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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묵상글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 내가 보았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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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보았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은혜로움을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삶의 모범을 통해 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변화된 모습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이라는 별 볼 일 없는 동네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 메시아는 유다 땅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주님을 알아보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되나요?’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냥 스쳐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 꿰뚫어 보는 것은 의미가 달라집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타나엘을 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이나 사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성숙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들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도 좋지만 꿰뚫어 보아야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안에서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통해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구원을 체험하며‘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메시아를 갈망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메시아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은 진실해지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으며 마침내 그 삶을 주님께서 인정해 줄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인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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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 앞에 진실하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나타나엘에 대해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위선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이방인의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우리가 어떤 수도자에 대해 참으로 수도자답다고 할 때,
거기에는 껍데기만 수도자가 아니고
그 됨됨이가 속속들이 진짜 수도자라는 뜻이 있고
거기에는 또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 성별된,
오로지 하느님께 바쳐진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에는 마찬가지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이방인처럼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율법 학자들처럼 위선자가 아니라는 뜻에서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보다 사람 눈에 더 들려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려드는 사람이 아니고
겉으로는 거룩하지만 속에는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짓이 없고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말과 행위,
안과 밖,
행위와 존재가 다르지 않고 일치한다는 인간적 자기완성의 차원이 아니라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한다는 인간관계적 성숙 차원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이고 하느님 앞에서 거짓이 없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어제는 한 수도자를 면담하였습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고 전에도 몇 번 면담을 했던 분입니다.
어렸을 때 가정 폭력을 경험한 분이고
그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아서 공동체 생활에서
다시 그 상처가 건드려져 그 상처가 계속되는 분입니다.
그래서 치유를 받으려고 심리 상담을 받고 했는데
심리 상담도 필요하지만 그 상처를 가지고 주님께 가라고 조언했고
그분도 그러려고 했으며 그래서 정말로 자주 성당을 찾곤 했습니다.
그래서 점차 좋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제 와서는 우울증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더 악화된 것이고 자살 충동까지 일 정도인데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제 비로소 제대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도가 이렇게 심해지기 전까지는 상담을 하고 성당에 갔어도 그저
계속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지 절실하지 않았고 진실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진심으로 자신을 상담자와 하느님께 내놓지 않았었는데
정말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해지자 이제 내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성당에 자주 간 것은 기도 행위를 한 것이지
기도한 것이 아니었고 이제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절실’이 ‘진실’을 견인한 것이고
이제 비로소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나아가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 것이며
자신의 상처 치유를 하느님 은총과 사랑에 이제 온전히 내맡긴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앞에 자기 상처를 내보이지 않고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것은
치유는 받지 않고 나는 상처받았다며 계속 징징대며 우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약 바르지 않고 자기 상처를 자기 입으로 ‘호’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나타나엘은 자신을 환히 보시는 주님 앞에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는데 우리도 주님 앞에 나갈 때
몸뚱이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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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오늘 <복음>은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증언을 듣고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하며, 필립보의 증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와서 보시오.”(요한 1,46) 라고 확신에 찬 초대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나타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신적인 전지함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 하고 당혹하여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믿음과 감격이 솟구쳤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필립보가 부르기도 전에 나를 보고 ‘알았다’는 예지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곧 ‘주시하여 바라보고 계셨다’는 ‘사랑’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바라봄입니다. 사랑하면 자꾸 바라보게 되는 거죠. 눈을 뗄 수가 없게 되는 거죠. 바로 지금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스런 바라봄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모든 의혹과 편견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감격이 샘솟을 것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자신을 온전히 아시는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은 자신의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마침내 입술을 타고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만남의 신비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이제 ‘대역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전복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만남의 신비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말합니다.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합물질의 만남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한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만남의 신비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신비입니다. 곧 자신의 존재를 심연으로부터 만난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만남의 신비’가 믿음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 사랑을 퍼부으십니다. 그 사랑을 통하여, 하늘과 땅을 이어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여, 우리를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주님!
저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계신 당신 눈동자 안에서
진정한 제 자신을 보게 하소서.
제 눈이 맑아져 거짓 없는 진실을 보게 하소서.
하늘이 열리고 진리를 보게 하소서!
제 마음에 거짓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이 퍼부은 사랑을 퍼 올리게 하시고
당신 만남의 거룩한 신비를 담아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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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저는 2명의 바르톨로메오 사제를 알고 있습니다. 한분은 저보다 4년 먼저 사제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커피의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가 되었습니다. 직접 원두를 사다가 볶아서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원하는 분들에게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 교육을 시켜주었습니다. 명동 가톨릭회관에 ‘하랑’이라는 커피 매장을 만들었습니다. 하랑은 ‘하느님 사랑’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카페 사목을 하고 싶다고도 하였습니다. 커피를 만들어 주고, 상담을 원하거나 고백성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고백성사를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으로 오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갈망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사목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건강에 좋은 효소를 만들어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 앞가림도 하기 벅찬데 신부님은 이웃을 위해서 좋은 것을 보았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터미널 성당으로 자원해서 가셨고 여행자들을 위한 사목을 하였습니다.
