시는 소리) 암튼 새해 첫날, 우리의 해(戊子生)에 갑자생끼리 화이팅을 한번 외쳐봅시다. 아자! 아자!!! -[02/08-00:53]-
홍 진흠: 윗글의 戊子生에 (갑자생)끼리는 戊子生에 (갑장)끼리로 바로 잡습니다. 또한 '08/1/ 25일에있은 "의정부참전전우회" 월례회의 공지사항,
유인물에 있은 글을 소개합니다.[02/08-01:35]-
홍 진흠: "베트남 참전 전우에게! 나는 1981년 7월 31일, 정치군인과 결별 스스로 군복을 벗고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생략)~전장에서 대대장인 나보다 몇배 더 고생한 전우들이 다만 무공훈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평시 안전 사고로 부상해도 국가유공자가 되고 자기 잘못으로 정신 착란이 되어도 국가유공자 대우를 해주는 마당에 정글에서 사선을 넘나든 전사를 외면하는 것은 국가가 직무유기하는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새 정부가 수립되어 비교적 빠른 시일 내애 전우들의 소원이 성취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소식을 알려드리며 문제가 완결될 때가지 계속 노력할것을 약속하면서 전우 여러분에게 보고 합니다. 기대하십시오. 저자 약력 박경석 (예)준장, 초대 재구대대장(65넨) 육군 준장 예편:통일원 정책 자문위원:한국 군사학회 회장:한국 소설가협회 최고위원:한국 군사 평론가협회 회장(현재): 베트남참전 유공전우회 고문" 참고 #4523 호주 "ANZAC DAY" 행사를 다녀와서---(5)편에 있습니다.(2007/5/24) -[02/08-01:40]-
장영호: 그간의 꽁까이 이야기 연제가 끝나나 봅니다 연제해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마이웨이 음악들으며 마지막 글 읽어 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더욱더 좋은 추억이 있다면 많은 좋은글 기대합니다. -[02/08-12:56]-
류지현: 설날엔 복많이 받으시고 가족,친지분들과 즐겁게 보내셨지요. 왠지 접으시는 "꽁까이 이야기"가 아쉽기만 합니다. 이담에 삼파 하셔서 반가운 글들이 올려 지리라 기대 됩니다. 그간 잘 읽었습니다. -[02/09-12:16]-
홍 진흠: 오늘 산악회에서 시산제지내고 "사패산"을 등반다녀왔는데 문득 장 전우님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전우님들과 함께 이런 멋진 산행을 기획한번 했으면하고 말입니다. 다른 번개팅보다 건강에 도움되고 함께하는 시간이 많으니 일거양득이 아닐까하는 맘이었습니다. 류 지현님은 왜 아쉬운지 좀 설명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사실은 저도 어딘지 모르게 서둘러 끝내버린것 같은 유전우님의 아쉬운 마음과 같지만 어디에서,어떻게 무엇이 아쉬운진 모르겠기에 말입니다. 이담에 삼파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해야먄 반가운 글이 될런지요? 도무지 알수가 없습니다. -[02/11-01:38]-
고재목: 홍전우님, 제가 바로 무자생입니다. 갑장의 입장으로 연재물 잘 읽었습니다. 감동도 많이 받았고요. 저도 비슷한 인생역정을 거쳤지만 제 경우엔 중동과 유럽의 생활이 가미되는 셈이네요. 올해는 소망하시는 모든 것 이루시길 빕니다. -[02/11-15:00]-