다른 한분은 저보다 4년 늦게 사제가 되었습니다. 2002년부터 3년 동안 교구 사목국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신부님도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통합사목연구소’가 있어야 한다고 제언하였습니다. 각자도생이 아니라 각 부서가 서로 협력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상부상조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소공동체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말씀이 공동체에 녹아들도록 하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공동체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변화된 공동체가 지역을 변화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매일미사에 복음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신부님의 글은 깊은 샘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과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풀었습니다.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쳐갈 때입니다. 신부님께 글을 부탁드렸더니 기꺼이 좋은 글을 신문에 기고해 주었습니다. 갈매기의 꿈에서 높이 날아오르는 조나단처럼 신부님은 늘 새로운 것을 보았고, 찾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슬픔 중에 있는 이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공감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공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셨습니다. 겸손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희생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순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공감의 눈으로, 겸손의 눈으로, 희생의 눈으로, 순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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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사람(眞人)의 모범
-나타나엘-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시편145,17)
얼마전의 두 체험은 새삼스런 깨달음이었고 내심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또 새롭게 배운 느낌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수도형제가 반갑고 고마워 수중에 있던 약간의 금전을 꼭 필요한 곳에 쓰라 드렸지만 완강히, 끝까지 고사했습니다. 비슷한 체험을 며칠전에 또 했습니다.
운전 봉사로 수고해준 수도형제가 고마워 모처럼, 처음으로, 성의誠意를 표현했지만 역시 완강히 사양했습니다. 역시 마음이 깨끗한 수도형제였습니다. 내심 부끄러웠고 배웠습니다. 정신이, 영혼이, 마음이 살아있었습니다. 이래서 수도자입니다. 수도자에게 마음의 순수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바로 우리 수도형제들을 믿고 사랑하는 점은 바로 이런 마음의 순수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산상설교중 참행복 선언에 나오는 성구입니다. 어제까지 양일간 계속됐던 “불행하여라”는 일곱가지 불행선언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음이 가난한 겸손한 사람이, 마음이 깨끗한 순수한 사람이 바로 참사람입니다. 참된 구도자가, 수행자가, 수도자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인간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참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살고 싶은 근원적 갈망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고 싶은 갈망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은 수도자뿐 아니라 누구나 안에 잠재해 있는 근원적 자질입니다. 더불어 열정과 순수 역시 수도자뿐 아니라 참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본질적 자질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참된 구도자의 모범을 오늘 복음에서 만납니다. 바로 나타나엘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바로톨로메오 사도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는 나타나엘입니다. 바로톨로메오를 비롯한 예수님께 발탁된, 누구보다 열렬히 항구히 주님을 사랑했던 12사도들이 바로 참사람, 참된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바로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후 인도와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다 합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말그대로 만남의 은총, 만남의 축복, 만남의 기쁨입니다. 바로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혼자서는 못 삽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우연한 만남이란 없습니다. 참 좋은 영적 도반 필립보 덕분에 주님을 만난 나타나엘, 이 또한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 만남의 과정은 간단치 않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서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참 좋은 분을 만나면 이웃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필립보의 언급에도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편견에서 못 벗어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만, 필립보는 즉시 “와서 보시오.”하고 강력히 권고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한눈에 보고 배우는 것이, 깨닫는 것이 결정적이 경우가 많습니다.
나타나엘과 주님의 만남이 가히 운명적입니다. 첫눈에 반한겁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만남이요 만남의 구원입니다. 나타나엘의 진면목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의 고백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참으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참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근원적 갈망입니다. 이어지는 문답도 마치 불교 선사들의 선문답같기도 하고, 옛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문답을 연상케 합니다. 삶이 간절하고 절실하면 말도 군더더기가 없고 단순명쾌합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늘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
역시 우연한 만남은 없습니다. 평상시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무화과나무아래에서 영적독서와 관상에 전념했던 나타나엘을 마음에 담아 두셨던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누구보다 우리의 전부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감격에 벅찬 나타나엘의 고백은 분명 성령의 은총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참사람 예수님과 참사람 나타나엘의 참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자기를 발견한 나타나엘이요 즉시 주님의 진면목을 깨달아 고백하는 나타나엘입니다.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결정적 전환점이 된 나타나엘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이런 주님과의 만남이요 날로 깊어질 주님과의 관계가 예고됩니다. 나타나엘뿐 아니라 주님을 찾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약속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제단 위에서 오르내리는 은총의 미사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나타나엘에 버금가는 순수의 사도가 바로 오늘 제1독서 요한 사도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마음 깨끗한 요한에게 천상신비를 체험케 합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될 천상교회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요한의 고백입니다.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이어지는 천상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움이 환상적입니다. 절정의 표현은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은 열두 사도뿐 아니라 무수한 성인성녀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을 것이고 언젠가 우리들의 이름도 새겨질 것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의 원형을 보여주는 천상 예루살렘 교회로 순례 여정중의 우리 지상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영성체후 기도도 고무적입니다.