심대흥: 누구에겐들 애틋한 사랑이야기 한토막 없겠으랴만 여기 '꽁까이 이야기'처럼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는 없을듯 하다. 더구나 그 이야기가 전쟁터에서 이루어 졌고 증거가 완연한 논픽션이여서 오는 사실성의 감동도 있겠으나 미완성이였던 스토리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며 잘하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듯한 호기심에서 오는 기대감 때문인듯 하기에 말이다.사랑했던 여인과의 멀고먼 시공을 초월한 해후 ㅡ 삶과 죽음의 절박함속에서 이루어졌던 국경을 넘은 그 사랑이야기는 동 시대를 함께했던 우리 파월전우들의 모두의 이야기 이기 때문에 더욱 공감되고 결말의 초조함도 그래서 큰것이다. 인생은 이래서 살만한것 아니겠는가. 둘러보면 모두가 회색빛 투성이여도 어느날 그런 내곁을 파고든 가슴설레이는 사랑이야기는 갓밀어낸 파릇한 면도자국마냥 비길데없는 신선함을 한아름 안겨주는 데야...「사랑은 結末이 아니고 過程」이라고 했다.무엇이 해피엔딩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꽁까이이야기'는 멋진 '과정'만으로도 우리에게 에머날드빛 낭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02/11-15:03]-
류지현: 재미있게 읽던 책을 놓는 기분이고 재파때 첫사랑의 애틋함이 묻어있는 인연과 따뜻한손바닥의 체온을 느끼며 만남이 있는 글이 없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3파후를 기다려 볼렵니다. -[02/12-09:02]-
홍 진흠: 고 전우님이 지난번 제기 서투른 영어로 베트남에서 꼬리글 달은바 영어는 good 인데요 뭐-그때 알아모셨습니다요.(유럽과 ~중동생활의 시작)암튼 특별관심에 감사드리며 : 심 전우님- 돼지우리에 주석 자물쇠을 달아주셔서 꿈보다 해몽이라는 그 말이 실감이 납니다. 거듭 큰절 올립니다. 류 전우님: 그 당시 2~300 k 떨어진 곳이었지만 저에겐 이미 2파에선 불가능이란 말을 실감했기 때문에 Anh 이 언제 푸캇을 떠나느냐? (오늘 떠난다) 그리고 언제 한국으로 가는가? (25일 밤에 한국으로 떠난다는 떠듬떠듬한 저의 답변에) 그곳에 당장 올수없을까 하는 나름대로 계산하는듯한-시간만 넉넉하면 제게 달려올듯한 기세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H.P 도 제것이 아니고 (김 성찬 전우님의 것) 잡소리와 화울링으로 통화상태가 영 좋지않았으며 여러가지의 제약이 있었으며-왜냐하면 우리처럼 당일치기로 금방 올수있는 상태가 못됨- 안타까움으로 발만동동이었답니다. 어쩜 오히려 더 멋진 휘날레를 장식하려고 (2파에선 그냥 그대로 끝내라는 신의 계시(?)가 아닌가 여김)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였다고 생각하십시다. 좌우간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02/13-01:29]-
홍 진흠: "My Way"---윤 태규 노래... 아주멀리 왔다고 생각 했는데 돌아다 볼 것 없네 정말 높이 올랐다 느꼈었는데 내려다 볼 곳 없네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어느새 겁많은 놈으로 변해 있었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수는 없어 내가 가야할 이길에 지쳐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번 더 부딪혀 보는거야 때로는 큰 산 앞에서 무릎 꿇고서 포기도 하려 했어 처음처럼 또 다시 돌아가려고 무작정 찾으려 했어 처음에는 나에게도 두려움 없었지만 어느새 겁많은 놈으로 변해 있었어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수는 없어 내가 가야할 이길에 지쳐쓰러지는 나까지 일어나 한번 더 부딪혀 보는거야. My way~ -[02/14-03:28]-
차경선: 홍전우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문장력도 문장력이지만 기억력에 큰 감동을 느꼈는데, 또 남들은 겪어보지못한 찐한 사랑을 글과 그림으로 함께 느껴왔었는데, "꽁까이 이야기" 참 재미도 있고 감동적이고 기적같은 사건의 전개가 마치 소설같았습니다.
건강하시고 빠른 시일내에 멋진 자서전이나 영화한편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02/14-11:37]-
홍 진흠: 차경선님의 기원에 힘입어 결코 기대에 어긋나지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02/16-03:09]-
정영숙: 홍하사님 의 젊은날의 아름다운추억 고이 고이 간직하세요 -[03/26-22:40]-
송미진: 월남전이있었다는 이야기는배웠지만이렇게월남전에참가하신분이 엄마주변에계신다는것이신기했어요 -[03/26-22:44]-
홍 진흠: 정여사님 이곳을 방문하여 주시고 더우기 꼬리글까지 남겨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또한 따님인 송미진양은 월남전이 있었다는 학교에서 배운얘기와 이글을 읽고 막연히 생각했던 월남전과 어떻게 다른지? 꼭 알고싶군요. 아마 모르긴해도 시대상황과 배경등은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았을것같군요. 아무튼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훌륭히자라 좋은 대학을 들어갔다니 다행이구요. 부디 열심히 뛰어 엄마에게 효도하는 따님이 되길빌어요. -[03/30-02:35]-
홍승철 : 코알라님 정말 한편의 드라마 였습니다 저보단 월남파병 일년 서배 이심니다 저는 8차10제대 임니다 홍하사님의 인생 역경 집필 한번 해보시죠 꽁까이 이야기 감명깁게 즐감하고감니다 -[09/14-14:43]-
홍 진흠: 홍승철 주미산악회장님! 그저께 모참전전우회에 가입하러 가신다했을때 극히 만류하질 못한이윤, 있는단체도 통합을 못하면서 우후죽순처럼 자꾸 늘어나는 단체를볼때 환멸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서 통합되어 한목소릴 내얄텐데---꼬리글 고맙습니다. -[09/22-23:11]-
조성우: 전쟁 영웅은 다들 돌아가셨는데 살아 남은 자들은 추억을 감상하는구료 하여간 멋진 추억에 감동이 됩니다 -[02/24-18:46]-
홍 진흠: 아직도 조성우 후배님은 같은 파월전우란 사실이 실감이 나지않는건 그만큼 신뢰감을 주지못했기 때문일겁니다. 함께 고생한 전우들의 관등성명이나 인적사항 혹은 부대명칭등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보이면 인정할겁니다. -[03/01-04:11]-
이수: 의정부엔 잘 도착했습니까. 제가 읽은 것이 완결편(10)이라니 앞부분도 읽어보렵니다.번호를 말해주면 찾기가 쉽겠지요. -[03/22-22:08]-
홍 진흠: 이수관장님 덕분에 열세시간에 걸쳐 올 거릴 1시간만에 왔습니다. 더우기 난생처음 J.J. 항공기도 처음 타 보구요. #4601 ('08/1/12일) 1편부터 이틀,사흘간격으로 찾아보심 쉽게 찾을 수 있답니다. 다시한번 자세히 제주안내를 해주신 님에게 거듭 감사드립니다. -[03/25-17:57]-
김준철: 라이파이도 일어보고 다른 글도 읽어 봅니다...ㅎㅎ 거듭 감사합니다. -[04/29-16:24]-
홍 진흠: 중위 김오랑(육사 25기)-이분이 바로 아버님이시라구요? 홍하사와 같은시기에 근무하셨다기에 아무리 기억하려해도~ 들은것 같기도하구~잘 기억이, 아물합니다. 아무튼 아버님의 행적을찾아 회사도 포기하고 열심히 뛰어다니시는 대한의 특전사 대위출신의 김준철 파월용사 아드님의 용기와 신념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오늘 냉면 잘 먹었습니다. -[05/01-12:16]-
홍 진흠: 밤 늦은 시간에도 약속을 지키려고 전화주신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컴에대해 여태몰랐던(아주 기초이기도 한) 한 부분을 알게되어 고맙기도 하구요. 저녁 잘 얻어 먹은걸 오늘로 착각 할 정도로 홍하사는 가끔 밤낮의 개념이 읎습니다. -[05/01-12:25]-
임한영: 머리결에 잔솔바람이 입니다. 훈련소에서 사역을 마치고 워커에 광을 내며 구두질을 하고 있을 때,스치는 그 향긋한 미풍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마치 그 기분을 맛보는 것같습니다. 저에게 젊은 군시절이 있었지만 선배님처럼 애절한 자기 인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부족했습니다. 오늘, 꽁가이의 한편, 마지막소절을 읽으며 만감이 교차합니다. 참을 멋진 분이 내곁에 그토록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진실을 보지못한 난시? 고맙습니다. 내 삶을 성찰하면 함꼐 한 고운 얼굴들도 떠오르겠지요. 덕분에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고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책으로 정리하여 가까운 이들에게 선사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잘보고 많은 생각을 얻어갑니다. 건필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12/23-14:10]-