“주님, 저희가 복된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지내며, 성체를 모시고 영원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현세에서 올바로 살아 미래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주님과 만남의 일치를 이루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 순수와 열정, 섬김과 겸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이에게 가까지 계시네.”(시편145,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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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분이 “신부님, 이 영화 보셨어요? 정말로 재미있어요.”라며 영화 한 편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솔직히 밀폐된 공간에서 가만히 있으면 거의 100% 잠들기 때문에, 극장에 가지 않은 지 꽤 되었습니다. 불편하게 잠을 자러 극장에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추천해주신 영화는 인터넷 유튜브에서 사서 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특히 재미있다면서 극찬하셨거든요. 재미있다는 말에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쏙 빼놓는 슬픈 로맨스 영화였습니다. 전혀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의미 있다’가 맞는 표현이 아닐 것 같은데, 우리는 이때에도 ‘재미있다’라고 말합니다. 이 재미라는 용어가 참 다양하게 쓰입니다.
“너 재미없을 줄 알아.”(협박하는 말)
“사업하는 재미가 어때?”(먹고 살기 위한 일인데)
“신혼 재미가 어때?”(재미와 생활이 동의어가 됩니다)
이 밖에도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말이 있습니다.
“나 머리 자르러 간다.”(단두대가 아닌 이발하러 간다는 것)
“화장이 잘 먹었네.”(화장품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이해하기 힘든 말과 글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함께할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주님을 만나 메시아이심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친구인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성경 지식에 박식한 사람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지명인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필립보는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다는 것은 당시의 라삐들이 성경 공부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나타나엘이 성경에 전념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찾고 있다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예수님께 그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요? 나타나엘이 주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만나기 전에 이미 성경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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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 속에서도 계속 의욕을 가져라. 최선의 결과는 곤경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마틴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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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으로 나를 눈여겨보시는 주님을 따라 ♣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오늘은 카나 출신인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교회는 9세기의 희랍 전승에 따라 필립보 사도의 인도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타나엘과 바르톨로메오 사도를 동일한 인물로 봅니다(요한 1,45-51). 그는 주님 승천 후 메소포타미아, 이란을 거쳐 인도와 터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먼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예수님을 소개하자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 하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와서 보라’는 필립보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고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1,47)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신적인 권위로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을 지닌 나타나엘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진실하고 성실하며 영적 수용력을 지녔음을 알아보신 것입니다.
사실 나타나엘은 하느님의 진리를 찾고 있었고, 열심한 마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보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1,49) 그는 단지 예수님께서 자신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영이 하느님이신 분을 만나 탄성을 터뜨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내 안의 갈망과 소망과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세상 물질과 눈에 보이는 것들에 걸려 넘어져 영혼의 어두운 터널 속을 헤매곤 하는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알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있지요. 그런 상태에서 자신도 하느님도 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있기 전, 영원으로부터 계신 하느님께서는 나를 있게 하셨습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도 늘 곁에 함께 계십니다. 내가 찾기도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으로 찾고 계십니다. 내 뜻대로 살아갈 때에도 애태우는 사랑의 마음으로 회개하여 당신의 자비 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삶의 순간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차리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나를 향한 하느님의 갈망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사랑을 열망하는 영적 가난함과 순수함을 지녔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늘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집중하여 그분의 뜻을 실행하여야겠지요.
나타나엘과 같은 그런 영적 수용의 태도와 감수성, 하느님을 향한 진실함과 성실함을 지닐 때 ‘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되겠지요.‘(1,55) 곧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표징과 부활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삶을 통해 하느님과 세상을, 갈등과 화해의 늪을, 미움과 사랑의 골을, 불신과 믿음의 틈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겠습니다(1,51 참조).
오늘도 각별한 사랑으로 나를 불러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타나엘처럼 신실한 마음과 영적 열망으로 주님을 찾고, 알아보며 그분을 추종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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