홍 진흠: 또 한해가 흘러갑니다. 12월 24일의 밤-그냥 보내기가 참으로 서운했지요. 나가지않는 교횔 다시한번 나가 그옛날의 아름답든 추억을 반추해 봄으로 위로를삼을까? 아님 아기예술 안고있는 마리아 앞으로 산넘고 물건너 별따라 몰약,사향 그리고 유황을 갖고 찾아와 가만히 경배하는 동방박사나 되어볼까? 꼭 45년전의 그녀와('64/12/24)그리고 '2007/12/24일의 그녀-두 잊을수없는 여자때문에 홍하사는 찜방(무얼 생각을땐 즐겨찾는곳)에서 밤을 새울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결국 비행기값이 싸다는 핑곗김에 일시귀국한 큰넘과 모처럼 같이한 작은넘 그리고 울淑과 넷이서 가족과 함께 케익을 자른 오붓한 밤이었습니다. 임후배님의 고민- 내년엔 잘 헤쳐나가리라 믿고 며칠남지 않은한해 잘 마무리 하길빌고 또 새해엔 더욱 힘찬 나날이되시길 바란답니다. -[12/25-20:26]-
이성철: 소식 몰랐던 시설의 자네의 아릿한 추억을 생각하며... 지금은 추억과 회상에 오늘을 보며, 돌아 올 수 없는 기억의 속에서만 때론 아파하고 때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든 자신을 자책도 했겠지?. -[01/02-17:23]-
두루미: 저는 70.8월 백마로 참전한 사람입니다. 참전수기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고갑니다. -[03/26-08:03]-
홍 진흠: 두루미님! 우연히 오늘지금 이곳을 스쳐 지나게 되었는데~ 님의 글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아래 네모칸에다 제이름을 넣고(반드시 홍 띄우고 진흠으로 치셔야합니다.) 검색하시믄 11편에서 16편까지도 글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아직 글이 끝난 상태가 아닙니다. 실명을 밝혀주심 더욱 고맙겠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십시오. -[03/26-13:16]-
이윤상: 제 이름을 기억 하시나요? 지난주 tmp에서 동수씨와함께 갔다가 홍 선생님 명암과함께 글을 소개받아 보게되었습니다. -[05/03-23:01]-
홍 진흠: 이윤상님! 알다마다요. 항상 저의 Store 를 이용해 주시는 고액님인걸요. 건강하십시오. -[05/05-13:19]-
홍 진흠: 오늘(2011/7/15일)부로 당시의 중대장님이셨던 김영준대위(공수부대 출신)님의 성함을 백용구님으로 부터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를 무척 아껴주셨던 분을 왜 이제까지 기억하지 못했는지 홍하사 한심한 생각도 들었지만 월남전사 자료를 잘 간직하고 계시고 중대장님 이름을 아르켜주신 백하사님 감사합니다. -[07/17-23:42]-
장민지: 지금시각 새벽 4시57분 밤 을 하얗게 지새며 "꽁가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독특하고 가슴아린 사랑이야기 입니다, 홍 진흠님 다음 모임에서 뵐때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느낌 이 겠지요,제가 9편에서 아~이 이야기는 영화로 나와야겠구나 생각 했는데...10편에 넘어오니 씨나리오 얘기가 나오는군요,사람의 생각들은 비슷한가 봅니다, 머리에 그려집니다,뿌연도시, 릭샤...몇해전에 베트남 하노이 를 다녀 왔거든요,다음엔 사이공을 방문 하고싶습니다, 11~16편 까지 검색 해서 읽어야 겠습니다, < 아름다운고백 감사합니다 > -[08/18-05:11]-
홍 진흠: 장민지님! 다음 모임에서 뵐때? 라고 하신걸봐선 이미 홍하사를 뵌분 같습니다만___ 졸작을 새벽까지 읽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헌데 "릭샤" 란 무엇인지? 암튼 다음모임에 기대됩니다. -[08/18-23:59]-
김 영균: 가슴을 저미는 미완의 넌픽션 순애보이기 때문에 10편까지 단순에 읽었습니다 꼭 해피앤딩 기대합니다 ..... -[03/09-02:13]-
홍 진흠: 김영균선배님! 검색해 보심 현재 16편까지 올려져 있답니다. "꽁가이 이야기" 글의 연재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__ 읽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03/11-20:02]-
첫댓글 전우님들! 오래전 KBS드라마 "태양의 후예" 보셨을줄 믿습니다.아마 1년전 조회수
661만회이니 지금쯤은 더욱 높아지겠지요? 외국 특히 이슬람계통에도 많이들 수출된걸로
알고있는데 "장금이" 못잖게 팔린걸로 알고있습니다.주인공 '송혜교' & '송중기' 이혼한커플~
전우님들! 참 인연이란 묘한거드군요. '77년 청량리의 "홍진서적" 주인분들 모두가 지금은 미국
으로 몽땅 이민가셨다는데~ 그분들이 지금의 윤석열대통령님과 친척이라시는군요. 그 얘기를
우연히 우리 유공전우회(윤석열종형)윤석산전우님이 홍하사와 책배달 얘기끝에 알게되었어요.
홍하사 오늘밤도 울淑과 그앞을 지나게 됩니다. 답십리 넘기전(옛날 고가도로)산업대학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